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ti Demon God RAW novel - Chapter 289
289화. 불가지원(不可知原)
도망하듯 뛰쳐나온 탁연수는 휘적거리면서 다가왔다. 아직 높은 사천련의 서촉백기, 가까이에서 당민이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녹면을 거두고서, 평범한 치마저고리 차림으로 한숨을 돌리고 있던 차였다.
당민은 다가오는 탁연수의 모습에 넌지시 물었다.
“이청은?”
“죽겠다고 하지. 아닌 게 아니라, 서류에 짓눌려서 딱 죽기 직전이더만.”
“흐음.”
당민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달리 걱정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탁연수는 일단 어깨를 나란히 하였다가, 슬쩍 곁눈질로 흘겨보았다.
“안 가봐도 되겠나?”
“싫은데.”
당민은 딱 잘라 말했다. 괜히 가까이 갔다가 발목 잡힐라.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당민이라면 붙들릴 만했다. 눈을 가늘게 떴다가, 탁연수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 잘 생각했다.”
“그보다, 산서 쪽은 어때?”
“완벽하게 정리했지. 마도 놈들, 꼬리 하나 남기지 않고 싹 쓸어버렸단 말씀이야.”
탁연수는 파리한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었다. 바로 답하는 모습이 당당했다. 어떻게? 라고 묻지는 않았다. 오랜 침묵을 깨뜨린 강시당은, 그 자체로 전설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당대 당주, 탁연수는 강시당의 수백 년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도, 보기 드문 성취를 이루어냈으니.
당민은 입술을 비틀었다.
“아이고, 그래서 이제 오셨어요?”
“야, 중원의 절반을 가로질렀는데. 그리 매정하게 말할 거 뭐 있냐. 게다가 다른 놈들도 아니고, 마도 것들인데. 아주 단단히 준비해서 왔단 말이다.”
탁연수는 분한 듯, 세차게 두 주먹을 마주쳤다. 쯧, 혀까지는 차는 것이 진정이었다. 드문 모습이었다. 당민은 새삼 뜻밖인 눈으로 보다가, 곧 눈살을 찌푸렸다.
“아하, 그래. 단단히 준비한 것을 써보지 못한 게 안타까우시다?”
“응? 아니. 뭐 그렇게까지는 아니고.”
당민의 어조가 심상치 않은 것을 감지하고서, 탁연수는 바로 꼬리를 내렸다. 슬쩍 턱을 당기고서 노려보는 눈초리가 언뜻 험한 기색이 어려 있었다.
보기에도 심사가 슬슬 꼬일 듯하니. 이쪽 눈치로는 천의무봉이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탁연수라, 냉큼 몸을 돌렸다.
“어구, 어구구, 허리가 뻐근하구만. 말을 너무 오래 탄 모양이야. 어구구……. 호충인, 이놈은 어디에 있으려나?”
“쯧!”
한눈에도 도망하는 게 분명했다. 그래도 당민은 혀 한번 차는 것으로 대신했다.
이래저래 발끈하기는 했어도, 자신이 도움을 청하는 하나에 만사를 다 제쳐놓고 달려온 친구였다. 피식 쓴웃음을 짓고서 몸을 돌렸다.
“그것보다 걱정은……. 역시 저쪽이겠지.”
당민은 한숨을 삼키고 눈매를 지그시 모았다.
대로 저편에서 한 무리의 비구니가 조용히 걸어가고 있었다. 아미의 제자들이었다.
다만, 며칠이라도 어찌 몸을 쉬는 편이 좋겠지만, 저들로서는 차라리 힘든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성도에서 아미까지는 그리 멀다고 할 수는 없어도, 일조일석에 닿을 거리도 아니건만. 당민은 고개를 들었다. 변덕 심한 사천 날씨, 그래도 안개가 차츰 걷히면서 양광이 스며들었다.
“응?”
때마침일까.
후미에서 조용히 걷던 한 이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방갓 끝을 치켜들고서 돌아보는데, 마치 당민과 눈길이 마주쳤다.
장우빙이다.
그 또한 생각지 못하여서, 눈을 잠시 동그랗게 떴다. 당황도 잠시, 이내 흐린 미소를 그렸다. 장우빙은 가슴 앞에 한 손을 세우고는 꾸벅, 깊이 허리 숙였다.
거리는 상당했지만, 감사를 표하는 진심을 엿볼 수는 있었다.
당민도 여기서는 그저 어리게 대할 수 없는 일, 자세를 고치고는 정중하게 두 손을 맞잡았다.
“부디 건승을…….”
무슨 다른 말을 할 수 있겠나.
당민은 아미파 모습이 한참 멀어질 때까지 내내 자리를 지키다가, 곧 몸을 돌렸다. 그가 향한 곳은 사천련이 아니라, 천룡의 저택이었다.
이제는 그곳이 제집이나 다름없었다.
궁가대원.
그곳 후원에서, 소명은 모두 모인 친구들과 자리를 함께하고 있었다. 그들 모습에 괜히 코끝이 다 시큰하다.
