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ti Demon God RAW novel - Chapter 25
25화. 나서는 걸음
“소명아.”
“예, 관주님.”
“어찌 된 일이냐?”
“그것이…….”
소명은 준비한 말을 하려다가 자신을 보는 호 관주의 눈을 마주하고는 흠칫했다. 어설픈 거짓이 통할 리가 없었다. 지금에야 한적한 촌의 무관 관주라 하나, 그는 당년 등용문의 호랑이, 양천호격이라 불린 절정의 무인이다.
“흉한 일은 없었습니다, 관주님. 마음 쓰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그러하냐?”
“예.”
“그래, 네가 그리 말한다면 됐다.”
호 관주는 눈가에 주름을 잡으며 웃어 보였다. 그리고 오늘은 꼭 무관에서 묵으라 당부했다.
그리고 다음 날이 되었다.
“과, 관주님. 밖에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
호 관주는 탕약 그릇을 내려놓으며 되물었다. 그가 이런 몸이 되고서는 찾아오는 사람은 없었다. 세상인심이 다 그러하려니 여기고 있었는데, 손님이 찾아왔다고 하니.
“그래, 어디 손님이시냐?”
“동화촌의 화, 황 관주가…….”
“황가가?”
호 관주는 뜻밖의 이름에 눈살을 찌푸렸다. 옆에 있던 호청연이나 제자들의 얼굴도 울컥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소명은 그저 담담한 기색으로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았다. 잠시 고민하던 호 관주는 곧 입을 열었다.
“드시라 하려무나. 손님으로 온 사람을 소홀히 해서야 되겠느냐.”
“아버지!”
속 편한 호 관주의 말에 호청연은 빽 소리를 높였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황태정, 그 인간이 어떻게 호가무관의 손님일 수 있단 말인가. 그렇지만 호 관주가 엄중한 눈으로 바라보자 도리가 없었다. 호청연은 싫은 기색을 한 채 돌아섰다.
열린 문으로 황태정이 들어섰다. 호 관주는 창백한 얼굴에 애써 미소를 그리고 그를 맞이했다.
“황 관주, 오랜만이오.”
“하, 하하. 호 관주님.”
들어선 황태정은 호 관주의 모습을 보자 어색하게 웃었다. 그리고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그도 자신을 향한 호가무관 제자들의 적의 어린 시선을 똑똑히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애송이들 몇의 따가운 시선 따위야 알 바 아니었다. 그는 흘깃 고개 돌려 그들 사이에 우두커니 서 있는 소명의 모습을 보았다. 자신을 향한 그의 담담한 눈초리에 오금이 후들거렸다.
“자리에 앉으시지요.”
“아, 아이고. 아닙니다, 아니에요.”
권하는 자리에 황태정은 황급히 손사래 쳤다. 그는 대뜸 엎어지더니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호 관주님, 이 황모가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아니, 황 관주.”
갑작스런 황태정의 모습에 사람들은 모두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호 관주는 급히 다가가 황태정을 일으켰다.
“왜 이러시오?”
“호 관주님, 그간의 무례를 제발 용서해주십시오. 우둔하고 욕심이 많아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이런…….”
황태정은 연신 고개를 숙였다. 호 관주는 그의 모습에 크게 난감했다.
‘대관절 무슨 일인가. 이렇게 사람이 변하다니.’
하지만 호 관주로서는 짐작 가는 바가 전혀 없다. 찌푸린 눈으로 고개 숙인 황태정의 모습을 보던 호 관주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황 관주, 그간의 일은 다 잊기로 합시다. 이웃한 무관끼리 사이가 나빠서야 되겠소이까.”
“아이고, 아닙니다. 저는 이제 황가무관을 정리할 생각입니다.”
“무관을?”
“예, 이참에 고향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아니, 황 관주. 대체…….”
호 관주는 이상할 정도로 의기소침한 황태정의 모습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전날의 오만은 전부 어디로 갔단 말인가. 고작 열나흘 만에 사람이 아주 달라진 것 같았다.
황태정은 긴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과할 정도로 사죄를 했고, 자신이 떠난 이후에 황가무관에 대한 일체를 호가무관에 넘기겠다고까지 했다. 무관 사이에 일체를 넘기겠다는 것은 단순히 가산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는 곧 제자들을 말하는 것이다.
호 관주는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며 만류했지만 황태정은 막무가내였다. 그는 그렇게 호가무관을 떠났다.
