Anti Demon God RAW novel - Chapter 2
2화. 소명(小明)
두 아이는 자주 노는 장소로 달려 나갔다. 상화촌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이다. 그곳을 향해 달리던 중에 소명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어? 이청이 먼저 와 있나 보다.”
“이청이?”
뜬금없는 말이었다.
“안 들려? 금 소리가 들리잖아.”
‘난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데. 정말, 귀도 밝아.’
탁연수는 되묻는 소명의 말에 어깨만 으쓱거렸다. 언덕까지는 아직 한참이나 남았다.
언덕이 눈에 들어오자 과연 금 소리가 멀리 들렸다. 그곳에는 두 아이가 앉아 있었다.
남자아이가 금을 타고 있었고, 여자아이가 옆에서 금 소리를 듣고 있었다. 작은 손으로 연주하는 금 소리는 아직 거칠었지만 그래도 땀을 뻘뻘 흘리며 연주했다.
남자아이가 소명이 말한 이청으로, 마을 변두리에 사는 금 선생의 제자이다. 그리고 여자아이는 대장간 집의 당민인데, 상화촌 아이들 중에서 제일 키가 크고 소명 다음으로 힘이 센 아이였다. 이 둘 역시 소명의 소중한 친구들이다.
소명과 탁연수는 이청의 옆에 앉았다. 금 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훌륭한 연주라고는 할 수 없지만 이청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연주임은 분명했다.
항상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하는 것이 이청이었다. 얼굴이 새파랗게 질릴 정도로 연주하고서야 금을 놓았다. 숨을 몰아쉬는 모습이 안되어 보일 정도였다.
“어, 언제 왔어?”
눈을 뜬 이청은 옆에 소명과 탁연수가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어색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부끄러운 듯이 머리를 긁적였다.
“방금. 듣기 좋았어. 이청아.”
“저, 정말?”
“그럼, 당연하지.”
머뭇하던 이청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소명의 말을 그만큼이나 믿는 것이다. 그러자 당민이 까무잡잡한 얼굴을 찌푸렸다.
“뭐야, 이청. 내가 말할 때는 귓등으로 듣더니.”
“그, 그야. 너는 항상 좋다고만 말하니까. 그렇지.”
당민이 발끈하고 성을 내자, 이청은 더듬거리며 변명했다. 풀이 잔뜩 죽은 모습에 소명과 탁연수는 키득거리며 웃었다.
“왜 웃어!”
당민이 둘의 웃음에 화를 냈지만 소명과 탁연수는 멈추지 않았다. 저렇게 툭탁거려도 결국 둘이 서로를 좋아하고 있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너희 죽을래!”
당민은 빽 소리쳤다. 그녀는 큰 주먹을 당장 쥐어 보였다. 여느 남자아이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당민이다. 주먹은 또 어떤가. 그 모습에 소명과 탁연수는 당장 입술을 물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어깨가 위아래로 흔들리고 있었다.
“우이씨!”
그렇게 한참을 떠들던 중에 소명은 문득 고개를 돌렸다. 수풀이 무성한 언덕 위에 낯선 아이의 모습이 보였다. 남매인 듯 서로 닮은 남자아이와 여자아이였다. 둘은 비슷한 옷을 걸치고 있었다. 무명옷에 검은 끈으로 허리를 감았다. 여자아이는 남자아이의 뒤에서 옷자락을 꼭 쥐고 있었다. 낯선 얼굴에 소명은 고개를 갸웃했다.
“쟤들은 누구야?”
탁연수가 대꾸했다.
“이사 온 애들이야. 저기 삼나무 밑에 큰 집.”
“그 집에 사람이 들어왔어?”
“응. 무슨 무관을 연다던데.”
“무관?”
소명은 멀뚱히 있다가 곧 두 남매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얘들아, 이리 와 같이 놀자.”
“…….”
하지만 두 남매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경계하는 듯 새치름한 눈으로 소명과 친구들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리고 멀어졌다. 소명은 머쓱해져서 손을 내렸다.
“뭐야, 저것들!”
당민이 성을 내려 하자 소명이 어색하게 웃으며 달랬다.
“에이, 뭘. 쟤들도 여기가 낯설어서 그러겠지 뭐.”
“아니, 그래도.”
“괜찮아. 괜찮아.”
소명은 맑게 웃었다. 그 웃음을 보니 당민은 울컥했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곧 네 아이는 낯선 아이들에 대한 것을 잊고는 또 웃으며 뛰어놀았다.
이윽고 날이 어두워졌다. 서산 너머로 해가 뉘엿 기울었다. 정신없이 뛰어놀던 아이들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이제 집에 들어가야겠다.”
“내일 봐!”
“응!”
탁연수와 당민이 먼저 집으로 향했다. 소명은 그런 둘을 향해 크게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이청을 돌아봤다.
