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ti Demon God RAW novel - Chapter 29
29화. 갈림길 앞에서
호충인은 호흡을 골랐다. 쌓인 숙취와 피로를 운기로 풀어냈다. 한참이나 집중하고 있다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고개 돌리자 탁자 위에 엎어져 있는 소명의 모습이 보였다.
“자식…….”
지금 생각해 보니, 밤을 새워 혼자 떠들었고, 소명은 그 주정을 전부 들어주었다.
십수 년 만에 만난 옛 친구.
호충인은 꽉 막힌 가슴이 뻥 하고 뚫린 것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지금껏 혼자 끙끙거려온 것이 바보 같았다.
‘큭.’ 한 번 웃고는 소명이 깰까 조심스럽게 방을 나섰다.
문소리가 들리고 호충인의 발소리가 멀어졌다. 실내가 조용해졌다. 순간, 소명의 눈이 번쩍하고 뜨였다. 벌떡 일어난 소명에게서 숙취나 피곤의 기색은 조금도 없었다.
소명은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원래는 네 얼굴만 보고 가려고 했었는데, 아무래도 그냥 갈 수는 없겠다, 충인아.”
중얼거린 소명의 얼굴이 진지했다.
지금 호충인이 처한 상황이 기이했다. 가볍게 생각하고 넘길 일이 아닌 듯했다. 호충인과 호청연, 두 남매 간에 소식이 전혀 전해지지 않고 있다 하니, 이는 중간에서 누군가 농간을 부리고 있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막 밖으로 나서려던 소명이 잠시 멈칫했다. 방 한구석에 쌓여 있는 옷가지들이 그의 눈을 잡았다.
해가 높았다. 봄을 겨우 지난 하늘에서는 서늘한 바람이 일었다. 아래에 창룡장은 넓고 거대했다.
높은 담 안으로 여럿의 전각들이 줄을 지었다. 그리고 곳곳이 소란했다.
전각 사이마다 몇이나 되는 큰 연무장들이 있어, 연무에 열중하는 무사들의 기합성이 어디서나 쩌렁하게 울렸다. 달리 등용문을 두고 하남제일세라 하는 것이 아니었다.
소림 속가의 연합이라는 것을 떠나 등용문 자체에서 보유한 무력도 상당했다. 한목소리로 외치는 기합성에는 패기(覇氣)가 가득했다.
그 사이로 소명은 구겨진 등용문의 푸른 무복을 걸치고 느릿하게 걸었다.
호충인의 것이었다. 유독 구겨져 있다는 것만 빼면 다른 무사들과 다르지 않았다. 딱히 이상하게 보는 사람도 없었다.
소명은 태연하게 창룡장 곳곳을 누비고 돌아다녔다. 어디 월동문을 지나는 데, 바쁜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디 후원의 정비를 하는 모양이었다.
대여섯의 사내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힘을 쓰고 있었다. 그들 주변으로는 돌과 흙이 잔뜩 쌓여 있었다. 무엇 때문인지 땅을 깊이 파는 모양이었다.
잠시 보던 소명은 곧 만면에 미소를 그리고는 그들에게 성큼 다가갔다.
“힘 좀 쓰라고!”
“쓰, 쓰고 있어요.”
“근데, 왜 안 움직여!”
“이게 지랄같이 무거우니까, 그렇죠!”
두 장정이 용을 쓰느라 얼굴이 벌게져 있었다. 땅속에 깊이 뿌리박은 바위를 치우는 중이었다. 한 사내는 끈으로 묶어 끌어당기고 있었고, 다른 이는 있는 힘을 다해 밀고 있었다. 그렇지만 바위는 요지부동, 도통 움직일 생각을 안 했다. 다른 이들도 삽질을 하고 돌을 치우느라 도울 정신이 없었다.
그 와중이었다.
“도와드릴까요?”
소명이 슬쩍 다가가서 넌지시 묻자, 얼굴이 벌게진 사내는 돌아보지도 않고 버럭 악을 썼다.
“말할 틈 없어! 거들 거면 어서 거들라고!”
그 말에 소명은 같이 밀어붙였다. 손을 바짝 붙이고 한 번 힘을 썼다. 그러자 흙바닥이 쩌적 갈라지며 바위가 크게 들썩였다.
“어? 어…… 너, 넘어간다!”
“좋아! 한 번 더!”
해가 높이 뜰 때까지 씨름하던 바위가 드디어 반응을 보인 것이다. 바위가 쿵 소리를 내며 옆으로 넘어갔다. 그 모습에 자리에 있던 사내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으아, 넘어갔다!”
