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ti Demon God RAW novel - Chapter 224
224화. 궁가(宮家)의 풍운(風雲)
날이 밝았다.
소명은 채비를 갖추고서 밖으로 나섰다. 그러자 자리에는 두 당주가 각자 정복을 갖추고서, 소명을 기다렸다.
“권야 공. 모두 기다리고 계십니다.”
“너무 늦었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
소명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서 성큼 나섰다. 좌측으로는 백검당의 백의가, 우측으로는 흑권당의 흑의가 줄지어 따랐다.
소명이 떠난 자리, 닫은 문가가 살짝 열리면서 아함의 백옥처럼 하얀 얼굴이 불쑥 나왔다. 그녀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저기 가는 소명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눈초리에는 불안이 그득했다.
“뭘 그리 걱정하냐.”
문득 방 안에서 위지백이 말했다. 그는 술 취한 기색 하나 없이, 단정한 모습이었다.
“걱정은 무슨…… 그냥 눈을 떼지 못하는 것이지.”
“크흐흐. 아아, 예에, 그러시군요. 산주.”
“피잇!”
아함은 놀리는 소리에 입술을 한껏 삐죽거렸다. 위지백은 실실 웃으면서 애도, 무광도를 덥석 움켜쥐었다.
“자아, 나도 이제 움직여 볼까.”
그는 창문을 소리 없이 열고는 창틀에 발을 올렸다. 막 밖으로 나서려는 순간, 아직도 문가에 서 있는 아함을 향해서 넌지시 한 마디를 건네었다.
“여기 부탁한다.”
“알고 있다니까.”
아함은 빨리 가버리라고, 돌아보지도 않은 채 손을 흔들었다.
“거, 박정도 하여라.”
위지백은 얼굴을 구기며, 잇새로 우물거리고는 휙 몸을 날렸다.
소명은 전날 지나온 대로를 똑바로 걸었다. 천룡의 가인이라고 하는 이들은 모두 나와서 소명의 걸음을 바라보았다. 무수한 눈길에는 선망과 흠모가 솔직했다.
“새로운 천하의 고수라 하여서, 모두의 관심이 대단합니다.”
“하아, 천하의 고수는 무슨. 한참 멀었건만.”
“그래도, 그 만천옹 노사께서 직접 인정하지 않으셨습니까. 천하육절이라니. 그건 정말…… 하하……”
뭐라고 덧붙일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그만큼 놀랍고 대단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걸 인정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네.”
소명은 고개를 흔들고는 입을 딱 닫아버렸다. 힘주어서 입매를 한껏 찌푸렸다. 그러는 사이에 몇 개의 높은 담을 지났다. 그들이 닿은 곳은 세가의 드넓은 궁, 한쪽에 자리한 드넓은 터였다.
군문의 교장이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을 듯했다.
그곳에 단을 마련하여서 올렸고, 오색으로 구분한 무리가 어지럽게 도열해 있었다.
어찌 보면 되는대로 뒤섞인 것처럼 보였지만, 그들이 늘어선 것은 어떤 진세였다. 은은히 일어나는 기세가 족히 수천 평에 이르는 자리를 가득 메우고도 부족하여서, 머리 위로 아지랑이처럼 일어나는 것이 보일 정도였다.
“이것이 천룡……세가인가.”
소명은 다가서면서 중얼거렸다. 가까울수록 따끔거리는 기파는 더욱 강렬했다.
수년 세월에 이르도록 강호 활동이 전혀 없다고 하더니만, 고작해야 한 시기에 지나지 않았을 뿐이다. 전력을 단순히 비교할 수는 없겠으나 천룡, 그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모습을 소명은 보고 있었다.
소명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거렸다.
세상은 천룡세가에 대해서는 채 절반도 알지 못하고 있구나.
이만한 가문이 은인자중할 수 있다는 것도 신기한 일이지만, 그럼에도 세력에 흐트러짐이 없다는 것도 놀라운 일일 터였다.
