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ti Demon God RAW novel - Chapter 264
264화. 감숙의 전귀(戰鬼)
둘이 입 다물고 있을 때, 당민이 불쑥 끼어들었다.
“전면전은 막아내고 싶어.”
“그렇지. 전면전만큼은…….”
소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홍천교는 무인을 앞세우는 것이 아니었다. 수채를 상대하는 모습을 이미 보지 않았던가. 홀려버린 교인을 그대로 밀어붙였다.
무엇을 위한 희생인지도 모르는 채.
결국, 죽어가는 것은 사천의 민초뿐이리라.
뻔히 그려지는 일이었다. 이미 육사령이라고 하는 자가 이끄는 일군만으로도 수백이나 되는 목숨이 사라졌다. 소명과 풍양자도 지금 눈감으면 참사 현장이 그대로 떠올랐다.
당민은 녹면을 다시 썼다. 얼굴을 감추고서, 눈을 지그시 감았다.
“가서 돌보아야 하지 않겠나?”
“손 쓸 수 있는 것은 다 해두었으니. 이제 죽고 살고는 본인에게 달린 일. 어찌 도울 수도 없어.”
당민은 일견 잔정이 없다고 할 만큼 차디찬 어조였다. 말 꺼낸 풍양자는 그만 머쓱하여서 눈길을 돌렸다. 녹면 사이로 드러난 두 눈동자는 차갑기만 했다.
소명은 당민의 어깨를 다독였다.
“그만 긴장 풀어라. 살 사람은 살겠지.”
“긴장 안 할 수가 있어야지.”
당민은 마다하기보다는 고개를 떨구었다. 목소리에 잠시 기운이 빠져 보였다. 풍양자는 뜨끔하였다가 그만 눈살을 바짝 모았다.
‘응? 뭐야? 짜증 난 게 아니었어?’
어느 모로 보더라도, 불편한 기색으로 읽혔건만.
소명 눈에는 그것이 아닌 모양이다. 찬바람 쌩쌩하였다가 그만 한숨을 내뱉으니 풍양자는 멀뚱거리는 눈으로 둘을 번갈아 보았다.
소명은 곧 주변을 환기시켰다.
마냥 걱정 속에서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홍천교 사정을 대충 헤아린 마당이다.
“여하간, 홍천교 것들도 그렇지만, 마도 것들이 아무래도 문제란 말이지.”
“음, 그렇지. 마도. 그 대사령이라는 놈이 아무래도 마도 쪽 녀석 같지?”
“혈검대주라는 작자 말로는, 교주도 정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니까 말이야.”
세 사람은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어 갔다.
* * *
햇살이 창살을 통해서 가만히 들어왔다. 창틀에 놓은 여러 장식물이 햇빛을 받아서, 그림자를 길게 드리웠다. 볕이 워낙에 잘도 들었고, 채광에 큰 신경을 쓴 방이었다.
그렇게 햇볕을 가만히 받으면서, 오군과 감천방은 축 늘어져 있었다.
겉모습은 오수에 젖어든 것처럼 나른하고, 평화롭다.
감천방은 잿빛으로 슬슬 물드는 수염을 느긋하게 쓸어내렸다.
덕지덕지 붙은 고약하며, 단단히 감아놓은 붕대가 한가득이지만, 손끝에는 힘이 자연스럽게 실렸다. 엉킨 수염을 손가락으로 힘주어 풀어냈다.
“오군 분타주. 마냥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말이오.”
감천방은 눈을 감은 채, 문득 입을 열었다. 한참 침묵 끝에 꺼낸 말이었다. 해가 뜨고서 어쩌면 처음 꺼낸 말일지도 몰랐다.
오군은 멍하니 앉아서, 고개를 뒤로 젖히고 있다가, 그 소리에 목을 세웠다.
“뭐, 그렇기는 하오만. 딱히 방도랄 것이 떠오르지 않는구려. 감 장군.”
오군도 나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좋은 옷, 말끔한 얼굴에, 앉은 자리는 구름 위에 오른 것처럼 푹신한 비단 보료였다.
