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ti Demon God RAW novel - Chapter 38
38화. 원행(遠行)의 고인(高人)
미련을 털어내고 걷는 것에 집중했다. 표행은 상당히 긴 행렬이었다. 물건도 물건이지만, 동원된 사람도 상당했다.
칼 찬 표사들만 열다섯, 쟁자수들은 스물에 달했다. 소명처럼 외부의 짐꾼인 자들도 서른이었다.
소명은 문득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표행의 분위기가 영 이상했다. 표사, 쟁자수 할 것 없이 모든 이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다른 짐꾼들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무거운 돌덩이라도 나눠 진 것처럼 걸음이 무거웠다.
어디 죽을 자리라에라도 끌려 나가는 양 기이한 긴장감이 흘렀다.
‘이건 또 무슨 경우지?’
자세히는 몰라도 표행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 위험을 감수하는 일임은 알았다. 그렇지만 이렇게까지 무거운 분위기로 출발할 정도는 아니지 않은가.
두리번거리던 소명은 곧 한 쟁자수를 발견했다. 나이 지긋해 보이는 그는 다른 이들과 다르게 그저 심드렁한 얼굴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저…… 어르신.”
“응? 뭔가?”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낯빛들이 다 좋지 않은데요.”
“……자네, 오늘 초행인가 보지?”
“예, 홍화철방에서 왔습니다.”
말을 들은 그는 안쓰럽다는 눈으로 소명을 보았다. 그는 끌끌거리며 혀를 찼다.
“끌, 우리야 일이 본래 이렇다 치지만, 자네는…… 쯧쯧, 정말 안됐구먼.”
“예?”
의아했다.
슬쩍 눈치를 살핀 그는 곧 소명에게 다가가 속삭이기 시작했다.
쟁자수들 사이에서 하숙(河叔)이라 불리는 그는 벌써 삼십여 년째 정주표국의 쟁자수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 그에게서 속사정을 들을 수 있었다.
표행이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표행을 이끄는 사람에게 있었다.
담아인, 담씨의 둘째.
이미 여러 번 목숨의 위협을 받았던 그였다. 일전의 표행 중에서도 그를 노린 습격이 있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리고 근 두어 달 만에 다시 그의 표행이 결정되었으니, 지금의 표행이 그를 노린 것이라는 사실은 불 보듯이 뻔했다. 게다가 나선 표사들마저 전부 신입들이 아닌가. 누군가가 단단히 작정한 것이 분명했다.
여기에 휩쓸리게 생겼으니, 담가의 사정을 조금이라도 아는 자들이라면 당연히 사색이 되기 마련이었다.
소명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고 하더니만, 된통 걸린 셈이다.
“아이고.”
절로 앓는 소리가 흘렀다. 어깨에 짊어진 짐의 무게가 갑자기 배나 늘어난 것 같았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자니 하숙이 다시 다가와 말했다.
“거 미안한 일이지만, 너무 성내지 말게나.”
“예?”
“이공자, 참 안된 사람이야. 휴우. 대부인께서 그리 가시지만 않았어도.”
뭔가 깊은 사연이 있는 듯했다.
담가의 일이고 정주표국의 일이니 굳이 관심 둘 이유는 없었지만, 하숙은 말벗이 그리운 모양이다. 미처 사양하기도 전에 그는 주절주절 온갖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저 흘려들었지만 하숙의 말은 한도 끝도 없었다. 게다가 서둘러 발걸음을 재촉하는 중에도 쉼 없이 말을 하는 놀라운 능력까지 지니고 있었다.
숨도 차지 않는지 주구장창 기나긴 사연을 기어코 다 이어갔다. 쉴 때나, 걸을 때나.
계속해서 듣다보면 머리가 다 어찔할 정도였다.
‘윽, 뱃멀미라는 말은 들어봤어도, 사람 말소리에 멀미가 날 정도라니.’
“이러니 사연이 그리 기구하지 않은가?”
“하, 하하. 그, 그렇군요.”
되묻는 말에 뭐래는지도 모르고 굳은 웃음을 흘리며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 힘 빠지는 한숨을 겨우 속으로 흘렸다.
‘하아, 내가 왜 그랬을까.’
하고 많은 이들 중에서 하필 하숙에게 말을 걸었는지. 주변 눈치를 보고 있자니 다들 안됐다는 눈으로, 또 안도하는 눈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하숙은 이를테면 상습범인 것이다.
그는 온갖 말들을 쏟아냈다. 담아인의 사연으로 시작했다가 정주표국의 이야기가 나오고, 급기야는 자신의 지금 처지까지 줄줄이 이어졌다.
