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ti Demon God RAW novel - Chapter 34
34화. 정주(定州)에서의 일상(日常)
소명은 큰 짐을 메고 시전을 바쁘게 걸었다. 약재의 부피와 무게는 상당했지만 그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멀리서 보면 불쑥 솟은 동산 하나가 흔들거리며 움직이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오가는 시전의 사람들이 산더미만한 짐을 이고 가볍게 걷는 소명에게 알은체를 해왔다.
“아이고, 소명 총각이네.”
“의사에 가는 길인가?”
“끝나면 차나 한 잔 하고 가지 그러나?”
웃으며 한 명 한 명에게 다 답하며 길목을 지나갔다. 그리고 굽잇길을 지나서 허름한 송가의사에 닿았다. 활짝 열린 문가에서 송 의원이 서성이고 있었다.
“거, 오셨나?”
“예, 어디에 놓을까요?”
“거, 저 뒤에 놓으시게.”
송 의원은 여전히 뚱한 모습이었다. 입버릇처럼 거, 거 하며 의사 뒤편을 가리켰다. 그는 슬그머니 눈매를 얇게 하더니, 넌지시 말을 흘렸다.
“거, 기왕에 가져다 놓은 건데, 손질도 좀 해주면 좋으련만.”
마치 들으라는 듯 하는 말에 소명은 소리 없이 웃었다. 송 의원은 흐느적 의사로 들어가며 또 말을 흘렸다.
“거, 작두도 뒤에 있는데에…….”
“하하.”
이래서야 소명도 도리 없이 소리 내어 웃었다. 흘깃 눈을 돌리자 송 의원은 냉큼 안으로 들어가버린 후였다.
젊고 엉뚱했지만 저래 봬도 근동에서는 솜씨가 좋다고 소문난 의원이다.
소명은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고는 지고 온 짐을 풀었다. 상당한 양의 마른 약재다. 능숙한 손길로 약재를 깔아놓고 작두를 찾아와 정리하기 시작했다.
수북하게 쌓인 약재를 전부 정리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솜씨가 좋다고 말할 정도는 아니지만, 말끔하게 일을 마무리했다.
손을 털고 일어난 소명은 의사 안으로 들어갔다.
“뭔가? 사람이 기척이나 하고 들어올 일이지.”
무슨 책을 보던 송 의원은 후다닥 책을 덮고는 급히 말했다. 적잖이 당황한 기색이었다. 그러나 소명은 개의치 않았다.
“다 마무리했습니다.”
“그런가? 그래, 그런데?”
“하하.”
“거, 뭔데?”
“하하하.”
소명은 그저 웃었다. 그러나 웃음소리가 점점 메말라갔다. 그 반응에 송 의원은 눈살을 찌푸렸다.
“거, 사람도 참. 단골 좋다는 게 뭐야? 서로 돕고, 도와가면서, 거, 그리 살아야 사는 맛도 나는 게지.”
그는 구시렁거리면서 소맷부리를 뒤적였다. 그리고 동전 두엇을 꺼내 책상 위에 소리 나게 탁 내려놓았다.
“친한 사이일수록 금전 거래는 투명하게 라는 말도 모르십니까?”
“거, 거 헛, 참.”
히죽 웃어 보인 소명은 동전을 집었다. 그런데 동전이 움직이지 않았다. 소명이 웃는 낯 그대로 송 의원을 차분히 불렀다.
“송 의원님?”
“거, 그게…….”
송 의원의 손가락이 동전을 잡고 힘을 쓰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소명은 속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또 무슨 책을 산다고 돈을 다 털었군.’
지난 한 달 동안 본 바로, 송 의원은 참 특이한 위인이었다. 제법 큰돈이 드는 약재에는 돈을 아끼지 않으면서도 동전 한둘에는 크게 인색했다. 또 때때로 큰돈을 들여 의서를 사들이고는 쫄쫄 굶기가 일쑤이기도 했다.
