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ti Demon God RAW novel - Chapter 201
201화. 망량(魍魎)
고도 낙양을 가로지르는 주작대로(朱雀大路), 그리고 동북방으로 백마대화가(白馬大華街)라는 거리가 있다. 그곳 거리는 고관대작(高官大爵), 혹은 거상부호(巨商富豪)의 저택이 자리한 곳이라 외인은 함부로 드나들기 어렵게 하는 기이한 위압감이 돌았다.
거리 초입부터 드높고 견고한 담이 줄지었고, 어느 곳 할 것 없이 담 너머로 화려한 처마가 아른거렸다.
그런 곳에 작은 그림자가 불쑥 들어섰다.
산발한 머리에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아이였다.
이제 예닐곱 정도나 되었을 법한 아이는 작고 왜소했다.
옷가지라고 걸친 것이 포대 자루나 다름없었다. 거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아무리 대담한 거지라도 여기까지 와서 구걸하지는 못한다.
들어서기가 무섭게 어느 저택이든 사용인들의 험악한 눈짓, 손짓에 내쫓기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지금만 하여도, 오고 가는 사람들이 어린 거지를 도끼눈을 뜨고 노려보거나 위협하듯 손짓을 했지만, 아이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이는 두리번거리면서 거리를 종종 걷다가, 이곳에서 특히 거대한 저택 앞에 멈춰 섰다. 다른 어디와도 다른 곳이었다.
규모는 구중궁궐이라 하여도 부족하지 않을 듯한데, 아무런 현판도 없었다. 검은 기와에 붉은 기둥과 벽이 전부였다.
거지 아이는 시커먼 얼굴에 동그랗게 커다란 눈을 연신 깜빡거리면서 저택을 이리저리 기웃대다가, 아예 흙바닥에 주저앉았다.
“에잉, 저거, 저거.”
“쯧쯧.”
다들 못마땅하지만, 그렇다고 먼저 나서서 내쫓는 이는 없었다. 아이가 지키고 있는 곳이 영 범상치 않은 곳이기 때문이었다.
이틀 전, 한밤중에 땅이 무너질 것처럼 쿵쾅거리고, 불빛이 번쩍번쩍 치솟는 꼴을 다들 뜬 눈으로 목도한 마당이었다. 그렇다고 찾아가 무슨 일인지 확인할 깜냥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그저 몸만 사렸다.
거지 아이는 쪼그리고 앉아서 닫힌 문만 바라보다가, 퍼뜩 고개를 떨구었다. 노곤하니 졸음이 몰려오는 것이다.
아이는 한참 고개를 꺼덕거렸다.
한참 그러고 있을 새, 닫힌 문이 끼익, 묵직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소리에 아이는 흠칫 어깨를 들썩였다.
졸린 눈을 끔뻑거리면서 고개를 들자, 문 사이로 엉망인 꼴의 사내가 나와서 아이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눈두덩이 시퍼렇게 부어 있고, 턱 아래는 시뻘겋게 달아 있었다.
“뭐냐?”
“저요? 행화(杏花)라고 하는데요.”
“뭣? 아니, 이름 말고 무슨 볼일이냐 묻는 게다.”
“심부름 왔어요.”
행화라고 하는 거지 아이는 마냥 몽롱하여서 대꾸했다. 아직 잠이 덜 깨었다.
저택의 무사인 사내는 욱신거리는 턱 아래를 스윽 훔쳐내고 짜증과 불쾌함을 솔직하게 드러냈다.
“심부름? 무슨 심부름?”
“여기 계신 분한테 소식을 전해 주래요.”
“누가?”
“에에, 몰라요. 그냥 시키기만 했어요.”
행화는 배시시 웃으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쌓인 먼지며, 비듬이 부스스 떨어졌다. 무사의 찌푸린 눈살이 한차례 꿈틀거렸다. 그러나 거지 아이에게 더 뭐라 할 수는 없었다. 아이의 넝마 차림에서 하나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매듭 하나를 매어 놓은 새끼줄이다.
어리다고 하지만 개방에 속하였다는 뜻이라, 차마 무시할 수는 없었다.
“아, 알았다. 알았으니까. 전할 게 뭔데?”
“직접 전해야 하는데요.”
“뭐어?”
무사의 얼굴이 사뭇 험악하게 일그러지려는데, 거지 아이는 큰 눈을 더욱 깜빡거렸다.
“우리 어르신이 여기 있는 소림사 용문제자한테 직접 전하라고 하셨어요. 꼭이요.”
“끅!”
아이는 새삼 강조해서 말했다. 그리고 용문제자라는 이름에 무사는 주춤 고개를 뒤로 뺐다. 부어오른 눈가며, 시퍼런 턱이 지끈거린다.
그의 한주먹에 나가떨어지지 않았던가.
무사는 부러질 듯이 이를 악물었다. 그러고는 험한 눈길로 거지 아이를 노려보았다. 눈빛 참 살벌하나, 아이는 여전히 천진난만이었다.
