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ti Demon God RAW novel - Chapter 28
28화. 붕우(朋友)
호충인의 얼굴은 더욱 어두워졌다. 상부에 보고하고 나왔을 때보다 더 좋지 않았다.
여인을 뿌리치고 처소가 있는 후원까지 왔지만 더 걷지는 못했다. 담 벽에 등을 기대고 긴 숨을 토했다.
“하, 젠장.”
호충인은 헛웃음을 흘리며 힘없는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입 안이 쓴맛으로 가득했다. 검게 탄 얼굴이 근심 탓에 더욱 어두웠다.
“이런 기분으로는 쉴 수도 없겠군.”
마음을 고쳐먹은 호충인은 발길을 돌렸다. 차라리 조원들과 한잔하는 편이 속 편할 것 같았다.
주로 들락거리는 북문 쪽으로 향했다. 호충인의 얼굴을 아는 위사들이 그를 제지하는 일은 없었다.
“호 조장님.”
“오, 수고.”
알아보는 위사에게 심드렁하게 대꾸하고는 문을 나섰다. 조원들이 갈 곳은 뻔했다. 단골집으로 걸음을 옮기려는데 뒤에서 누가 그를 불렀다.
“충인아.”
“응? 어떤 놈이…….”
들려온 목소리에 호충인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등용문 내에서 그의 이름을 편히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문주 이외에는 없었다. 그리고 이 목소리는 문주의 것이 아니다.
한 사내가 북문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자신을 보며 환히 웃었다. 호충인은 눈을 깜빡거렸다. 가만 보니 낯이 익은 듯한 얼굴이었다. 앞머리가 눈을 덮고는 있었지만 어쩐지 신경에 거슬리는 입매가…….
긴가민가하는 얼굴로 있던 호충인은 버럭 소리 질렀다.
“어, 너, 너!”
가리키는 손가락 끝이 바들바들 떨렸다.
놀라는 호충인의 모습에 소명은 히죽 웃었다.
‘역시, 알아보는구나.’
세월이 많이 흘러 자신의 외양도 크게 변했건만. 소명은 흐뭇했다. 그러나 소명의 웃음이 무색하게, 호충인은 욕설을 토하며 당장 주먹을 쥐고 달려들었다.
“소명! 이 망할 자식아!”
“우, 우엇!”
부웅!
코끝을 스치고 지나친 주먹 끝이 매서웠다. 공력씩이나 끌어올리지는 않았지만 진심을 다해 내지른 주먹이었다.
“야, 야!”
“이 새끼! 죽어! 죽어!”
호충인이 연이어 주먹을 내갈겨왔다. 소명은 몸을 웅크렸다. 때리는 주먹은 아팠지만 그래도 웃음이 나왔다. 한참 난동을 부리던 호충인은 곧 씩씩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소명은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좀, 풀렸냐?”
“헥, 헥, 헥……. 썩을 놈.”
호충인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일그러진 얼굴에 힘없는 웃음을 그렸다.
“안 죽었었냐?”
“모자란 네놈을 두고 이 형님이 어떻게 먼저 가시겠냐.”
“헹, 형님 같은 소리 하네.”
소명이 던진 농에 호충인은 싸늘하게 비웃었다.
그 모습에 안절부절 못하는 이들이 있으니, 북문을 지키던 위사들이었다. 호충인을 찾아왔다는 말에도 믿지 않고 내쫓으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소명도 호충인도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호충인은 술집이건 뭐건 다 잊고는 소명을 끌고 자신의 처소로 향했다.
호충인의 처소는 꽤 넓었다.
“오, 정말로 출세했구나.”
소명은 탄성을 흘리며 방 안을 두리번거렸다. 그 모습에 호충인은 피식 웃었다. 솔직히 그리 볼 것도 없는 방이었다. 조금 넓기만 할 뿐이었다.
그래도 소명의 호들갑이 싫지 않았다. 그는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어떻게 지냈냐?”
“그냥, 이렇게 저렇게.”
소명은 딴청을 피우며 대꾸했다.
“아저씨는?”
“……편히 가셨어.”
“그렇구나.”
담담한 소명의 말에 호충인은 더 묻지 않았다. 한바탕 주먹다짐으로 회포를 풀고 난 후, 소명과 호충인은 마주앉아 담담하게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사이에는 박주(薄酒)에 박찬(薄饌)이 전부였지만, 소명은 불평하지 않았고 호충인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상화촌에는 들른 거냐?”
“음.”
“거기는 여전하지?”
“…….”
호충인은 웃으며 물었다. 소명은 술잔을 입가에 가져가던 손을 잠시 멈칫했다. 흘깃 호충인을 보자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이었다.
소명은 술잔을 들이키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뭐. 놀랄 정도로 여전하더라.”
“다행이네. 이상하게 요즘 들어 소식이 없더라니까. 몇 번씩 전서를 보내도 묵묵부답이니.”
