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ti Demon God RAW novel - Chapter 35
35화. 정주(定州)에서의 일상(日常)
철방 일을 마무리하고 소명은 집으로 돌아왔다.
남호동 골목을 돌아서 들어가니, 문가에서 서성이는 그림자가 보였다. 장인지였다. 소명은 반갑게 그녀를 불렀다.
“장 소저.”
“흡!”
그러자 장인지는 화들짝 놀랐다. 무슨 다른 짓을 하다가 들킨 사람처럼 안절부절못했다. 어두웠지만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소명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무슨 일 있습니까, 장 소저?”
“으, 아니. 저…….”
주저하던 그녀는 냅다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영문 모를 일이었다. 소명은 그녀의 뒤를 따라서 집으로 들어가려 했다. 막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문이 쾅 하고 닫혔다.
“윽!”
코앞에서 큰 소리를 내며 닫혔다. 이번에는 소명이 당황할 차례였다. 문이 닫힌 것도 모자라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대문을 아예 잠가버린 것이다.
“아, 아니, 저기. 장 소저. 장 소저!”
당황해서 문을 쿵쿵 두들겼지만 안쪽은 조용했다. 아무 소리도, 기척도 없었다. 문까지 잠가놓고는 그대로 방으로 들어가버린 모양이다.
계속 문을 두들기려다가 손을 멈칫했다. 누워 있는 정 부인에게까지 생각이 미친 것이다. 더 어찌할 수 없어서 소명은 한숨을 푹 내쉬고는 문에 기대어 주저앉았다. 문이 잠겼다고 섣불리 담을 넘기에는 장인지의 모습이 영 심상치가 않았다. 그저 몸 사리는 편이 좋을 듯했다.
그는 쓰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하, 어쩔 수 없이 오늘은 노숙이군.”
소명은 몸을 웅크린 채 고개를 들어 하늘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남호동의 적막 속에서 밤하늘 별빛은 고요하게 빛났다.
느닷없는 노숙이라니 날벼락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봄 무렵이라고는 해도 밤늦은 시간에는 아직 쌀쌀했다. 그러나 소명에게 노숙은 진저리 날만큼 익숙한 일이었다. 천산 등지의 추위를 생각하며 지금은 한여름이나 다름없었다.
화염산에서의 혹염, 천산에서의 혹한. 거쳐 온 세외만리(世外萬里)에서의 기억들이 새삼스럽다. 소명은 달리 불만 없는 얼굴로 장포자락을 여몄다. 흘깃 고개를 돌려 닫혀 있는 나무문을 바라보았다.
언제까지 이곳에 있어야 할까.
적어도 정 부인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고, 모녀의 형편이 나아질 때까지는 자리를 지킬 생각이었다. 이들 모녀를 돕는 것은 스승을 위한, 아니 무엇보다 자신을 위한 일이었다.
이곳 정주에서의 하루하루는 소명에게 그 어느 때보다 고요한 평화를 안겨주었다. 머리 위로 이는 찬바람에도 불구하고 가슴은 따뜻하다.
소명은 어두운 밤하늘을 바라보다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파묻었다.
다음 날, 소명은 여느 때처럼 일을 하고, 홍화철방으로 향했다. 홍씨가 특별히 부탁할 일이 있다고 당부한 터였다.
“오, 왔나.”
“예, 노반. 오늘은 무슨 일입니까?”
“짐을 좀 날라줘야겠어.”
소명은 홍씨가 가리키는 짐을 바라보았다. 긴 나무 상자가 여럿이었다. 홍화철방에서 공들여 만든 명도 서른 자루였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앓아누워버려서 말일세. 모항, 그놈까지 쓰러졌어. 지금 멀쩡한 사람이 자네랑 나밖에 없다네.”
소명은 쓰게 웃었다. 무리도 아니었다. 최근에 일이 크게 바빴으니. 소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맡겨주세요. 노반.”
그 말에 홍씨의 얼굴이 환해졌다.
백마보(白馬堡).
담가와 함께 정주 일대를 양분한 가문이다. 그곳에 물건을 전하는 길이었다. 소명은 묵직한 목함을 잔뜩 등에 지고는 길을 걸었다. 등에 인 칼은 모두 서른 자루. 그 무게는 상당했다.
홍씨는 질린 얼굴로 소명을 바라보았다. 묻는 목소리가 떨려서 나왔다.
“자, 자네, 괜찮은가?”
“예? 하, 뭐 이 정도쯤이야, 거뜬합니다.”
소명은 환히 웃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홍씨는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었다. 그 자신도 완력이라면 어디서 밀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소명처럼은 자신이 없었다.
평소에도 제법 용력이 있는 것은 알았지만…….
‘하이고, 저게, 저게…… 어찌 되나?’
