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ti Demon God RAW novel - Chapter 245
245화. 사천련(四川聯)
부지불식간에 내뱉은 한마디의 여파가 이렇게 클 줄이야. 쪼르륵 나선 다섯의 어린 여협은 바르르 몸을 떨었다. 새초롬한 눈빛에서 불똥이 파직 튀었다.
이청은 입술을 지그시 말아 물었다. 그만 헛웃음이 터질 뻔했다.
“다섯 여협께서는 뭔가 오해를 하시는 모양입니다.”
“오해? 오해라고요?”
“아민, 아니…… 녹면옥수 여협과는 같이 자란 오랜 지기이지요.”
“당 여협과 같이 자라다니?”
“어, 그럼.”
이청은 아주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까마득하게 어릴 적의 이야기를 적당히 설명했다. 그러자 다섯의 어린 여협의 경계가 잠시 누그러졌다.
이청의 목소리가 평온하기도 하였지만, 그것만은 아니었다. 말하면서도 공력을 살짝 실어낸 까닭이었다. 스승인 상 부인의 음공이 어디 보통의 수준이라던가.
사람을 현혹하는 마공이나 사공의 반열에는 들지 않으나. 적어도 경계를 누그러뜨리는 것 정도는 가능했다.
“다섯 여협께서 이렇게까지 아민을 아끼고, 따르시니. 오랜 친구로서도 가슴이 뿌듯합니다.”
이청은 말하면서 잠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진중한 모습이다. 다 컸다면 컸다고 할 수 있지만, 그래도 아직 소녀의 방심이 더욱 크게 남은 여협들이다.
얼굴을 한껏 붉히고서 우물쭈물하다가, 너 나 할 것 없이 고개를 숙였다.
“별말씀을요.”
“당 여협께 말씀 잘해 주셔요.”
“아무렴요.”
이청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식으로 사태가 일단락될 듯하였다.
쪼르륵 나섰다가, 다시 쪼르륵 물러났다.
누구는 그만 헛웃음을 흘리기도 했고, 누구는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그렇다고 해서, 외인인 이청에게 다시 다가가서 손 내미는 자는 없었다.
여인들 심정은 그렇다고 하나, 당가의 여협을 흠모하는 남정네들 심사는 또 어떻겠는가.
급기야는 더 참지 못하였는지, 한 사내가 벌떡 일어났다.
“더는 못 봐주겠군!”
거칠게 한마디를 짓씹더니, 성큼성큼 나섰다. 사내는 이청 앞에 소리가 나도록 털썩 주저앉았다.
“…….”
이청은 그런 사내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무슨 일인지, 딱히 의아할 것도 없었다. 그만큼이나, 사내는 본심을 아주 솔직히 드러냈다.
앞으로 얼굴을 기울였다.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는 눈초리가 기분 나쁠 정도로 노골적이다. 그래도 이청은 딱히 반응하지 않았다.
이글거리는 눈초리를 한번 마주했을 뿐이다.
이쯤 되면 누가 먼저 입을 열지 버티기 경쟁이라도 하는 듯하다. 곱상한 얼굴이 한 번 움찔거렸다. 결국, 왈칵 오만상을 썼다.
“참으로 건방지군. 네놈은 내가 누군 줄 아느냐?”
“알아야 하는 게요?”
이청은 진정 어이가 없어서 되물었다. 다가와서 시비를 거는 것이야 그렇다고 할 수 있었다. 대뜸 누군 줄 아느냐며 다그치다니. 그런데 기다렸다는 듯이 무리 중에서 덩치 좋은 무인 서넛이 서둘러 나섰다.
그들은 귀공자의 뒤를 마치 지키듯이 늘어섰다.
어디 귀한 집의 후손이라도 되는 양이다.
다른 곳도 아니고, 독문당가에서 출신을 가지고 자랑하는 것은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청은 어째 돌아가는 상황이 기이하다 싶었다.
잠시 눈을 돌렸다.