버석거리는 옷차림이 좀 거슬리기는 하여도, 이리 편한 자리에, 이리 햇볕이 좋은 날이다. 거지의 마땅한 도리로 게으름을 피우지 않을 수가 없다.
오군은 의욕 한 점이 없어서, 졸린 눈을 가만히 끔뻑거렸다.
“감 장군은 몸 상태가 또 어떠시오?”
“음, 그럭저럭 회복하였소. 허허, 어차피 전장을 뒹구는 처지인지라, 손발만 움직일 수 있으면 좋은 상태라 하겠소이다.”
“흐음.”
온갖 부상에도 전선을 단단히 지키는 것이 본분이다. 애당초 몸 상태에 만전을 기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언제, 어느 때라도 실전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감천방은 좌우 어깨를 한 번 움찔거리고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아직 불편해도, 움직일 만하다.
오군은 묘한 눈으로 감천방을 보았다.
“그럼, 당장 움직여도 무리가 없겠소?”
“하고자 하면야 못할 것도 없지요.”
“아니, 그 정도로는…….”
감천방이 살짝 눈을 빛냈다. 그런데 어째 미지근한 소리인지라, 오군은 슬금 물러섰다.
감천방은 불쾌하기보다는 나직이 웃었다.
“허허, 장수에게 확언은 없어도, 허언 또한 없소이다. 오군 분타주.”
군문에서 허언은 곧 목을 내놓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감천방은 지그시 눈매를 집중했다. 오군은 게으름을 가득 담은 채, 그 눈빛을 맞받았다. 그러다가 히죽 웃었다.
“그럼, 슬슬 움직여 볼까요.”
“그럽시다. 그럼.”
“서두르실 것 없습니다.”
둘이 주고받는 와중에 불쑥 어린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엉덩이를 들썩거리던 오군이 고개를 돌렸다.
“이런.”
나란히 놓아둔 침상 사이로 아이 하나가 낑낑거리면서 기어 나왔다. 어디로 들락거리는 것인지. 아이는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꼴이었다.
“어린 교주. 왜 거기서 나오시나?”
“워낙에 보는 눈이 많고, 번잡스러워 그렇지요.”
“에헤이, 그것참.”
어린 교주, 홍산아는 머리에 앉은 먼지를 털어내고서 히죽 웃었다. 웃음은 해맑아서, 도무지 사교의 교주라고는 볼 수 없었다.
마주하는 오군과 감천방도 딱히 적의를 드러내지 않았다. 한결 편한 모습이었다. 아니, 솔직하게 말하면 안쓰러워하는 기색이었다.
홍산아는 의자 하나 끌어다가 놓고서 냉큼 올라앉았다.
“이봐, 어린 교주.”
“내일 즈음에, 고집을 부려서라도 외유에 나설 생각입니다. 그때 같이 나가시지요. 일단 말썽 없이 총단은 벗어나실 수 있을 겁니다. 거기서 밖으로는…… 헤헤, 거기까지는 제가 어찌할 수가 없겠네요.”
홍산아는 머쓱하게 웃었다. 홍천교의 교주라고 하지만, 결국에 부릴 수 있는 것은 총단이라는 이름 아래의 장원이 고작이었다.
그리고 한숨을 흘렸다.
“말씀드렸다시피, 홍천교는 다 글렀습니다. 마교의 수족이나 다름없지요. 두 분이 본교의 폭주를 막아 주십시오.”
“이보게, 자네도 같이 가세나.”
“저는 움직일 수 없습니다.”
“어찌 그러한가?”
“비록 어리다고 하지만, 엄연히 교주라고 하는 저입니다. 죄과의 책임을 짊어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몰랐다고, 마교의 수족이 되어버린 책임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마교 쪽에서 움직임이 심상치가 않습니다. 야금야금 경계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본격적으로 들이닥칠 모양입니다. 홍천교를 앞세워서 사천 일대를 집어삼키려는 게지요. 하지만 결국 실패할 것이 불 보듯 뻔합니다.”
“왜 그런 짓을 하려는 거지?”
“마교는 사천을 원하는 게 아닙니다.”