“이청아. 안 가?”
“나, 난.”
이청은 말을 더듬었다. 원체 말주변이 없는 아이다. 그렇지만 소명은 이청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곧 알아챘다.
“상 부인, 기다리게?”
“으, 응.”
이청의 스승인 상 부인은 낙양 일대에 이름난 금 선생으로, 종종 멀리까지 나가 연주를 하거나 가르침을 주고는 했다.
해가 저물고 나서나 도착하련만, 이청은 그때마다 마을 어귀가 내려다보이는 여기 언덕 등성이에서 꼬박 기다리고는 했다. 소명은 이청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소, 소명아. 안 들어가?”
“같이 기다려줄게.”
“괘, 괜찮은데.”
“헤헤. 금이나 연주해줘.”
“그, 그럴까?”
소명의 말에 이청은 어색하게 웃었다. 이청은 곧 입술을 말아 물고는 옆에 놓아두었던 호금을 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현을 타기 시작했다.
노을마저 저물어드는 하늘 위로 호금의 음색이 잔잔하게 흘렀다. 금의 선율은 그치지 않았다. 이청은 마치 물러가는 노을을 부여잡으려는 것처럼 같은 곡을 계속해서 반복했다. 소명은 귀를 기울이며 목편을 읽었다. 사방이 어둑했지만 읽을 만했다.
이청의 선율을 따라서 흥얼거리던 소명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어, 상 부인이다!”
“으, 응?”
소명의 외침에 이청은 손을 멈췄다.
“저기 봐.”
소명이 가리키는 방향을 뚫어져라 보았다. 그렇지만 이청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어두울 뿐이었다.
“안, 안 보이는데?”
“곧 오실 거야.”
소명은 헤헤 웃었다. 이청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명의 말은 틀림없다. 이청은 소명의 옆에서 빤히 오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청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두운 길가에서 반짝이는 등불이 보였다. 그리고 곧 등불을 쥔 사람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한 여인이 등불을 든 채 걸어오고 있었다.
단정한 인상의 중년 여인이었다. 곱게 빗어 올린 검은 머리에 옥비녀를 꽂았다. 등에는 호금이 든 주머니를 메고, 한 손에 등불을 들고 있었다. 그녀가 이청의 스승인 상 부인이다. 그녀의 모습을 보자 이청은 좋아라 달려 나갔다.
“스승님!”
들려온 목소리에 상 부인은 고개를 들었다. 등불을 들어 올리자 달려오는 이청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냉큼 달려온 이청은 상 부인의 손에 들려 있는 짐을 받아들었다.
“이 녀석, 늦은 시간인데 집에 있지 않고 어째 이리 나와 있느냐?”
“헤헤.”
이청은 어느 때보다 밝은 얼굴로 웃었다. 상 부인은 이청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뒤에 서 있는 소명의 모습을 보았다.
“소명, 너도 있었느냐?”
“예, 안녕하세요.”
상 부인은 꾸벅 허리를 숙이는 소명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잔잔한 웃음을 보였다. 그녀는 소명의 머리도 쓰다듬어주었다.
“이청이와 같이 기다려준 것이냐? 고맙구나.”
소명은 상 부인과 이청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왔다. 불 꺼진 단칸의 집은 서늘한 한기만 맴돌았다. 화로에 불을 피우자 붉게 달아오르며 방을 밝혔다. 그리고 화로 앞에 쪼그려 앉아서 목편들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집중하자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바깥에서 발소리가 들리더니 곧 문이 덜컹하고 열렸다. 퍼뜩 고개를 들었다.
“아빠!”
소명은 반색하며 침상에서 내려왔다. 흙투성이의 사내가 들어왔다. 수염이 수북한 얼굴은 지친 기색이 뚜렷했다. 그러나 소명의 모습에 그는 얼굴을 환하게 밝혔다.
“오늘 하루 잘 보냈느냐, 소명아?”
“응.”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그는 나직이 웃었다.
사내는 대일이었다. 십수 년 세월의 흔적이 남아 얼굴에 주름이 깊었지만 그것이 전과 다른 푸근한 인상을 만들었다. 그는 손에 든 주머니를 들어보였다. 약간의 잡곡이 들어 있었다.
“오는 길에 탁 노인께서 일을 도와줘서 고맙다고 쥐어 주시더구나.”
소명은 배시시 웃었다. 대일은 손을 뻗어 소명의 머리카락을 흩어뜨렸다. 그러나 그는 곧 아이의 손에 들린 목편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또 저 나무 쪼가리들을 보고 있었던 게냐?”
소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일은 한숨 쉬며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빨리 제대로 된 책을 구해주어야 할 텐데.”
“책은 무슨. 난 괜찮아. 여기 읽을 게 얼마나 많은데.”
