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ti Demon God RAW novel - Chapter 221
221화. 화산백기(華山伯起), 권야출도(拳爺出道)
하북의 팽가는 아주 큰 손실을 당하고 말았다. 아마도 다음 무가련의 회합에서 팽가의 도객을 보는 일은 십수 년 내에는 어려울 듯하였다.
“팽가가…… 그렇군요.”
“무엇보다 사람을 크게 잃었습니다.”
소천룡 회는 고개를 흔들었다. 차분하게 말하였지만, 그 피해는 놀라울 정도였다.
다른 피해는 굳이 말할 것도 없다.
가주 직속인 호왕대, 한 명, 한 명이 절정도객만이 모였다고 하는 막강한 무력이다. 그런 호왕대가 전멸하였다.
하북을 암중에 어지럽히던 사교의 무리와 같이 분사한 것이다.
십여 년이 아니라, 삼십 년 세월이 흐른다 하여도 회복하기가 어려운 전력이었다. 무엇보다 가문의 사람을 잃었다는 것이 제일 뼈아픈 일이었다.
그것은 가문의 뿌리가 크게 상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섬서백가와 안휘남궁은 피해를 보았다고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다른 가문, 지난 몇 달 사이에 그만 움츠러들었던 광동육가과 호남황보는 용케도 화를 면하였으니, 그것도 천운이라면 천운이었다.
소명은 무가련의 사정에 가만히 귀 기울였다. 이렇다면, 하북 쪽의 무가련은 그 틀이 느슨해졌다고 봐야 했다. 당장이야 무가련이 무너지거나 흐트러지지는 않겠지만, 마도의 준동이 확실해진 지금에는 어찌 될지 모를 일이다.
외인에게는 하기 어려운 말이었지만, 소천룡 회는 소명에게 숨기는 바가 전혀 없었다.
가만히 듣다가, 소명은 고개를 들었다. 그는 얼핏 미소를 머금었다.
“듣다 보니, 어째 소천룡께서는 저에게 따로 할 말이 있으신 모양입니다.”
“예, 그렇습니다. 소명 공. 감히 어려운 일을 청하고자 합니다.”
“어려운 일이라. 그것참.”
소명은 혀를 찼다. 무슨 대단한 일이라고, 천하의 소천룡이 직접 어려운 일이라고까지 하는 건가.
불편하기보다는 의아하다.
“본가에서도 근자에 벌어지는 사태가 심상치 않다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래서요.”
“천룡이 일어날 때가 되었다는 것이지요.”
“천룡세가가 문을 여는 겁니까? 강호로서도 다행한 일입니다.”
강호 활동은 자제하고 있어 그렇지, 천룡가의 저력은 끝이 없었다. 무가련의 주축인 다섯 가문, 신주오가를 다하여도 겨우 비할 만하다던가.
그런 천룡이 오래 숨죽이고 있다가 다시금 강호로 나선다고 하니.
마도가 언제 어디서 수작을 부릴지 모를 상황에서는 참으로 반가운 소식이었다.
“그런데…….”
소천룡 회는 소명의 웃음에 마주 웃을 수가 없었다. 그는 한층 어려운 기색으로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참 난처한 얼굴이다.
“무슨 일입니까?”
“가주의 자리가 비어 있으니 문제입니다. 가주지령이 없고는 천룡세가는 세상으로 나설 수가 없지요. 그것은 천룡의 여러 어른의 뜻이라 하여도 도리가 없습니다.”
“그렇군요.”
소명은 잠시 의아하였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겠다.
천룡세가가 아무리 막강하고, 부유하다고 해도, 중심이 되는 자가 없이는 제대로 뜻을 이룰 수가 없을 터이다. 소명은 사뭇 심각하여서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의 가주는 이곳 대저택의 찬 바닥에 아직도 누워 있는 처지이지 않은가.
이지(理智)는 돌아온 모양이었지만, 그가 천룡가주의 권위를 다시 세울 정도로 회복하려면 아직도 한세월은 필요할 터였다.
“그것참.”
난처한 일이다. 소명은 어렴풋이 소천룡 회의 심정을 짐작하고서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는 헛다리를 짚은 셈이었다.
정말 난처한 것은 천룡대야의 안위만이 아니었다.
“본가에서는 아직 부친대인의 용태를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천룡의 후계를 빨리 결정하고자 합니다.”
“천룡세가의 후계는 꽤 신중해야 할 일이 아닙니까?”