지금처럼 일을 부려놓고는 삯을 주기 싫어 머뭇거리는 것을 보니, 보나마나 어디 의서를 산다고 모은 돈을 다 털어 넣은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지금 소명과 송 의원이 같이 쥐고 있는 동전은 송 의원의 저녁 밥값일 것이다.
“헤, 헤헤. 거, 자네.”
“하하, 의원님.”
송 의원은 사정을 보아달라는 듯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나 소명은 마주 웃어 보이고는 홱 동전을 가로챘다. 송 의원의 하얀 얼굴이 팍 일그러졌다.
“윽! 소명, 자네.”
“그럼 갑니다. 수고하십시오.”
“에이잉, 철방 가는 건가?”
“예.”
“쳇, 철방도 내가 소개 시켜줬건만, 거 박정하기는…….”
등 뒤로 송 의원은 계속해서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소명은 쓴웃음만 머금었을 뿐, 달리 대꾸하지 않았다. 다만 문 닫는 뒤로 넌지시 한마디만 남겼다.
“그럼, 다음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에이잉!”
소명은 의사를 나서 다음 일터인 철방으로 향했다.
손안에서 동전을 굴리며 가는 중에 요깃거리를 고민했다. 막 골목을 돌아서는 순간, 백의의 인영이 튀어나와 그의 앞을 막아섰다 .
“저, 잠시만!”
소명은 움찔하며 막아선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의 등장보다는 격앙된 어조 탓이다.
“왜 그러십니까?”
“저, 저를 기억하지 못하시겠습니까?”
“에?”
그의 말에 소명은 눈살을 찌푸렸다. 뜬금없이 길을 막고 무슨 소리인가 하는 얼굴이었다.
그 사람은 또 그 사람대로, 소명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에 당황했다. 사내의 하얀 얼굴이 순간 붉어졌다. 그는 급하게 말했다.
“한 달 전에 노상에서 저를 구해주지 않으셨습니까. 정주표국의 담아인입니다, 은공.”
“한 달? 아, 아아. 그 얼…….”
소명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웃는 얼굴로 입을 열려다가 멈칫했다.
‘헛, 면전에서 얼빠진 놈이라고 말하려 하다니……. 큰일 날 뻔했네.’
겨우 말을 삼킨 소명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흘렸다. 듣지 못한 그는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예?”
“아, 아니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하.”
애써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때에 한번 찾아주십사 간곡히 부탁을 드렸습니다만…….”
“하하…….”
말꼬리를 흐리는 담아인의 모습에 소명은 어색한 얼굴을 한 채 머리만 긁적였다.
앞에서 안타까워하는 그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솔직히 그런 적이 있었나 싶었다. 크게 마음에 두지 않았던 것이다.
난감해하는 소명에게 담아인은 재차 청했다.
“은공, 지금이라도 본가에…….”
“아, 곤란합니다, 담 공자. 저는 이제부터 또 일이 있어서.”
“그, 그래도…….”
담아인의 얼굴에는 미련이 가득했다. 그 간곡함에 소명은 정말로 일간 찾겠다 약속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이번에는 꼭, 꼭 찾아주십시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멀어진 뒤에 소명은 흘깃 뒤를 돌아보았다.
“으이크…….”
아직도 선 자리에 남아 이쪽을 보고 있는 담아인이었다. 그 모습에 뜨악했다. 무슨 미련이 저리도 많은가.
소명의 발걸음이 괜히 바빠졌다. 요깃거리 따위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골목을 돌아선 뒤에야 한숨을 흘렸다. 그는 흘깃 고개를 들었다. 기운 햇살에 흠칫했다.
“이런, 늦겠다.”
홍화철방(紅火鐵房)
걸린 간판 아래로 들어가니 후끈한 열기가 먼저 소명을 맞이했다.
불에 검게 탄 중년 사내가 들어오는 소명의 모습에 말을 건넸다.
