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ti Demon God RAW novel - Chapter 202
202화. 망량(魍魎)
해가 저기 저물어 간다. 노을빛으로 물든 구름이 가만히 흐르며 산세를 타고 돌았다.
때를 알리는 어느 사찰의 범종 소리가 가만히 울리며 산을 타고 흘렀다. 그 사찰이 바로 달마조사 이래로 선종(禪宗)의 본산이면서, 또 한편으로 무림의 성지로 천하무종(天下武宗)이라 일컫는 숭산 소림사이다.
켜켜이 산중의 어둠이 산사의 지붕 위로 내려앉을 사이, 불공에 분주한 승인들은 사찰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불을 밝혀 갔다.
학승들은 마땅히 경전을 읽기 위해서, 무승들은 마땅히 신체를 수련하기 위해서.
소림사는 밤이 늦도록 잠들지 아니한다.
산사의 깊은 선방에도 불을 환히 밝혔다. 고작해야 서너 칸에 지나지 않은 선방이니. 그 비좁음이 어떠할까마는 한 자리에는 여러 승인이 모여 있었다.
등불에 비친 그림자가 어지러웠다.
다들 나이가 지긋한 소림의 무자배 원로와 공자배가 모처럼 모인 자리였다.
용문제자의 일 이후로는 좀체 없는 자리였다.
밝힌 불빛이 어른거리면서, 노승들의 계인마저 흐린 머리를 비추었다. 무슨 심각한 일이 화제로 있는 것인지. 불빛 받은 노승들의 주름 깊은 얼굴은 누구랄 것 없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공자배가 이리 모였다는 것은 그만큼 간단치 않은 이유일진대. 섣불리 입을 여는 이 하나 없었다. 평소라면 무슨 농지거리라도 주고받았을 사형제들이었지만, 드리운 그늘이 원체 짙었다.
눈 감은 채 굵은 염주 알을 가만히 돌리거나, 짐짓 심각한 낯으로 연신 한숨지었다.
침묵이 내내 이어질라, 불현듯 상석에 앉은 방장이 고개를 들었다. 방장은 평소의 푸근한 기색이 아니었다. 주름 깊은 얼굴이 살짝 굳어 있었고, 눈 아래에는 시름이 역력했다.
“이것, 용문제자가 전한 소식이 맞는다고 하면, 어찌하면 좋겠는가?”
방장은 천천히 말했다. 그 한마디에 시름이 실려서 사뭇 묵직하다. 주변의 승인들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일 뿐,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간단치 않은 일이다. 용문제자가 개방을 통하여서 만천하에 알리는 동시에, 소림사에도 따로 전하기까지 한 소식이다.
마도의 암약이라니.
제법 오랜 세월 동안, 마도는 조용했다. 이제는 그 흔적조차 가물거릴 지경이다.
지난 세월 동안 마교라 칭하는 온갖 사교가 등장하여서 인세를 어지럽히기는 하였지만, 지금 말하는 마도와는 격이 전혀 달랐다.
그저 혹세무민(惑世誣民) 따위가 아니라, 세상을 멸하고 새 세상을 열겠다는 것이 성산의 마도이다. 한번 요동치면 천하가 어지러운 정도가 아니었다.
수백 년 전, 신검의 활약으로 채 안문관을 넘지 못하였으나, 마도의 준동 하나로 망국지경(亡國之境)에 이를 정도였고, 이후에도 한 번 발원할 때마다 못해 천만인의 목숨이 스러졌다.
피가 강을 이루고, 시체가 산을 이루는 일대의 혈겁이 벌어졌다.
이는 단지 강호무림만의 일이 아닌 것이다.
개방과 마찬가지로, 소림사 또한 마도에 대해서만큼은 경계를 잊지 않았다.
그러한데, 마도가 이토록 공을 들이면서 중원에 스며들었을 줄이야.
하나, 둘이 아니었고, 동서남북의 구분이 따로 없다.
누구도 말은 않고 있었지만, 어쩌면 이곳 소림에도 마수가 뻗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방장이 먼저 말문을 열었음에도, 비좁다 싶은 선방은 한참 조용했다.
사안의 중차대함과 더불어 시름이 어찌 가벼울까. 침묵 끝에 누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방장, 혹여 회맹(會盟)을 생각하시는지요.”
회맹이라, 맹을 소집한다니. 이것이 무슨 뜻인가. 바로 구파일방을 포함한 무림의 정기를 한데 모으는 무림맹을 소집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무림맹이라는 이름으로 모인 것이 무려 반백여 년 전의 일이었다.
