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ti Demon God RAW novel - Chapter 291
291화. 천산마맥(天山魔脈)
“천산과 화염산은 대대로 불가근불가원을 고수했다. 그 연유가 무엇이겠나.”
“그야…….”
공야근은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그는 아함의 불꽃을 품은 눈길에 이미 압도당하고 말았다. 손가락 하나를 움직일 수가 없었다.
공야근은 자신의 속에 품은 성마의 가호가 그만 요동치는 것을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천산 직계에게 전하는 마공은 오로지 피를 통해서 전해지는 것으로, 그것은 재능이 있다고 익힐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직계라고 반드시 발현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 핏줄로 전해지는 혈계 전승의 마공. 그것이 크게 요동쳤다. 설사 성마를 대신하는 좌현사 앞에서라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과, 과연……. 신인이로다…….’
화염산주 또한 성마에 버금가는 신인이다.
아무리 자신이 성마의 직계가 어떻고, 족장이 어떻고 떠들어도, 화염산주 앞에서는 그저 범인에 불과하니.
눈앞의 산주가 한참 어린 소녀 모습을 하고 있다 한들, 본성은 조금도 달라짐이 없다.
공야근은 저도 모르게 일어나는 오한에 바들바들 몸을 떨었다. 이해 불가의 상대였다. 그 또한 성마의 존위를 다시 마주하면 이러할지도 모르겠다.
그러한데. 공야근은 불현듯 깨닫는 바가 있었다.
‘좌현사가 굳이 화염산주를 청한 것은 대체……?’
의아함이 덥석 앞섰다.
좌현사가 굳이 중원에서부터 보낸 대지급을 따라서 움직인 바였다. 지금 펼치지 못한 죽간에는 대체 무엇이 적혀 있을지. 덜컥 불안감이 앞섰다.
직계혈족 중에서도 자신이 이끄는 육천공가는 천산의 성지를 지키는 데에 집중할 따름이라서, 좌현사의 급한 소식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은 분명 공야씨 일족뿐이었고, 화염산주를 대할 만한 자라면 또한 족장인 자신일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화염산주는 흐린 조소를 머금었다.
“본산이 성마의 신비만 못하겠느냐?”
“아, 아닙니다.”
공야근은 고개 들기가 어려웠다.
“본산은 먼저 건드리지 않으면, 딱히 손을 쓰지 않기 때문이지. 은원을 맺는 것에 신중한 것이 우리 화염산이다.”
“예, 산주. 그 점은 잘 알고 있습니다.”
공야근은 겨우 기운을 내어서 답했다.
과거 성마께서도 화염산에는 굳이 복종을 바라지 않으셨다.
하고자 하면 할 수 있겠으나, 돌이킬 수 없는 피해가 더욱 큰 까닭이라.
가깝지도, 멀리하지도 않는 이유였다. 성마에 못지않은 신비라는 것은 분명했다.
화염산주는 다시금 붉은 눈으로 공야근을 내려다보았다.
공야근은 꾹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부랴부랴 죽편을 펼쳤다. 좌현사가 급하게 전한 소식이다. 아무리 자신이 족장이라고 한들 내용을 먼저 볼 수야 있겠는가만.
화염산주의 경계와 불신이 이렇게 노골적인 바에야, 그도 다른 도리가 없었다. 눈 딱 감고, 죽편을 펼쳤다.
일순 정적이 내렸다.
진득한 기운이 한차례 솟구쳤다가 갈 곳을 잃고 헤맸기 때문이었다. 죽편마다 새겨진 글자에서 피어오르는 검은 마기라니, 저것이 무엇인지 공야근은 모를 수가 없었다.
“허어…….”
공야근 입에서는 어이없는 한숨이 튀어나왔다. 자신을 통해서 이런 수작을 부렸다는 것도 어이가 없었지만, 감히 화염산주와 같은 신인에게 이런 것이 통할 것이라고 생각이나 했다는 말인가.
공야근은 다리가 풀려서 일어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함은 히죽 웃으면서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러자 떨어뜨린 죽편이 주르륵 펼쳐졌다. 남은 글자에 몇 줄을 읽고서 싸늘한 조소를 날렸다.
“너희 좌현사라는 자. 제법 재밌는 짓을 하는구나.”
“사, 산주시여.”
겨우 소리는 내었지만, 아함 앞에서 더는 말을 꺼낼 수도 없었다. 더듬거리는 목소리는 자신이 생각해도 미약했다.
이때 같이 있던 홍화선자가 하얀 얼굴로 싸늘하게 내뱉었다.
“공 족장. 당신도 단단히 미운털이 박힌 모양이오. 이런 것을 들고 오게 하다니.”
“서, 선자께서는 어찌 그런 말씀을. 본 족장을……모, 모욕하시려는 것이오?”