힘이 모이면 어떤 식으로든 불만이 쌓일 터이고, 힘이 거대하면 거대할수록 균열은 더욱 심각할 것이다. 그러나 천룡세가는 그것을 모두 아우르고 있었다.
장중한 위세를 잠시 지켜보다가, 소명은 문득 입매를 찌푸렸다.
그래, 천룡세가의 대단한 저력은 이제 알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자신은 소림의 용문제자인데. 소명은 그냥 지금 자리가 한없이 불편하기만 할 뿐이었다.
소명은 목 아래를 긁적거렸다.
새로 맞춘 옷깃이 자꾸 목에 닿아서 거슬렸다. 극구 마다했지만, 천룡세가의 위신도 위신이고, 용문제자라는 이름을 좀 생각하라는 강권 앞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나마 타협하여서 색은 쏙 빠진 잿빛의 장삼이었다.
다른 색은 없어도, 이 한 벌의 가치가 상당하다는 것은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소명은 어깨에 앉은 먼지를 한 번 털어내고서 다시 한숨을 삼켰다.
“그만 오르시지요, 권야.”
장대한 교장, 그곳에 오색의 천룡 무인들이 어지럽게 자리했다. 그리고 붉은 융단을 길게 깔았다.
붉은 길은 교장 한복판에 마련한 높은 단 위까지 뻗어 있었다. 그리고 단 아래에서는 두 소천룡이 각자의 예복을 갖추고서 당당하게 서 있었다.
“하아.”
소명은 그 모습을 보기가 무섭게 일단 한숨을 삼켰다. 저기까지 가야만 하는 것인가.
마지못해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흑백양단은 그 뒤에서 멈춰 섰다. 그들의 호위는 여기까지였다.
소명은 발목까지 묻히는 융단의 붉은 털을 밟으면서 걸었다. 좌우에서 자신을 보는 천룡가 무인들의 눈길이 사뭇 뜨거웠다.
그들 개개인은 비록 천룡의 깃발을 높이 세우지는 못하였더라도, 강호도상에서 무수한 실전을 겪은 바 있는 숨은 고수들이다. 그들은 천하의 고수가 어떠한 이름인지 잘 알았다.
그런즉.
이제 육절이라는 반열에 오른 소명의 존재를 다시 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소명은 여기의 주목이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 쏟아지는 시선에는 적의도 있고, 호기심도 있고, 심지어 살기에 가까운 적의를 내비치는 이도 있었다.
어느 쪽이 되었든 소명은 속이 불편했다. 무가련, 그리고 천룡세가와는 그닥 얽히고 싶지 않은 것이 솔직한 마음이었다.
“아,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단 말이야…….”
‘응? 전생은 또 무슨 전생 타령이니.’
혼잣말을 읊조리기가 무섭게 다시 치고 들어온다. 소명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일단 표정을 관리하고서, 못들은 척 걸어 나아갔다.
그리고 두 소천룡의 뒤에 섰다.
“오시었습니까, 권야 공.”
“공.”
환대하는 소천룡 회였다. 과는 어색한 얼굴이래도, 의식적으로 고개를 까딱 숙였다.
“간밤에 자리는 어떠하셨는지.”
“너무 편해서 일어나기가 싫은 정도였소.”
꽤 뼈있는 말이다. 이때만큼은 누구랄 것도 없어서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굳이 책 잡자고 하는 말은 아니다.
소명은 곧 주변을 차분히 둘러보았다. 단으로 향하는 쭉 뻗은 길, 좌우로 정렬한 이들의 모습이 새삼스럽게 보였다.
“이거 마냥 환영의 의미만은 아닌 듯하오만.”
“하, 그것이…….”
“이제부터 시작이오. 권야.”
회가 주저하자, 과가 불쑥 끼어들었다. 되묻는 소명의 목소리가 잠시 올라갔다.
“이제부터?”
“하하…….”
