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ti Demon God RAW novel - Chapter 272
272화. 무너지는 홍천
홍산아가 모습을 드러내자, 대로를 가득 메우고 있던 여러 교도는 일제히 무릎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대사령이 지닌 이능으로 교세를 다잡았다고 하지만, 아직 교도들의 정신적인 기둥은 교주였다.
홍천교의 어린 교주, 홍산아.
모친이 직접 세운 홍천교를 훌륭하게 이어받았다. 비록 그의 영향이라는 것은 이곳 홍천과 본래 홍천교가 일어선 사천 북방의 오지 정도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교주라는 지위는 여기 민초에게는 참으로 거대했다.
홍천불의 가호 아래에서, 고난 많은 삶을 위로받았다. 대사령이 말하는 홍천 세상도 좋지만, 그저 홍천교라는 공동체가 한참 소중했다.
홍천교주는 그런 상징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힘없는 자들이기도 했다. 오사령은 뿌드득, 이를 악물었다.
대사령의 명이야 어떻든, 여기서 교주를 치우고, 저 무지렁이들을 짓밟는다. 어쨌든 숨만 붙어 있으면 될 일이 아닌가. 뒤는 따로 맡을 사람이 있었다.
“교주!”
홍산아는 대여섯 걸음을 걷다가 멈춰 섰다.
“후우…….”
한숨이 절로 흘렀다. 입술은 바짝 말랐다. 태연한 척하고 있지만, 고작해야 열두세 살, 그 정도의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는다.
오사령의 살의는 참으로 솔직하게 엄습하였다.
오금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외면하지 않았다. 마지막의 용기를 다 긁어모으고서, 홍산아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
오사령이 자신을 돌아보면서, 한 손을 옆으로 길게 뻗었다.
“교주, 다음 생에는 당돌한 짓도 상대를 보아가면서 하시구려.”
간신히 들릴 정도로 낮은 속삭임이다. 그래도 홍산아의 귓가에는 벼락 치는 소리처럼 쩌렁하고 울렸다. 홍산아는 정면으로 마주하는 오사령의 살기에 입안이 바짝 말라붙었다. 그래도 억지로 입술을 떼었다.
“그건…… 오사령이…… 할……것이……아니.”
“음? 마지막 할 말이 있으신가?”
제대로 말이 나오지 않는다. 오사령은 고개를 비틀고서 되물었다. 그러자 홍산아는 목을 가다듬고, 다시 말했다.
“크흠, 큼. 그건 오사령이 걱정할 것은 내가 아니라 하였소.”
“하! 하하!”
끝까지 당돌하다. 오사령은 한껏 눈꼬리를 치켜들고서, 사뭇 사납게 외쳤다.
“그럼, 교주. 무엇을 걱정하면 좋겠나!”
“네놈 몸이나 걱정하라는 소리지.”
불현듯 오사령의 바로 뒤에서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어느 틈에, 라고 놀랄 것도 없다. 당황할 것도 없다. 스걱, 너무도 간단히 울린 소리가 몸을 흔들었다.
떨군 것은 자세를 잡는다고 뻗은 팔이다. 너무도 깔끔하게 잘려나가서, 핏물조차 뒤늦게 솟았다. 느리게 다가오는 고통이라니, 이보다 두려운 상황은 없을 것이다.
“어, 억!”
불명의 도객, 그는 빛 자체로 이루어진 것처럼 번뜩이는 칼날을 간단히 부렸다. 끊어진 팔은 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빛을 잔뜩 품은 칼날이 망막을 가득 채웠기 때문이다. 느리게 다가온다. 한없이 느릿느릿, 그러나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막강한 내공도, 대사령에게 받은 마공기력도 다 쓸모가 없었다. 이미 칼날은 코 앞이다.
‘제, 젠장! 이렇게 허망하게!’
생각은 거기서 끝났다. 빛줄기가 스쳐 지나치고, 눈앞의 세상이 뒤집어졌다. 솟구친 목은 이내 바닥으로 툭 떨어져서 데굴 굴렀다.
