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ti Demon God RAW novel - Chapter 21
21화. 거짓 잔치의 끝
“뭐? 사죄?”
사내는 기가 막힌다는 듯 크게 웃었다. 그리고는 뒤쪽의 관원들에게 들으라는 듯이 소리를 높였다.
“이봐, 여기 상화촌 촌놈이 우리 관주님보고 사과하러 오라 전해달라는데?”
“와하하하.”
“저놈이 미쳤구나. 크크크.”
당장 왁자한 웃음과 함께 조롱 섞인 외침으로 시끄러워졌다. 그 앞에서도 소명의 신색은 여전히 담담했다. 사내는 홱 고개를 돌렸다.
“네놈이 정신이 나갔구나? 그렇지?”
“후우.”
당장 험악한 기세를 드러내는 모습에 소명의 입에서 한숨이 흘렀다. 그는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었다.
“여튼, 어디나 사람이 말로 하면 안 듣는다니까.”
중얼거리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뭐, 뭐라는? 으억!”
소명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사내는 돌연 뻗은 일권에 놀라 뒤로 나동그라졌다. 우당탕 소리가 크게 울렸다.
나동그라진 그는 정신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 큰 충격은 아니었지만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는 퍼뜩 고개를 치켜들었다.
“이, 이 자식이…….”
그는 당장 소명에게 달려들려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앞으로 일으키려는 순간 다리가 확 풀렸다.
“어, 어어…….”
소명은 그를 지나쳐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뭐, 뭐야, 저 자식?”
“허, 저놈 봐라?”
황가무관의 관원들은 오만상을 쓰며 문가로 다가왔다.
소명은 그들의 일그러진 얼굴들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그리고 뒤로 손을 뻗어 열린 문을 천천히 닫았다.
쿵.
문소리가 묵직하게 울렸다.
홍추덕은 멍청한 얼굴로 눈을 깜빡거렸다.
그가 황가무관에 이름을 올린 지는 사나흘밖에 되지 않았지만, 본래 낙양에서 제법 먹어주던 주먹 중 하나였다. 그런 그가 비리비리한 비렁뱅이 한 명한테 달려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것도 혼자 있는 것도 아니었다. 홍추덕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그의 주변으로 황가무관의 관원들이 뻗어 있었다. 그들 중에는 자신처럼 낙양의 주먹 출신들도 몇몇 섞여 있었다.
세게 맞은 것도 아니고, 툭툭 치는 듯한 가벼운 주먹질을 감당하지 못하고 인사불성으로 드러누워버린 것이다. 하지만 홍추덕은 왜 그런지를 딱히 몸으로 알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이, 이런 스버럴…….”
욕이 절로 나왔다. 그놈은 처음 들어선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단 한 걸음도 물러서지도, 나서지도 않았다. 그는 손목을 풀며 혼자 남은 홍추덕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눈길을 받기가 무섭게 홍추덕은 혀가 바짝 굳어버리고 무릎이 후덜덜 떨렸다.
‘지, 지미럴…….’
낙양 땅에서 이런저런 더러운 꼴을 다 보아온 처지였지만 저런 눈을 한 자를 본 적은 없었다. 일말의 사심도 없는 눈. 자신들을 겁박하려 드는 것도 아니요, 얕잡아 보는 것도 아니었다. 아무런 감정도 없는 것이다.
“우, 우리한테 왜 이러는 거요?”
목소리가 절로 갈라져 나왔다.
“그저, 말씀을 전해주시면 됩니다.”
“그, 그런데, 왜 이렇게…….”
“들어주시지 않을 것 같아서요.”
“그, 그런.”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 이렇게 솜씨를 보이지 않았다면 듣는 척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게 무슨 소란이야?”
불현듯 무관 건물 쪽에서 거친 목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홍추덕의 얼굴이 절로 환해졌다. 한 사내가 인상을 찌푸린 채 밖으로 나왔다.
그의 모습에 홍추덕은 반색하며 달려갔다.
“아이고, 이 사범님!”
“뭐야, 이 새끼들은 왜 여기 뻗어 있는 거야? 저놈은 또 뭐고?”
“그것이…… 호, 호가무관에 온 놈이랍니다.”
“호가무관?”
그는 호충덕의 말에 어이없어했다.
“지금 네놈들이 호가무관 촌놈 하나한테 이렇게 당했단 말이야? 그걸 말이라고 해?”
“그, 그것이…….”
거친 사범의 말에 홍추덕은 그만 말을 잃었다. 사범의 얼굴에는 노골적인 멸시가 떠올라 있었다. 마치 쓰레기를 보는 듯한 눈. 그 차가운 눈초리를 마주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사범은 그를 밀치고 문 앞에 서 있는 소명에게 다가갔다.
