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ti Demon God RAW novel - Chapter 23
23화. 거짓 잔치의 끝
“그러실 필요까지야 있겠습니까?”
“아니오, 아닙니다. 이제야 내 주제를 알았소이다. 알량한 재간을 믿고 내가 너무 큰물을 바랬던 것이오.”
의기소침한 정도가 아니었다. 그는 자괴감을 느끼고 있었다. 아무리 무가련에서 보내온 무인들이라지만, 그들과 소명이 겨루는 사이 주먹을 내지르기는커녕 주먹을 쥐지도 못한 자신이 한심한 것이다.
이래서야 무슨 명목으로 무관의 주인이라 자처할 수 있단 말인가. 황태정은 한순간 만에 수년은 흘려보낸 듯 보였다.
소명은 지친 그를 두고 고개를 돌렸다. 황산오웅의 다섯 사람이 대자로 뻗어 있었다. 다가가 그들을 깨웠다.
“괜찮으십니까?”
“으음.”
묻는 목소리에 그들은 그저 신음성만 흘렸다. 쉽게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한참을 멍한 채로 있던 도벽성이 먼저 고개를 들었다. 아직 충격의 여파가 가시지 않아 초점이 흔들리는 눈이었다.
“이, 이런 일이 있나. 도대체 당신은 누구요?”
“말씀드렸다시피…….”
“상화촌 어쩌고 할 것이면 관두시오.”
소명은 셋째 단봉철우의 한 소리에 머쓱하여 입을 다물었다.
“이런 일이 있나. 우리 황산오웅이 천하에 이름난 고수는 아니라 하여도 이렇게 순식간에 당한 적은 없었는데.”
“하아…….”
도벽성의 자조 섞인 한탄에 다른 동생들의 입에서 한숨이 절로 튀어나왔다. 맥 빠진 모습이었지만 그들이 정신 차릴 때까지 기다릴 생각은 없었다.
“무가련 소속이시라 들었습니다.”
“응? 황가, 그 위인이 입을 놀린 게요?”
“황 관주를 탓하지는 말아 주십시오.”
“흐음.”
도벽성을 눈살을 찌푸렸다가 소명의 말에 곧 감정을 누그러뜨렸다. 패장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는 고개를 숙였다.
“그래, 이렇게 깨운 것을 보면 무슨 용건이 있는 듯한데.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이오?”
“본래 제가 바랐던 것은 황가무관의 사과였습니다만…… 이야기를 듣고 보니 일이 심상치가 않더군요.”
“음.”
도벽성과 황산오웅 또한 강호의 오랜 경험을 쌓은 자들이었다. 소명의 말 뒤에 숨은 뜻을 짐작 못할 리 없었다.
“당신이 바라는 것은, 그럼…….”
“예, 무가련이 호가무관에 신경을 쓰지 않았으면 합니다.”
도벽성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다른 형제들을 돌아보았다. 얼굴을 구기기는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정말로 호가무관 같은 볼품없는 시골 무관 때문에 나섰단 말인가.
“하아…….”
땅이 꺼져라 한숨을 깊게 내뱉었다. 어차피 이 지역에 관한 것은 그들 다섯 형제가 담당하고 있으니 크게 문제될 것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간단한 일은 또 아니었다. 다섯 형제는 복잡한 얼굴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어려우시겠습니까?”
“아니, 그것은…….”
도벽성은 주저했다.
“아무래도 말미를 주셔야겠소. 당장 어떤 답을 하기가 어렵구려. 황 관주가 손을 털어버렸으니…….”
일 년 가까이 공을 들인 황가무관이었다. 그런 곳이 한순간에 쓸려나간 모양이니.
그들의 허탈한 모습에 소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또한 사정이 있을 터. 무리하게 몰아붙일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짚고 넘어갈 일은 분명히 짚어야 한다.
“그럼 한 가지만 묻지요.”
고개 든 황산오웅에게 소명은 싱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호 관주님께 독수를 쓴 자는 누구입니까?”
오싹!
