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ti Demon God RAW novel - Chapter 225
225화. 궁가(宮家)의 풍운(風雲)
가문의 일에 천하안녕 운운이라니. 다른 곳이라면 몰라도, 천룡세가라면 그런 소리를 할 만하지 않은가.
소명은 떨떠름한 속내와 달리, 진지한 얼굴로 두 손을 맞잡았다.
“부족하지만, 가문의 큰일에 외인에 범부에 불과한 저를 청하신 것은 연유가 있겠지요. 험한 일이라 하여도 마다치 않으리다.”
“허, 허허. 감사한 말씀이시오. 그러나 범부 운운은 겸손이 과하시오. 이제야 천하육절이라 하는 권야이시지 않으시오.”
“…….”
심히 낯부끄러울 따름이다.
소명의 진지한 모습이 마음에 드는 모양인지, 삼성 중 가운데에 있는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처럼 발그레한 얼굴에 백설처럼 하얀 수염을 탐스럽게 기르고 있었다. 외견은 참으로 훌륭하였지만, 그에 대해 평하는 목소리는 사뭇 신랄했다.
‘저 노인네가 대성이라는 운요(雲曜)장로, 제일 음흉한 늙은이이니, 특히 경계해야 하네.’
“아, 네. 네.”
소명은 공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좌우로는 이성, 삼성이라고 하지만, 쳇 성은 무슨. 속내가 좁쌀보다도 작단 말이야. 일 좀 해 보려고 하면, 천룡세가의 진의를 알아야 한다나, 어쩐다나 하면서 사사건건 트집을 잡고 말이야.’
이래저래 사연은 있는 모양이지만, 눈앞의 세 노인에게 감정이 적지 않았던 모양이다. 다른 장로들 험담하는 것보다 한층 뾰족한 목소리였다.
소명은 어색한 입꼬리를 바들바들 떨었다.
뭔가를 시작도 하기 전에 크게 지친 듯하다. 그러나 어깨를 늘어뜨린 것은 찰나에 불과했다.
“그래, 뭐가 되었든. 얼른 끝냅시다.”
소명은 잇새로 나직이 구시렁거렸다.
천룡궁가, 그곳의 주인을 정하는 마지막 의식을 이제 시작한다. 이공천역의 팔관이라, 거창한 이름이다 싶었다.
삼성의 가운데로, 대성 운요장로가 나섰다. 굵은 향을 사르고는 마련한 제단에 올렸다. 일제히 하얀 소매를 펄럭이면서 부복했다.
의식은 시작되었다.
천지에 고하고, 궁가의 선조영령께 고하는 것으로 시작을 알렸다.
이공천역의 팔관에 드는데, 소명의 역할은 조력과 심사였다. 두 소천룡과 함께 관문을 돌파하면서 두 사람을 평가해 달라는 것이다.
소림사라는 이름과 더불어서 천하육절이라는 이름이 있으니. 그의 평가에 크게 반발할 수 없다는 것도 한 이유였다.
소명은 어깨가 뻣뻣했다. 그 사이, 장중한 예식이 끝나갔다. 그리고 관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오호…….”
소명은 문득 묘한 탄성을 흘렸다.
‘저것이 시작이다. 저 너머가 이공천역이지.’
천룡대야가 웃음기를 싹 거두고서, 짐짓 묵직하게 말했다. 소명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보았다. 단 너머, 붉은 길 끝으로 홀연 안개가 고였고, 그 너머로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허공으로 웅장한 문루가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저것은 선술 혹은 기문둔갑이라 불리는, 그야말로 이능의 영역이다.
추호도 가볍게 여기지 않았지만, 소명은 저 너머에서 있을 일이 생각보다 더욱 험난하겠다는 것을 예감했다.
단 위로 돌풍이 세차게 일었다. 그리고 운요 장로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흑문이 현현하였다. 드디어 오늘 비어 있는 천룡의 좌에 주인을 가를 것이다. 내외문의 제자들이여, 개진하라!”
“개진!”
장로의 창노한 외침을 쫓아서, 수백이 한목소리로 크게 외쳤다. 그리고 에워싼 수백의 무인이 본격적으로 기세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좌우로 번갈아 가면서 힘껏 발을 굴렀다.
쿠웅! 쿠웅!
땅이 들썩거리고, 유형화된 기파가 거세게 요동쳤다. 이것으로 진세가 제대로 발동한 것이다.
단 너머로 쭉 뻗은 붉은 길은 여전했다. 그리고 길 끝에는 정문에 못지않은 문루가 우뚝 섰다. 온전히 모습을 드러낸 환상의 문루는 딱 보기에도 그리 길한 모습이 아니었다.