홍산아는 큰 눈동자를 내리깔고서 음울하게 대꾸했다. 꽤 어려운 일이었다.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자신을 비롯한 홍천교는 점점 물러날 수 없는 길로 등 떠밀려 나아가고 있었다.
홍천교의 바깥이라고 할 수 있는 후천계의 교인들은 이미 미쳐서 날뛰기나 할 뿐이었다. 이제 자신을 비롯한 선천계의 교주 일맥은 유명무실하였다.
홍산아는 퍼뜩 고개를 치켜들었다.
“무사히 몸을 피하시거든. 홍천 대사령, 그를 조심하십시오. 그자는 홍천교를 여기까지 밀어붙인 자이니까요.”
“홍천 대사령? 그 기괴한 자를 말하는 건가?”
대사령이라는 이름에, 조용히 듣고 있던 오군과 감천방이 고개를 들었다. 붉은 운무로 온몸을 감싸고서 괴이한 술수를 펼치던 모습이 바로 떠올랐다.
대사령은 과업 운운하면서 감천방의 얼굴을 노렸다.
“아닙니다. 그는 대사령의 분신 중 하나에 지나지 않습니다.”
“분신? 대사령이란 것이 대관절 무엇이기에?”
얘기를 듣다 보니, 실로 사람이 아닌 듯하지 않은가. 홍산아는 한층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자신으로서도 명확한 정체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대사령이 홍천교에 들어서면서부터, 교세는 어마무시하게 확대되었다. 그저 사천 변경에서 작게 이루어지는 교파에 불과하였던 홍천교가, 체계를 정비하고, 삽시간에 사천 북방을 도모한 것만을 보아도 대단한 일이었다.
그럴수록, 교주일맥은 점점 유명무실되어 갔다.
“선친께서 일구었던 홍천교는 본래 이런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비록 세간의 이목으로는 사교 무리에 불과할 수도 있었지만, 이렇게 괴이한 집단은 전혀 아니었습니다. 전혀 아니었어요.”
홍산아는 시무룩하여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대사령, 그 악마적인 존재를 얘기하고자 하면, 홍천교의 본래 모습부터 얘기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마디가, 그렇게 답답하였다.
오군은 심각하게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대사령, 대관절 정체가 무엇이었단 말인가. 단순히 마도의 무엇이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개방의 분타주로, 마도에 대하여서는 달달 외다시피 했다. 그렇지만, 대사령의 정체와 같은 술수는 좀체 떠오르지 않았다.
난처한 일이었다.
같이 듣고 있던 감천방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것 희한한 일이구려.”
“그렇지요.”
“그렇다고 한들, 이미 벌어진 일을 어찌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선후야 어떻든, 대사령은 마교를 끌어들였고, 지금 홍천교는 마교의 하부조직에 불과했다. 교도라 하는 이들 중에서 그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홍천세상이 열린다는 말 하나에 현혹되어서 죽기를 마다치 않는다.
자신을 비롯한 홍천교 직계는 총단이라고 이름 붙인 장원에 격리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곳에서, 교주가 탈출의 기회를 직접 만들어 보겠다고 했다.
“대사령이 돌아오면, 아마도 그때부터 진정한 수라장이 열릴 것입니다. 그전에 돌아가셔야지요.”
“어허, 어린 교주…….”
“하하,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요.”
홍산아는 애써 웃었다. 보이기 위한 웃음이었다. 밝은 웃음이었지만, 진심이라고는 일 푼도 실려 있지 않았다.
비추는 햇빛이 환하였지만, 아이 얼굴에 드리운 어둠을 거두어내지는 못했다.
다음날, 일은 신중하게 이루어졌다.
홍산아는 평소보다 한층 화려하게 일을 벌였다. 장원의 모든 이가 한껏 차려입고서는 꽃잎을 사방으로 뿌려댔다. 붉고 붉은 제의를 갖춘 홍산아는 가슴을 한껏 펼치고서 사뭇 당당하게 걸었다.