그때에, 재림한 황도릉이라고 주장하면서 세상을 어지럽게 하였던 백건사라는 사교를 상대하기 위함이었다. 사천에서 크게 일어난 백건사는 지금에도 그렇지만, 그때에도 명문이었던 사천의 삼강, 청성, 아미, 당가가 크게 위태로울 정도로 밀어붙였다.
광신(狂信)이란 참으로 두려워서, 무공 반 초식도 모르는 민초들이 사술에 홀려서는 죽자고 달려드는 통에, 상승의 경지에 이른 무인들이 그만 손 쓸 틈도 없이 당하고 말았다.
그야말로 문파의, 가문의 명맥이 위협받을 정도였으니.
백건사의 위험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만했다. 그렇다고 홀린 민초들을 학살할 수도 없는 노릇.
삼강은 사천에서 잠시 물러났다. 그리고 소림, 무당 그리고 개방을 중심으로 급하게 이루어낸 무림맹과 합류하여서, 백건사의 수뇌라는 자들을 일망타진하였다.
사술에 홀린 자들을 다독이고, 돌보기를 수년.
그제야 사천 일대가 정돈되었다.
이후로 삼강을 비롯해서 큰 화를 입은 사천 무림의 여러 군소문파를 돌보고는, 무림맹은 자연스럽게 해산했다.
일이 있을 때에만 모이고, 다른 이득을 취하지 않고 흩어지는 것이 무림맹의 전통이었다.
항시 무림맹을 유지한다면 그 자체가 또 다른 해악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과거, 성마교의 대대적인 위협이 있을 적에, 그때에는 무림맹이라는 이름도 아니었으나, 천하 영걸들을 돌려보내면서 그와 같은 아름다운 선례를 남기기도 했다.
그러한 선례로, 지금 소림의 고승들 사이에서 무림맹의 일이 나왔다는 것은 절대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소림사가 나서면, 당연히 소림파가 움직인다.
소림파가 움직인다는 것은 하남 무림 전부가 움직이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것만으로도 일말의 과장할 것도 없이, 가히 중원 무림의 삼 할에 이른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선승들은 부족하지 않은가 여겼다. 그만큼 사안이 중대하였고, 용문제자의 한 마디를 중히 여긴다는 뜻이기도 했다.
방장은 침묵했다. 아무리 소림사의 방장이라고 하여도 쉽게 할 수 없는 말이, 회맹의 일이었다.
이때에 장경각을 맡은 공수가 입을 열었다.
“그것은 그리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닌 듯합니다.”
“공수, 무슨 뜻인가?”
무자배는 물론이고, 공자배 또한 흠칫한 눈으로 공수를 바라보았다. 언제고 먼저 말문을 연 적이 없는 공수였다.
묻기 전에는 답을 들을 수 없다 하여서, ‘자물쇠 달린 입’이라고 할 정도인데. 이렇듯 나섰다는 것은 참 대단한 일이었다.
“용문제자는 개방뿐만이 아니라, 따로 손을 써서 은밀히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무슨 뜻이겠습니까.”
“공수, 네 말은?”
“등용문의 대공자, 남악도문의 장제자는 물론이고, 강시당에서도 그 흔적이 있었다지요.”
“음, 단속이 먼저라는 말이로구나.”
“참으로 꺼내기에 민망하려나, 본사라고 크게 다르겠습니까? 오히려 더욱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공수는 고개를 숙였다. 진지한 태도이다. 그러나 잠시간에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한 이도 몇 있었다.
“응? 그게 무슨 뜻이더냐?”
“커흠.”
갑자기 조심 운운하다니. 알아들은 자들은 잠시 얼굴을 붉혔을 뿐이고, 미처 깨닫지 못한 몇은 퍼뜩 의아한 낯으로 되물었다.
공수는 다만 헛기침으로 말을 맺었다.
다들 한쪽으로는 염두에 두었으려나, 아무리 그래도 쉽게 꺼내지는 못한 말이다.
“불편한 말일 수 있으나, 우리 중에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라는 것이지.”
“아니, 지금 서로 의심이라도 하자는 것이냐?”
누구는 공감하여서 고개를 끄덕였고, 누구는 크게 발끈하여서 언성을 높였다. 처음 말을 꺼낸 공수를 책망하는 투였다. 그러나 공수는 눈감은 채,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분명 진노할 만한 일이었고, 차마 입 밖으로 내기에도 어려운 말이다. 그러나 말을 꺼낸 것은 그만큼이나 중차대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마도는 언제이고 두려운 이름이라.
그런데 선뜻 고개를 끄덕이는 이가 있었다.
“공수의 걱정이 괜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방장.”
“그러한가?”
