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ti Demon God RAW novel - Chapter 31
31화. 갈림길 앞에서
“나, 난 단지 호…… 호 조장이…… 호 조장의…….”
그녀는 말문을 제대로 이어가지 못했다. 심적 충격이 큰 것이었다. 그녀로서도 사정은 있었다.
호충인의 연심은 그녀로서도 기뻤다. 그는 솔직한 사내였다. 감정에 충실했고, 그녀를 최대한 배려했다. 그래, 그런 그에게 상처를 준 것은 그녀, 자신이었다. 그의 연심을 저버린 것 또한 자신이었다. 그것은 괴롭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문혜선이 호충인에 대한 연심을 고백했을 때, 그녀는 문혜선이 호충인에게 더욱 어울리는 배필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그의 앞날을 위한 일이다. 더욱 좋은 일이다. 그리 여겼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 합리였으며 오만이었다.
기 선고는 호충인의 눈빛을 새삼 떠올렸다. 싸늘한 눈빛, 지금에야 다시 돌이켜보건대 그것은 분명 상처 입은 눈이었다.
“아, 내가 무슨…….”
기 선고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니, 상처 입은 이는 그만이 아니었다. 그녀가 지금껏 돌보아온 문혜선, 그 아이에게까지.
기 선고는 고개를 들었다. 소명이 차분한 기색으로 그녀가 다시 정신 차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애써 호흡을 다스렸다.
“제가 뭘 어찌해야 할까요?”
“모르겠습니다.”
“예?”
실컷 아픈 곳을 찔러놓고는 냉큼 두 손 놓아버리는 태도에 기 선고는 멍해졌다.
“그것은 앞으로 두 사람이 알아서 할 일이지요. 안 그렇습니까?”
소명은 두 손을 활짝 펼쳐 보인 채 히죽 웃었다.
“다만, 앞으로 충인이를 잘 부탁드립니다. 어여삐 보아주세요. 못난 놈이기는 해도, 나쁜 놈은 아닙니다.”
“…….”
기원원은 뭐라 답할 수 없었다. 소명 역시 딱히 답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 그는 천천히 걸어 후영각의 후원을 벗어났다.
뒤에서 기원원의 굳은 기척을 선명히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크게 혼란한 모양이었다.
어느 정도 멀어진 이후, 소명은 ‘후’하고 한숨을 흘렸다.
과연, 잘한 짓이었을는지. 남녀의 일에 끼어 봤자 좋을 것 없건만.
“쳇, 그놈이 빙충이 같으니 내가 이러는 것 아니겠어.”
소명은 변명하듯 중얼거리며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벅벅 긁었다. 아직 볼일이 다 끝나지 않았다.
호충인은 갑자조원들과 행하던 연무를 평소보다 이른 시각에 마무리했다. 내일은 일찍부터 원행에 나서야 했다.
“모두들 몸 관리 철저히 하도록.”
묵직한 한마디에 서른의 갑자조원들은 눈을 빛냈다. 그들의 모습에 호충인의 입가에는 피식 실소가 새었다.
무룡갑자조는 정말 싸우는 것을 좋아하는 종자들만 모여있다. 그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다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지금은 그만큼의 실력 또한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해산을 명한 호충인은 연무장을 나섰다. 그러자 멀찍이 소명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기다리고 있었던 거냐?”
“어허, 기다리기는.”
“크크.”
아닌 체 딴청 부리는 소명의 모습에 호충인은 숨죽여 웃었다. 둘은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대며 처소로 돌아갔다. 그리고 문 앞에서 호충인은 굳었다.
하얀 옷의 여인, 기원원이 문 가까이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
호충인의 얼굴이 무섭게 굳었다. 두 눈은 깊이 가라앉았다. 그러나 옆에서 가만히 그 변화를 본 소명은 내심 피식 웃었다.
‘그것 참. 솔직하지 못한 놈. 아주 용을 쓰는구나.’
애써 낯빛을 굳히는 모습에 절로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호충인이 얼굴에 무리해서 힘을 주는 바람에 눈썹 끝이 부르르 떨렸다.
“소명아, 저…….”
“음, 난 자리를 비켜주지. 나 그렇게 눈치 없는 놈이 아니다.”
“뭐? 아니, 그게 아닌데.”
소명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자리를 피하자, 애써 굳혔던 호충인의 냉면(冷面)이 와작 깨어졌다. 허둥거릴 새에 기원원이 그에게 다가왔다.
“호 조장.”
“어, 어흐흠.”
호충인은 억지로 헛기침을 흘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선 기원원의 눈을 마주하는 순간, 호충인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언제나 흔들림 없던 그녀의 눈가가 흠뻑 젖어 일렁이고 있기 때문이었다.