“모욕! 그렇다면 먼저 본산을 능멸하려 드는 것은 너희 천산마맥이 아니냐!”
홍화선자는 차갑게 다그쳤다. 흘겨 뜬 눈초리가 한없이 차갑다. 퍼뜩 공야근은 어깨를 움츠렸다. 저것은 괜한 허세가 아니었다.
진정으로 노하였으니. 그때, 탁탁 팔걸이를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홍화선자는 바로 눈빛을 거두고 물러났다. 화염산주가 히죽거리는 눈으로 재밌다는 듯이 그를 내려다보았다. 눈길에는 우스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공야근은 순간 덥석 숨을 집어삼켰다.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는다. 그것과 동시에 등 뒤로 식은땀이 마구 솟아서 흘러내렸다.
아함은 가볍게 일어섰다.
“이 몸은 이제 귀찮구나.”
“말씀대로.”
홍화선자가 나서서 고개를 숙였다. 뒤에 주저앉은 공야근은 전혀 안중에 두지 않았다. 이제는 손님이 아닌 것이다.
아함은 태사의 앞에서 홀연 사라졌다. 드리운 불길이 확 사그라지는 것처럼 갑작스럽다. 그 자리에는 은은한 열기가 자리에 맴돌고 있을 뿐이었다.
공야근은 돌연 사라진 아함의 모습을 보면서도 넋을 잃어서, 어떤 반응도 보이지 못했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넋을 잃은 그의 앞에 홍화선자가 다시 돌아섰다.
“공 족장은 뭐라 적혀 있는지 아시는가?”
“이 사람은 전령의 신분으로 여기에 왔소이다. 그 내용까지는…….”
“어허, 전령이라 하기 이전에 그대는 천산의 족장이 아니신가.”
“그것은 그렇지만.”
더듬거렸다. 다그치는 모습에 더욱 가슴이 내려앉았다.
좌현사, 그가 대체 무슨 속셈으로 화염산주 앞에 수작질을 벌였으며, 또 무슨 전언을 남겼기에 이러한가. 황망함이 짙은데. 그런 공야근 앞에 그가 떨구고 만 죽편이 불쑥 들이밀어졌다.
떨리는 손으로 공야근은 그것을 겨우 받아 살폈다.
“…….”
입술을 아프도록 꼭 깨물고서, 눈동자가 위에서 아래로, 거듭 오르내렸다.
“으, 으으으……. 으으으!”
움켜쥔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서릿발 같은 기운이 일었지만, 그것에 영향을 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만, 천화의 불길 앞에서 하찮은 마기를 드러낸다는 것이 불쾌할 따름이다.
“이놈…….”
낮은 소리와 함께 팔대산인은 방관하듯 물러나 있던 자세를 풀고 앞으로 몸을 숙였다.
“잠깐.”
홍화선자가 문득 팔을 들어, 산인들의 예기를 억눌렀다.
그녀 또한 공야근을 향한 눈초리가 곱지 않기는 마찬가지. 그러나 공야근의 반응이 먼저였다. 바르르 몸을 떨던 공야근이 홀연 두 어깨를 늘어뜨렸다.
당장 찢어발길 듯한 죽간을 맥없이 떨구었다.
고개 돌려서 홍화선자를 돌아보았다. 빛없는 눈동자가 아득할 따름이었다.
“좌현사는 내가 여기서 죽기를 바라는 모양이오. 허, 허허……. 이럴 수가 있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좌현사에게 버림받았다는 생각이 앞서서 그만 힘없는 한숨이 푹 튀어나오고 말았다. 어느 틈엔가 고인 굵은 눈물이 주룩 흘러내렸다.
죽편에는 구구절절하지만, 하나 쓸모없는 문장만 가득 남아 있었다.
오로지 성마만이 하늘 아래에 유일한 신인이라. 화염산은 이단의 허튼 세월을 그만 거두고 본류에 귀의할 것은 권한다는 둥의 소리였다.
화염산은 오히려 천산에 앞서서 문호를 열었음을 알면서도 이런 소리라니. 다른 수작질을 펼친 것도 부족해서 이딴 문구라니. 결국, 전령에게 죽으라고 하는 소리일 수밖에 없는 일이겠다.
공야근이 비록 좌현사와 대립하고 있다 하나, 성마를 향한 일심 만큼에는 한 점 흐림도 없건만.
“차라리, 가서 죽으라고 말하면 얼마든지 그리 따르려나. 이것은……너무도…….”
공야근은 채 말을 다 할 수가 없었다.
참담하고 참혹하여라.
“공야 족장, 그래, 어찌하시겠소.”
“…….”
공야근은 불현듯 낯빛을 굳혔다. 산주는 자리를 옮겼다고 하지만, 여기에 있는 여덟은 분명히 화염산에서도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이들이었다.
‘동귀어진…….’