홍산아는 떨어진 목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일그러진 얼굴, 빛 잃은 눈동자, 과연 마지막에 무슨 생각을 하였을지. 아무래도 모를 일이다.
홍산아는 그만 눈길을 거두었다. 고개를 들자, 도객 위지백이 천천히 도를 거두고 있었다. 오사령을 베었으니, 나머지 홍천병이야 크게 알 바 아니라는 태도였다.
주변에는 정적이 내려앉았다. 홍천의 교도들은 물론이고, 홍천병들도 넋을 잃었다.
이런 일이 한순간에 벌어질 줄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그들에게 대사령을 비롯한 여러 사령은 모두 사람 아닌 자들이다. 홍천불의 신력이든, 마구니의 요술이 되었든 간에, 창칼이 들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각자 신묘한 이능을 부렸다. 그런데 저기 목이 떨어져 있다.
“오, 오사령!”
“오사령!”
홍천병들은 뒤늦게 소리를 높였다. 내내 망연자실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들은 당장 땅을 박차고 달려들었다. 이미 칼을 거두고서 턱을 세운 위지백을 향해서였다.
옷자락이 세차게 펄럭였다. 여기 널린 홍천병은 단순히 칼을 쥔 자들이 아니었다.
오사령이 직접 가르친 자들로, 솔직히 홍천교의 교인이라기 보다는 오사령의 수족들이다. 위지백은 딱히 떨어지는 칼날을 막을 생각도 않았다.
“캬아아악!”
힘껏 내지르는 괴성이 쩌렁 터졌다. 그러나 기합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맨 끝에 있던 홍천병 둘이 같이 땅을 박차며, 좌우로 몸을 돌렸다. 그러면서 거침없이 검과 도를 뽑았다.
“차합!”
“으랏차!”
검객과 도객, 둘은 전혀 다르면서도 절묘하게 합을 맞추면서 같이 몸 날린 홍천병을 향해 휘둘렀다.
위지백은 활약하는 둘 모습을 보면서 하하, 시원하게 웃었다.
“좋아, 좋아. 때를 딱 맞춰서 왔구만.”
“예, 위지 선생!”
도기영은 힘껏 외치고서는 대원도법을 어지럽게 펼쳤다. 몸을 타고 도는 유엽도가 흡사 톱니바퀴처럼 솟아나서는 사방을 휩쓸었다.
홍천병이 부랴부랴 창칼을 앞세웠지만, 진즉 선수와 거리마저 빼앗긴 마당이었다. 바닥에 붙는 것처럼 빠르게 맴돌았다. 그렇다고 아래에만 신경 쓸 수도 없었다. 허공을 박차 오른, 장관풍이 있었다.
검 끝을 가볍게 휘저으면 그대로 몸이 다시 날아올랐다.
솟구쳐 오르는 탄력을 빌어서, 휘둘러 떨치는 검적에 홍천병은 위아래를 조심하다가 목을 잃었다.
파파팍!
장관풍과 도기영은 그렇게 홍천병을 거침없이 휩쓸어 나아갔다. 위지백도 이를 드러냈다.
대로 바깥에서, 남은 홍천병이 우르르 몰려왔다.
“이놈들!”
칼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들은 대로 가운데에 웅크리고서, 옴짝달싹 못 하는 일반 교도들은 전혀 안중에 두지 않았다. 눈이 홱 돌아가서, 닥치는 대로 칼질할 참이다.
장관풍, 도기영이 급히 몸을 돌렸다.
“후우…….”
서른 두엇에 이르는 홍천병을 허를 찔러서 빠르게 베어버렸지만, 아직 배에 이르는 자들이 저렇게 달려오고 있었다. 남은 힘을 죄 쥐어짜 낸 참이라, 검과 도를 쥔 손이 들썩거렸다. 그래도 주저앉을 바에야, 이를 드러냈다.
“좋아, 와라! 마구니들아!”
“망할 것들!”