한참 수군거리던 자들이 젊은 공자가 나서자, 다들 입을 꾹 다물고서 돌아가는 눈치만 열심히 살폈다. 그렇다고 한들, 이청이 움츠러들 이유는 딱히 없다.
이청은 새삼 허리를 세우고서 불꽃 튀는 귀공자의 하얀 얼굴을 바로 마주했다.
“그래, 공자께서는 누구신지?”
“허! 허허허.”
공자는 퍼뜩 고개를 치켜들더니 높이 웃어버렸다. 뭐 그리 대단한 것을 물었다고.
“무례하다, 이놈!”
답은 전혀 엉뚱한 쪽에서 터졌다. 공자의 뒤에 시립한 이가 버럭 다그친 것이다.
“여기 엄 공자께서는 사천도지휘사사(四川都指揮使司)의 독자이시다!”
“도지휘사사?”
이청은 잠시 집중하지 않고서 중얼거렸다.
사천의 도지휘사사라고 하면, 사천일대의 모든 병력을 관장하는 자리이다. 그러나 당연하게 이청에게는 크게 와 닿지가 않는 일이었다.
이청은 다시금 곱상한 공자의 얼굴을 보았다. 이제 알았느냐는 얼굴로 턱을 바짝 치켜들었다.
사람을 눈 아래로 보는 눈초리가 참 대단하다.
사천도지휘사사 엄경준의 독자, 엄삼보. 대단한 부친을 둔 것도 있으나, 자신이 또한 청성속가에서 명문으로 손꼽는 청풍문의 제자이기도 했다.
그만한 뒷배가 있다는 것이리라.
콧대를 세울 만한 일이다. 이청은 그러나 딱히 맞장구치기 보다는 물끄러미 엄삼보를 바라만 볼 뿐이었다. 상황이 이러하다.
사교가 들불처럼 일어나, 수천에 이르는 유민이 발생했다. 급하게 피난하는데, 이들은 정작 군관에 의지하기보다는 강호의 유협과 명문에 의지한다.
그런 판국인데 도지휘사사의 독자라는 자가, 고작 사천 무림의 후기지수들 사이에서 콧대를 세우고 있을 뿐이라니.
“허어…….”
이청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뱉었다. 무겁고 무거운 한숨이다. 더불어서 얼굴빛이 흐려졌다. 그 모습이 그만 다른 사람들 눈에 엄삼보의 위명에 움츠러든 것으로 보인 모양이었다.
“하, 그럼 그렇지.”
비아냥이 섞였다. 엄삼보는 뾰족한 턱을 세우고서, 그늘을 드리운 이청의 어두운 안색을 흘겨보았다.
“자네, 내가 자네라고 해도 되겠지? 그래, 듣기로는 당 소저의 어릴 적 친우라지? 그런 것을 믿고서, 당가에 빌붙기라도 할 요량인가?”
“…….”
조소를 머금고서 내뱉는 싸늘한 한마디가 사뭇 날카롭다. 엄삼보를 마뜩잖게 생각하는 이도 여럿이지만, 이때에는 이청을 향한 경계가 더욱 큰 까닭에, 누구도 나서지 않고 모습을 지켜만 보았다.
엄삼보를 호위하는 세 장정은 어깨를 더욱 펼치면서 짐짓 흉흉한 기세를 드러냈다. 머뭇거리는 이청을 압박하기라도 할 모양이었다.
“아니, 지금 뭣하시는 겁니까!”
불현듯 뾰족한 목소리가 울렸다. 사람들 고개가 그쪽으로 돌아갔다. 거기에 서 있는 것은 녹의에 백포의 두터운 앞치마를 걸친 당진령이었다.
“선고.”
“아니, 의절선고께서 어찌.”
“이 사람들이 지금.”
당진령은 새삼 날 선 눈초리로 좌우를 빠르게 훑었다. 대부분은 멋쩍음에 헛기침을 흘렸다. 그리고 당진령은 아직 자리에 앉아서 턱을 세우고 있는 엄삼보에게로 성큼 다가섰다.