황산오웅은 식은땀을 흘렸다.
도벽성은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런 약한 말은 하고 싶지 않지만, 그때 호가무관의 일에 나서지 않았던 것이 천만다행이었구나.”
“대, 대형.”
* * *
소명은 호가무관의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해는 중천에 떴다. 황산오웅들과 드잡이한 것이 제법 시간이 흐른 것이다.
몇몇 제자들이 안쪽에서 수련하는 모양이다. 기합 소리가 들렸다. 안으로 들어가자 어제 본 다른 제자들이 힘써 권법을 연마하고 있었다.
그들은 소명의 모습에 흘깃 눈길을 주었지만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소명의 눈이 아득해졌다. 오래전, 그와 친구들이 무술을 수련한답시고 분주하던 모습이 눈앞에서 아련했다.
많은 사람이 있었다. 근방의 청년들은 모두 이곳에서 무술을 배웠다. 그런데 이제는 을씨년스레 변하다니. 입가에 절로 씁쓸한 미소가 맺혔다. 세월이 그만큼 흐른 것이다.
소명은 더 지켜보기가 두려워 몸을 돌렸다. 자리를 벗어나려는데 문소리가 들렸다. 호청연이 나오는 참이었다. 어디 먼 길을 가려는 듯 옷을 챙겨 입은 모습이었다. 그녀는 길을 나서려다 소명의 모습을 보고는 뾰족하게 소리를 높였다.
“뭐야! 어디 있다가 이제 온 거에요?”
“지, 집에.”
“집? 불탄 자리밖에 없는데 집은 무슨 집.”
“하하.”
호청연이 쏘아붙이는 말에 소명은 어색하게 웃었다. 하기야 맞는 말이다. 불탄 자리밖에 남지 않았다.
“멀뚱히 있지 말고 들어가서 아버지께 인사나 드려요. 아침부터 얼마나 찾으신 줄 알아요!”
“아, 그, 그래.”
그리고 호청연은 가던 걸음을 재촉했다. 소명은 급히 물었다.
“어디를 가는…….”
“약방이요!”
“가까운 약방이면…….”
“흥! 내가 더 잘 알거든요!”
외치고는 정문을 나서는 모습에 소명은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열린 문 사이로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호청연은 씩씩거리며 걸었다. 그녀는 소명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니, 소명을 거두려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니, 지금이 식솔을 늘릴 때냐고. 하나라도 입을 줄여야 할 판국에.”
툴툴거리던 그녀는 문득 멈춰서 홱 고개를 돌렸다. 수개월 동안 관리하지 못해 부쩍 허름해진 무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이 또 못마땅해서 눈살을 찌푸렸다.
“쳇!”
이는 바람이 차가워 옷매무새를 여미며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해지기 전에 약방을 다녀오려면 서둘러야 했다.
호 관주의 방 앞에서 소명은 잠시 머뭇거렸다. 안쪽에서 마른기침 소리가 쉬이 끊이지를 않았다.
“쿨럭…… 소명이냐?”
“예, 관주님.”
“들어오너라.”
문을 열고 들어서니 전날보다 한층 얼굴이 핼쑥해진 호 관주를 볼 수 있었다.
“흐흠, 못난 모습을 보였구나.”
잔기침을 삼키며 호 관주는 웃어 보였다. 마주 앉은 소명은 그저 어색한 웃음만 보였다. 그리고 조심스레 물었다.
“변고를 당하셨다 들었습니다.”
“하하, 들은 게냐? 하기야…… 감추려야 감춰질 만한 일은 아니지.”
그는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식은 찻물로 마른 입술을 축이고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그것이 어디 변고라 할 일이더냐. 비록 변두리 무관이라지만 나 역시 강호 중의 인물이다. 겨루다 몸을 상하는 것은 언제든 있을 수 있는 일이지. 쿨룩, 쿨룩.”
애써 담담한 호 관주의 말에 소명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강호…… 입니까.”
“너는 어떠하냐? 십여 년 동안 어디서 무얼 한 게야? 많이들 너를 찾았다.”