“이, 이익. 너 지금 요, 용문제자라고 했느냐?”
“네! 우리 어르신이 소식 못 전하면, 용문제자라는 분이 많이 화를 낼 거라고 하던데요.”
부글부글 끓는 속을 애써 다잡고 있건만, 행화라는 아이가 고개를 한쪽으로 갸웃하면서 말을 덧붙였다.
이건 불난 데다가 부채질이 아니라, 아예 기름을 들이 부어대는 격이다. 그래도 무사는 차마 아이에게 화를 낼 수는 없었다.
아이는 ‘아무것도 몰라요.’라고 하듯이 그저 눈만 깜빡거렸다. 그런 거지 아이에게 뭐라고 할까.
“알았다.”
무사는 맥 빠진 채 중얼거렸다.
행화는 그렇게 오래 기다리지 않았다. 저택의 정문은 당장 열렸다. 용문제자에게 소식을 가져왔다는 것 한마디로 충분했다.
비록 드러내지는 못하고 있다지만, 이곳은 천룡의 안가이고, 여기 사람들은 모두가 천룡의 가인들이다.
천하제일세가.
그 오만한 이름을 조금도 마다치 않는 자들이었다. 그렇건만, 용문제자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그의 손에 호된 꼴을 당한 것이 얼마나 되었다고, 자존심을 앞세울 수 있을까.
아이를 상대했던 정문의 무사는 졸지에 안내까지 맡고 말았다.
그는 굳은 얼굴로 성큼성큼 걸었고, 그 뒤로 행화가 생글거리면서 졸졸 쫓아 걸었다.
짧은 다리로 바쁘게 발을 놀렸지만, 그러면서도 높은 담 안쪽의 저택을 연신 두리번거렸다.
구경하기 좋아라, 계절이 무색하게 자란 아름드리 꽃나무가 곳곳에서 가지를 드리웠다. 색색을 입혀놓은 단청은 화려하기 이를 데 없다.
행화는 아니 가본 곳이라서 기웃거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 모양새는 아무래도 거슬렸다.
그냥 거지 아이가 아니지 않은가.
개방의 소걸개였다.
무사는 행화의 저 눈초리가 어린아이의 순수한 호기심으로 보이지 않고, 염탐하는 눈길로만 보일 뿐이다.
“크흠!”
앞서 걷는 무사는 이를 드러내면서 눈치를 주었지만, 아이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결구 참다못해서 한 소리를 하려다가, 그만 혀를 차고 말았다.
“헤에, 높다. 크다.”
한참 두리번거린 끝에 하는 말이 그게 다였으니.
복잡한 안가의 주랑을 한참 돌아서 닿은 곳은 이곳 저택에서도 손꼽히는 규모의 전각이었다.
저택 안에 또 다른 저택이 있는 듯했다. 높고 화려한 문 위에는 용정의 두 글자가 적혀 있었다.
용정당.
천룡세가에서도 가히 귀빈이랄 수 있는 사람만을 위한 곳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곳까지 개방 거지를 들이게 될 줄이야.
무사는 못마땅함에 입매가 마구 요동쳤지만, 다른 도리는 없었다. 명을 받은 처지였다. 그는 거지 소녀를 용문제자 앞에까지 안내해야 했다.
용정당의 현판을 지나, 그곳에 딸린 정원에서 행화는 용문제자 소명을 마주할 수 있었다.
소명은 정원의 팔각 정자에 앉아, 거지 소녀를 마주했다.
개방의 급한 소식이라고 하더니만, 아이는 먼저 말은 않고서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소명을 빤히 쳐다보았다.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아저씨가 정말 용문제자에요?”
“그렇다만. 너는 누구니?”
“개방 제자, 행화에요.”
“행화라. 흐음, 예쁜 이름이구나.”
“에헤헤헤.”
행화는 맑게 웃었다. 살구나무 아래에 버려진 아이를 주웠다고 그리 부르는데, 그런 이름을 어여쁘다고 해준 사람은 소명이 처음이었다.
대부분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머쓱한 웃음도 잠깐, 행화는 곧 큰 눈동자를 데굴 굴리면서 소명의 위아래를 살폈다.
소림사의 용문제자라고 하여서, 위맹한 풍채라든가, 범접 못 할 위엄 같은 것을 두르고 있지 않을까 상상하였는데. 앞에서 마주한 소명은 그저 평범한 모습이었다. 고요하게 앉은 모습에 흔들림은 없다.
행화는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느냐?”
“정말 용문제자 맞아요?”
“왜, 아닌 것 같더냐?”
“우으웅.”
행화는 선뜻 답하지 못했다. 그저 지저분한 손가락을 입에 물고서 우물거렸다.
소명은 쓴웃음을 지었다. 용문제자의 대체 어떤 모습을 기대하였는지. 그렇다고 갸웃거리는 아이를 타박할 것은 없는 노릇이다.