“예, 동기와도 같은 사형제요, 제자들이니, 동문을 의심하는 것이 어찌 가당하겠습니까마는…… 상대는 마도요, 천륜을 거스르고, 인륜을 어디 불쏘시개 정도로밖에는 생각하지 않는 잡것들입니다. 무슨 짓을 한다고 해서 이상할 것 없겠지요.”
“허어…….”
“저런.”
좀체 없는 과격한 말이다. 그러나 공자배는 물론이거니와, 무자배들조차 한숨만 지을 뿐, 뭐라고 말하지는 못했다.
입을 연 이는 다른 누구도 아닌, 무오였다. 전대의 나한당주로, 지금에는 소림무공을 새로이 정리하는 데에 매진하는 고승이다.
무오는 방 안의 조용한 승인들을 한 번 둘러보고서, 다시금 방장을 돌아보았다.
단호한 모습이다. 방장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러고는 한숨과 더불어서 물었다.
“무오, 자네 말이 옳아. 마도는 참으로 간악한 자들이니. 허나 어떤 방법으로 의심을 해소할 수 있겠느냐.”
“그것은.”
무오는 눈썹을 잔뜩 모았다.
말문이 막혔다. 소림 무공이라면 사흘 밤낮이라도 실컷 논할 수 있겠지만, 이런 일에는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무자배, 무수가 나섰다.
항상 무오와 툭탁거리면서 소소한 다툼을 멈추지 않는 그였지만, 지금에는 그 뜻을 같이했다.
“내 한 가지 방편이 떠오르기는 하였습니다만.”
“무수 사제, 그래 방편이란 무엇인가?”
“확실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범종이 있지 않습니까. 방장 사형.”
“범종?”
“잊으셨습니까. 이백 년 전의 파마범종(破魔梵鐘)입니다.”
“그러고 보니. 어허, 그것이 아직 실재하였던가?”
노승들은 서로 돌아보며 수군거렸다. 공자배도 의아한 기색이었다. 그러자 공수가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장경각에서도 남은 기록이 있습니다. 마도가 크게 준동하였을 적에, 파마범종 하나로 마기를 잠재운 일이 있었다 하지요. 그러니 마도에 조금이라도 닿은 자라면, 파마범종의 보력 앞에 어떤 식으로든 틈을 드러낼 것입니다.”
“어허, 파마범종이라.”
“그것이 과연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래도 없는 것보다야.”
선승들은 잠시 수군거렸다. 의구심을 품은 자들도 있었고, 고개를 끄덕이는 자들도 있었다. 가만히 생각하면 나름 가능할 것도 같다.
무수가 말하고, 공수가 확인하였으니. 서둘러 찾아온 범종.
파마의 범종이라, 이름은 참으로 거창하다. 그러나 정작 모습을 드러낸 것은 청동으로 만든 작은 종이었다.
작은 종대에 매달린 범종에는 세월의 흔적이 역력했다.
용의 모양을 새겨놓았지만, 한참 닳아서 뭉툭하였고 연꽃의 대좌가 어렴풋이 남아서 형태만 짐작할 뿐이었다. 몇 줄의 경문이 적힌 듯했지만, 유심히 보아도 어느 경문인지는 헤아리기 어려웠다.
전하기로는 천축국의 보배로운 패엽(貝葉)이 들어오자, 그것을 녹여서 만들었다고도 하고, 또 어디서는 동쪽의 멀고 먼 땅에서 유학 온 선승이 지닌 것으로 동쪽의 법력이 담겨 있다고도 했다.
유래가 명확하지는 않으나, 같이 말하는 것은 만사만악(萬邪萬惡)을 파(破)하는 법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좀체 울린 적이 없는 파마범종을 지금 꺼낸 것이니.
방장은 작은 범종을 앞에 두고는 잠시 눈을 감고 숨을 다잡았다. 선방의 모든 이가 긴장한 눈초리로 불빛 아래에 번들거리는 범종을 바라보았다.
“자아, 이제 종을 울릴 것이니. 모두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시게나.”
“예, 방장.”
수염 허연 선승들이 반장하고서 순순히 허리를 숙였다.
그들은 곧 한입으로 염불을 시작했다. 웅얼거리는 계송 소리가 차차 높아지는데, 방장은 그때 범종을 때렸다.
데에에엥!
맑은 소리가 계송과 어우러졌다. 방장은 다시 범종을 때렸다.
따아아앙!
더욱 강렬하다. 이는 고심종(叩心鐘)의 공력으로 범종을 때렸기 때문이다. 방장은 마음을 차분히 하며 다시 종을 때렸다.
무상대능력이 드러나면서 방장의 머리 뒤에는 흡사 보광처럼 황금의 광휘가 일었다. 그리고 방장은 입술을 살짝 벌리면서 범종을 때렸다. 그러자 소리가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