“저는 그러니까, 이곳저곳을 떠돌았습니다.”
“이곳저곳이라면?”
“주로 변방을 떠돌았습니다. 서역으로 가는 상단의 일을 도왔거든요.”
“서역? 그건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일이구나.”
뜻밖의 말에 호 관주는 해연히 놀랐다. 서역이라니.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명은 지나온 수 년여 세월의 이야기보따리를 하나하나 풀어놓았다.
변방의 모래바람에 고생한 이야기나, 멀리 신기한 문물에 대한 이야기들이었다. 호 관주는 그의 경험담에 귀를 기울이며 때로는 맞장구를 쳤다.
흥겨운 모습이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가는 줄을 몰랐다. 어느 틈엔가 어둠이 내려, 방 안에 불을 밝혔다.
호 관주의 주름진 눈에 깊은 회한이 어렸다.
“힘들었겠구나. 많이 힘들었겠어.”
“아, 아닙니다.”
그는 온화한 미소를 그리며 소명의 투박한 손을 잡았다.
굳은살과 상처로 가득한 거친 손이다. 지나온 세월이 결코 평탄치 않았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일까. 애써 밝은 이야기만을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그가 기억하는 열 서넛 어린 시절의 모습을 어디서 찾아볼 수 있을까. 헝클어진 머리카락 아래로 보이는 검게 탄 얼굴에서 노인은 씁쓸함을 감출 수 없었다.
호 관주는 새삼 세월의 무상함을 절절하게 느꼈다.
“이제 돌아온 것이더냐?”
“그건…….”
호 관주의 주름진 눈가를 마주한 소명은 잠시 머뭇했다.
“왜 그러느냐? 다시 떠날 생각이더냐?”
“은인 되시는 분의 가족을 찾아가보려 합니다.”
“은인이라.”
호 관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문득 흔들리는 눈으로 소명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불안함이었다.
‘설마하니, 이 아이가 강호의 은원에 휩쓸리는 것은 아니겠지?’
호 관주는 애써 말문을 돌렸다.
“그, 그보다, 청연이 이 녀석이 많이 늦는구나. 보통 이때쯤이면 돌아오고도 남았을 터인데.”
“제가 나가보겠습니다.”
“아니, 그럴 것까지야.”
만류하는 호 관주에게 어색한 웃음을 보이고는 자리에서 물러났다. 생각해 보면 상당히 늦은 시각이기도 했다. 오전에 길을 나선 아이가 해가 저물도록 돌아오지 않다니.
소명은 천천히 걷다가 상화촌 바깥까지 이르렀다. 한참을 멀리까지 나왔지만 호청연은 기척도 보이지 않았다.
“이상한데.”
길이 엇갈렸을 리는 없었다. 상화촌에 드나드는 길은 여기뿐이니.
멀리까지 내다보던 소명은 돌연 눈을 치떴다. 먼 곳에 하얀 것이 바닥에 떨어져 있다. 서둘러 확인하니 그것은 한 포의 약재였다.
소명의 얼굴이 일순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그는 약재를 손에 들고 몸을 일으켰다. 동공 깊숙한 곳에서 푸른 안광이 번뜩였다. 내린 어둠을 꿰뚫을 듯했다.
그는 호청연의 흔적을 찾기 시작했다. 깊은 어둠도 불을 켠 소명의 눈을 방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시간이 얼마 흐르기도 전에 흔적을 찾아냈다.
네 사람의 흔적이었다. 한 명은 멀리서 오고 있었고, 다른 셋은 한곳에서 오래 머물러 있었다. 그 한 명은 말할 것도 없이 호청연이다.
흔적을 통해서 소명은 벌어진 일을 얼추 짐작했다.
상화촌으로 돌아오던 호청연이 문득 이곳에서 쓰러졌다. 어떤 암수에 당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혼절한 호청연을 업고 이동했다. 그들이 향한 방향은.
소명은 고개를 들었다. 파악함과 동시에 그는 지체하지 않고 앞으로 뛰었다.