“왔나? 오늘은 좀 늦었군.”
“예. 송 의원이 잡는 바람에요.”
“송 의원? 그 사람 참…….”
중년 사내는 철방의 주인인 홍씨였다. 사정을 알기에 더 뭐라 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일에 집중했다. 지금은 한창 바쁠 때였다. 오래 떠들고 있을 틈은 없었다.
소명도 소매를 걷어붙이고 일을 돕기 시작했다. 풀무를 돌리고 탄과 철을 날랐다.
소명은 하루 중에 두어 시진 정도만 일할 뿐이었다. 그러나 가장 바쁜 때에 돕는 손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일의 진척이 크게 달랐다.
더구나 초보의 손이 아니었다. 어디서 무얼 하다 왔는지는 모르지만, 능숙한 일꾼이라는 것만으로도 홍씨와 철방 식구들에게는 충분했다. 또 일한 만큼만 받아가고, 큰 욕심을 내지 않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철방의 일을 돕기 시작한 지 이제 보름 남짓. 철방 사람들은 모두 소명을 반겼다.
소명은 철방 뒤쪽으로 탄을 나르러 갔다. 그곳에 숯검정을 잔뜩 뒤집어쓴 청년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어? 소명 형, 오셨소.”
“음, 좀 늦었어.”
“히히, 또 송 의원이군요.”
그는 히죽 웃었다. 이 빠진 웃음이 밝았다.
모항, 철방 일꾼 중 막내였다. 소명이 처음 정주를 찾았을 적에 길을 가르쳐준 청년이 바로 모항이었다.
쾌활한 성격에 안 끼는 데가 없어서 온갖 사건사고를 몰고 다녀, 항간에서는 정주의 소풍파라 불리기도 했다. 그래도 모난 구석이 없어 누구에게도 큰 미움을 받지는 않았다.
소명은 그런 모항에게 마주 웃어주며 턱짓으로 철방 안쪽을 가리켰다.
“모 동생, 그러고 있다가는 또 노반께 혼날 걸.”
“헤이구야.”
모항은 소명의 말에 움찔하더니 다시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그렇잖아도 몇 날 전에 친 사고 때문에 홍씨가 벼르고 있던 참이다.
모항의 일은 탄과 숯을 분류하는 일이었다. 탄 중에 불량이 섞여 있으면 사고가 일어나거나 불량품이 나오기 십상이다. 나름 중한 일이다.
한참 묵묵히 일을 하는가 싶던 모항은 슬그머니 눈치를 살피더니 이내 히죽 웃으며 탄을 담는 소명에게 다가갔다.
“저기, 근데, 소명 형. 얘기 들으셨소?”
“얘기?”
“헤헤, 홍 누님에게 매파가 들어왔다던데.”
“그래? 홍 소저에게? 금시초문인걸. 좋은 혼처인가?”
“헤구, 말 마오.”
“응?”
모항은 콧잔등을 찌푸리며 손을 흔들었다.
홍화철방은 정주 인근에서는 제법 건실한 철방으로 단골도 많았고, 그만큼 명성도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크게 유명한 것이 있으니.
철방 주인 홍씨의 무남독녀 홍유선이다.
정주 일대에서는 열화미녀(熱火美女)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철방의 여식이라는 것도 이유이겠지만, 그보다는 그녀의 천성이 무엇보다 컸다.
“하…… 어디라고?”
“정주표국의 첫째 아들이랍니다.”
“정주표국이면…… 그…… 그러니까.”
“아, 형님도 참. 그 유명한 담가의 가업 아닙니까.”
“아, 그렇지, 참. 그래.”
소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에 그 담가의 둘째아들을 만나지 않았던가.
탄을 나르던 손을 멈추고 잠시 머리를 굴렸다.
홍유선이 확실히 미인이기는 하지만…….
“뭘 멍하니들 있어요? 일 안 해요?”