관원들은 모두 모여들어 떠들기 시작했다. 대체 무슨 바람이 분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 대체 황가 저 인간이 무슨 바람이 불어 저러지요?”
“어허, 청연. 이 녀석.”
호청연의 거친 말에 호 관주는 나직이 꾸짖었다. 그러나 호청연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제 놈이 우리에게 한 일이 있는 걸요. 아버지께서 너무 쉽게 용서해주신 거라고요!”
“허, 허허.”
뾰로통한 호청연의 모습에 호 관주는 나직이 웃었다. 고개를 돌리던 그는 문득 소명의 모습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응? 소명은 어디에 있느냐?”
“예? 아까까지는 있었는데?”
호청연은 그제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소명은 호가무관의 소란 중에 조심스럽게 몸을 뺐다. 그는 곧 상화촌의 외곽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황태정이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으로 서 있었다. 그는 소명의 모습이 보이자 급히 다가왔다.
“오, 오셨습니까.”
“예. 감사합니다. 황 관주님.”
“아이고, 별말씀을 다…….”
“이제부터 어떻게 하실 겁니까?”
“호 관주께 말씀드렸다시피 황가무관은 닫을 생각입니다. 입관한 제자들도 모두 내보냈습니다. 다들 알아서 처신하겠지요. 어차피 제 손을 거친 아이들도 얼마 없습니다.”
황태정은 씁쓸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의 말대로 무가련에서 보내준 다섯 무사, 황산오웅의 입김이 더욱 컸기 때문이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무운을 빕니다, 소협.”
황태정은 힘없는 미소를 그려 보였다.
소명은 어둠 저편으로 쓸쓸히 사라지는 황태정의 뒷모습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두 어깨를 축 늘어뜨린 그의 모습은 너무도 왜소해 보였다.
“무가련.”
소명은 문득 황가무관의 뒤에 있는 그 이름을 읊조렸다.
* * *
호 관주는 황가무관의 일이 마무리된 덕분인지 안색이 크게 호전되었다. 그 모습에 소명도 마음을 놓았다. 비록 그를 보는 호청연의 날 선 눈매는 여전했지만.
소명은 지금은 비어 있는 연무장 한쪽에 앉아서 그곳 정경을 바라보았다. 아니, 그가 보고 있는 것은 지금이 아닌 십여 년 전의 모습이었다.
한쪽에서는 어린 호충인과 당민이 서로 권을 겨루고, 옆에서는 이청이 권로를 연습한다. 여전히 호금을 손에 놓지 않은 채다. 호청연은 탁연수와 권법을 연습한다. 옛적의 추억을 보는 소명의 입가에는 미소가 절로 그려졌다.
“흥! 무슨 그런 재수 없는 얼굴을 하고 있어!”
뾰족한 목소리가 상념을 지웠다.
고개를 들자 성난 얼굴의 호청연이 서 있다. 그녀는 허리에 두 손을 턱 걸친 채 소명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니, 그냥.”
험상궂은 모습에 그저 웃어 보였다. 그 미소에 호청연은 흥, 코웃음 쳤다.
“아버지께서 찾으셔.”
소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호 관주는 자리에 차를 끓여놓고 소명을 기다렸다.
“왔느냐?”
“예, 관주님. 찾으셨습니까?”
호 관주는 관주님이라는 호칭에 잠시 멈칫했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 긴히 할 말이 있어 찾았다.”
“말씀하시지요.”
“정히 다시 떠날 생각이더냐?”
“……예, 관주님.”
“내 지금껏 무관의 사정이 좋지 않아 말을 못했다만…… 내 바람으로는 네가 호가무관에 남아주었으면 좋겠구나.”
소명은 고개를 숙였다. 미안한 말이었다. 더 말하지 않아도 자신을 걱정하는 호 관주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죄송합니다.”
“하하, 죄송할 것까지야 있겠느냐. 다만 네가 나중에 돌아올 곳이 있다는 것만 잊지 말거라.”
호 관주는 흐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는 손을 뻗어 소명의 거친 손을 맞잡았다.
“소명아.”
“…….”
호 관주는 소명의 손을 다독였다.
“세상의 일이란 것은 거칠단다. 많은 어려움이 있을 수도 있고, 가슴 아픈 배신이 있을 수도 있단다.”
그는 느릿한 어조로 당부하듯 말했다.
“강호의 일이란 그런 것이다. 은과 원이 중첩하여 그 끝을 알 수 없는 것이지.”
소명은 묵묵부답으로 호 관주의 말을 마음으로 담아 들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소명을 걱정하는 마음이 가득했다.
