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ti Demon God RAW novel - Chapter 204
204화. 망량(魍魎)
개방의 거지 소녀, 행화는 의자 위에 무릎을 딱 붙이고 앉아서, 조용한 소명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는 말이 없었다.
행화는 눈을 가늘게 떴다. 아이의 눈동자에는 유독 검은자위가 컸다. 그만큼이나 많은 것을 볼 수 있는 눈이었다.
용문제자의 안색을 살피려고 눈동자를 가만히 굴렸지만, 아이는 이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의 얼굴에 다른 변화는 전혀 없었다. 그저 고요한 눈빛이 한층 깊어졌을 뿐이었다.
소명은 조용히 있다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았다. 결국에 그리되어 버렸구나.”
“네? 뭐가요?”
행화는 크기도 한 눈동자를 끔뻑거리면서 되물었다. 방금 전한 말에 무슨 다른 뜻이 있는가 싶었다.
그저 소림사에서 고목 하나가 쓰러졌다는 것, 한 마디뿐이었는데.
다른 내색은 하지 않아도, 소명의 어조는 참으로 착잡하지 않은가.
소명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고해 주어서 고맙구나. 개방 어른들께도 감사의 말을 전해 주렴. 배려를 잊지 않겠다고 말이다.”
“헤헤, 아니에요. 그럼, 달리 전할 말씀은 없으신가요?”
속내를 훔쳐보려는 듯이 눈동자를 굴리던 차였던지라, 행화는 제풀에 움찔하여서 억지웃음을 흘렸다. 그러고는 냉큼 한마디를 덧붙여 물었다.
“음.”
소명은 흐린 미소를 내비쳤다. 그는 먼지 그득한 행화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말할 것은 없었다.
일은 다 하였으니. 행화는 이대로 정원을 나서려는데, 아무래도 기이하여서 걸음이 주저주저했다.
암만 생각해도 이상하다.
이리저리 고개를 갸웃거려 보지만, 행화는 곧 콧등을 찌푸렸다.
“에이, 몰라.”
고민해도 모를 일이다. 그저 두 눈으로 본 것만 전하면 될 일이다.
행화는 종종걸음으로 용정당을 나섰다.
소명은 정자에 앉아 잠시 넋을 놓았다.
처마를 스치고 내리치는 햇볕이 그를 비추었다.
“기어코 그리되었던가.”
개방이 전한 한 줄의 문구는 그저 뼈아플 뿐이었다. 그 전의 소식은 머릿속에 남지도 않았다.
걱정했던 일이 고스란히 일어나고 말았다.
사문의 어려움을 헤아릴 수 있기에, 심중에는 이는 격랑이 참으로 세차다. 소림사의 소식에 비하면 만천옹이 어떻고 하는 것은 아무래도 좋은 일에 불과했다.
소림사에서 몸담은 시간은 고작 한 계절에 불과하려나, 새삼 품게 된 사문의 정이며, 사승의 인연이 어찌 가볍다고 할 수 있을까.
소명은 불현듯 어깨가 무거웠다. 감당 못 할 피로가 하염없이 밀려왔다. 차라리 일천의 마구니를 홀로 상대하는 것이 더 나으리라.
치미는 한숨을 다잡고, 또 다잡다가 소명은 퍼뜩 고개를 치켜들었다. 아직 맑은 하늘에 하얀 구름이 느릿하게 흘러갔다. 저기 흐르는 구름은 어디를 향하는 것인지.
하늘 향한 소명의 눈가는 초점 없이 그저 망연할 따름이었다.
소명이 홀로 시름할 적에, 용정당의 다른 전각에서는 때 아닌 소란이 크게 일었다.
“야, 야야. 아서라. 지금은 네가 나설 때가 아니다.”
“우이씨!”
위지백이 당장 튀어 나가려는 아함의 목덜미를 덥석 움켜쥐었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소명의 기파가 흔들렸다. 그것만 보아도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진 것이 틀림없다. 생각하기가 무섭게 몸이 움직이려는 차에, 그만 위지백의 손에 붙들린 것이다.
그녀는 입술을 닷 발이나 내민 채, 홱 노려보았지만, 위지백도 이번에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는 한층 억센 손에 한층 힘주었다.
“이 녀석아, 나설 때에 나서. 느닷없이 뛰쳐나가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
“저기 거지 꼬마를 잡아다가 족치면 될 거 아니야!”
“일을 더 크게 벌여놓을 참이냐. 안 그래도 일전의 일 때문에 개방에서 너한테 벼르고 있는 걸 몰라?”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이런…….”
덮어놓고 뻔뻔한 아함이다. 위지백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자신도 어지간하지만, 이 녀석은 자신보다 참 더하다.
“에효, 요놈아. 그래, 네놈이 그리 설치면 소명 놈이 참 어여뻐라 하겠다.”
“……몰래 하면.”
“안 들킬 자신 있어?”
“없지.”