넋두리하듯 하는 호충인의 말에 소명이 미간을 잠시 찌푸렸다.
‘묵묵부답이라?’
상화촌에서 호충연도 같은 말을 하지 않았던가. 서로 소식이 없음을 탓하고 있었다.
술잔을 입에 댄 채, 소명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흘깃 고개를 들자 밝힌 황촉의 불빛 때문인지 취기 때문인지, 호충인의 얼굴이 크게 붉었다. 그러나 웃고는 있어도, 그의 얼굴에는 감추지 못한 어둠이 있었다. 뭔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소명은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너도 많이 힘들겠다.”
“응? 아…… 뭐, 그렇지. 야, 하남제일세에서 이 나이에 조장으로 행세하는 게 좀 쉬운 일 같으냐? 존경해라, 자식아. 하하하.”
“아이구, 어련하시겠어.”
호탕하게 웃고는 호충인은 다시 상화촌의 일을 물었다.
“다른 녀석들은 어떻게 잘 지내냐? 당민, 그 가시나, 이청이랑 잘 됐을라나.”
“……다들 떠났더라.”
“응?”
옛적을 추억하듯 말하는 호충인에게 소명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 말에 그는 멈칫했다. 호청연에게 들은 대로 말해주자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 다들 떠났구나. 그것 참, 아버지께서 많이 쓸쓸해하시겠네.”
“시간 내서 찾아뵙지 그러냐?”
“나도 마음은 굴뚝같은데.”
호충인은 말하며 다시 술병을 기울였다. 쪼르륵 차오르는 술잔을 보는 눈길이 참 복잡했다.
“등용문에 들어가겠다고 했을 때, 아버지한테 정말 엄청나게 두들겨 맞았다. 그렇게 처맞고도 기어이 나선 강호다. 쉽게 돌아갈 수야 없지.”
“하하, 들었어.”
“뭐? 듣다니?”
“청연이가 얘기해주던데. 뭐, 복날에 개 맞듯이 처맞았다나?”
“끅! 호청연…… 이걸 그냥…….”
호충인은 뿌득 이를 악물었다. 눈앞에 호청연이 있다면 당장 어떻게 할 기세였다.
‘네가 아무리 날고 기어봤자 청연이한테는 안 된다.’
소명은 속으로 피식거리며 웃었다.
밤은 깊어갔다. 창틈으로 달빛이 새어들었다. 주로 떠드는 쪽은 호충인이었고, 소명은 맞장구를 치며 귀를 기울였다.
험한 강호에 나선 지 사오 년.
등용문의 말단으로 시작해 조장에 오르기까지 호충인이 겪어온 온갖 무용담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적당한 허풍을 감안해 들으며 소명은 크게 웃고, 같이 화를 냈다.
그때였다.
소명은 다가오는 작은 기척에 기울이던 술잔을 멈칫했다. 취기가 돌았지만 기척을 놓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모른 체했다.
작은 기척은 조심스레 문 앞에까지 다가왔다.
호충인은 계속해서 껄껄거리며 웃었다. 그의 웃음은 과했다. 그리 우스운 얘기도 아니었다. 술기운 때문이라 하기에도 어려웠다. 기척을 눈치챘음에도 애써 모른 척하려는 듯했다.
숨은 사연이 있는 듯했다. 소명은 술잔을 기울이며 눈을 빛냈다. 다가오는 기척의 경중을 헤아리건대 여인이 분명했다.
그녀는 문 앞에서 주저하다가 크게 용기를 내는지 흠흠 목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조심히 입을 열었다.
“호 가가.”
문틈으로 흘러들어온 목소리는 맑고 또렷했다. 껄껄 대소하던 호충인도 더 모른 척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여인은 재차 그를 불렀다.
“호 가가.”
“…….”
웃음이 뚝 그쳤다. 순간 굳은 얼굴로 닫힌 문을 노려보았다. 번뜩이는 안광이 문을 뚫고 나가 다가선 여인에게까지 닿을 듯했다.
“누가 너 찾는 것 같은데?”
“음, 미안하다. 잠깐만.”
호충인은 굳은 얼굴에 억지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소명은 신경 쓰지 말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호충인이 방문을 나서기가 무섭게 술잔을 내려놓고 쫑긋 귀를 세웠다. 슬그머니 올라가는 입매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자리를 피하려는 듯 걷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곧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왜 와주지 않으셨나요, 가가?’
‘하아, 아가씨…….’
멀리 간들, 두 남녀의 목소리를 막기에 벽은 너무 얇았다. 아니, 소명의 귀가 너무 밝은 것일지도 몰랐다.
‘아가씨라고 부르지 마세요. 왜, 왜 저를 그리 밀쳐내시나요?’
‘…….’
여인의 목소리는 너무 간절했다. 그러나 대하는 호충인의 태도는 무뚝뚝했다. 그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다시, 먼 길을 떠나신다고 들었어요. 오늘 아니면 또 뵙기 어려울 것 같아서…….’