도저히 사람으로 보이지가 않았다.
더구나 백마보 무사들이 쓰는 칼은 여타 칼날보다 너댓 근은 더 나갔다. 백마보의 명도는 자루당 열다섯 근, 그것이 서른 자루이니 얼추 오백여 근에 달하는 무게였다.
짊어지는 것이야 어찌 할 수 있다 치지만, 십수 리의 거리를 너끈히 걷는다는 것이 어디 쉽게 할 수 있는 일이라던가.
“젊어서 좋구먼.”
홍씨는 괜스레 세월을 탓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백마보가 눈앞에 보였다.
백마보는 그 자체가 하나의 촌락을 형성하고 있었다. 보를 이루는 높은 토벽에는 칼 찬 무사들 몇이 우뚝 서 있었다. 높이 세운 깃발에는 백마가 갈기를 흩날렸다.
“어디서 오셨소?”
“정주 홍화철방에서 왔소이다. 주문받은 명도 서른 자루요.”
홍화철방이라는 말에 그들을 맞이한 무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리시오.”
무사는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그리 오래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곧 안내를 받아 백마보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어느 내전으로 들어가자 세 가닥 수염을 단정하게 기른 중년인이 그들을 맞이했다.
“오, 홍 노반. 어찌 직접 오셨소. 하하.”
유삼을 단정하게 걸치고, 평정건을 쓴 모습이 딱 문사의 풍모였다. 그러나 유삼 아래에는 단단한 근육의 움직임을 엿볼 수 있었다.
오래 단련한 자. 내민 손에는 오래 칼을 잡은 사람들에게나 생기는 흔적이 뚜렷했다.
홍씨는 그의 등장에 급히 고개를 숙였다.
“아이고, 둘째 보주께서 직접 나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하하, 내 사람들이 쓸 물건인데 소홀히 할 수 있나요. 어디 좀 봅시다.”
“예, 예. 이보게, 짐을 풀게.”
“예.”
소명은 어깨에서 내려, 앞에 놓고 풀었다. 하얀 면포로 곱게 감싼 칼자루 서른이 모습을 드러냈다. 과연 홍화철방의 공력이 들어간 명도인지라 도갑 대신에 감싼 면포 사이로 서슬 퍼런 예기가 줄줄 흘렀다.
백마보, 둘째 주인인 마영보는 한 자루의 칼날을 뽑아들었다. 감싼 면포에서 소리 없이 빠져나온 도신은 빛을 받아 밝은 광채를 발했다.
“흠, 흐음.”
그는 도신을 이리저리 비추어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칼날을 살피는 그의 눈길은 삼엄하여, 조금 전 까지 미소 짓던 사람이 맞는가 싶을 정도였다.
홍씨는 긴장된 낯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감히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하지만, 그래도 이런 순간에 긴장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마영보는 곧 입가에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칼날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음, 역시 홍 노반이군. 홍화철방의 솜씨는 항상 좋소.”
손가락으로 도신을 한 차례 튕기니, 맑은 소리가 윙 하고 울렸다. 그는 칼날로 흘러내린 면포를 들어 휘릭 감았다.
“총관, 들여오게.”
“예, 이보주님.”
답과 함께 총관이라는 자가 작은 상자를 들고 들어왔다. 안에는 은원보가 한가득 담겨 있었다. 열어본 홍씨는 당황했다.
“아니, 이건…… 너무 많습니다.”
“하하, 아니요. 그런 말마시구려. 홍화철방의 명도 서른 자루에 은원보 오십이면 결코 과한 것이 아니오. 차후에 더욱 신경 써달라는 의미이기도 하니.”
마영보는 웃으며 말했다. 그리 말하는데 더 사양할 수 없었다. 홍씨는 어렵게 은원보를 받아들었다.
문득 마영보의 눈길이 멀뚱히 서 있는 소명에게로 향했다.
“그런데…… 이 친구는?”
“아, 저희 철방에서 일하는 사람입니다. 자네, 인사드리게. 백마보의 둘째 주인이신 마영보 대협일세.”
소명은 급히 두 손을 모으며 고개를 숙였다. 어수룩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마영보는 싱긋 웃어 보였다.
“하이구, 가슴이 다 떨리는군.”
백마보 밖으로 나오기가 무섭게 홍씨는 과장되게 가슴을 쓸어내렸다.
“묵직한데요.”
“그야 그렇지. 은원보가 자그마치 오십여 개일세. 오십여 개면 얼마인 줄이나 아는가?”
“하하, 계산도 못하겠는데요.”
소명은 웃으며 대꾸했다. 은의 값어치야 때마다 다르지만, 보통 동전이 일백이면 은이 한 냥이요, 은이 닷 냥이면 원보가 하나였다.
