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ti Demon God RAW novel - Chapter 26
26화. 붕우(朋友)
하남 일대는 대륙의 중심인 바, 많은 사람과 물류가 오갔다. 상단이나 표국의 행렬이 하루가 멀다 하고 먼지를 날리며 달렸다.
소명은 길을 따라서 천천히 걸었다.
상화촌을 나서고 사흘째였다.
호청연이 싸준 건량을 우물거리다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급한 말발굽 소리였다. 곧 십여 기 남짓의 기마행렬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쪽으로 물러서자 그들은 누런 먼지구름을 고스란히 일으키며 지나쳐갔다. 쫓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급박한 모습이었다. 그 통에 소명만 먼지를 옴팡 뒤집어썼다.
소명은 툭툭 먼지를 털며 순식간에 멀어져가는 기마들을 바라보았다. 행렬의 뒤쪽에서 표기(鏢旗)로 보이는 깃발이 펄럭였다. 어느 표국의 기마들인 모양이다.
“푸후, 세상에는 바쁜 사람이 많군.”
달리 감흥은 없었다. 그리고 다시 길을 따라 걸었다. 크게 서두르는 기색은 없었다. 그리고 고갯길을 하나 올라서는 순간, 소명은 걸음을 멈췄다.
“어라?”
고개 아래에서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수 각 전에 소명을 스치고 지나친 기마들이 멈춰서 있었다. 그리고 기이한 고요가 관도자락을 짓눌렀다.
흉험한 광채가 번쩍였다. 그것은 흉기(凶器)가 발하는 빛이었다. 소명은 곧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니, 하필이면 길 위에서…….”
그것도 훤한 대낮이었다. 속으로 혀를 차며 슬쩍 몸을 숨겼다.
긴장된 상황을 만들어 서로 칼을 뽑아들고는 아무도 나서지를 않고 있었다. 두 무리는 눈싸움만 한참 하고 있다.
적의는 물론이고 살기마저 충천하니 당장 칼부림을 하여도 이상하지 않으련만, 그만큼이나 몸을 사리는 모양새였다. 그 모습에 소명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저리 굴 것이면 백주대로에서 칼이나 뽑지 말 것이지.”
손마다 들린 흉기의 번뜩임은 살벌했다. 그러나 섣불리 움직이는 자들은 없었다.
청년 담아인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는 길을 막아선 자들의 모습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모두 열다섯. 그들은 한명의 예외 없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천으로 전신을 휘감았다. 뒤집어쓴 복면 사이로 드러난 두 눈에는 짙은 살기가 일렁였고, 뽑아든 열다섯 자루의 직도는 햇살을 받아 섬뜩한 빛을 뿌리며 담아인의 눈을 어지럽혔다.
‘젠장, 차라리 녹림중의 무리라면 마음이라도 편하련만.’
녹림도라면 적당한 예물로써 시비를 피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눈앞의 상대는 그런 종자들이 아니었다.
흉한 예감이 그의 가슴을 짓눌렀다. 담아인은 애써 불길한 느낌을 털어내고 소리를 높였다.
“대체 무슨 용건으로 정주표국의 길을 막는 것이오?”
“…….”
한참 동안의 대치 끝에 내지른 일갈에 그들은 대꾸하지 않았다. 다만 뽑아든 직도를 눈앞에 세운 채 길목을 막아서고 있을 뿐이었다.
담아인은 붉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를 비롯한 정주표국의 일급표사 다섯은 각자의 병장기를 고쳐 잡았다.
그는 애써 강한 모습을 보이며 옆에 선 표두에게 넌지시 물었다.
“고 표두, 어쩌면 좋겠습니까?”
“그것이…… 쉽지 않겠습니다. 상황이 심상치가 않아요.”
“강행돌파…… 밖에는 답이 없겠지요.”
“안타깝지만.”
그 말을 끝으로 더 묻지 않았다.
담아인은 다시 흑의인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이제 천천히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어차피 다른 여지는 없었다. 길을 막아섰을 때부터 결정된 일이다.
애써 호흡을 골랐다.
‘저들이 누군지는 몰라도, 뭘 노리는지는 명확하지. 그리고…… 누가 보냈는지도.’
입술 끝에 절로 쓴웃음이 맺혔다. 그러나 이내 상념을 떨쳐내려는 듯 거칠게 검을 뽑았다.
챙!
햇살 아래 드러난 날카로운 검날이 강한 빛을 발했다. 순간 땅을 박찼다.
“흐압!”
느릿하게 다가오던 흑의인들은 갑작스런 그의 검격에 흠칫했지만 물러서지는 않았다.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검을 받아냈다.
창! 차차창!
좌우 표사들도 일제히 뛰어드니 순식간에 난전이 벌어졌다.
이같이 갑작스런 상황에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개인의 실력으로 헤치고 나가는 수밖에. 그러나 흑의인들은 무위도 머릿수도 정주표국에 비해 월등했다. 밀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큭!”