온통 검은 칠을 하였고, 흉한 귀면이 좌우에 큼직하게 달려 있었다.
저 문이 가주의 시험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이공천역으로 드는 입구였다.
그래, 귀면흑문은 그렇다고 하지만.
소명은 문득 입매를 찌푸렸다. 단 아래에 늘어선 천룡 무인들이 일으키는 저 진세는 또 무언가.
보는 소명의 기색이 영 편치 않다.
“포천……진이라.”
“박룡포천진이오.”
쓸데없는 친절이다. 옆에서 거드는 소천룡 과에게 뭐라고 하지는 못하고, 힘주어서 어금니만 악물었다.
본격적으로 일어나는 진세의 기파가 쩌르르 울렸다.
땅을 뒤흔들고, 먹구름을 불러오는 진세는 갈수록 위력을 더해 갔다.
운요장로는 곧 두 소천룡에게 다가섰다.
“자네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모두 가문의 미래일세. 그리고 천하의 미래라고도 할 수 있지. 몸 성히 돌아오시게.”
“대장로.”
“대성 어른.”
둘은 흐린 미소를 머금고서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곧 제단을 지나쳐 아래로 나섰다. 소명도 조용히 따라 나서려는 데, 운요장로가 다가섰다.
“소명 공, 잘 부탁드리겠소.”
“예, 알겠습니다. 어르신.”
“허허.”
운요장로는 마치 친조부가 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소명의 어깨를 가만히 다독였다. 소명은 마냥 어색한 기색이었다. 그리고 단을 내려갔다.
한 계단, 두 계단.
내려가면서, 소명은 이를 드러냈다.
‘저 늙은이가…….’
운요장로 또한 소명을 스쳐 지나는 순간에 눈빛을 달리했다. 온기 하나 없어, 냉엄한 눈길이 내려가는 소명의 뒷모습을 꿰뚫을 듯했다.
두 소천룡은 굳은 얼굴로 붉은 융단을 밟고 내려섰다. 그리고 소명은 한 걸음 뒤에서 걸었다.
포천진을 가로질러서, 흑문으로 향한다.
힘껏 걸었지만, 한 걸음마다 발목이 푹푹 파고들었다. 그만큼 진세가 짓누르는 무게가 수천 근이었다.
쿵! 쿵! 쿵!
수백이 동시에 울려대는 발 구름은 그 자체로 위압적인데, 막대한 공력이 실려서 심신을 뒤흔들었다. 동시에 일대를 장악한 진세의 기파가 가히 일만 근의 무게로 짓눌렀다.
‘어떠냐?’
“뭐가, 어때요?”
짓누르는 진세는 대단하였지만, 그저 불편한 정도일 뿐이었다. 소명은 딱히 흔들림은 없었다.
‘흐음, 우리 아이들이 어떠하냐 묻는 게 아니더냐.’
“뭐, 제법이긴 하네요.”
‘제법이라? 흐음, 딱 그 정도란 말이지.’
얼굴은 볼 수가 없었지만, 목소리에서 감정은 솔직하게 느껴졌다. 약간의 실망이었고, 약간의 진노였다. 소명은 헛기침 한 번 하고는 넌지시 물었다.
“그건 그렇고. 어찌하실 요량이오?”
‘뭐가?’
“뭐기는! 크, 크흠.”
소명은 순간 욱했다가, 급히 주변 눈치를 살폈다. 또 무슨 딴청인지.
천룡대야는 숨죽여 웃었다.
‘흐, 흐흐흐. 걱정하지 마시게나. 내 어떻게든 손을 쓸 터인즉. 시간이나 잘 벌어주게.’
“에이…… 알았어요.”
소명은 거칠게 머리를 긁적거렸다. 달리 답할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주춤했다. 주변의 눈길이 사뭇 기이한 것을 한 박자 늦게 깨달았다.
위압적으로 짓누르던 여러 눈길이 그저 동그랗게 변하여서는 소명을 보는 눈초리에 당혹감이 역력했다. 몇은 발 구름마저 잊고서, 엉거주춤한 꼴로 소명을 빤히 보았다.
용을 결박하여서 가두어 버린다는 박룡포천이다. 그만한 진세의 한복판에서, 소명은 힘겹기는커녕, 태평하기 이를 데가 없다.
이 무슨 황망한 상황이란 말인가.
소명은 그제야 자신이 너무 편히 움직였음을 깨닫고서, 머쓱하게 손을 내렸다.
당황하기는 앞서 걷던 두 소천룡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각기 최고조로 공력을 끌어올려서 진세에 항거하는 차였다. 각자 낯빛이 좋지 않았고, 굵은 땀방울이 맺혀 있다. 그런데 소명의 모습은 대체.