소명은 다가온 황가무관의 사범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시골의 무관에 있을 사람들로는 보이지 않았다. 은연중에 드러나는 기세가 상당했다.
“이봐, 이름이 뭐냐?”
“상화촌, 소명이오.”
“그래? 네놈 재간이 제법이구나. 여기 이 쓰레기들을 상대할 줄도 알고.”
“…….”
소명은 같은 무관에 속한 자들을 두고 서슴없이 쓰레기라 칭하는 사범의 모습에 입을 닫았다. 그와는 어떤 말도 섞고 싶지 않다.
이 사범이라 불린 자가 건들거리며 다가왔다. 두 손을 늘어뜨린 채 다가오는 모습은 얼핏 방만하기 그지없어 보였다. 그러나 소명은 축 늘어뜨린 두 손에 공력이 집결되는 것을 어렴풋이 엿볼 수 있었다. 한 걸음 다가왔다 싶은 순간, 일권이 무섭게 뻗어왔다.
팡!
허공을 치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어?”
일권을 내친 사범의 입에서 당황한 소리가 새었다. 피할 줄은 미처 생각지 못한 것이다.
소명은 고개를 기울인 채 눈앞의 놀란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 이놈 보…… 컥!”
억지로 웃음 짓던 그 얼굴이 크게 뭉개지며 뒤로 날았다. 홍추덕은 그 광경에도 크게 놀라지 않았다. 아까 다른 관원들도 그 모양으로 날아갔기 때문이다.
지금 홍추덕은 머리가 바빴다.
지금 뻗은 이 사범은 그래도 하남 일대에서 섬전권이라는 이름으로 제법 알아주는 고수 중 하나였다. 그런 그가 오히려 주먹에 당해 누워 있으니.
이제 황가무관에서 제대로 서 있는 이는 홍추덕 혼자인 것이다.
그때, 소명이 물었다.
“이제 다른 분은 안 계신가요?”
“예, 관주님하고 다른 사범님들은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절로 존대가 나왔지만,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그럼, 말씀드린 대로 빠른 시일 내에 호 관주님께 사과하러 오시라 전해주십시오.”
“그, 그리하겠습니다.”
홍추덕은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답이 없다. 그는 숙인 고개를 차마 들지 못했다. 한참 눈동자를 굴렸다.
‘제, 젠장. 뭐야…….’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까. 어쩐지 노려보고 있는 듯해 고개 숙인 뒤통수가 섬뜩했다. 주저주저하던 홍추덕은 크게 용기를 내어 흘깃 앞을 살폈다.
“흡!”
눈이 크게 뜨였다. 올 때와는 전혀 다르게, 아무런 기척 없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문 열리고 닫히는 소리도 듣지 못했는데 문 앞의 자리가 텅 비어 있다.
“허, 허이구야…… 이, 이게 무슨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냐…….”
홍추덕은 그제야 오금이 탁 풀려서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는 멍한 눈으로 무관의 연무장을 바라보았다. 이 사범과 관원들이 찬 바닥에 뻗어 있는 모습이 없었다면, 한바탕 꿈이라도 꾸었으려니 싶을 정도였다.
그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가만, 이러고 있으면 안 되지…….”
홍추덕의 머리가 쿵쾅거리며 급하게 굴러갔다. 황 관주는 속이 좁은 인물이었다. 다 뻗어 있는데 혼자만 멀쩡하다고 하면 무슨 해코지를 당할지 모르는 일이다.
머리를 벅벅 긁어가며 생각을 쥐어짜던 그는 곧 번쩍 고개를 치켜들었다.
“에이, 썅! 여긴 어차피 끝난 거야!”
결정한 홍추덕은 당장 자리를 박찼다.
* * *
황가무관의 관주, 황태정은 들뜬 마음으로 걸었다. 술자리를 거하게 대접받은 터였다. 이제 일이 잘만 되면 일개 무관이 아닌 무파로서 발돋움하게 될 것이다. 탄탄대로를 걷는 앞날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무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문득 눈살을 찌푸렸다. 당연히 들려야 할 기합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이다.
“이런, 놈들이. 또 농땡이를.”
좋던 기분이 확 상했다. 급하게 세를 불린답시고 어중이떠중이들을 끌어들인 것이 문제였다. 그는 당장 달려가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한바탕 호통을 치려는 순간, 무관의 모습에 그는 입을 쩍 벌렸다.
“아, 아니…… 이게 무슨!”
당황스러웠다. 제자들이 모두 바닥에 처박힌 채 끙끙 앓고 있다. 입관제자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중에는 황태정이 직접 가르친 제자들도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냐!”