그제야 아함은 버티는 힘을 거두었다. 둘이 입씨름하는 잠깐 사이에 질질 끌린 발자국이 돌바닥에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 아함의 작은 발자국은 까맣게 타들어서 남았고, 위지백의 흔적은 족히 세 치 깊이로 패여 있었다.
그만큼 뛰쳐나가려 했던 이나, 붙잡는 이나 참 어처구니없는 이들이다.
행화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겁난(劫難)을 피한 셈이었다.
아함은 이제 포기하여서 잠시 시무룩하게 있었다. 아랫입술을 삐죽거리더니, 툭 던지듯이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인데?”
“나도 잘은 모르겠다만…… 사문에 일이 생긴 모양이다.”
“사문이면? 소림사? 그거 대단한 곳이라면서.”
“일이 벌어지는데, 대단하고 말고가 어디 있어?”
위지백은 한 번 면박을 주고는 아함을 끌고, 다른 전각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곳에는 담씨 내외와 장관풍이 조용히 차를 마시고 있었다.
담일산은 들어서는 위지백을 반겼다.
“오셨습니까, 두 분. 소명 공께서는?”
“그놈은, 예, 뭐…… 일이 있는 모양입니다.”
“그래요?”
위지백은 어색하게 얼버무렸다.
담일산은 잠시 멈칫했다. 어디 눈치가 없을까. 위지백의 어색함과 더불어서, 아함의 얼굴에는 불만이 그득했다. 뭔가 있음을 대번에 알았지만,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성 부인에게 눈짓하여서 자리를 마련하고, 둘에게도 따로 차를 준비했다.
“하하, 과연 천룡세가라고 해야 할지. 참으로 좋은 극상의 차를 다 준비해주더군요.”
“극상이라? 그 정도인가요?”
“하하, 그럼요. 이 정도라면 같은 무게의 금으로도 구하지 못할 것입니다.”
“흠.”
확실히 향은 훌륭하다.
위지백은 은은하게 번져 오는 차향을 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온기를 느끼면서 잠시 침묵에 젖어들었다.
누구랄 것 없이 조용했다.
차를 권한 담씨 내외도, 위지백도, 끌려와 앉은 아함도. 각자 상념에 빠져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위지백의 입에서 한탄 비슷한 한마디가 툭 튀어나왔다.
“참, 여러 일이 있었습니다. 정말 여러 일이 있었네요.”
“하, 하하. 그렇군요.”
담일산은 흘깃 고개를 들었다가, 위지백의 한마디며, 그의 얼굴에 실린 피로함에 크게 공감하였다. 그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흘깃 성 부인을 돌아보았다.
그녀도 고졸한 미소를 머금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설마 부부의 강호유람이 이렇게 극적으로 변할 줄이야.
성 부인은 미소 띤 채, 담일산과 눈을 마주하고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인연이 신기할 따름이라. 성 부인은 곧 불퉁한 얼굴로 앉아 있는 아함을 슬쩍 보았다.
소명이 상대해 주지 않으니, 어지간히 마음이 상한 모양이다. 그러나 저렇게 철모르는 아이처럼 보여도, 서방에서는 무림중을 떠나, 전설이라고까지 하는 화염산의 주인이다.
성 부인은 담일산에게 눈짓으로 뜻을 전했다.
‘산주는 제가 달래지요. 여기서 위지 선생과 계셔요.’
“크흠.”
담일산은 헛기침을 잠깐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성 부인은 슬쩍 아함에게 다가갔다.
“산주, 그만 마음을 푸시지요.”
“…….”
아함은 뾰로통한 채, 성 부인을 흘깃 보았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백옥 같은 얼굴로 저리 실망에 젖어 있으니. 찌푸린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같은 여인으로 가슴이 같이 아플 정도였다.
성 부인은 미소를 머금고서 아함의 손을 잡아끌었다.
“들어가시지요.”
“응?”
“소명 공이 아주 눈이 돌아갈 정도로 어여쁘게 꾸며드릴 터이니.”
“정말?”
“아무렴요.”
성 부인이 아함을 살살 달래어 다시 방으로 들어가는데, 그 모습을 위지백은 멀거니 보았다.
“저런 수가 다 있을 줄이야.”
“하, 하하.”
기껏 힘 씨름하면서 끌고 온 것이 못내 무식한 짓거리처럼 느껴진다.
담일산은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곧 남은 웃음을 삼켜내면서 말했다.
“여인들이야, 여인들의 방편이 있는 것이지요.”
“음, 정말 그 말이 맞는 것 같소. 담 가주.”
위지백은 무엇을 떠올렸는지, 퍼뜩 눈살을 찌푸렸다. 그 기색이 여기 없는 누군가를 헤아리는 듯하다. 여인이 여인의 마음을 안다면, 가장은 또 가장의 마음을 안다던가.
담일산은 어째 고졸한 미소를 머금고서, 찌푸린 위지백을 바라보았다.
“가내가 꽤 번잡한 모양이지요?”