밝은 목소리가 갑자기 들려왔다. 순간, 모항은 바짝 얼어서는 후다닥 제가 맡은 탄고로 도망하다시피 뛰어들어갔다.
소명만 멀뚱히 자리에 남았다. 도망하는 모항의 모습에 쓰게 웃고는 고개를 들었다.
붉은 옷을 걸친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열화미녀 홍유선이었다. 큰 눈 가득하게 반짝이는 것은 호기심이요, 도톰한 붉은 입술은 장난기로 실룩거렸다.
소명은 급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홍 소저.”
“윽, 소저는 무슨. 그냥 편하게 부르라니까.”
그녀는 팍 인상을 썼다. 소름끼친다는 듯이 몸서리를 쳤다. 그 모습에 소명은 내심 쓰게 웃었다.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홍 소저.”
“쳇. 그런데, 바빠요?”
“예, 오늘 좀 늦었습니다.”
“흐음. 그렇단 말이지.”
말꼬리를 흐리는 모습이 심상치 않았다. 또 무슨 꼬투리를 잡아서 장난을 치려는 것인지.
소명은 어색하게 웃어 보이고는 급히 탄을 담은 바구니를 들고 철방으로 들어갔다. 바삐 걷는 걸음 뒤로 홍유선의 눈길이 따갑게 느껴졌다. 애써 모른 체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소명이 안으로 들어가고 나자, 홍유선은 눈썹을 치켜든 채 떠난 자리를 노려보았다.
“쳇.”
혀 차는 소리에 불만이 가득했다.
이날은 월말이라 다른 어느 때보다 일이 많고 급했다. 보통 두어 시진 남짓 도왔지만 오늘같이 바쁠 때에는 끝나는 시간에 대중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불만은 없었다. 소명은 묵묵히 일손을 거들었다.
어느새 해가 저물어 바깥은 캄캄했다. 그러나 철방 안은 대낮같이 밝았다. 후끈한 열기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질식할 것만 같은 열기 속에서 소명과 일꾼들은 힘을 다했다. 그만큼 일이 많은 것이었다.
“후…….”
힘차게 풀무질하던 소명은 겨우 한숨 돌렸다. 얼굴 가득한 땀방울을 훔치며 고개들 들었다. 그러자 주변의 눈초리들이 이상했다.
다들 손을 멈추고 질린 얼굴로 소명을 빤히 보고 있었다.
“왜……들 그러십니까?”
머뭇거리고 있으니 홍씨가 웃으며 다가왔다.
“하, 하하. 자네, 정말 물건이군.”
“예?”
“아니, 어떻게…… 허헛, 참.”
홍씨는 소명과 화로를 번갈아 보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다른 일꾼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제대로 말문을 열지 못했다.
뜨거운 열기를 발하는 화로 앞에서 수 시진째 버티고 있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설사 능숙한 대장장이라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소명은 달리 꾀도 부리지 않고 있으니, 신기할 따름이었다. 덕분에 아슬아슬했던 밀린 일들을 하루 중에 끝낼 수 있었다.
원래는 철야까지 각오한 일이었다.
“이제 뒷정리만 남았으니, 자네는 가서 좀 쉬게.”
“저는 괜찮습니다만.”
“괜찮기는. 이 사람아, 그러다가 쓰러져. 나보고 약값 내달라는 말 할 것 아니면 어서 물러서게.”
홍씨는 급히 손짓했다. 소명은 어색하게 웃으며 물러섰다. 철방 뒷마당으로 나가자 새삼 바람이 서늘했다.
“후우.”
가볍게 숨을 돌렸다. 피부 아래로 열기가 후끈했지만 견디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소명은 쌓아 올린 장작더미 위에 앉아서 해 저문 밤하늘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몸의 후끈한 열기를 느끼다보니, 새삼 예전의 일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면, 화염산의 태양은 정말 뜨거웠지.”
소명은 추억하기보다는 진저리를 쳤다. 정말 끔찍하다는 듯이 오만상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