소명은 맑게 웃으며 집구석에 무수하게 쌓여 있는 목편들을 가리켰다. 그 말에 대일은 쓰게 웃었다.
저것들을 읽을거리라고 할 수 있을까. 그의 눈에는 그저 불쏘시개에 지나지 않았다.
오래된 무덤을 도굴했을 때마다 나온 것들이었다. 어찌 처분하지 못하고 집에 쌓아두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쌓이고 쌓여 저렇게 벽을 이루기에 이르렀다. 자리만 크게 차지하여 불쏘시개로나 쓰려던 것인데, 그것으로 족하다고 하니.
대일은 안타까운 눈으로 소명을 바라보았다.
영특한 아이다. 따로 가르치지도 않았건만 제 혼자서 귀동냥으로 글월을 깨우쳤고, 이 불쏘시개들을 스스로 찾아서 읽는다.
대일은 주로 멀리까지 일을 다니느라 집을 오래 비울 때가 많았다. 다 소명 혼자서도 제 앞가림을 잘 하기 때문에 그리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마을 일을 곧잘 도와 이번에 탁 노인에게서 잡곡을 받은 것처럼 살림에 도움이 되기도 했다. 이제 열 셋 된 아이가 마을의 일꾼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으니.
아직은 어린 나이지만, 대일은 소명의 앞날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에게 더 큰 길을 열어주고 싶건만 능력이 태부족하니. 안타까움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소명은 흙먼지를 털어내는 대일의 모습을 멀뚱히 보았다. 많이 지친 얼굴이다. 아이는 넌지시 물었다.
“저기, 이제 나도 같이 가서 일 도우면 안 돼?”
“무슨 말을!”
대일은 소명의 말을 눈썹을 치켜들었다. 그의 외침에 아이는 흠칫했다. 당황한 것이다. 이제껏 큰소리 한 번 한 적 없던 대일이었다. 그런 그가 지금은 정말로 화가 난 듯 얼굴을 크게 붉혔다.
그는 소명의 놀란 얼굴에 곧 표정을 풀었다. 하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무거웠다.
“안 돼, 안 될 말이다. 너한테 그런 일을 시킬까 보냐.”
“그래도…….”
“너는 나처럼 땅이나 파서는 안 된다.”
“아부지이.”
“긴말할 것 없다.”
대일은 딱 잘라 말했다. 정색하는 그의 모습에 소명은 더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그는 흘깃 아이의 얼굴을 살폈다. 시무룩한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그 모습에 피식 헛웃음이 새었다. 그는 더 말하지 않고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굳은살이 가득한 큰 손이다.
대일은 늦은 저녁을 차렸다.
“듣자니 이번에 무관이 새로 생긴다고 하더구나.”
“응.”
밥알을 밀어 넣던 소명은 대일의 말에 낮에 본 두 아이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런 소명에게 대일은 넌지시 물었다.
“어떠냐? 무관에 다녀 보지 않을 테냐?”
“응? 별로.”
대일의 말에 소명은 시큰둥했다.
“사내라면 강건해야지. 듣자니 이번에 생기는 무관의 주인이 강호에서도 이름을 날리던 분이라더구나.”
“그래도.”
“하, 이놈. 다른 걱정은 말고. 탁 노인께 얘기를 들으니 연수도 무관에 보내려고 하신다더구나. 다른 아이들도 무관에 다니는데 너라고 못 다닐 것이 무어냐?”
“으응.”
거듭된 대일의 말에 소명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 무술 같은 것에 큰 관심이 없었지만 다른 아이들도 다 간다는데 계속 싫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소명이 고개를 끄덕이자 대일은 웃었다. 조만간에 무관을 찾아가 부탁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순간 굵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퍼뜩 떠오른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내일은 네 어미에게 가는 날이구나. 잊지 않았지?”
“응!”
소명은 대일의 물음에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의 밝은 모습에 그는 흐릿하게 웃었다.
대일은 저녁을 먹고 잠든 소명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무덤 속의 아이가 이렇게 건강하게 자랐다.
친아비가 아닌 것을 알면서도 이리 따라주니 고맙기 그지없다. 꺼내기 불편한 말이었지만 감출 수는 없었다. 대일은 단순한 사내였다. 거짓을 몰랐고, 요령도 없었다.
대일의 손끝이 소명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이 아이가 있어서 그는 과거를 끊을 수 있었다. 이제 더 이상 망산의 도굴꾼 대일은 없었다. 소명의 아비인 대일이 있을 뿐이다.
아이에게 지어준 소명(小明)이란 이름처럼 아이는 그에게 작은 빛이다.
그는 이불을 아이의 목까지 끌어올리고 다독였다. 새근새근 잠든 소명의 모습이 마냥 보기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