하려면 못 할 것 없다.
비록 좌현사에게 속은 셈이었지만, 이것이 진정으로 성마를 위한 일이라면 어찌 마다할 수가 있겠나.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이것이 오히려 화염산의 역린을 건드리는 것은 아닐지.
일 푼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실로 중차대한 문제라서 공야근은 쉽게 마음을 다잡을 수가 없었다.
“이, 이것은……이것은…….”
공야근은 억지로 목소리를 쥐어짰다. 떨리는 목소리에는 갈등이 한없이 짙게 실려 있다.
홍화선자는 한층 신중해졌다. 다른 수작을 부리려고 한다면. 조금도 사정 둘 여유가 없으니.
“공야 족장……. 공야근!”
“성마를 위하여!”
공야근은 버럭 소리쳤다.
아함은 감은 눈을 떴다. 처소로 돌아와 쭉 드러누운 참이었다.
“정말 귀찮군.”
외유가 길었던 탓일 수도 있다. 심신이 사뭇 피로하여라. 맨발로 발가락을 열심히 꼼지락거렸다. 그러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흐음…….”
정성을 들여서 손질해주던 정 부인의 빗질이 문득 떠올랐다. 참으로 번잡하고 귀찮은 일이지만, 막상 그녀가 가까이 없다는 것을 느끼다니.
“어찌할꼬나.”
여기서 또 멋대로 뛰쳐나가기는, 아무리 아함이라 해도 눈치가 보이는 일이다. 투정을 부려야 할 때와 그렇지 않을 때 정도는 구분한다.
아함은 다시 누워 뒹굴다가 문득 턱을 괴었다.
천산의 성마, 그를 따르는 자들이 중원에서 무슨 수작질을 벌이고 있다는 것은 대강 알고 있었다.
그것을 수습하고자 소명이 다시 뛰어다니고 있지 않나.
“에이, 그것들이 아니라고 해도…….”
아함은 문득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것도 한 이유이겠지만, 소명은 쉽게 서천 무림으로 발길을 돌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소명 모습을 가만히 그려본다.
“마냥 어리게만 보이는 게 문제란 말이지.”
아함은 눈을 가늘게 뜨고서 중얼거렸다. 부스럭하더니, 이내 침상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폐관을 제대로 마무리하였고, 화염산주로서 신공은 물론 제반 절기 또한 모조리 품어낸 아함이다. 이제는 엄연히 당당한 신화의 주인이라 할 수 있건만.
아함은 잠시 멍한 얼굴로 부스럭 일어나 앉았다.
“홍화.”
“예, 산주.”
밖에서 먼저 소리를 내기도 전에, 아함은 기척을 바로 분간했다. 홍화선자는 이상할 것도 없다는 듯이 공손하게 답하면서 안으로 들어왔다.
“어찌하였나?”
“발악을 하였기에.”
“흐흠. 천산에서도 꽤 소란한 것은 알고는 있지만, 공야씨족이라고 하면, 무엇보다 성소를 지키는 자들이라 하지 않았나?”
“영명하십니다, 산주. 말씀대로 성소를 지키며, 절대 산을 떠나지 않는 일족이지요.”
“그런 곳의 족장을 전령으로 마구 부리다니. 좌현사라는 작자도 어지간한 모양이지.”
“그에 더하여서,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흐흠.”
아함은 다시 입술을 삐죽거렸다. 무엇이든 영 성에 안 차는 일이었다.
장난질, 공야 족장에게도 말했다시피 화염산을 두고서 장난을 하려 들고 있었다. 여기에 맞장구를 쳐주어야 할지.
“천산 쪽 상황은 파악하고 있다든가?”
“예, 마지막 소식을 들은 것은 석 달 전이라고 합니다만. 다른 변화는 없다고 하더군요.”
“석 달 전에는 다른 변화가 없다라. 그럼 지금은 또 모른다는 거네?”
아함은 문득 고개를 돌렸다. 책망하려는 바는 아니지만, 홍화선자는 드물게 식은땀을 흘렸다.
“말씀대로입니다. 산주.”
“음……. 사람을 보내봐. 발 빠른 자로.”
“예.”
“그리고…….”
아함은 말끝을 흐렸다. 지금 하려는 말이 과연 마땅한 것일지, 딱 잘라서 말할 수가 없는 일이다. 그래도 멈칫한 것은 잠깐이었다.
아함은 다시 말했다.
“원정 준비를 해놓아.”
“원정이라 하심은.”
“가깝게는 천산, 멀게는 중원.”
“사, 산주!”
“준비라고, 준비!”
아함은 흠칫하는 홍화선자에게 짜증 부리듯이 힘주어 말했다.
누가 들으면 또 가출한다는 줄 알겠네. 아닌 게 아니라, 그런 속내로 들리기는 하겠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