“엄 공자.”
“이리 뵙습니다. 당 소저.”
엄삼보는 짐짓 태연한 미소를 그렸다. 당진령은 그래도 솟은 눈썹을 억누르지 않았다.
“여기 이 공자께서는 우리 당가의 귀빈이십니다.”
“그렇다지요.”
“헌데, 당가를 무시라도 하시는 겁니까?”
“무시라니. 그게 무슨 서운한 말씀이시오. 다 오해랍니다. 하하, 본 공자는 여기 이 사람과 교분을 나누고자 하였을 뿐이라오. 하하하.”
엄삼보는 꾸민 듯한 웃음을 흘렸다. 다른 의도는 전혀 없다는 듯이 두 손을 좌우로 벌렸다.
“아니, 그런가?”
“그럼요, 그럼요.”
“공자의 순수한 의도를 너무 오해하신 듯합니다.”
뒤를 돌아보면서 되묻자, 셋은 번갈아 고개를 끄덕였다. 당진령은 입술을 깨물었다.
엄삼보도 그렇지만, 엄삼보의 호위 노릇을 하는 저 셋도 참 말썽이다. 청풍문의 이대제자이면서, 또한 사천 지역의 정예라고 할 흑호기의 세 백부장이다. 무림과 군, 양 방면에서 나름 뛰어난 무인들이다. 그런데 엄삼보의 호위를 맡으면서 악평만 자꾸 쌓아가고 있으니.
당진령은 능글맞은 엄삼보는 관두고서, 그들 셋을 한참이고 노려보았다.
“크흠, 크흠.”
셋은 슬쩍 눈길을 피하면서 헛기침만 연이었다. 노려보고 피하는, 이상한 눈싸움은 그리 오래 하지 않았다.
이청이 중간에 일어났다.
“아민은 어디에 있소?”
“민 언니라면, 지금 별원 쪽에.”
“그렇구려.”
이청은 고개를 한 번 까딱 숙여 보이고는 바로 자리를 벗어났다. 자신 때문에 심상치 않은 소란이 벌어질 듯한 마당이건만, 전혀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바로 움직이는 모습에 좌우에서 당황하였지만, 그렇다고 이청을 붙잡을 수도 없었다. 마치 도망이라도 하는 듯하지 않은가.
“흥!”
엄삼보는 싸늘한 코웃음을 흘렸다. 별것도 아닌 작자가 어디서 감히.
딱 그런 표정이다.
* * *
사천무림에서 사천련을 이루고서, 마도에 대항한다는 소식은 발 빠르게 전해졌다.
맞닿아 있는 섬서, 운남은 물론, 중원으로 그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뜻 있는 자들, 혹은 무림 중의 일로 크게 벌어볼 생각을 하는 낭인, 무부 등등. 여럿이 분주하게 사천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천은 성도를 가운데로 두고서, 위아래로 나뉘어 있는 마당이었다. 사천의 북부, 민강을 비롯한 일대는 홍천교가 단단히 틀어쥐고 있었다. 그곳은 그야말로 무인지경이나 다름없었다.
사천 삼세가 크게 손을 썼을 때에 잠시 위축되었지만, 그조차 불과 한 달도 못 되는 시간 사이에 전부 회복했다.
몇몇 큰 마을에는 홍천교가 상징으로 삼은 붉은 깃발을 높이 세웠다. 깃발은 피로 적신 것처럼 온통 붉은 바탕에 천의 한 글자가 적혀 있었다.
그런데 홍천교, 자체의 모습은 볼 수가 없었다.
홍천교주는 물론이거니와, 홍천교를 실질적으로 이끌어 나간다는 홍천사자도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분명 어디선가 일대를 지켜보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홍천교에 귀의한 교인이든, 그렇지 않든, 북부에 남은 백성은 그것을 똑똑히 느끼고 있었다.