“기, 기 소저.”
“미안해요. 저, 정말로 미안해요.”
그녀는 왈칵 눈물을 쏟으며 고개를 숙였다. 호충인은 그녀의 눈물에 당황했다. 무엇을 어찌하면 좋을지 몰랐다. 머리가 하얗게 변해서, 지금까지 그녀에게 품었던 원망, 미움마저 깜빡할 정도였다.
먼저 방으로 들어온 소명은 문밖에서 들리는 기척을 읽고는 피식 웃었다.
“고래로 여인의 눈물만큼 강한 것도 없다니까.”
그리고 마지막 날이 밝았다. 소명도, 호충인도 먼 길을 떠나야 할 때였다.
소명은 행낭을 메고 등용문을 나섰다. 호충인은 말고삐를 쥐고 천천히 걸었다. 뒤에서 갑자조원들이 따랐다. 두 사람은 말없이 어깨를 나란히 한 채 걸었다.
기원원과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는 몰라도 호충인의 얼굴은 어제와 달리 크게 밝았다. 헤실헤실하는 모습이 어이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것은 잠깐에 불과했다.
등용문이 자리한 허창을 나서면서부터 호충인은 연신 소명을 흘깃거렸다.
소명에게 듣기로 은인의 가족을 찾아보러 하북으로 향하는 길이라 했다.
수천 리의 먼 길은 아니지만 그래도 험한 것이 세상이요, 강호였다. 맨몸에 행낭 하나 덜렁 메고 걷는 소명의 모습은 호충인이 보기에 너무도 방만했다.
소명이 그 기색을 짐작하고 넌지시 물었다.
“자식, 이 형님이 그리 걱정이 되냐?”
“걱정은 무슨. 아니, 누가 형님이냐?”
고개 돌리다가 던진 농에 불끈하는 호충인의 모습에 소명은 피식 웃었다. 아닌 척하면서도 신경을 쓰는 것이 호청연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누가 남매 아니랄까 봐. 참 똑같다, 똑같애.’
소명은 웃으며 말했다.
“어렸을 적에는 허구한 날 나한테 맞고 뻗던 놈이. 아이고, 우리 충인이 많이 컸네.”
“이 자식이, 진짜!”
호충인은 순간 도끼눈을 뜨고 노려봤다. 그 날선 눈초리에도 소명은 웃음을 잃지 않았다.
“하아, 그러지 말고 본문에 남아 있으라니까. 내가 아무리 네놈한테 자리 하나 마련 못해줄까.”
“내가 네 덕이나 보겠다고 상화촌을 떠났겠냐.”
“…….”
저도 모르게 내뱉은 말에 소명은 담담히 대꾸했다. 호충인은 뒤늦게 아차 싶었다. 당황한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
“미, 미안하다.”
“됐어.”
소명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도리어 웃어 보였다.
“그분 덕에 목숨을 구했고, 천하 곳곳을 내키는 대로 떠돌았다. 이제라도 그분의 식솔들을 찾아뵙는 것이 마땅한 도리(道理) 아니겠냐.”
“도리, 그렇지. 도리.”
호충인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갈림길이었다.
이곳에서 소명은 북쪽으로, 호충인은 남쪽으로. 갈 길이 갈라졌다.
“그럼, 보중해라.”
갈라지는 길목을 보며 침묵하는 호충인에게 소명이 먼저 시원하게 말했다. 그늘 한 점 없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강한 척해도 여린 녀석이었다. 이런 녀석이 하남의 맹호라고 불리다니.
히죽 웃음이 나오려고 했다.
“마, 채신머리없이.”
“헛, 흠.”
구박조로 던진 말에 호충인은 무안하여 짐짓 얼굴을 굳혔다. 나직이 헛기침을 흘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의 조원들이 두어 마장 뒤에서 호충인의 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 간다.”
고개 돌린 사이, 소명은 한마디 툭 던지고는 발길을 돌렸다. 호충인은 잠시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악을 쓰듯 소리를 높였다.
“이 자식! 몸 성히 돌아와라! 안 오면 내가 쫓아가서 밟아줄 테다!”
소명은 돌아보지 않았다. 악쓰는 소리를 귓등으로 흘리며 설렁설렁 손을 흔들어 보였다.
호충인은 곧 말에 올랐다. 지금도 충분히 시간을 지체한 터였다. 멀어지는 소명을 흘깃 일별하고는 등자를 박찼다. 높이 운 말은 빠르게 앞으로 내달렸다. 그 뒤를 따라서 갑자조원들도 급히 말을 몰았다.