‘돌아가십시오, 아가씨. 밤이 깊었습니다.’
‘가, 가가.’
침묵 끝에 나온 호충인의 말은 차가웠다. 여인은 상처받은 듯 더듬거렸다. 그러나 호충인은 성큼 방으로 돌아왔다. 문이 왈칵 열리는 순간, 소명은 고개를 돌리며 술잔을 들었다.
“생각보다 일찍 왔다.”
“음, 아니, 뭐.”
웃으며 던진 가벼운 말에 호충인은 얼버무리며 자리에 털썩 앉았다. 낯빛이 워낙에 좋지 않아 소명으로서는 더 묻지 못했다.
소명은 혼자 술을 홀짝였다. 그러는 사이사이 곁눈질로 호충인의 낯빛을 유심히 살폈다.
그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
“너, 혹시…… 들었냐?”
“응? 뭘?”
소명은 무슨 소리냐는 듯이 되물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렇지만 호충인은 그 얼굴이 더욱 찝찝했다.
“아, 아니다.”
호충인은 고개를 흔들며 술병에 손을 뻗었다.
“근데 누구였냐? 목소리가 참 곱던데.”
“…….”
술병에 닿은 손가락이 멈칫했다. 흔들리는 속내가 빤히 보였다. 호충인은 손을 거두고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그의 얼굴은 어두웠다.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문혜선, 문주님의 따님이시다.”
“문주? 등용문의?”
“그럼 내가 달리 문주님이라고 할 사람이 누구 있겠냐?”
호충인은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
“너 인기가 많은 모양이다. 문주의 딸이 이 밤에 너한테 다 찾아오고.”
소명이 실실 웃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러자 어색하게나마 맺혀 있던 호충인의 웃음이 점점 사라졌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은 흡사 가면이라도 뒤집어쓴 것 같았다.
호충인은 잠시 말을 않고 술상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빈 술잔을 손끝으로 빙글 돌렸다.
“그녀를 만난 건 내가 갑자조장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침묵 끝에 호충인은 입을 열었다.
소명은 직감적으로 지금 호충인이 말하는 그녀가 문혜선이 아님을 알았다.
“그녀는 항상 백의를 즐겨 입지. 양광 아래에서 처음 본 그녀의 모습은 흡사 선녀가 강림한 듯했다.”
고개 숙인 호충인은 지금 생각해도 황홀하다는 듯이 눈가를 붉혔다.
백의선영(白衣旋影) 기원원.
그녀는 문주의 딸인 문혜선의 호위무사인 동시에, 스승이나 다름없는 여인이었다. 그녀의 사문내력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었지만, 이제 이립(而立: 서른)의 나이에 벌써 절정에 이르렀다고 했다.
기원원에 대한 마음을 깨닫는 순간, 호충인은 적극적으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그녀는 호충인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았다. 아니, 차라리 그뿐이라면 지금 호충인이 이렇게 괴롭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호충인은 말을 멈추고 술을 따라 그대로 들이켰다.
“내가 싫어서 그런다면 이해할 수 있어. 남자답게 물러날 수도 있다고. 하지만, 하지만…… 이건 아니잖아.”
“충인.”
차분하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시종 담담함을 유지하던 그가 감정을 드러낸 것이었다.
내용인즉슨, 그에게 크게 상처를 준 이는 기원원으로, 그녀가 문혜선과 호충인을 이어주려 한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감정과는 무관하게.
호충인은 애써 웃으며 말했다.
“차라리 지금처럼 여기저기 내돌리는 편이 좋다. 최소한 보지 않을 수 있으니까. 바쁜 중에는 잊을 수 있으니까 말이야.”
말로는 좋다고 하지만, 소명의 눈에 비친 호충인의 얼굴은 괴로움으로 가득했다. 웃는 얼굴조차 괴로움에 울부짖는 것만 같았다.
정한(情恨).
그것은 속일 수도 없고, 가장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잠시 뜸을 들인 소명은 조심스런 어조로 물었다.
“그, 문혜선이라는 소저도 알고 있는 거냐?”
“문 아가씨? 글쎄다. 난 모르겠다. 적어도 내 입으로는 말한 적 없다. 그녀로서는…… 갑자기 변한 내가 원망스럽겠지.”
호충인은 무심히 대꾸했다. 그리고 이리 털어놓은 것이 속 시원하다는 듯이 껄껄 웃었다.
“하하, 그래도 옛 친구가 있어 좋구나. 이런 얘기를 누구한테 할 수 있겠냐?”
“힘들었겠다.”
“힘들다. 지금도 힘들고, 앞으로도 힘들겠지.”
담담하게 대꾸했다. 지금을 견뎌내는 사람의 모습이었다. 소명은 다른 말 않고 술잔을 들어 보였다. 그러자 호충인도 마주 웃으며 술잔을 들었다.
마련한 술은 고작 한두 병에 지나지 않았지만 둘은 밤을 하얗게 지새우며 술잔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날이 밝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