진정으로 신불이 있어서, 이능을 발휘하는 듯했다.
무엇보다, 마을에서 사람 모습이 갈수록 줄어만 갔다. 이유 없이 사람이 하나둘씩 휙휙 사라졌다.
자고 일어나면 가족 중 한 사람이 없어지기 일쑤였다. 급기야 어느 집에서는 눈 깜빡할 사이에 젖먹이만 덩그러니 남기도 했다.
바람에 나부끼는 붉은 깃발은 음산하고, 깃발 아래의 마을은 황량했다.
잿빛으로 잔뜩 물들어서 사람 그림자 하나 보기가 어려웠다. 다들 집 속으로 숨어서는 벌벌 떨어댈 뿐이었다.
차라리 마을을 뛰쳐나가서 도망이라도 했으면 좋겠지만, 그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사교의 홍천사자, 그리고 따르는 홍천병(紅天兵)이라는 것들은 어떻게든 알고서 도망한 사람들을 다시 끌고 왔다. 그리고 사람들이 다 보는 길목에서 산 채로 갈가리 찢어 죽였다.
끔찍한 일이었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다. 작정한 사람들은 모두 붙잡혀서 죽었고, 아닌 자들은 집에 틀어박혀서 벌벌 떨다가, 하나, 둘 사라져버렸다.
무슨 생업을 이룰 수가 있을까.
“하이고, 하이고야.”
집안 구석에 틀어박혀서 앓는 소리만 겨우 맴돌았다. 염주를 꼭 움켜쥔 늙은 손이 발발 떨렸다. 문이며, 창이며 모조리 닫아 걸고, 덧창까지 덧대어 놓았다. 그래도 마음은 놓이지가 않았다.
노파는 벌벌 떨면서 힘주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웅크린 노파의 품에는 천으로 꽁꽁 감아둔 아이가 꼭 안겨 있었다.
노파는 두려움에 심장이 쿵쿵 뛰었지만, 아이는 그 소리를 자장가처럼 들으면서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휘잉, 바람이 한 번 불면서 닫아건 문창이 덜컹거렸다.
그때마다 노파는 어깨를 움츠렸다. 노파는 그러다가 불현듯 고개를 들었다. 진물 맺힌 흐린 눈동자가 두려움 속에서 좌우로 요동쳤다. 불을 밝히지도 않아서, 내실은 한없이 어둑어둑했다.
노파는 여기서 자식 놈 둘과 며느리 하나, 그리고 갓 태어난 손주와 함께 살고 있었다. 그런데 불과 몇 달 만에 참담한 일을 마주했다.
마을의 다른 집처럼, 둘째가 밤 중에 사라져버렸고, 첫째는 이대로 안 되겠다고 뛰쳐나갔다가 잡혀 와서는 내자 앞에서 찢겨 죽었다.
며느리는 그대로 정신이 나가버려서는 집 안을 배회하다가 둘째처럼 사라져 버렸다. 이제 노파와 젖먹이 손주만 남았을 뿐이었다.
노파는 밤이 두려웠다. 하나뿐인 손주마저 잃을까, 손주를 두고 내가 사라질까. 어느 쪽이든 한없이 두려웠다. 그런데 두려움의 실체를 지금 마주해 버리고 말았다.
“하이고, 하이고오.”
노파는 겨우 소리를 쥐어짰다.
눈을 뜨지 말 것을, 고개를 들지 말 것을.
다른 사람은 아무도 없어야 할 내실이었다. 온기 하나 없고, 어둑하기만 해야 할 곳이다. 그런데 거기서 어둠이 뒤엉켜 있는 무엇이 있었다.
그것이 이쪽을 빤히 보았다. 노파는 무슨 얼굴을 본 것도 아니었지만, 마치 어둠이 웃는 듯하였다. 그리고 노파는 까무룩 정신을 놓았다.
허윽……
신음이 왈칵 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