악문 잇새를 비집고 저도 모르게 침음이 새었다. 직도의 거센 일격을 막았더니 검을 쥔 아귀가 찢긴 모양이었다. 뜨뜻한 핏물이 손아귀를 적셨다.
셋이나 되는 흑의인들이 담아인을 둘러쌌다. 연이은 도격에 그는 비척이며 물러섰지만 주저앉지는 않았다. 되려 전의를 더욱 태우며 거세게 맞섰다.
도날과 검날이 부딪치며 무섭게 불똥이 튀었다.
“죽엇!”
좌우의 직도를 걷어내기가 무섭게 정면에서 직도가 머리를 쪼개왔다.
담아인의 얼굴이 창백해졌지만 몸은 굳지 않았다.
백원검파(白猿劍派)의 구명절초(求命絶招), 운창망월(澐暢望月)의 일초가 한껏 힘이 실린 직도를 받아냈다.
쩡!
검과 도가 부딪쳐 높은 쟁명(錚鳴)을 토했다. 귀를 찢는 소리와 동시에 담아인의 검봉이 뚝 하고 부러져나갔다. 초식은 제대로 펼쳤지만 연이은 직도의 충격을 검이 견디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담아인의 얼굴에 당황하는 기색은 없었다. 검날은 아직 살아 있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
차오르는 숨을 끊어내며 부러진 검신을 그대로 휘둘렀다.
“끅!”
답답한 신음성이 나자마자 붉은 피가 확 솟구쳤다. 그런데 담아인의 위치가 좋지 않았다. 실전에 미숙한 무인이 종종 범하는 실수였다.
“헛!”
입에서 놀란 헛바람 소리가 새었다. 목을 베기가 무섭게 솟구친 핏물이 눈앞을 덮어버린 것이다.
주춤 뒤로 물러서며 정신없이 눈을 비벼보지만 핏물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이공자!”
좌우에서 표사들이 다급하게 외쳤지만 그들 역시 다른 흑의인들에 막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다른 칼날이 그대로 담아인의 머리를 쪼갤 듯 떨어졌다. 공기를 가르는 소름끼치는 소리를 똑똑히 들으면서도 담아인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어깨를 움츠린 채 눈을 질끈 감았다.
‘이렇게 끝인가!’
이십여 년을 겨우 살았을 뿐인 인생이었다. 이제야 제 뜻대로 살 수 있나 하였는데.
쩡!
웅크린 채 굳은 담아인의 머리 위에서 돌연 높은 쟁명이 크게 울렸다. 그 소리에 몸을 움찔 떨었다. 조심히 실눈을 떴다. 이상하게 주변이 조용했다.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목이 떨어지기라도 한 건가 싶었다.
“어엉?”
곧 눈을 깜빡였다. 아직 시야가 붉었지만 적어도 목이 떨어진 것은 아니다. 뒤늦게 정신 차리고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바랜 장포 자락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낯선 뒷모습이 주저앉은 담아인의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한 손에는 직도의 칼날이 잡혀 있었다.
그 모습이 어이없어, 상황에 어울리지 않지만, 주변 다른 표사들과 흑의인들도 굳은 채 빤히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소명은 곧 벌어진 칼부림을 지켜보며 몸을 사렸다. 인적이 없다 하나 대로변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중원도 딱히 살기 좋은 동네는 아니야.”
중얼거리며 상황을 지켜보았다.
표국의 사람들이 선수를 친 것은 좋았지만 그것만으로 전세를 유지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이내 수세에 몰렸다. 흑의인들은 거침없는 살수로 표사들을 몰아붙였다.
그러나 표사들도 녹록한 자들은 아니었다. 그들은 서로 도와가며 거친 칼날을 버텨냈다.
다만 이상한 것은 흑의인들은 표사들에게 살수를 쓰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손을 멈춘다는 것이다.
유심히 지켜보다가 소명은 곧 고개를 끄덕였다.
“아하…… 노리는 목표는 따로 있다 이거군.”
상황을 이내 알 만했다.
다른 흑의인들은 그저 표사들을 압박하여 막아설 뿐, 진정한 목표는 한 사내였다. 아직 어린 티가 남아 있는 젊은 사내로, 이제 갓 약관이나 되었을 법했다. 그에게는 일말의 사정도 없는 살수를 쏟아냈다.
“결국에는 저 사람 하나란 말인데.”
표사들도 그 상황을 아는 듯했다. 그들은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젊은 사내에게 다가가려 하지만 흑의인들이 철저히 막아서고 있었다. 그리고 목표인 그는 흑의인 셋을 상대로 분전하고 있었다.
검을 쓰는데 모양새가 상당했다. 나이에 걸맞지 않게 유연한 솜씨였다.
“오호, 제법. 어, 어라?”
그러나 이내 눈살을 찌푸렸다.
하필이면 소명이 있는 쪽으로 점점 밀려오는 것이 아닌가. 그럼에도 어찌어찌 견디고 있다.
“운창망월. 백원검파의 제자이신가?”