은원보 오십여 개라는 소리는 은 이백오십 냥. 동전으로 따지면 이천오백 전이다. 홍화철방의 반년 치 수입으로, 이 정도면 정주 같은 큰 도시에서도 오 인 가족이 수년은 족히 풍족하게 먹고 살 만했다.
“해 지기 전에 어서 가세나. 괜히 가슴이 뛰는구먼.”
“예, 예.”
소명은 웃으며 대꾸했다. 그리고 서두르는 홍씨를 쫓아서 발을 재게 놀렸다.
싱글 웃으며 걷는데, 언덕 하나 넘기가 무섭게 발을 멈춰야 했다. 청하지 않은 손님들이다. 그것도 칼을 든. 그 모습에 홍씨의 얼굴이 대번에 사색이 되어버렸다.
“하, 하이고야…….”
흉하게 일그러뜨린 얼굴에 칼날을 높이 들고 흔드는 모습이 전형적인 노상강도의 꼴이다.
“가진 것 다 내놓아라!”
호쾌하게 외치며 길을 막아서는데, 등장과 동시에 들으라는 듯이 쌩쌩 휘두르는 칼날이 제법 위협적이었다.
홍씨는 당장 주저앉을 듯했다. 아무리 불길을 친구 삼고 칼날을 베게 삼는다는 대장장이였지만 눈앞의 칼을 맨손으로 상대하는 재간은 없다.
그래도 있는 간담을 다 쥐어짜서 쓰러지지 않고 버티는 것이 용하다 할 정도였다.
“이, 이보게 소명. 일단, 일단 상자부터 내려놓게. 어서…….”
홍씨는 내민 칼날에 눈을 떼지 못한 채, 뒤에 서 있는 소명을 채근했다. 그러나 소명은 묵묵부답이다.
“아니, 뭘 하고 있는 건가?”
급하게 고개를 돌린 홍씨는 문득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는 소명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는 노상강도 중 한 사내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피식거렸다.
등장하자마자 호기롭게 소리 높인 자였다.
소명은 상자를 바닥에 조용히 내려놓고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나직이 그에게 말을 건넸다.
“기억에 있는 분이신데.”
그 말에 노상강도 중 일인의 얼굴이 일순 새파랗게 질려갔다. 그 모습에 히죽 웃음이 절로 그려졌다.
노상강도 중 일인, 홍추덕은 호기롭게 외치기가 무섭게 얼어붙고 말았다.
상자 하나 들고 있던 사내의 모습이 너무 낯이 익은 것이다. 허름한 장포 자락에 마르고 큰 키, 얼굴을 가린 헝클어진 머리까지…….
‘서, 설마 아닐 거야. 그렇지? 아닐 거야…….’
그리 생각하는데, 그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알은체를 해왔다.
“기억에 있는 분이신데.”
똑바로 자신을 보며 하는 말이다.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눈동자와 딱 눈을 마주쳤다.
뭘 어찌할 사이도, 무슨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일단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그가 웃으며 말했다.
“이제 무관은 그만 두셨나 봅니다?”
“하, 하하.”
‘아, 아니 저 괴물 같은 놈이 왜 하필 여기에…….’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서 다른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놈의 칼은 또 왜 이렇게 무거운지. 칼 든 손이 사시나무 떨듯이 달달 떨렸다.
“저 기억하시죠?”
“그, 그럼요.”
‘내가 누구 때문에 여기서 이 지랄인데…….’
빙긋 웃으며 묻는 말에 홍추덕도 얼굴에 억지 미소를 그렸다. 미소 그린답시고 일그러진 얼굴은 안쓰러울 정도로 식은땀에 흠뻑 젖어들었다.
“그런데, 그 칼 계속 들고 있을 겁니까?”
“아뇨! 아닙니다!”
묻는 말에 번쩍 정신이 들었다. 아직까지 칼을 들고 있었던 것이다. 홍추덕은 버럭 소리치고는 냉큼 칼을 뒤로 돌렸다. 그 모습에 동료 두 사람이 어이없다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 이봐. 지금 뭐하자는 거야?”
“…….”
홍추덕은 그러나 입도 벙긋할 수가 없었다. 칼을 등 뒤로 감춘 채 빳빳하게 굳어서 소명의 눈치만 살필 뿐이다.
“여기 두 분은 잘 모르는 분이군요.”
“저, 저도 잘 모릅니다!”
“그래요? 그럼 제가 손을 써야 하나요?”
“아닙니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는 칼을 내던지고 냅다 끌어서 길가를 비켜섰다. 이쯤 되면 그들도 뭐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뒷골목 주먹이란 본래 7할이 눈칫밥 인생이다. 물론 그렇지 못한 자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