“신중함이 과하면 때를 놓친다고 보는 게지요. 그래서 소명 공께 이리 말씀을 드립니다.”
“아니, 천룡가의 후계와 제가 무슨 관계가 있다고.”
소명은 더 모를 일이었다. 당연한 물음이었다. 소천룡 회는 차마 자신의 입으로는 더 말할 수가 없었다.
“이것을.”
그는 한 통의 첩지를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풍운첩, 용트림하는 바람과 구름이 어지럽게 새겨져 있었다. 천룡세가에서 쓰이는 첩지였다.
사뭇 묵직하였는데, 소명은 섣부르게 첩지를 펼치지 않았다. 그는 풍운첩과 소천룡 회의 안색을 번갈아 살폈다.
“뭔가…… 뭔가, 께름칙합니다만.”
“하, 하하.”
회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어색한 웃음이 맴돌았는데, 그것이 더욱 불길하다.
소명은 다시금 석탁 위에 덩그러니 놓인 풍운첩을 물끄러미 보았다. 앞머리 너머로 언뜻 드러나는 눈빛에는 껄끄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풍운첩에서는 마치 검은 기운이 슬금슬금 일어나는 듯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덮어두고 있을 수만도 없었다. 소천룡 회가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서, 기다리고 있었다.
소명은 한숨을 삼키고서, 정말 내키지 않는 느낌으로 손을 뻗었다.
첩지를 펼치자, 참으로 유려한 필체가 드러났다. 그리고 참 격식을 차린 인사말이었고, 다음이 문제였다.
소명은 찬찬히 첩지의 글을 읽고는 절로 눈살을 찌푸렸다. 턱에 힘이 들어갔다. 입술을 지그시 깨무는 모습에는 난처함이 그대로 드러났다.
“이거야 원…….”
“면목이 없습니다. 소명 공.”
“소천룡께서 미안할 일은 아니겠지요. 다만, 더욱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소명은 소리 나게 첩지를 닫았다.
아무리 소림사의 용문제자라고 하지만, 아직은 중원 강호에서는 그 경험이 일천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천룡세가에서는 극공의 예를 다하여서, 소명을 청하고 있었다.
풍운첩에서 말하기를.
인세가 크게 혼란하여, 때 이르게 천룡의 문호를 다시 열고자 하니. 천하의 귀인(貴人)을 청하여서 고언을 받고 싶다고 하였다.
이것은 단순한 초청이 아니었다. 천룡의 문호를 다시 열겠다는 것은 비어 있는 천룡대야의 자리를 급하게 결정하겠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일문, 일가의 앞날이 걸려 있는 일이었다. 더구나 천룡세가였다. 소명은 얼마 전에야 알았지만, 강호 제일의 명문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라 하지 않았던가.
그런 곳에서 그런 일로 외인을 청하다니.
소명은 덮어버린 풍운첩을 보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크흠.”
불편한 헛기침을 억지로 터뜨렸다. 앞에 소천룡이 없었다면 아까의 넝마처럼 처리해 버렸을 것이다.
“거참, 제가 또 무슨 귀인이라고. 이렇게 구구절절하게…….”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지금 강호의 풍문을 듣지 못하신 모양이군요. 개방에서 말이 없었습니까?”
“풍문? 개방에서 말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요?”
알 듯 모를 듯한 말이다.
그러자 소천룡 회는 이제까지와는 사뭇 다른 의미로 쓴웃음을 머금었다.
“지금 강호는 천하육절, 육대 고수를 말하고 있습니다.”
검백(劍伯) 사마종(司馬倧)
만천옹(滿天翁) 허유(許惟)
월부대도(月斧大刀) 노장시(盧帳示)
증장천왕(增長天王) 무운(無雲)
철판관(鐵判官) 치외수(治嵬戍)
그러한 천하의 오대고수에 이제 한 이름을 더하였다. 그것이 바로 권야(拳爺).
천하 오대고수가 이렇게 육절이 되었으니.
소명은 눈을 한번 깜빡거렸다.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그는 괜히 콧대를 긁적거리고, 잠시 다른 데로 눈을 돌렸다.
한참 딴청을 부렸지만, 이렇게 계속 모른 척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는 크게 숨을 삼켰다. 그리고 여전히 쓴웃음 짓는 소천룡 회를 바라보았다.
“설마 그 육절이…….”
“왜 아니겠습니까. 만천옹께서 아주 널리 널리 퍼뜨리시는 모양이더군요.”