홍천교의 민초는 모두가 나서는 홍산아 앞에 부복하여서, 얼굴을 아주 깊이 숙였다. 땅속으로 얼굴이 파고들 듯했다. 비록 실권이랄 것은 없다지만, 홍천교주는 하늘 아래에 유일한 존재이고, 이들의 신앙이었다.
열망으로 가득한 광신의 기운을 받으면서 홍산아는 뽐내듯이 턱 끝을 세웠다. 그러면서 자신의 영역이랄 수 있는 홍천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교주시여, 어찌 그러시는지.”
“홍천이 이렇게 작았던가.”
홍산아는 가만히 중얼거렸다. 뒤에서 교주를 지키는 홍천병이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천의 변두리라고 하지만, 이곳을 홍천교가 접수하면서 불어난 사람과 물량은 어마 무지하였다.
아직은 성도와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불과 수년 만에 발전한 것을 생각하면 어마어마한 성장세였다. 그런데 교주는 이곳을 작다고 말한다.
홍천병은 어린 교주의 속내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입 밖으로 소리 내어서 묻는 불경을 저지를 수도 없다. 당장에 교주의 좌우를 지키는 시비들 눈초리가 예리하여서 얼굴이 따끔할 지경이었다.
“어흠, 노비가 교주 앞에 불경을 저질렀습니다.”
“아니, 신경 쓰지 않는다.”
홍산아는 대충 손을 휘저었다. 홍천병이 자신을 두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조금도 알 바가 아니었다. 아이의 눈초리는 먼 곳을 헤아리다가, 잠시 한쪽으로 돌아갔다.
아주 찰나에 지나지 않아서, 여기 누구도 홍산아의 눈길을 헤아리지 못했다. 그러고서 홍산아는 속 편한 미소를 머금었다.
“교주, 교주께서 웃으셨다!”
“홍천만대(紅天萬代)! 영생불사(靈生不滅)!”
“교주만세(敎主萬歲)! 후천세주(後天世主)!”
짧은 웃음이라도, 광신에 깃든 신도들은 그만 정신을 놓고서 있는 힘껏 울부짖었다. 그들을 향한 미소가 아니었지만, 그것을 구분할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홍산아는 그저 묵묵히 미소만 머금었다. 그러다가 문득 고개를 끄덕였다. 짧은 한 동작에 불과했다. 그래도 뜻은 명확하게 전해졌다.
“하아.”
안타까움이 실린 한숨이 재차 흘렀다. 오군과 감천방이었다. 그들은 홍천교주의 행차가 내려다보이는 산중에 있었다. 이곳 산을 통해야지, 사천 북방으로 향할 수 있었다.
평소라면 이곳에도 홍천교의 교도들이 배회하면서 번을 서는 곳이기도 했다.
그런데 대대적인 교주의 행차가 있어서, 이곳의 경계가 거두어졌다. 본래 홍천병이 은신하고 있을 자리에서, 두 사람은 홍천교주, 홍산아의 어린 모습을 멀리 지켜보았다.
아이가 이쪽을 향해서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 멀었으니, 자신들의 모습을 알아본 것은 아닐 터였다. 그저 미루어 짐작하고서 저리 표시하는 것이다.
영특한 아이였다.
오군은 씁쓸함에 고개를 흔들었다. 옆에서 갑주를 다시 갖춘 감천방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서 중얼거렸다.
“사교의 꼭두각시로 남기에는 참으로 아깝고도 안타까운 아이구려.”
“그러게나 말입니다. 본방에 들어왔으면 훌륭한 거지가 되었을 텐데.”
홍산아의 영민함을 두고서 한마디씩 주고받았다. 훌륭한 거지 운운에, 감천방은 잠시 멈칫했다. 그게 무슨 헛소리냐 싶었지만, 몸을 빼는 와중이라 굳이 입 밖으로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그, 그만 갑시다. 어린 교주가 저렇게까지 해서 벌어준 시간이니.”
감천방은 떨떠름한 얼굴이나마, 길을 재촉했다. 오군은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럽시다.”
안타까움을 일단 젖혀둘 때인지라. 오군은 한숨을 마저 꿀떡 삼켰다. 곧 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