“으, 과, 관주님…….”
황태정은 신음하는 제자 중 하나를 일으켜 세웠다. 어디를 어떻게 당한 것인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는 세차게 뺨을 내갈겼다.
“정신 차려! 이런 빌어먹을, 정신 차리란 말이다! 어떤 놈이야, 어떤 놈이 이딴 짓을 벌인 거냐!”
“호, 호가, 호가무관 놈이…….”
“뭣? 호가무관?”
제자의 말에 황태정은 어이가 없었다. 호가무관에 무슨 사람이 있다고 황가무관의 제자들을 이렇게 때려눕힌단 말인가.
혼란한 눈으로 두리번거리던 그는 이 사범의 모습을 발견했다.
“이, 이 사범!”
“…….”
그도 차가운 돌바닥에 고개를 처박은 채 인사불성이었다. 제자들이야 백번 양보해 그럴 수 있다 치지만, 그들이 보내준 이 사범마저 이런 꼴이 되어 있을 줄이야.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멍한 채 있던 황태정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얼굴 살이 후들거렸다.
“호경한! 이 작자가 감히 뒤통수를 쳤다 이거지!”
화가 머리끝까지 솟구친 그는 눈이 완전히 돌아갔다.
* * *
소명은 황가무관을 나서서 밤이 더 깊기 전에 상화촌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호가무관으로 돌아가지는 않았다.
옛 집터에서 밤을 지새웠다.
한쪽에 바람 막을 자리를 만들고 몸을 웅크렸다. 아직은 날이 풀리지 않아 추운 바람이 불어들었지만, 크게 불편하지는 않았다. 풍찬노숙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소명이었다. 오히려 뜻밖의 아늑함에 가슴이 평온했다.
돌아왔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어 전날보다 더 편히 잠들었다.
날이 어슴푸레 밝아오기 시작하자, 소명은 번쩍 눈을 떴다. 몸을 덮은 한 장의 모포를 걷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는 하루의 시작을 눈으로 바라보았다.
검푸른 빛으로 물들어가는 하늘 아래에 찬 공기가 폐부 깊숙이 들어왔다. 탁한 숨을 내뱉는 호와 맑은 숨을 들이키는 흡을 차분히 다스렸다. 새벽의 한기는 밀려나고 새로운 날의 힘이 전신으로 퍼져갔다.
몸을 바르게 한 소명은 천천히 손발을 움직였다. 금강권이다.
아니, 바탕은 금강권이었으되 그 내용은 크게 달랐다. 본래 십팔식의 금강권을 간결하게 하면서, 무형결의 실전요결을 더하였으니.
실전형 금강권이라고 할까. 소명이 이름 붙이기를 소금강권(小金剛拳)이라고 했다.
앞뒤로 느릿하게 움직이는 소명의 손발에는 보이지 않는 힘이 흘러넘쳤다.
“흡!”
내공 없이 소금강권을 행하고 나자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고작 한 번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만한 공력이 들어간 것이다.
눈을 들었다.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새벽 그늘이 물러가고 햇살이 고개를 내밀었다. 호흡을 가다듬은 소명은 스며든 한기를 떨쳐내려는 것처럼 돌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발치에서 시작된 떨림은 일순 전신으로 퍼졌다.
파파팟!
맺힌 땀방울을 남김없이 흩어낸 뒤 소명은 눈을 떴다. 번뜩이는 광채가 눈가를 스쳤다. 햇살이 반사된 까닭인지도 몰랐다. 이내 깜빡이는 소명의 눈동자는 여느 때처럼 담담한 빛을 품었다.
곡물 가루에 맑은 물로 아침을 간단히 해결했다. 그리고 마을 어귀에서 자리를 지켰다. 홀로 선 마른 나무에 등을 기대고 섰다.
어제 그렇게 난리를 쳤으니, 새벽을 재촉해서라도 그들은 이리로 올 것이다.
그리고 생각대로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되었다.
진시(辰時) 무렵, 멀리서 사람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소명의 입가에 짧은 웃음이 맺혔다.
먼 길 오는 시간치고는 많이 일렀다. 그만큼 속이 달았다는 뜻이다. 소명은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이른 아침의 바람은 매서울 정도로 차가웠다. 그러나 끓은 황태정의 울화를 식히지는 못했다.
그는 핏발 선 눈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당장 호가무관을 작살 내어놓아야 이 속이 풀릴 것 같았다.
그는 흘깃 고개를 돌렸다. 뒤에서 묵묵히 따라오는 다섯 사내가 있었다.
침중한 안색에 품은 안광이 범상치 않았다. 이들 다섯은 ‘그들’이 이 사범과 함께 보내준 무인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