“이런.”
소명은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난처함도 이렇게 난처할 데가 없었다. 딱히 명성을 바란 적은 없었다. 소림사의 용문제자, 그 하나로 충분하다.
그런데.
육절이라니. 이리 난감할 때가.
“소림의 용문제자라는 이름도 이름이지만, 만천옹이 인정한 고수라는 것이 더욱 크게 작용하였지요.”
“하아, 그 노선배도 참.”
소명은 참다못해서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뜻으로 벌인 일은 아니다. 어디 한번 당해 보라는 심보가 절로 짐작이 갔다.
“아이고, 골치야…….”
소명은 머리를 잡고 고개를 흔들었다.
고개 숙인 소천룡 회는 그런 소명의 모습에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다시금 이는 웃음을 어찌 감추려고 애썼다.
강호의 누구라도 바라마지 않는 위명이다. 갈망한다고 닿을 수 없고, 마다한다고 멀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이 천하를 논하는 고수의 경지였다.
더욱이 소명은 갓 이립을 넘긴 터라, 젊다면 한참 젊은 나이가 아니겠는가.
가장 이른 나이에 천하의 고수로 손꼽힌 검백 또한 이립의 나이에는 그 정도 무명을 이루어내지는 못하였다.
천하의 으뜸가는 검객 중 한 사람으로 평가받았을 뿐이다.
헌데, 소명은 만천옹을 마주하기가 무섭게 오대고수와 대등하다 하여서, 육절의 칭호를 받았으니. 어찌 놀랍지 않을까.
‘어찌 보면 권야 공다운 모습일 수도 있겠군.’
이미 서천 무림에서는 못지않은, 아니 전설이라고까지 일컫는 권야였다.
마주 앉은 소천룡이 그렇게 속으로 감탄하고 있을 때, 소명은 정말 골머리를 앓는 중이었다.
육절, 오대고수라는 이름이 이제는 천하육절이라고 불린다니. 용문제자라는 이름만도 부담이건만. 이건 한술 더 뜬 모양이다.
소명은 이내 마음을 다스리고서 머쓱한 기색의 소천룡 회를 물끄러미 보았다.
“그래, 육절이니 청한다는 뜻입니까?”
“그도 있겠지요.”
“하아…… 언제가 되었든, 천룡의 가주께서 일어나실 터인데.”
“원로들은 그때까지 기다려 줄 리가 없지요. 무엇보다 알릴 수도 없는 일입니다.”
“아아…….”
“가내의 일이라서, 참으로 민망합니다.”
“아아아…….”
소명은 연신 앓는 소리를 쥐어짰다. 말로는 민망하네, 죄스럽네 하지만, 기어코 청할 작정인 모양.
소천룡은 조금도 물러나지 않았다. 소명은 벌린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서, 흔들림 없는 소천룡을 누르듯이 바라보았다.
헝클어진 앞 머리카락이 눈가를 덮고 있었지만, 사이로 안광은 언뜻 드러났다. 참 따가운 눈초리였다. 그는 입매를 비틀었다.
“소천룡도 한 고집 하시는구려.”
“아하하하.”
맥 빠진 목소리, 소명은 결국 두 손을 들었다. 여기서 더 고집만 부리기도 어렵다.
누구 핏줄인지 정말 명확했다.
소명은 거칠게 머리를 긁적거렸다. 이 판국에 귓가에서는 모깃소리처럼 마구 앵앵거리는 소리가 있었다.
‘그렇지, 저놈이 어렸을 적부터 고집이 참 대단했어. 나도 어찌할 수가 없었단 말이지. 그 녀석 참. 조금 융통성이 있어도 좋을 텐데. 뭐, 우리 궁가의 가풍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 허허허.’
‘…….’
하이고, 좋다고 웃는다.
억지로 치켜든 소명의 입꼬리가 바들바들 떨렸다. 이 목소리는 듣는 사람 심정이야 어떻든 혼자 들떠서 마구 떠들었다.
‘참으로 대단하지 않은가. 권야, 권야라. 이야, 나도 감히 이름을 올리지 못한 오대고수의 반열인데. 정말 어지간하군. 그렇지 않나?’
소명은 앞에 앉아 있는 소천룡 회의 민망한 얼굴을 더 볼 수가 없었다. 지금 입을 열면 오만 욕설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그는 두 손으로 얼굴을 덥석 움켜쥐었다.
이게 다 누구 때문에 벌어지는 일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