소명은 묵직한 참격을 받아내는 모습에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사내의 검신이 뚝 하고 부러져나갔다. 연이은 도격을 검이 견디지 못한 것.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파고들어 기어코 상대의 목을 베어냈다.
훌륭한 대처라 하겠지만, 이어진 모습에 소명은 혀를 찼다.
“저런…….”
제가 벤 이의 핏물에 시야가 막히다니. 사내는 물러서기 급급하다가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번쩍 들린 칼날이 그를 노리고 흉포한 빛을 뿌렸다. 그야말로 생사관두(生死關頭)의 순간이다.
그 모습에 소명은 고민했다.
‘나서야 하나?’
고민은 오래지 않았다.
몸이 앞으로 나갔다. 한 걸음 앞으로 내딛으며 한 손을 치켜들었다.
턱!
직도의 칼날이 마치 빨려드는 듯이 덥석 붙잡혔다. 그대로 끌어당겨 옆에서 쳐오는 다른 칼날을 막았다.
쩡!
소리가 크게 울렸다.
흑의인의 눈이 크게 뜨였다. 당황한 듯 얼굴을 가린 복면 뒤로 입을 크게 벌렸지만 말은 없었다.
주변의 다른 이들도 놀라고 당황한 눈으로 소명 쪽을 바라보았다. 그 눈길에 소명이 도리어 당황스러웠다.
‘뭐, 뭐지? 분위기가 왜 이래?’
칼날이 잡히고 막힌 두 흑의인은 뒤늦게 정신 차리고 후다닥 물러섰다. 그에 소명 또한 순순히 칼날을 놓았다. 그리고 두 손을 가볍게 탁탁 털면서 어색하게 웃었다.
“하, 하하.”
물러선 그들의 눈에는 소름끼치는 안광이 어렸다. 뿌득 이를 악무는 모습이 다시금 칼을 휘둘러 올 듯했다. 특히 소명에게 칼날을 붙잡혔던 흑의인의 살기는 더욱 강렬했다.
뿌득 이를 갈아붙이는 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얼굴 가린 복면 사이로 서슬 퍼런 안광이 번뜩였다. 칼자루를 쥔 손이 미미하게 떨렸다. 무언가 벌어질 듯했다. 반해, 마주하고 있는 소명에게는 다른 기색이 없었다. 그저 어색한 얼굴로 복면인의 살기 넘치는 시선을 받아 넘겼다. 그때.
땅!
쇠붙이 소리가 크게 울렸다. 옆에 있던 다른 흑의인이 칼날을 두들긴 것이다. 그것이 약속된 신호였는지, 눈을 치뜨고 있던 사내는 악문 잇새로 침음했다.
“큭!”
그는 소명을 죽일 듯 노려보며 칼을 거두었다. 마치 단단히 기억해두겠다는 듯이 노려보는 눈초리가 심상치 않았다. 그리고 흑의인들은 이내 물러갔다.
지치고 부상 입은 표사들로서는 뒤쫓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들은 흑의인들의 모습이 멀어지기가 무섭게 긴장이 풀렸는지 한숨을 토하며 일제히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흐윽, 흐윽…….”
내뱉는 숨소리가 격했다.
“가, 감사합니다. 덕분에 목숨을 구했습니다, 은공.”
멀뚱히 있던 소명에게 담아인이 급히 다가와 깊이 허리를 숙였다.
“아, 아니요. 별말씀을.”
“저는 정주 담가의 둘째로 담아인이라고 합니다. 은공의 존성대명은 어찌 되시는지요.”
“담 공자시군요. 저는 딱히 이름 밝힐 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지나가는 중에 우연하게도 길이 겹쳤을 뿐이니, 너무 마음 쓰실 필요 없습니다.”
“어찌 그런 말씀을.”
소명의 겸양에 담아인은 격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른 표사들도 다가와 거들었다. 이쯤 되니 소명도 마냥 겸양하고 있을 수 없었다.
“저는 천…… 아니, 하남의 소명이라는 무명소졸(無名小卒)입니다.”
“아, 소명 공이시군요.”
“하하.”
담아인은 깊이 기억하겠다는 듯이 눈을 빛냈다. 그 모습에 소명은 그저 어색한 웃음만 흘렸다.
그는 소명에게 어떻게든 사례를 해야겠다며 붙잡으려 들었다. 그것이 부담이라 소명은 일이 바쁘다며 핑계를 대어 길을 나섰다. 그러자 담아인은 크게 실망한 얼굴로 후일 꼭 찾아주기를 거듭 청했다.
어찌 얼버무리고 급히 나서니 뒤쪽에서 담아인이 계속해서 목청껏 외쳤다.
“은공! 꼭 찾아주십시오! 정주표국의 담아인입니다! 꼭 찾아주십시오!”
“하하…… 그것 참…… 질기네.”
간절하게 외치는 담아인을 마냥 무시할 수는 없었다. 소명은 어색한 얼굴로 겨우 손을 한번 흔들어보이고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그들 모습이 멀어지고, 소리도 들리지 않고서야 웃음을 지우며 고개를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