“소명아, 너는 마땅히 마음을 살피거라.”
강호의 어려움과 어둠을 경계하라는 말에 그저 고개를 숙여 보일 뿐이었다.
“가, 감사, 감사합니다, 관주님.”
“소명아, 네가 돌아올 곳은 어디더냐?”
“사, 상화촌입니다.”
“그래, 그럼 되었다.”
호 관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명은 젖은 눈으로 그의 주름진 눈을 바라보았다.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그래, 그러려무나.”
소명은 조심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닫으려는데 호 관주의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고맙구나.”
“…….”
무슨 의미인지, 소명은 되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저 문틈으로 고개를 숙여 보였다. 문은 소리 없이 닫혔다.
“무슨 말씀 하셨어?”
“응? 아, 아니. 별말씀 안 하셨는데.”
“정말?”
“그, 그럼.”
나오기가 무섭게 호청연에게 붙잡혔다. 그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설마, 무관에 남으라든가 하는 말씀을 하신 건 아니지?”
“하, 하하.”
“허튼 생각하지 마.”
“허튼 생각?”
소명은 호청연의 말뜻을 순간 이해하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의아해 묻는 얼굴에 호청연은 어깨를 움찔하더니 서둘러 말을 내뱉었다.
“여, 여하튼! 떠날 셈이면 빨리 떠나버리라구!”
뾰족하게 쏘아붙이고는 찬바람 쌩쌩 부는 표정으로 홱 고개를 돌려 멀어졌다.
* * *
소명은 이른 아침부터 서둘렀다. 그는 무관을 돌아다니며 무너진 곳, 혹은 손볼 곳을 샅샅이 찾아서 손을 썼다.
호가무관은 삼십여 칸의 큰 집이었다. 잡초 무성한 정원이나, 무너지고 금이 간 담벼락들, 깨진 기왓장 등등. 손 볼 곳이 하나둘이 아니었다.
아무리 솜씨가 좋은 사람이라고 해도 혼자서는 여러 날이 걸릴 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소명은 거침없었다. 쉬지도 않고 바쁘게 움직였다. 필요한 자재는 품 안의 돈을 써가며 마련했다.
사나흘 만에 일을 모두 마무리했다. 먼지 앉은 손을 탁탁 털고 멀끔해진 무관의 건물들을 바라보았다. 화려하지는 않아도 단정한 모습이다.
소명이 직접 올린 기와지붕 너머에서 낙조가 붉게 타올랐다.
“하.”
문득 짧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것은 어느 한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이제 떠날 때가 된 것이다.
짐이라 할 것은 없었다. 왔던 모습대로 다시 떠날 뿐이다. 여전히 허름한 장포를 걸치고 축 늘어진 행낭을 메었다.
그는 호 관주의 방이 보이는 곳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불 밝힌 창가에 그의 그림자를 얼핏 엿볼 수 있었다.
꾸벅 허리 깊이 숙여 보이고 호가무관의 문을 넘었다. 그리고 어두운 밤길을 빌려 상화촌을 나섰다. 그날은 달빛이 환하였다. 그러던 소명은 고개 너머에서 움찔하고 멈춰 섰다.
달빛을 받으며 한 사람이 길가에 앉아 있었다.
“처, 청연아.”
“뭐 죄라도 지었어? 오밤중에 무슨 도둑걸음이야?”
호청연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면박 주듯이 쏘아붙였다. 눈썹을 확 치켜들어 머뭇거리는 소명을 노려보았다.
“어떻게 알고…….”
“떠날 거면 그냥 가버리지, 여기저기 고치고 난리 치는데 어떻게 몰라?”
“아하. 그, 그렇구나.”
퉁명스런 그녀의 말에 소명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호청연은 문득 손에 들고 있던 작은 보따리를 소명에게 던졌다. 소명은 놀라며 받아들었다.
“가면서 먹어.”
“고, 고맙다.”
“뭐, 정 갈 데 없어지면…… 눌어붙지만 않으면 되니까, 괜히 엉뚱한 곳에 피해 주지 말고 무관으로 와.”
“…….”
“왜 답이 없어!”
뾰족하게 반응했다. 소명은 얼굴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랐다. 그저 어색한 웃음을 그렸다.
“고, 고맙다.”
“흥! 됐어!”
호청연은 쿵쿵 발을 크게 구르며 마을로 돌아갔다. 상화촌 쪽으로 가는 그녀의 모습을 소명은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녀가 싸준 보따리는 아직 따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