회는 멋쩍은 듯이 가만히 웃고는 괜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는 사이에 단 위로 올라섰다.
사각의 단 위에는 여러 노인이 묵묵히 자리하고 있었다. 연배를 대체 짐작하기 어려운 모습들이었다. 그들이 가주가 부재인 지금에 천룡세가를 이끌어가는 천룡가회의 장로들이었다.
장로들은 누구랄 것 없이 신선의 풍모를 지니고 있었다.
하늘 밖에 있는 사람처럼 고고하였다. 백색의 장삼을 예복으로 걸쳤다. 옷깃에 검은 용문을 작게 새겨 넣었다. 그들은 허허, 가만한 웃음을 흘리면서 올라선 두 소천룡을 반겼다.
겉으로 보기에는 참으로 공평무사한 모습이었다.
소명은 한 발 뒤에서 그들의 면면을 둘러보았다. 당연하게도 모두 초면이었지만, 싫든 좋든, 장로들의 성명내력을 고스란히 알 수밖에 없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천룡대야의 입이 다시 떠들어댔기 때문이었다.
‘저기 저 노친네가 백기장로라고 하는 노인네이지. 젊은 시절부터 그리 나를 못마땅하게 여겼단 말이야. 선대에 혼원류의 구결 중 일부를 전수받아서 그 내공이…….’
아아, 세존이시여.
소명은 잠시 풀리려는 눈동자를 겨우 다잡았다. 천룡대야는 정말 날을 잡은 사람처럼 한 번에 쏟아냈다. 조금도 말을 늦추지 않았다.
차라리 흘려들으면 좋겠지만, 바로 뇌리로 파고드는 심어경이다.
심어를 흘려들으려면, 아예 삼매 정도에 들어서 외부일체를 끊어버리는 수밖에 없다.
그럴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니. 그저 시달릴 수밖에.
소명이 그리 있을 적에, 두 소천룡은 뭇 장로들과 인사를 나누고서, 굳은 낯으로 전면을 바라보았다.
교장을 에워싼 세가 내외의 여러 고수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천룡의 정예라 할 자들이다. 그들은 따로 기세를 발하지 않더라도, 이미 장중한 기파를 흩뿌렸다.
외유를 마치고서 이제 관문의 시련을 앞둔 소천룡을 향한 그들의 예우인 셈이었다.
둘 중 누가 되었든, 장차 아울러야 할 자들이다. 그러나 당장은 장대한 시련이고 관문이었다.
그것을 알았기에, 소명을 제외하고서 두 사람은 각자 복잡한 심경이었다.
“후우…….”
내내 침묵하고 있던 회의 입에서 한숨이 흘렀다.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딱히 가주의 자리에 욕심이 없는 그였다.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는지. 그렇다고 여기까지 온 마당에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것은 가문 원로의 권위에 정면으로 반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회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러다가는 한숨이 습관이 되겠다.
반면, 과는 씨익 웃었다. 자신만만한 모습이었다.
‘저 노인네가 저리 사람 좋게 생겼어도, 꽤 음흉한 노인네란 말이지. 이십 년 전에 뒤로 주머니 차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모르는 척해 주느라. 내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나? 응? 아니 대꾸가 없군. 하기야 그래, 자네도 얼굴 마주하기가 여간 고역이 아니겠지.’
‘…….’
소명은 머리가 어찔했다. 그는 눈을 끔뻑이다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말의 홍수에 잠깐 정신이 나갈 뻔했다.
누구에게 하소연할 수도 없는 일이다. 소명은 그저 폐부 깊숙한 곳에서 왈칵 치솟는 한숨을 꾹 어금니로 끊어냈다.
“답답하구만.”
‘뭐가 왜 답답하다는 게냐? 아니, 가만. 저쪽, 저쪽을 좀 보자꾸나. 와하! 저 늙은이 아직도 살아 있어?’
소명은 그냥 눈을 감아버렸다.