기수가 새삼 깃발을 높이 세웠다.
푸른 용문기에 갑이라는 빨간 글자가 선명했다. 펄럭이는 깃발 아래, 무룡갑자조가 달렸다.
* * *
머리 위에 해는 아직 높았다.
하북에 들어서고 닷새 남짓 지나서야 소명은 목적했던 정주에 닿을 수 있었다.
정주의 성문을 들어서자마자 복잡한 시전 거리가 그를 맞이했다. 왁자하게 떠는 사람들, 흥정하는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다.
소명은 인파 사이를 걸었다. 크게 서두를 이유는 없었다. 아니, 그렇다기보다는 서두르고 싶지 않았다. 장우상의 친인을 찾는다는 것이 부담스럽기 때문이었다.
찾는 것은 둘째 문제요, 마주하게 되면 어찌 말문을 열어야 할지. 하고자 한다면 한달음이면 닿을 거리임에도 이렇게 느릿하게 가는 이유였다.
장우상이 부인을 떠난 것은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이라 했다. 제대로 성혼을 올린 것도 아닌 사이. 그저 기억하는 것이라고는 하북 정주의 찢어지게 가난한 뒷골목이라는 것이 전부였다.
남호동(南胡同)이라던가.
“해도 너무하지. 그 하나로 뭘 어떻게 찾으라고. 세월만도 십수 년인 것을…….”
불평하며 걸음을 옮겼다. 수많은 이들 사이를 능숙하게 헤치며 두리번거렸다. 문득 지나는 한 청년을 잡고 길을 물었다.
“죄송합니다. 남호동이라는 곳을 가려면 어찌 가야 합니까?”
“응? 남호동?”
청년은 검게 탄 얼굴에 검댕을 묻히고 있었다. 그는 코끝을 슥 훔치더니 소명의 위아래를 살폈다.
“형장, 외지서 오셨구먼?”
그는 히죽 웃더니 대뜸 손가락으로 어느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짝으로 가보시구랴. 쭉 가다 보면 비좁은 골목이 여럿 있는데, 그중 아무데나 들어가서 남쪽으로 가면 거기가 남호동이오.”
대중없이 가리키는 길이었지만 소명은 이내 손을 맞잡아 보였다.
“감사합니다.”
“뭐, 감사받을 일은 아니고. 그런데 들어가서는 조심하시구랴.”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손을 흔들고는 짐짓 당부의 말을 건네고 히죽 웃어 보였다. 한쪽 이가 빠진 웃음은 밝았다.
소명은 사람들 속으로 사라지는 청년을 빤히 바라보았다. 무얼 조심하라는 것인지. 곧 행낭을 고쳐 메고 걸음을 옮겼다. 그의 말대로 찾아가니 골목길에 들어설 수 있었다.
남호동이라 하지만 딱히 지명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자연히 발생한 뒷골목 거리의 남쪽을 칭할 뿐이었다.
골목을 지나면 또 여럿의 골목으로 갈라지는 길이 계속해서 이어져 있었다. 길은 복잡하고 모두 비슷비슷했다. 설사 정확한 위치를 알고 있어도 헤맬 정도였다.
소명은 두리번거리며 걸었다.
어느 골목에서는 아이들이 뛰어놀고, 또 어느 골목에서는 빈한한 차림의 사내들이 모여 앉아 도박패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흘깃 고개 들어 소명을 퀭한 눈으로 보고는 다시 쥔 패에 집중했다. 다가가 말을 붙일 수가 없었다.
돌고 돌아서 가다가 집안일이나 무슨 일로 분주한 부인들을 마주할 수 있었다. 소명은 마주하는 대로 장우상의 가족에 대해 물으며 돌아다녔다. 하지만 장삼이사(張三李四)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남호동이라는 골목에서만도 장 씨 성을 쓰는 사람이 하나둘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십여 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으니 제대로 답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한참을 빙글빙글 돌며 헤맸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하늘 높은 곳에서 해가 뉘엿 저물어갔다.
소명은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다시 돌아나가려고 해도 길목을 찾을 수가 없었다. 빼곡하고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그 골목이 그 골목처럼 보였다.
집을 찾기는커녕 길 한복판에서 밤이슬 맞게 생긴 것이다.
“이런, 이런…….”
이제야 소명은 길가의 검댕이 사내가 뭘 조심하라 말한 건지 알 것 같았다.
해가 저물어 어둠마저 내리니, 공연히 마음이 급해질 따름이다. 마구 헤매다가 보니, 소명은 결국 막다른 골목까지 다다르고 말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이상한 상황과 마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