지금은 또 정주의 어디 주점이 어떻다는 둥, 자신이 표행에서 잔뼈가 굵었다는 둥, 젊은 시절에 표두를 도와서 산적을 때려잡아다는 둥, 두서없이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내내 시달리며 걷던 소명은 문득 곁눈질로 담아인의 모습을 보았다.
깊이 눌러쓴 죽립 덕인지, 그는 미처 자신을 눈치채지 못하고 옆을 스쳐 지나갔다. 긴장했는지 하얀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는 말을 몰아가며 표행의 소소한 것들을 살피고 또 챙겼다. 신중한 모습이었다.
소명은 하숙에게 들은 담아인의 사연을 잠시 떠올렸다. 그것은 확실히 있는 집에나 있을 법한 일이었다.
담가에는 세 아들이 있었다. 그중 둘째인 담아인 만이 다른 형제들과 모친이 달랐다. 두 사람은 이부인의 소생이고, 그는 대부인의 소생이었다.
대부인은 늦은 나이에 담아인을 가졌고, 산고를 이기지 못했다. 그리 어렵게 세상에 나온 담아인이었지만, 담가에서 그를 반기는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 부친인 담가주조차 담아인을 멀리했다고 한다. 그에게 담가의 무공조차 가르치지 않았다고 하니.
담아인은 어린 나이에 멀리 백원검파로 보내졌다고 들었다. 그가 부친의 부름을 받고 정주에 돌아온 것은 불과 수삼 년 전의 일이었다.
‘생긴 것과 다르게 강단 있다 싶었더니, 그런 사연이 있었던가.’
그러나 곧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 근데…… 장 소저랑은 대체 어떤 접점이 있는 거야?’
그것은 궁리한다고 답이 나올 만한 의문이 아니었다. 그렇게 길을 재촉하는 중에 표행은 성의 경계를 넘었다.
정주를 떠나고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양천(陽泉)은 하북에서 산서로 들어오는 관도의 첫 관문이다. 이곳에서 목적지인 태원부(太原府)까지는 이틀 거리.
지금까지는 아무런 탈도 없었다. 담아인은 순탄히 나아가는 표행을 둘러보며 한숨을 돌렸다.
‘적어도 표물은 안전하게 전할 수 있겠군.’
그것이 그나마 위안거리이다. 그는 곧 고 표두를 찾았다.
고 표두는 신입 표사들을 다그치고 있었다.
“성의 경계를 넘었다. 표행이 끝나간다고 멋대로 긴장 푸는 놈은 내 손에 먼저 죽을 줄 알아!”
버럭버럭 소리 높이는 모습에 표사들은 새삼 정신을 차렸다. 그 모습에 담아인은 쓰게 웃었다.
“고 표두, 양천에서 하루 쉬었다가 움직이기로 하지요.”
“양천에서요?”
“예, 태원부에 닿으면 쉴 틈이 없을 겁니다. 그리고 우리 사람들만 있는 것도 아니고.”
그는 짐을 이고 있는 사람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들 중에는 정주의 상회에서 개별적으로 보낸 짐꾼들도 있다. 하지만 단지 그것만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니었다.
고 표두 또한 속뜻을 이해했는지 고개만 끄덕였다.
양천에서 하루의 휴식이 허락되자, 다른 표사나 쟁자수들은 모두 술을 마신다느니 무얼 한다느니 하며 각기 흩어졌다.
소명은 달리 할 것도 없어 그저 짐만 지키고 앉았다. 여객의 창고에 드러누운 채 멍한 눈으로 흘러가는 구름만 바라보았다.
“하암…… 한가하네.”
옆에서 떠들던 하숙의 말소리도 없으니 이토록 평화로울 데가 없었다. 흐뭇하게 누워 있던 소명은 문득 손을 뻗어 챙 넓은 죽립으로 얼굴을 덮었다.
바람은 소곤하고, 양광은 따스하니, 노곤하게 잠이 몰려왔다. 이것이 얼마 만의 여유인지 모르겠다.
새근새근 잠든 소명의 귓가에 소곤거리는 말소리가 들려온 것은 얼마 있지 않아서였다.
“……까 말이지.”
“저, 정말인가?”
“아, 그럼.”
소명은 슬그머니 실눈을 떴다.
‘뭐야?’
뭔가 심상치 않은 말소리였다. 대충 흘려들으려 해도 흘려 들리지가 않았다. 새삼 귀를 세우자 목소리가 한층 또렷하게 들려왔다.
“정말 이공자를…… 그리하자는 말인가?”
“아니면? 어차피 이공자는 눈 밖에 났어. 이번이 아니면 또 언제 같이 다니다 화를 당하게 될지 모를 일 아닌가.”
“그, 그래도 사람 도리라는 것이…….”
“그 답답한 소리 하네.”