그제야 자리한 이들이 소명에게로 눈을 돌렸다.
“자네, 힘 좀 쓰는데? 그런데 어디 소속인가?”
“소속이요? 하하, 제가 들어온 지 얼마 안 돼서…….”
“아아. 이제 북문을 넘은 모양이군.”
어색하게 웃으며 둘러대자, 사내들은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등용문은 규모만큼이나 입문하려는 사람도 많았고, 들어왔음에도 달리 소속이 확정되지 않은 이들도 많았다. 그런 이들을 두고 북문을 갓 넘었다고들 불렀다.
“이봐, 아직 일 안 끝났어.”
“예, 예. 이봐, 도운 김에 좀 더 돕지 그래?”
“그러지요.”
소명은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일을 거들면서 등용문에 관한 이야기를 귀담아들을 수 있었다.
그들은 소명을 신입이라 생각했는지, 일하는 내내 가르치듯이 이런저런 얘기들을 줄줄 늘어놓았다.
한창 귀 기울이던 소명이 넌지시 물었다. 그러자 사내는 다른 의심 없이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저 유명한 갑자조장은 대체 어떤 사람입니까?”
“일단은 갑자조장이 그 유명한 무사부 호경한 대협의 핏줄 아닌가. 호부 밑에 견자 없다고, 호 조장이 인물은 인물이지.”
“그럼, 그럼. 오무방 녀석들이 괜히 까불다가 호 조장한테 박살이 났었잖아.”
“달리 등용문의 맹호가 아니죠. 음음.”
젊은 사내들이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이들 중 고참인 듯한 중년 사내가 팍 인상을 썼다.
“하이고, 세상 물정 모르는 소리들 하고 있네. 그것 때문에 호 조장이 계속 조장 자리에 붙잡혀 있는 줄도 모르나.”
“그건 또 무슨 말씀입니까?”
소명이 묻자 사내는 삽을 바닥에 푹 꽂고 고개를 돌렸다.
“이 사람들아. 말이 좋아 무룡갑자조니 등용문의 주먹이니 하지, 실상 온갖 번잡한 일에 다 끌려다니는 처지인 걸 몰라? 어제는 서쪽 끝, 내일은 또 동쪽 끝.”
“그야, 갑자조가…….”
“등용문에 호 사부를 기억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야.”
볼멘 얼굴로 대꾸하려는 젊은 사내의 말을 끊고, 그는 어두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
지금 등용문의 중진이라 하는 자들은 모두 호경한에게 어떤 식으로든 감정이 있는 사람들이다.
호의를 지닌 이는 일부였다. 대부분은 시기와 질시의 감정이었다. 그런 중에 호충인이 보무도 당당하게 등용문에 들어왔으니, 당연히 눈엣가시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등용문의 평무사들은 호충인의 존재에 환호했다.
호경한으로 말하자면 혈혈단신으로 입문하여 무사부의 자리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 십수 년이 지난 지금에도 호경한, 양천호격의 이름은 하남의 권사를 논할 때에 빠지지 않았다. 그 아들인 호충인에게 쏠리는 눈이 또 어떠하겠는가.
더구나 호충인은 쏟아지는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 자신의 무위를 드러냈다. 지금 무룡갑자조의 위명을 만들어낸 것이다.
“더구나.”
사내는 잠시 말을 멈추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문 아가씨가 호 조장에게 마음을 두고 있다는 건 다 알려진 얘기 아닌가. 그것 때문에 문 대공자가 갑자조를 눈엣가시로 생각하고 있단 말일세.”
“…….”
소명은 상황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호충인은 온갖 경계와 질시를 받고 있고, 그에게로 통하는 외부와의 연결은 대부분 끊겨 있다. 호충인 역시 그것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을 것이었다.
생각이 복잡해지는데, 불현듯 누군가의 기척이 다가왔다. 사내들은 그것을 느끼지 못하고 아직도 수군거리고 있었다.
등용문에 대한 얘기가 어느새 갑자조에 대한 갑론을박으로 이어졌다. 나이 있는 사내들은 갑자조의 미래가 어둡다 혀를 찼고, 젊은이들은 갑자조의 용맹을 말했다.
노소가 대치하는 사이에서 소명은 슬쩍 물러났다. 물러서기가 무섭게.
“무슨 소란이지요.”
낮고 무거운 목소리가 이들의 소란을 한순간에 잠재웠다. 이들이 번쩍 눈을 뜨고 고개를 돌렸다.
백의를 걸친 여인이었다.
“기, 기 아가씨.”
“후영각(厚榮閣)입니다. 무슨 추태들이십니까.”
“죄, 죄송합니다.”