흔적을 찾고, 상황을 파악하며, 이내 뒤를 쫓는 그의 모습은 이런 일에 크게 익숙한 듯했다.
흔적이 안내한 곳은 상화촌에서 멀지 않은 야산이었다. 검은 산등성이 한 구석에서 불빛이 보였다. 다가가니 왁자하게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세 사내가 불가에 둘러앉아 술을 마시며 떠들었다. 그리고 그들 뒤에 호청연이 있었다.
그녀는 결박된 채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그러나 그뿐, 몹쓸 짓은 당하지 않았다. 안위를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소명은 눈을 감고 두근두근 뛰는 가슴을 가만히 눌렀다. 심장이 격하게 뛰고 있었다. 급하게 움직였기 때문은 아니었다.
솟구친 분기를 누르며 습관처럼 일문(一文)의 구결을 되뇌었다. 뛰던 심장은 가라앉고, 달았던 피는 식었다. 그리고 소명은 눈을 다시 떴다.
깊이 가라앉은 눈동자는 불빛을 받아 붉게 물들었다.
불가에 앉아 있는 셋 중 두 사람은 아무것도 모른 채 음담패설을 내뱉으며 웃고 떠들었다. 다른 한 사내는 자리한 채 앉아 있을 뿐, 눈을 감고 일절 말이 없었다.
두 사내는 웃고 떠들면서도 눈길이 호청연에게로 향했다. 음심에 몸이 달아오른 것이다. 그렇지만 앞에서 말 없는 사내의 눈치 때문에 아무것도 못 하고 있었다. 그저 바짝 말라가는 입안을 술로 적실 뿐이었다.
일부러 더욱 왁자하게 떠들던 둘은 문득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서로 눈짓으로 뜻을 주고받았다.
“헤, 헤헤. 저기 오 대형.”
“뭐냐?”
한참 조심하는 목소리에 사내는 눈을 감은 채 대꾸했다.
“저기, 저 계집 말입니다.”
“…….”
사내는 그제야 눈을 떴다. 그런데 드러난 그의 눈동자는 어딘지 기이했다. 그것은 마치 온기가 없는 뱀눈을 마주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가 눈동자를 돌리자, 두 사내는 움찔하고 어깨를 떨었다.
“왜, 간만에 계집의 냄새를 맡으니 몸이 달더냐?”
“헤, 헤헤.”
사내의 눈동자를 마주하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웃음기 섞인 물음에 둘은 어색하게 마주 웃어 보였다.
사내, 오관화는 제 눈앞에서 어색하게 웃고 있는 두 놈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두 놈은 개봉 뒷골목에서 행세하던 주먹들로 그 바닥에서는 쌍흉(雙凶)이라고 불리던 놈들이다. 재간이야 어떻든 제법 눈치가 빠르고 수완이 있어 몇 개월간 수족으로 부리던 참이었다.
쌍흉을 향한 오관화의 뱀눈이 새삼 스산해졌다. 그 눈길에 둘은 크게 움찔했다. 두려워하는 그 모습에 오관화의 입가에 싸늘한 조소가 머물렀다.
‘쳇, 쓰레기 같은 놈들……. 이런 놈들이나 부리고 앉았으니.’
그렇지 않아도 무관의 뒤나 관리하는 지금 자신의 처지가 못마땅하던 오관화였다.
그는 흘깃 기절한 호청연의 얼굴을 보았다.
‘기껏해야 작은 무관의 계집 주제에 꽤 괜찮게 생기기는 했군.’
두 사내가 조마조마한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으니. 오관화는 작은 변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시끄러운 건 질색이다. 할 거면 조용하게 처리해.”
“헤, 헤헤. 예, 알겠습니다!”
오관화의 허락이 떨어지자 둘의 입이 귀까지 걸렸다. 바지춤을 움켜쥔 채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나는 모습에 오관화는 피식 웃었다.
그때였다.
“그 말 하나로 너희 놈들은 살려 보낼 수 없겠다.”
고저 없는 목소리가 스산히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