어찌할까. 소명은 잠시 고민했다. 그는 문득 중지를 접었다가 간단히 튕겨냈다. 허공을 꿰뚫는 파공성에 행화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탄지신통(彈指神通)의 한 수.
손가락을 튕겨내는 것만으로 저기 있던 굵은 가지가 뚝 하고 끊어졌다. 거리가 못해도 족히 수장에 이를 듯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이만한 위력이라니.
행화는 눈을 깜빡이다가, 곧 배시시 웃었다.
아이의 눈으로 지금 한 수를 알아볼 수 있겠느냐만서도, 개방 제자는 남다른 모양인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전언이 무엇이더냐?”
“둘이 있는데요.”
행화는 고사리 손을 둘 펼치고는 눈을 반짝였다.
큰 눈을 더욱 크게 뜨고서 좌우 눈치를 보았다. 주변에 달리 인적도 없는데, 조심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소명은 피식 웃고는 불현듯 한 손을 가볍게 내저었다. 마치 허공중에 뭔가를 그러쥐는 듯했다. 그리고 말했다.
“들을 사람은 없으니. 이제 말해 보아라.”
“네에.”
행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명이 무엇을 하였는지는 몰라도, 사방의 소리가 한순간 멀어지는 것을 어린아이도 느낄 수 있었다. 한층 안심하면서도, 아이는 은근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하나는요. 남타주가 전한 소식인데요. 만천옹이 찾아올 거래요.”
“만천옹이시라. 흐음, 그리고?”
소명은 전혀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천하를 들썩거리게 하는 오대고수 중 하나가 찾아온다는 말에도 그러려니 하는 기색이다.
행화는 그 반응이 뜻밖이어서 고개를 잠시 갸웃했다. 만천옹이라는 이름을 모르는 건가 싶었다.
“만천옹 모르셔요? 천하오대고수 중 하나인데.”
“그래, 그래. 들어 알고 있지. 그보다 다른 소식은 무어니?”
“헤에.”
이렇게 말하면 행화도 더 할 말이 없다. 아이는 목덜미를 벅벅 긁고는 다시 말했다.
“소림사에서 말을 전해달라고 했대요.”
소명은 낯빛을 고치고, 새삼 진지한 얼굴로 행화가 하는 말을 귀담아들었다.
혁련후는 한참 거리를 두고서 소명과 개방 아이가 얘기 나누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았다.
개방에서 용문제자를 찾아왔다는 말을 듣기가 무섭게 이 자리로 달려왔다. 무슨 얘기를 나누는 것인지 마땅히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눈을 가늘게 떴다. 아직도 얼굴 한쪽이 시퍼렇게 물들어 있었지만, 눈빛은 예리했다.
혁련후는 바빴다. 귀는 특유의 청음술을 발동했고, 두 눈으로는 입 모양을 읽어내려고 했다. 그런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주변의 엉뚱한 소음이나 들려올 뿐이지, 그가 보고 있는 소명이나 거지 아이에게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입술을 읽어내기에는 이상할 정도로 눈앞이 어지러웠다.
계속해서 두 사람의 모습이 일렁이는 통에, 입술을 읽기는 아주 언감생심이었다. 예리한 안광이 부르르 요동치다가, 결국 그가 눈을 질끈 감음과 동시에 자취를 감추었다.
“제길!”
험한 소리가 절로 터졌다. 아무리 부릅뜨고, 귀를 기울여도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뭐라 떠들어대는 것은 분명하건만.
“대체 무슨 짓을 해 놓은 거냐.”
내가공력으로 소리를 막는 것까지야 그렇다고 할 수 있지만, 입술조차 읽어낼 수가 없다니. 단순히 공력이 높고 낮음으로 가능한 경지가 아니었다.
혁련후는 빠득빠득 이를 갈아붙였다. 짜증이 솔직한 눈길이 멀리서 흐릿한 소명의 뒷모습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고새 개방의 아이는 볼 일을 다 보았던지, 꾸벅 허리를 접었다.
저 나가는 아이를 붙잡아 볼까 싶었지만, 혁련후는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에이, 관두지. 개방과 굳이 척 질 것도 없고.”
한숨을 삼키고서 처마 머리에 그냥 주저앉았다.
손을 뻗어 머리카락을 한껏 헝클어뜨렸다.
천룡팔가 중에서도 첫째, 둘째를 다투는 혁련가의 젊은 영재로서 나름의 자부심이 있었건만. 지금은 그저 참담하다.
동배에서는 소천룡을 제외하면 적수가 없다고 자신하였건만, 주먹질 한 번에 나가떨어졌으니.
“용문제자. 젠장, 역시 소림은 소림이라는 건가. 저런 괴물이 세상에 있을 줄이야.”
혁련후는 한껏 흐트러진 눈으로 멀리 보이는 소명을 물끄러미 보았다. 지금으로서는 무엇 하나 헤아릴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지켜보는 자리를 쉽게 포기할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