솔직하고, 또 솔직한 심정으로 말하자면 천룡대야는 정말 들러붙은 잡귀처럼 귀찮을 뿐이었지만, 그래도 그가 하는 말이 영 쓸모없는 것은 아니었다.
뭔가 목적이 있다기보다는 오래도록 입을 닫고 있었다는 것 하나 때문에 정신없이 입을 털었을 뿐이나, 그 한마디, 한마디로, 소명은 새삼 자신의 처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무시하지는 못하지만, 달갑지 않은 손님이다.
소명은 후우, 한숨을 살짝 흘렸다.
눈가를 가린 머리카락이 잠시 펄럭였다. 그래도 잡귀 같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음, 뭔가 불순한 기분이 드는구나.’
‘…….’
소명의 심경 변화를 어찌 느꼈는지. 천룡대야가 한마디를 툭 던졌다.
“이 정도로 회복하였으면, 사실은 지금이라도 당장 떨쳐 일어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으, 응?’
슬쩍 감정 실린 한마디에 목소리가 당황했다. 천룡대야는 곧 헛기침을 흘리면서 앓아댔다.
‘아, 아이고오. 아이고. 공력이 과하였던가. 갑자기 기력이 딸리네. 기력이…… 크흐흠…….’
“정말 이러깁니까. 가주 자리를 이대로 넘기기라도 하겠다는 거예요?”
소명은 복화술인 양, 이를 악물고서 한껏 우물거렸다.
‘크, 크흠! 뭐, 그렇다기보다는 저 녀석들이 크게 성장할 기회이기도 하니 그렇지. 이공천역(異空天役)의 관문은 굳이 천룡가주가 되는 것이 아니더라도 기연이라 할 만하지.’
“기연? 그런 곳에 외인인 저는 또 왜?”
소명은 퍼뜩 의아했다. 기연 소리를 들을 정도의 관문이라면 마땅히 아끼는 것이 사람 마음이 아닌가.
그러자 천룡대야의 웃음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뭐, 무사히 돌파한다면 그렇다는 말이지. 으하하하. 뭐, 자네 정도라면 고생은 하겠지만, 딱히 도움은 안 될 걸세.’
‘이런…….’
그럼 헛고생이라는 말과 뭐가 다른가. 천룡대야는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새삼 진지하여서 말했다.
‘오해하지 말게. 자네의 경지가 실로 뛰어나서 그러는 것이니. 아무리 진한 소금물이라도 대해에 뿌려 보았자 무슨 흔적이나 남겠는가.’
“대해는 무슨…….”
위로라고 하는 말이냐, 약 올리는 말이냐.
소명은 일그러지려는 입매를 힘주어서 다잡았다.
‘조심하거라. 위험한 늙은이다.’
갑자기 경고하는 말이다. 소명은 고개를 들었다. 천룡장로 중에서 특히 삼성이라고 불리는 대장로 세 사람이 소명에게 다가왔다.
“허허허, 권야 공.”
“본가의 청에 이렇게 응해 주시어서, 참으로 고맙소.”
“생각보다 훨씬 젊으시군.”
세 노인은 입가에는 고요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얼굴에서 빛을 발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환하였다.
그들이 다가서는 모습에 혼자 들떠서 한참 떠들던 천룡대야도 입을 다물었다.
소명은 다가서는 세 노인을 마주하며 몸가짐을 바르게 했다.
“허허, 천하의 무종. 소림의 용문제자께서 찾아주셨으니. 이 또한 본가의 크나큰 홍복이오.”
“우리 세 늙은이가 비록 자격은 되지 않으나, 가주의 부재로 대신하여 감사의 인사를 올리오.”
“천룡대업은 곧 천하안녕, 용문제자께서 넓은 마음으로 본가의 행사에 참여하여 주시니. 이 또한 천하의 큰 복이 아닐까 싶소.”
세 노인은 번갈아 가면서 한마디씩 하였다. 말씀들 참 아름답기도 하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