“그만하면 됐다. 둘은 쉬고 있어.”
힘을 쥐어짜면서 몸을 부르르 떨어댔다. 그런데 둘 사이로 위지백은 불쑥 지나쳤다.
“흐흐흐.”
몽상순천도, 그 극의가 여기서 펼쳐진다. 도영이 먼저 허공을 가르고, 뒤이어 날카로운 도경이 땅거죽을 죄 뒤집었다. 파파팍! 솟구치는 먼지 구름, 그러나 일어나는 무형의 도경은 그것마저도 갈랐다.
서거거걱!
칼로 막으면 칼과 함께, 창으로 막으면 창과 함께.
달려오는 것을 채 멈추지 못하고서, 허리 위아래가 덜컥 끊어졌다.
일제히 갈라버리는 무형의 도경은 더욱 뻗어 나가서, 대로 끝자락에 세우고 있는 돌벽마저 베어버렸다.
우르릉……
비스듬히 갈라진 벽이 낮은 울음을 토해내면서 밀려나다가, 와르르 무너졌다. 피어오른 먼지가 허리가 끊어진 홍천병의 시신을 뒤덮었다.
위지백은 산뜻한 표정으로 칼날을 가볍게 떨쳤다. 일도에 수십 목숨을 끊어낸 사람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홍천의 여러 민초는 물론이고, 숨을 고르던 장관풍과 도기영도 아연한 기색으로 위지백을 보고만 있었다.
“여봐, 교주. 이제 서두르지. 몸을 빼야 할 때야.”
위지백은 거둔 무광도를 다시 어깨에 기대어놓고서는 턱끝을 들었다.
재촉하는 말이다.
홍산아는 마른침을 한번 삼키고서,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홍천의 지하, 바로 홍천교주의 성소 바로 밑으로는 거대한 공동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곳이 무엇을 위한 공간인지는 우선 알 수가 없었다.
반구형으로 천장은 높았고, 자리는 한없이 드넓을 뿐만 아니라, 짙은 어둠과 함께 북풍한설보다 더욱 차가운 냉골의 강풍이 연이어 맴돌았다.
그곳은 바깥 홍천의 절반 이상에 달할 정도였다.
그 한복판에는 높이 올린 단이 하나 자리하고 있었다. 십여 장 높이로 쌓아 올린 단으로, 계단이 가파르다. 위에 화로가 하나 있어서,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
어디를 밝히고자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불빛이었을 뿐만 아니라, 몰아치는 냉풍에 수시로 꺼질 듯 위태하게 깜빡거렸다.
그런 자리이나, 화로 뒤에는 작은 인영이 있었다.
불안한 화로의 불길에 비친 인영은 불꽃 문양을 가득 새긴 장포를 늘어뜨리고, 장포에 달린 두건을 깊이 눌러쓴 채였다.
인영은 고개 숙인 채, 묘한 주문을 끝없이 읊조렸다. 일심으로 집중하는 모습이다. 그런데 인영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웅얼거리는 주문 소리가 끊기고, 하얀 턱이 드러났다.
“응?”
의아한 목소리가 문득 흘렀다.
고개 들어서, 단보다 훨씬 높이 자리한 반구형의 천장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까마득한 천장에 고인 어둠은 하염없이 짙으려나, 밝은 눈은 어려움 없이 둥근 천장을 노려보았다.
마치 너머를 꿰뚫어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깊은 눈빛이었다.
두건 아래에서 하얀빛이 강하게 번뜩였다.
눈으로 보는 것은 아니다. 울리는 소리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감지했다. 멀고, 높아서 미세한 소리에 지나지 않겠지만, 인영은 그 정도는 능히 가능했다.
홍천교의 실세라 하는 대사령이 바로 본인이기 때문이다.
대사령은 떨림을 감지했고, 그것을 구분할 수 있었다. 여럿의 인원이 다급하게 물러나는 소리였다. 그저 오가거나, 다툼이 이는 것이 아니다.