“응? 에헤, 번잡은 무슨. 하하, 번잡은…… 번잡이 아니라, 아주 전쟁통이 따로 없소. 기껏 백금장을 세웠을 때만 하여도 이렇게 살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에혀…… 어디 가는 것 하나까지 다 허락을 받아야 하니.”
위지백은 당장 울상이 되어서는 고개를 푹 떨구었다. 그의 신세한탄은 처량했다.
서장제일도, 서천 무림의 제일 도객이건만.
집에서는 등살을 긁히는 남편이고, 등골이 휘는 아버지이다. 담일산 또한 정주 담가라는 내력 있는 가문을 이끌었던 처지였다. 그 와중의 다사다단함은 아무리 말해도 끝이 없을 것이다.
담일산은 미소를 삼키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고, 위지 선생. 그래도 아이들 어렸을 때가 그나마 살 만하다오. 이 녀석들이 또 머리가 굵어지고 나면 어찌나 속을 썩이는지.”
“그, 그런!”
가보지 못한 길을 먼저 가서, 하염없이 지친 표정이다. 위지백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담일산을 다시 보았다. 그저 중원의 한 고수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이제는 인생의 선배로 다시 보이지 않는가.
“다, 담 선배!”
“하, 하하.”
선배 소리가 절로 튀어나온다. 담일산은 쓴웃음일망정 소리 내어서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두 가장의 눈물겨운 공감 사이에서, 장관풍은 은근히 소외된 채 있었다.
그는 멀뚱멀뚱한 모습으로 한참이고 자리를 지켰다. 뭐라고 하는지 전혀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그는 한없이 진지한 얼굴이었다.
뜻하는 바가 있는 까닭이다.
장관풍은 눈동자를 좌우로 굴리면서 틈을 보다가, 위지백이 한숨 질 무렵에 성큼 다가갔다.
“백금장주님.”
“응? 뭐냐, 애송이.”
대뜸 애송이라고 말하지만, 장관풍은 추호도 싫은 기색이 없었다. 서장제일도에게 천산파의 누군들 애송이가 아니겠는가.
장관풍은 신색을 바르게 하고,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단단히 두 손을 맞잡았다.
“삼가, 가르침을 청하고자 합니다. 미거한 말학에게 한 수 가르쳐 주십시오.”
“뭬이야? 가르침?”
위지백은 험악하게 눈썹을 치켜들었다.
이때에 가르침 운운이라.
목소리가 자연 곱게 나가지 않는다. 치뜬 눈매에서 이미 날이 서 있었다.
장관풍은 험한 기세에 움찔하고 어깨를 들썩였다.
‘흐읍!’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절로 치미는 신음을 간신히 물어 삼켰다. 두렵지만, 그래도 각오한 마음이 흔들리지는 않았다.
두려움을 마주하지 않고서야, 어찌 길을 찾을 수 있으랴.
장관풍은 한층 힘주어서 눈을 크게 떴다. 맞잡은 두 손이 잘게 떨렸다.
“어허, 이런.”
담일산은 헛웃음을 흘리면서 슬쩍 몸을 뒤로 물렸다. 갑작스러운 일에 어찌 당황하지 않을까. 경험 많은 노강호로서도 이러한 상황은 처음이었다.
위지백이 일거에 드러내는 기세는 참으로 날카로워서, 담일산도 감탄할 만했다. 가까이 있는 자신이야 그저 한풍이 스치는 정도이나, 똑바로 마주하는 장관풍은 칼날이 목덜미에 닿아 있는 듯할 것이다.
자칫 험한 일이 벌어질 것처럼 살벌하기 이를 데가 없다.
그러나 담일산은 이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치미는 웃음을 감추기 위함이었다.
대뜸 서리 앉은 것처럼, 위지백은 싸늘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눈매가 슬금슬금 오르락거리고 있었다. 진정으로 노하였다기보다는 장난스러운 기색으로 한가득하다.
“허허, 위지 선생도 참.”
아무래도 장관풍이 호된 꼴을 당할 모양이었다.
담일산이 잘못 보지 않았다. 위지백은 옳다구나 싶었다. 굳은 몸 한번 제대로 풀어볼 기회가 아닌가.
‘흐, 흐흐흐. 분명 먼저 가르침을 달라 하였겠다.’
위지백은 커흠, 헛기침을 흘리고는 벌떡 일어나 널찍한 자리로 걸음을 옮겼다.
“좋다. 어디 한번 놀아주지.”
“헛, 감사합니다!”
장관풍은 번쩍 고개를 치켜들었다. 눈빛에 열의가 가득하여서 뜨겁게 타올랐다. 위지백은 턱을 한 번 치켜들고는 무광도를 곧게 뻗었다.
솟은 도첨 끝에서 햇빛이 부서지며 무지갯빛을 뿌렸다.
딱히 기세를 일으킨 것 같지도 않았지만, 장관풍은 도첨을 마주하는 순간 입 안이 바짝 말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