고개 숙인 사람들 사이에서 소명은 흘깃 여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백의여인의 눈은 고요했다. 한 차례 주의를 준 것을 끝으로 더 책망하지 않았다. 잠시 사내들을 보고는 곧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모습이 멀어지고 나서야 사내들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 하이고야, 심장 멎는 줄 알았네.”
“기 선고(仙姑)께서 와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기 선고?’
소명의 눈썹이 올라갔다.
젊은 사내들은 언제 놀랐냐는 듯이 몽롱한 얼굴로 여인이 사라진 방향을 빤히 바라보았다.
“근데, 헤에. 역시 아름다우시군요. 저 외모로 서른 줄이라니…….”
“글쎄 말이야.”
“예끼, 이 사람들하고는. 어서 일이나 마무리 짓지. 이대로 있다가는 언제 끝날지 모르겠구먼.”
멍하니 있던 사내들은 중년 사내가 채근하자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소명도 다시 일을 돕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퍼뜩 의문이 떠올랐다.
“저, 근데…… 땅은 왜 파고 있는 겁니까?”
“응?”
소명의 물음에 채근하던 중년 사내가 고개를 들었다.
소명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흙먼지로 가득했다. 그는 옷자락을 툭툭 털며 고개를 들었다. 높았던 햇살은 저만치 기울어 있었다.
물들어가는 낙조가 붉었다.
“하, 정원에 호수를 만드는 일인 줄은 몰랐네.”
조금 전까지 매달려 있던 일을 떠올리고는 피식 웃었다. 깊이 박힌 바위를 여남은 개나 뽑아서 치우고, 삼 장 깊이로 넓은 호를 파내고서야 일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어지간한 일로 잔뼈가 굵은 소명이 있었기에 그나마 하루 만에 끝낼 수 있었다.
일도 끝냈으니 한잔하자며 붙잡는 손을 겨우 사양한 참이었다. 그리고 다시 호충인의 처소가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가까이에서 기합 소리가 들려왔다.
“백사토신!”
“하, 하, 합!”
“간부동수!”
“하, 하, 합!”
슬쩍 다가가 살폈다.
넓은 연무장에 호충인과 갑자조원들이 힘써 연무하고 있었다. 펼치는 권각은 위맹했다. 땅을 밟는 진각에 쿵쿵하고 큰 소리가 울렸다. 내뻗는 좌우권에 경풍이 쌩쌩 불었다.
집중하는 호충인의 모습을 바라보며 소명은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고생이…… 많다.”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눈에 띌세라 발길을 돌린 소명의 눈에 한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백의의 여인. 그녀는 그늘 속에 숨듯이 자리하고 있었다. 기척마저 감춘 상태였다. 그렇기에 더욱 소명의 눈을 잡아끌었다.
‘저 여인은…….’
기 선고, 백의선영 기원원이었다.
고요하나, 흔들리는 동공. 소명은 그녀의 눈빛 속에서 보이지 않는 감정의 편린들을 짐작할 수 있었다.
기원원.
호충인이 연심을 품은 여인, 그리고 그의 연심을 참담함으로 돌려준 여인이었다.
소명은 한층 주의 깊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신을 지켜보는 눈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오래도록 자리를 지키던 그녀는 결국 깊은 한숨을 흘리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하아.”
부지불식간에 토해낸 그녀의 한숨이 무척이나 무거워 보였다.
* * *
갑자조원들과 오랜 연무를 끝마친 호충인은 땀을 닦으며 처소로 돌아왔다. 밤샘 탓인지 평소보다 몸이 무거웠다. 눈살 찌푸리며 걷던 호충인은 문득 걸음을 멈췄다.
처소 앞의 마당에서 누군가의 그림자가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소명이었다.
그 모습을 잠시 본 호충인은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흘렸다.
‘하하, 여전하군.’
느리기는 했어도 소명의 동작은 금강권이 분명했다. 못 알아볼 수가 없었다. 어린 시절 소명 덕분에 호충인도 저 금강권을 지겹게 연습하지 않았던가. 눈 감고도 펼칠 수 있는 것이 금강권이었다.
세월이 십수 년인데, 아직도 금강권을 연습하고 있다니. 한숨 나올 일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소명답기도 했다.
호충인은 한쪽으로 조용히 물러나 소명이 마무리 지을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구름이 짙은 밤이었지만, 사이로 용케 달빛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달빛 받은 소명의 그림자는 정법권운, 나한소사, 요신일추 등, 금강권의 투로를 차분히 풀어냈다.
소명은 곧 합장하며 숨을 골랐다. 고개 돌려 담에 기대고 선 호충인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