상화촌 오인방이 한자리에 모여 있다. 그것만으로도 가슴 뭉클해지는 일이다. 어린 시절 모습이 새삼스럽다.
중에는 죽다 살아난 놈도 있다.
“이렇게 한자리에 모인 것이 대체 얼마 만이지?”
“한 놈을 찾아놓으면, 또 한 놈이 없어지고. 또 한 놈이 일 생기고. 하이고, 참.”
소명은 혀를 내둘렀다. 여기서 얽히지 않은 사람이 대체 누가 있더냐.
호충인, 탁연수, 이청, 그리고 이제는 당민까지. 다들 쓴웃음을 지었다. 크고 작은 일이 정말 여럿 있었다. 가까이 있던 호충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 일이 참 끊이지 않았다.”
“너는 그냥 네놈이 미련했던 것이고.”
“뭐야? 와중에도 지금 따지는 거냐?”
“다른 녀석들이야 어떻든, 네놈은 내가 조심하라고 했었지.”
“어, 그게. 그랬나?”
호충인 순간 발끈했다가, 소명의 착 가라앉은 말에 움찔 어깨를 들썩였다.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묘한 표정의 호충인은 내버려 두고서, 나머지는 새삼스럽게 얼굴을 굳혔다.
“이게 끝일까?”
탁연수가 한마디를 던졌다. 어조는 가볍지만, 마냥 가볍게 여길 만한 물음이 아니었다.
사천 일이 마무리되었다고, 마냥 안도하고 있을 상황은 아니었다. 산서에서도, 하남에서도, 심지어 강남 일대에까지 말하자면 성마교가 배후에 있는 상황이었다.
여기 일을 마무리했다고 끝이 아닌 게다.
사천은 그야말로 일성을 뒤흔들 만한 내란에 가까운 일이었다. 백성의 피해를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다.
“강남에서는 무가련이 힘을 써서 다행이지.”
“섬서에서는 화산과 백가, 그리고 호북에서는 무당이 나서서 상황을 수습했다고 하더군.”
“그래도 당장 피해를 말하자면…….”
소상하게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겠지만, 흘려버린 피와 생명이 너무도 많았다.
혈세천하(血世天下)라, 그것은 이미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었다.
대관절 무엇을 위한 피였고, 무엇을 위한 희생인지.
무림의 피해는 말할 것도 없고, 그에 휩쓸려서 터전을 잃거나, 목숨을 잃은 민초들은 또 어떠한가. 하나하나를 생각하면 정말 끝도 없어라.
이청은 한층 어두운 얼굴로 그만 두 손을 들어서 얼굴을 덮었다.
“열이 나는 것 같군.”
“골치가 이만저만이 아니야.”
“어려운 것은 알겠어. 그럼, 그놈들 다음 목적은 뭐라고 생각하나?”
“글쎄.”
예측이 어렵다는 점에서, 성마 무리의 수작은 한층 교묘하다. 상당한 피해를 감수하면서까지 동시다발적으로 일을 벌였다.
개중에는 소림사처럼 갑자에 가까운 세월 동안 준비한 곳도 있었고, 하남, 하북처럼 이제 막 손을 쓴 곳도 있었다. 그런 안배를 일거에 발동한 셈이다.
사천의 일도 그 하나라 하겠다.
대관절 무엇을 위해서인가. 차라리 천하를 제패하겠다고 하던가, 과거의 원한을 갚아내기 위해서라던가, 하는 등의 일이면 또 모르겠다.
지금껏 알아낸 것은 뜬구름 같은 소리로, 존체가 어쩌고 하겠다는 것인데. 그것과 천하의 소란은 또 무슨 상관이란 말인지.
다들 고민이 깊었다. 마도라고 하는 것들, 그 위험을 각자가 실제 경험하지 않았는가. 마땅히 신중해야 할 일이니, 다들 입을 꾹 다물었다.
“천하가 더욱 혼란하겠는걸.”
누구의 말인가. 불쑥 내뱉은 한 마디가 묵직한 침묵을 깨뜨렸다. 눈치 없이 하는 말이다.
일제히 고개가 돌아가면서, 쓰으……. 잇새로 험한 소리를 흘렸다. 쏟아지는 눈길이 따가워서, 별생각이 없던 얼굴이 이내 머쓱해져서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크, 크흠. 크흠. 아니, 난 뭐. 걱정이. 그러니까, 그렇지…….”
주저하면서 하는 말이 참 옹색하다. 호충인은 괜히 억울했지만, 더 말해서 눈총을 사지는 않았다. 거기까지는 그래도 눈치가 있다고 해야 할지.
“등용문주가 저래서야 어디……. 소림파는 앞으로 괜찮은 거냐?”
“아니,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당대 용문제자가 아니면 누구한테 물으라는 거야?”
“이런.”
놀리는 기색이 역력하다. 소명은 그저 고개만 절레절레 흔들었다. 호충인이 말 꺼낸 탁연수를 향해서, 달려들 것처럼 두 눈을 한껏 부라렸다.