홍천에 거하던 뭇 교인들이 줄지어 빠져나가고 있다.
대사령은 땅속의 광장에 앉아서는 그 상황을 짐작했다.
“이런, 이런, 이런 일이 있나. 대성회의 때가 이제 무르익었건만. 오사령은 무엇을 하는 게야.”
가만히 읊조리는데, 목소리가 기이했다. 어떻게 들으면, 어린아이의 목소리 같고, 또 어떻게 들으면, 한참 나이든 노인의 목소리 같기도 하다.
연배뿐만이 아니었다. 남녀의 구분도 쉽지 않은 목소리였다.
대사령은 고개를 흔들었다. 두건이 펄럭였다. 이곳에서 때를 기다리기를 벌써 수삼 일이다.
미리 준비한 계책 하나가 어린 교주의 훼방으로 영 글러서, 다음 계책으로 들어간 참인데. 하필이면, 그마저 바로 코앞에 두고서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바탕이 될 자들이 없어서는 대성회라는 말이 되지 않는 일이지. 오사령이라면, 누구라도 능히 제압할 수 있을 터인데. 희한하군, 그가 상대하기 어려울 정도의 고수가 사천에 따로 있다는 건가?”
대사령는 더 생각하기를 관두고서 느리게 몸을 일으켰다.
“좋지 않아, 좋지 않아.”
대사령은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그러나 손 놓고 있을 수도 없었다. 이번에는 때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대사령은 긴 장포를 질질 끌면서 걸음을 옮겼다. 단을 내려가는 것이 아니었다. 허공으로 보이지 않는 다리를 놓은 것처럼 사뿐사뿐 허공을 밟으면서 내려갔다.
완벽한 반구형의 광장, 그곳에 드나드는 길목은 수십이나 있었지만, 밖으로 향하는 길목은 오직 하나뿐이다. 대사령은 정확히 그곳을 향했다.
그런데.
투웅!
대사령은 문득 몸을 가누고서 고개를 치켜들었다. 어디서 울리는 것인가. 이번에는 전혀 방향을 잡을 수가 없었다.
다시 소리가 울렸다. 낮고, 묵직한, 그리고 불길한 소리였다.
투우웅!
소리가 한층 가깝다.
잠깐 사이에 바짝 다가선 듯했다. 눈동자를 굴리던 대사령의 고개가 한쪽으로 홱 돌아갔다.
반구의 천장, 그 복판에서 어둠이 요동쳤다. 그리고 재차 소리가 터졌다. 이번에는 바로 코앞에서 마른벼락이 치듯, 전혀 다른 소리였고, 아예 천장을 무너뜨렸다.
꽈릉!
거대한 공동이 내려앉을 것처럼 세차게 요동쳤다. 그리고 말 그대로 집채만 한 바위가 연이어 떨어졌다. 바위는 대사령이 막 내려선 높은 단을 그대로 짓이겼다. 연이어 뚝뚝 떨어지는 데, 그럴수록 대사령의 얼굴을 딱딱하게 굳어갔다.
왈칵 닥쳐오는 흙먼지는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단 위에서 그나마 불빛을 보이던 화로는 진즉 짓눌려서 사라졌다. 대사령은 거대한 바위 아래를 한참이고 바라보았다. 두 눈에 맺힌 하얀 안광이 복잡하게 흔들렸다. 곧 천천히 고개를 치켜들었다.
떨어질 것은 다 떨어졌는지. 윙윙 울리는 소리가 주변을 가만히 맴돌았다.
“으흐음!”
대사령은 꾹 이를 악물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사람의 솜씨라고는 전혀 볼 수가 없는 일이 바로 눈앞에서 벌어졌다. 바깥의 햇빛이 흐리게나마 비추어 들어왔다. 그런데 대사령은 찰나 눈을 번뜩였다.
흐린 광선 아래로, 누군가가 있었다. 흙먼지를 하얗게 뒤집어썼지만, 그래도 사람의 모습이었다.