그들의 눈초리가 더욱 심각해질 판이다. 소명은 멋쩍음을 감추고 서둘러 나섰다.
“크흠, 자자, 가십시다. 팔관? 아니, 구관이라고 하시었나? 어쨌든 가봅시다.”
“아, 아아. 예. 가야지요. 가야지요.”
회와 과는 눈을 끔뻑거리면서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하간에 하나는 분명했다.
이대로 일관은 통과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다고 그것을 곧이곧대로 말하기에는, 두 소천룡은 같이 속내가 불편하여서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포천진의 진세가 머리 위에서 요동친다. 둘은 각자 혼원과 무극의 공력으로 짓누르는 진세에 대항하던 차였다.
“허허……”
운요장로는 탐스러운 하얀 수염을 나긋나긋한 손길로 쓸어내렸다. 그는 붉은 길을 따라서 나아가는 세 젊은이의 모습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천룡좌로 향하는 길.
이공천역의 팔관은 분명 대단하다. 그러나 귀면흑문의 너머는 실로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이를 보는 운요장로의 눈길이 한층 가늘어졌다.
그는 젊은 날의 어느 때를 그리는 듯했다.
감상은 찰나였다. 운요장로는 눈가에 시퍼런 광망을 발하였다. 흡사 귀화처럼 파랗게 일렁였다. 굳이 살기를 숨기지 않았다. 그러나 눈가와는 달리 입가에는 인자한 웃음이 여전히 걸려 있었다.
“그래도 재간이 있구먼. 천하육절 운운하는 것이 마냥 허튼소리는 아니었던 모양이오. 포천의 진세가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듯하구려.”
노인은 살짝 고개를 돌렸다. 그의 좌우에 있던 다른 삼성의 두 장로는 그만 어색하여서 주춤 고개를 숙였다.
같은 삼성의 반열이었지만, 무슨 영문인지 크게 주눅이 들어 있었다.
“아니면…… 자네들이 내 뜻을 잘 이해하지 못했든가 말이지.”
“그, 그럴 리가요. 단단히 당부를 해 두었습니다.”
“아무렴요, 아무렴요. 공력을 아끼지 말라고 거듭, 거듭 당부까지 하였습니다.”
박룡포천의 진세는 상대를 짓눌렀다. 내외의 고수가 한뜻으로 십성 공력을 발휘하면, 설사 동두철신(銅頭鐵身)의 몸이라도 한순간에 무너뜨린다.
처참하게 짓눌러 본래의 모습조차 유지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혼원과 무극류가 완성경에 이른 두 소천룡이라면 포천진의 흐름을 어느 정도 파악하느냐에 따라서, 어느 정도의 내상을 각오하고 버티어낼 수 있겠지만, 그도 아닌 자가 저리 태연한 걸음으로 진세를 받아내고 있다니.
경지가 남다름을 말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허허, 그렇다면. 권야라는 자가 생각보다 더한 거물이란 소리로군. 달리 육절이 아닌 게야.”
운요장로는 여전히 웃음을 머금었다. 그러나 아래를 보는 눈초리는 독사처럼 요악(妖惡)스럽게 번뜩였다. 그 눈초리는 가문의 미래를 보는 눈이 아니었다.
오히려 철천지원수를 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싸늘했다. 그 와중에 귀면흑문이 서서히 열렸다. 너머에 짙은 아지랑이가 맺힌 것처럼 이지러지는 광경이 서서히 드러났다.
어디로 향하는 것인지 모를 일이다.
두 소천룡은 마음을 다잡고서, 힘껏 앞으로 나섰다. 신중하고 차분한 걸음의 회였고, 과감하고 큰 걸음의 과였다.
둘은 높은 문지방을 넘기가 무섭게 모습을 감추었다.
소명은 잠시 머뭇거렸다.
“아, 정말.”
‘왜 그러느냐?’
천룡대야는 바로 들어서지는 않는 소명의 모습이 의아했다.
소명은 고개를 한 번 흔들었다. 그리고 단 위를 곁눈질로 살짝 살폈다.
삼성을 비롯한 천룡가회의 뭇 장로들이 앞으로 모여서 이쪽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 일단 차분한 척하는 눈빛이었지만, 하나같이 다른 속내를 단단하게도 꿍쳐놓고 있었다.
소명은 차갑게 조소했다.
“뒤통수가 싸늘하니, 내가 지금 어디에 와 있는 건지 모르겠군.”
소명은 그리고 흑문을 넘어섰다. 그 또한 일그러진 공간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흑문은 절로 닫혀들었다.
쿠웅……!
천근의 문이 닫히면서 울리는 묵직한 소리가 교장을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