목소리는 셋이었다. 둘이서 한 표사를 둘러싼 채 뭔가를 종용하고 있는 것이었다.
“어쩌겠나?”
“으, 그, 그것이.”
“종 표사, 자네가 그래도 동기이고 하니, 특별히 이런 말을 하는 걸세.”
“이, 이보게. 조금만 시간에 여유를 주면 아니 되겠는가?”
“하, 이 친구. 우유부단하기는.”
“좋아. 태원부에 닿을 때까지 시간을 주지. 그때까지 결정을 못한다면…… 우리를 탓하지 말게.”
“그, 그럼.”
종 표사라 불린 이는 주눅 든 목소리로 답했다. 그러자 다른 이가 새삼 위협적으로 다그쳤다.
“자네 혹시 고해바치려는 건 아니겠지?”
“아, 아니. 이 사람들이 날 어떻게 보고.”
“그러니 하는 말 아닌가. 우리가 지켜보고 있다는 걸 잊지 말게.”
“그, 그럼. 그럼.”
종 표사는 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잔뜩 움츠러든 그를 두고 다른 둘은 모습을 감췄다. 그리고 새삼 조용해졌다.
문득 멍하니 서 있는 종 표사의 뒤로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담아인과 고 표두였다. 표사 셋이 모이기 전부터 자리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고 표두의 얼굴이 살벌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담아인은 애써 웃으며 종씨 표사의 어깨를 두들겼다.
“수고했네, 종 표사.”
“별말씀을요.”
“출발할 때부터 거슬리더니, 저 죽일 놈들…….”
고 표두는 빠득 이를 갈아붙였다. 그 모습이 험악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담아인은 달리 말이 없었다. 미루어 짐작하고 있었던 일이지 않은가. 그러나 정작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니 착잡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 이제라도 내부의 적을 알았으니. 다행입니다.”
“허면, 이공자.”
“순순히 당해줄 수는 없지요.”
담아인은 이를 악물었다. 두 표사들이 사라진 방향을 노려보는 그의 눈초리는 삭풍처럼 차가웠다.
담아인들까지 자리를 뜨고 한참이 지나서야 소명은 몸을 일으켰다.
“하아, 잠은 다 깼네.”
불퉁하게 중얼거리며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벅벅 긁었다. 귀찮기는 했지만, 대충 머리를 굴리니 상황을 알 것도 같았다.
“앞에서 놀라게 하고, 뒤에서 치시겠다. 대충 그런 계획인 것 같은데.”
소명은 담담히 중얼거렸다.
집안의 싸움이라면 굳이 나설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그 집안싸움에 괜한 목숨과 생계가 달려 있다면 사정은 전혀 다르지 않겠는가.
소명은 눈을 감았다.
* * *
태원부가 가까웠다. 정주표국의 표행은 끝나가지만 소명의 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맡은 물건의 목적지는 태원을 지나 여량산인 까닭이었다.
“이거 아쉽구먼. 자네처럼 내 말을 들어준 사람도 없는데.”
“하, 하하, 하하하.”
그새, 깊이 정들었는지 하숙은 정말 아쉽다는 얼굴이었다. 소명의 입에서는 딱딱한 웃음만 겨우 나왔다.
“그래, 정주에 돌아오면 꼭 다시 보세. 내 그때에는…….”
소명은 정말 최선을 다해서 웃는 얼굴을 만들었다. 꿈에서라도 마주하고 싶지 않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난감해하는 소명의 모습에 다른 쟁자수들이 숨죽여 키득거렸다.
“고생했네. 정말 고생했어.”
문득 쟁자수 중 한 이가 다가와서 말을 건넸다. 웃음이 가득 실린 목소리였다.
“자네 덕분에 올 때는 우리가 편했네그려.”
무슨 뜻인지 묻지 않아도 알 만했다. 억지로 짓는 미소가 꿈틀거렸다. 소명은 잠시 멀어진 하숙의 눈치를 살피더니 소곤거리며 물었다.
“대체 어떻게들 견디셨습니까?”
“그야 눈을 안 마주치는 거지.”
“예?”
“자연스럽게 눈길을 피하다 보면 말문이 줄어들기 마련이거든.”
그의 말에 소명은 큰 깨달음을 얻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이어진 말에 팍삭 오만상을 썼다.
“하지만, 자네는 워낙에 잘 들어줘서 하숙 마음에 쏙 들어버렸으니 쉽지 않을 거야. 혹시라도 정주에서 다시 보거든 죽자고 도망하게나.”
정말 안 되었다는 듯이 말하고는 저리 앞으로 가버렸다. 굳어 있던 소명은 결국 긴 한숨을 토하며 행렬을 쫓았다.
‘이것도 다 마음 수련이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