거대한 바윗돌과 함께 덜어진 그는 느릿느릿 허리를 세웠다. 부스스 먼지가 떨어진다.
그는 흘깃 고개를 들어서 떨어진 까마득한 높이를 한 번 확인하고,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고는 왈칵 성을 냈다.
“이런 빌어먹을! 뭐, 이딴 데다가 만들어 놓고 난리야!”
공동에서 맴도는 냉골의 바람이, 일어난 먼지를 씻은 듯 밀어냈다. 왈칵 성을 낸 사내는 이내 어깨며, 허리며 연신 두드렸다.
사내가 터뜨린 일성은 웅웅, 공동 주변을 타고 크게 울렸다. 먼지와 함께 헝클어진 머리를 대충 쓸어넘겼다.
소명이었다.
성소의 비처에서 따로 길을 찾기보다는 아예 때려부수면서 아래로, 아래로 내려온 참이었다.
그 모습조차 대사령에게는 방자하기 그지없다.
대사령은 잠시 멍해 있던 것을 부랴부랴 정신 차리고서, 새삼 노기를 드러냈다.
“으음. 이곳은 허락받지 않은 자의 출입을 금하는 곳이거늘. 어느 잡인이 감히 발을 들이느냐?”
기괴한 목소리가 벽을 타고서 어지럽게 울렸다. 그런데 소명은 다른 대꾸가 없었다. 옷을 툭툭 털고는 곧 찌푸린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 살폈다.
공동, 참으로 드넓은 자리. 어둠이 묵직하게 고여 있는데. 사방으로 우뚝 서 있는 그림자가 하나, 둘이 아니었다. 소명은 슬그머니 입술을 깨물었다.
대사령은 소명에게 다가서면서 재차 목소리를 높였다.
“음, 바깥의 변고도 그렇고, 한낱 잡인 따위라 할 수는 없겠구나.”
“…….”
“허허, 끝내 말을 않겠다는 게지? 좋다. 어디 상판 한번 제대로 보자꾸나!”
바깥에서 떨어지는 흐린 빛으로는 아무래도 부족하다.
대사령은 작은 손을 활짝 펼쳤다. 그러자 공동 벽에 드문드문 걸려 있던 유등이 폭발하듯이 화르륵 불길을 토해냈다.
불길은 유등과 유등 사이를 빠르게 치달렸다. 좌우 벽으로 붉은 불이 들러붙어서 뜨거운 열기와 함께 붉게 타올랐다.
닿을 듯이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그림자는 빠르게 물러가고, 소명의 모습은 물론, 광장에 빼곡하게 서 있는 수백, 아니 천몇백을 헤아릴 정도의 창백한 얼굴이 드러났다.
소명은 무너지면서 쌓인 바위 위에 우두커니 서서, 대사령을 가는 눈초리로 내려다보았다. 차가운 눈빛은 차가운 분노를 담고 있었다.
불길에 드러나는 것은 소명뿐만이 아니다. 대사령도 그 작은 체구를 그대로 밝혔다.
대사령은 두건 아래에서 하얀 눈을 번뜩이다가, 천천히 손을 들었다. 작은 손이 걸친 두건을 뒤로 넘겼다. 그리고 사뭇 기이한 외양을 드러냈다.
머리는 터럭 한 올이 없었고, 눈썹은 하얗게 물들어 있었다. 그러나 정작 얼굴은 열하나, 둘쯤이나 되었을까. 어린아이의 모습이었다. 그러면서도 왼쪽 눈가를 뒤덮는 푸른 불꽃의 문양이 문신처럼 선명했다.
얼핏 홍천교의 다른 거점에서 홍혈족 마녀와 같이 마주한 마동과도 흡사한 모습이다. 일체의 이지 없이, 흉성만을 지닌 마도의 인간병기.
그러나 두 눈은 전혀 달랐다. 하얀 눈썹 아래에서 이글대는 두 눈동자에는 깊은 세월을 지녔다. 소명의 짙은 눈썹이 한차례 꿈틀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