고민과 걱정도 중요하지만, 어디 마냥 그렇게 축 처져있을 수만 있겠나. 다섯은 곧 이런 저런 얘기를 차분하게 주고받았다.
면박을 주기도 하고, 실소가 흐르기도 한다. 한 세월을 묵혀둔 옛이야기를 가만가만 나누기에 한밤은 그저 짧기만 하겠다.
밤은 그렇게 깊어갔다.
“하하, 하, 하아…….”
소명은 문득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흐린 미소를 머금은 채, 앞에 있는 친우들 모습을 한참이고 바라보았다.
강호는 무정이다. 그러나 인간이란 또한 홀로 나아갈 수만은 없지 않은가. 여기 있는 친구들이야말로, 지금 소명으로 하여금, 소명으로 있을 수 있게 한다.
권야가 어떻고, 용문제자가 어떻고 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 다시 없을 귀중한 인연이고, 보배이다.
한참을 떠들던 참에, 불현듯 일제히 입을 닫고 고개를 돌렸다. 서두르는 소리가 이쪽을 향해서 다가오고 있었다. 후원의 담은 높고 두꺼웠지만, 여기서 바깥 기척을 감지하지 못할 이는 없었다.
“일이 생긴 모양인데?”
이청이 고개를 갸웃하면서 후원으로 바로 들어설 수 있는 월동문 쪽을 살폈다. 이내 그곳으로 누군가의 그림자가 들어섰다.
그림자는 차마 안으로 들어오지는 못하고 조심하는 기색으로 기척을 내었다.
“권야 공.”
“무슨 일이오.”
“중원에서 대지급으로 소식이 왔습니다. 본가에서 전한 것인데…….”
그는 월동문의 그림자에서 한 걸음 나섰다. 신룡대의 부대주, 마량이다. 불빛에 드러난 그 얼굴은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어 있다.
일이 벌어진 것만은 분명했다.
마량이 즉각 다가와서 천룡의 풍운첩을 건네었다. 그 문양이며, 재질이며 분명 천룡본가에서 온 것이 분명했다. 소명은 의아한 기색으로 풍운첩을 펼쳤다.
힘찬 필체였지만, 급한 소식이라는 게 한눈에 드러날 정도로 글자가 다급했다.
소명은 천천히 읽고서, 다시 눈동자를 돌렸다. 두어 번을 거듭하여서 위아래로 보고 난 뒤에 소명은 풍운첩을 덮었다. 그리고 풍운첩의 단단한 표지를 톡톡 두드렸다.
“이게 지금…… 사실이오?”
“소식을 접하기가 무섭게 바로 가져왔습니다.”
“그렇군.”
소명은 으득 이를 악물었다. 마량은 마치 자신이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한껏 조심하는 모습으로 소명의 눈길을 차마 마주하지 못했다.
그만큼 참담한 소식인 까닭이었다.
이쪽을 보고 있는 친구들, 와중에 탁연수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들어섰다.
“왜, 왜, 뭔데?”
“성마교. 이것들이 아주 미쳤네.”
소명은 읊조리면서 입술을 비틀었다. 고요한 기파가 스멀스멀 일어났다. 성마교 이름을 듣고서, 탁연수는 물론, 자리한 모두가 대번에 안색을 굳혔다.
소명은 굳이 입을 열기보다는 풍운첩을 건넸다. 직접 볼 일이다. 탁연수는 빠르게 훑고서 바로 얼굴을 굳혔다. 건너, 건너 받을 때마다 다른 셋도 별반 차이가 없었다.
풍운첩에는 어이없는 소리가 있었다.
“허, 허허. 이것들이 진짜 미쳤네. 아주 끝을 보자고 이러는 건가?”
호충인이 험악하게 고개를 꺾었다. 일그러지려는 얼굴을 일단은 붙잡았는데, 눈가에서 먼저 살의와 분노가 뒤섞인 광망이 일었다.
“목적이 무엇이든, 크게 작정한 모양이다.”
마지막으로 풍운첩을 읽은 이청이 첩지를 덮었다. 차분하게 중얼거리지만, 그 또한 목소리에 힘이 절로 실렸다.
마군등숭산(魔群登嵩山).
마도의 군세가 숭산을 오른다는 뜻이었다.
숭산에는 무엇이 있겠는가. 선종의 본산이며, 불가의 성지, 그리고 천하무종이라 일컫는 곳, 천년 소림이 거기에 있다.
이미 천하를 크게 흩어놓은 마도가, 바로 소림사를 목적으로 해일처럼 몰려가고 있었다.
첩지에서는 대략적으로만 파악했을 뿐이지만, 그것만도 물경 일만을 헤아렸다.
일만의 마도.
소명은 한번 호흡을 가다듬었다. 분기가 차오르는 것은 차오르는 대로, 그러나 머릿속은 한참 차갑고, 침착하게.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야말로, 무학의 기본이다.
소명은 곧 공손히 서 있는 천룡 가인을 돌아보았다.
“바로 숭산으로 향해야겠소.”
“채비는 갖추어 두었습니다.”
회는 기다렸다는 듯이 답했다. 무슨 채비인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되는 일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