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ti Demon God RAW novel - Chapter 39
39화. 원행(遠行)의 고인(高人)
쓴웃음을 흘리며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여공이 말하기를 ‘세속풍진(世俗風塵) 속에도 지극한 도가 있으니 배움이란 가릴 것이 아니다’라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문득 소명은 걸음을 멈췄다. 그만이 아니라 표행 전부가 멈춰 섰다. 앞을 바라보는 소명의 눈이 새삼 깊이 가라앉았다. 떠올라 있던 웃음은 사라졌다.
그는 표행을 막아선 검은 옷 사내들을 바라보았다.
저런 사람들을 보고 무엇을 배울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검은 옷의 수상한 이들 열여섯이 나란히 선 채 길을 막고 있었다. 이미 뽑아든 칼날이 흉한 빛을 발했다. 그들을 이끄는 듯, 두 사람이 나와 있었다.
“멈춰라!”
둘 중 한 명이 버럭 외친 일갈이 크게 울렸다.
담아인은 질끈 이를 악물었다. 태원까지 고작 반나절 거리를 남겨두고 사단이 일어난 것이다.
‘기어코!’
정주표국의 이름이 드높은 것은 단순히 무력이 높아서가 아니요, 자산이 많아서도 아니었다.
신용(信用), 무엇보다 신용을 지켰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무리 자신이 밉다고 해도 표행을 끝내기 전에 나서서는 안 되는 일인 것이다.
그는 애써 숨을 골랐다. 지금은 분노할 때도, 다른 생각할 때도 아니었다. 지체 없이 소리를 높였다.
“쟁자수들은 뒤로, 표사들은 앞으로!”
“예!”
담아인의 말을 따라서 열다섯 표사들이 앞으로 뛰쳐나왔다.
일촉즉발의 상황.
다들 올 것이 왔다는 표정이었다. 소명처럼 따로 고용되어온 짐꾼들 얼굴은 특히 사색이 되어 있었다. 그들 사이에서 소명은 등에 짐을 맨 채, 멀뚱히 돌아가는 상황을 바라보았다.
그는 문득 발끝으로 작은 돌조각 몇을 굴리더니, 슬쩍 집어 들었다. 그 모습을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들 고개를 처박은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하숙처럼 경험 많은 쟁자수들이나 그나마 정신을 차리고 표물들을 챙겼다.
앞으로 나선 담아인과 고 표두는 길을 막고 선 흑의인들과 마주했다. 일전에 일급 표사들로도 감당하지 못한 자들이었다. 신입 표사들, 게다가 내통자까지 있는 마당에 어떻게 상대할 수 있을까. 그러나 순순히 죽어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더 말할 필요는 없겠지요.”
“…….”
그들은 역시 입을 열지 않았다. 칼날을 앞으로 세웠을 뿐이었다.
담아인은 일시에 검을 뽑아들었다. 동시에 표사들 역시 발도했다.
차차창!
이전처럼 눈싸움 따위는 없었다. 칼을 뽑는 거친 소리가 시작이었다.
“으, 으아아!”
“끄아아악!”
고요히 다가서는 흑의인들을 향해서 젊은 표사들이 기합인지 비명인지 모를 소리를 막무가내로 내질렀다.
소명은 쟁자수들과 짐꾼들 사이에 쪼그리고 앉아 눈앞에서 벌어지는 칼부림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저 흑의인들이 이번에는 독한 마음을 먹은 모양이었다. 이전에 목격한 것과는 전혀 다른 양상을 보였다. 표두건 표사들이건 가리지 않고 모두 죽일 작정인 것이다. 그 의도가 노골적으로 보였다.
‘하기야, 그러니 일부러 신입 표사들로 표행을 꾸렸겠지.’
표사들을 모두 죽이겠다는 얘기는 여기 쟁자수들이나 짐꾼들도 무사하기는 글렀다는 말이기도 했다.
“쯧.”
못마땅함에 절로 혀를 찼다. 그리고 슬쩍 중지를 튕겼다. 작은 돌조각이 날카롭게 쏘아졌다.
스팟!
작은 소리는 칼부림하는 소란에 파묻혔다.
종 표사는 달려드는 흑의인의 칼날을 감당하기가 쉽지 않았다. 다른 표사와 함께 맞상대하면서도 당장 칼에 베일 것 같았다.
캉! 카캉!
“끅, 으윽!”
이를 악물고 버티지만 그뿐이었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넘어올 것만 같았다.
“아악!”
순간 옆에서 비명 소리가 크게 울렸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던 표사가 크게 칼에 베여 고꾸라진 것이다. 그 위로 재차 칼날이 떨어진다.
그 모습에 종 표사는 눈을 질끈 감았다. 다른 생각할 겨를 없이 막무가내로 달려들었다.
우아아악!
발악하듯 크게 휘두른 칼이다. 통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그런데 손끝에 둔중한 감각이 전해왔다.
번쩍 눈을 뜨자, 그의 얼굴로 뜨거운 핏물이 푸학 하고 뿜어졌다.
“어? 어어어…….”
제 손으로 한 일이 당황스러워서 어쩔 줄 몰랐다. 옆에서 동료가 외치지 않았다면 넋 놓고 있다가 목이 달아났을 것이다.
“종가야! 뭐하는 거야!”
“으, 음!”
종 표사는 급히 정신을 차리고 칼을 다시 세웠다. 터질 것만 같았던 심장의 박동이 이상하게 잦아드는 듯했다. 그는 새삼 힘을 모아 외치며 흑의인들에게 달려들었다.
“으아아악!”
그와 같은 식으로 표사들은 분전하기 시작했다. 밀렸던 것은 최초에 불과했다. 어느 순간마다 날아든 돌조각이 딱 위험한 상황에서 표사들의 목숨을 구했다.
퍽!
둔중한 울림은 다른 사람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지만, 맞은 사람에게는 벼락보다 크게 울렸다.
‘컥!’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요혈을 정확히 노리고 날아들었다. 돌조각 자체는 약하여서 한 번 부딪히면 그대로 가루가 되어 흩날렸지만 실린 위력이 상당했다.
더구나 지금처럼 혼전의 와중이다. 더할 나위 없이 치명적이었다.
“끄윽!”
돌조각에 흔들린 나머지 다 몰아놓고서도 도리어 역공을 당해 피를 쏟았다. 그런 식으로 흑의인들의 피해가 속출하기 시작했다.
하나둘 흑의인들이 죽어 넘어갈 때마다 그들을 이끄는 수장은 당혹스러웠다.
‘뭐가 잘못됐다.’
칼 쥔 손에 힘이 실렸다.
“하압!”
그는 처음으로 일갈을 터뜨리며 크게 칼을 휘둘렀다. 그 기세에 상대하고 있던 고 표두는 비척거리며 물러섰다.
“으윽!”
참았던 신음이 흘렀다. 고 표두의 털이 숭숭한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지금까지 어찌 동수를 이루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봐주고 있었다는 것이냐…….’
상대는 고 표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급히 상황을 살폈다. 정신 차리고 보니 열몇이었던 흑의인의 숫자가 눈에 띄게 줄어 고작 대여섯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그는 다른 흑의인에게 소리쳤다.
“빨리 끝내시오!”
담아인을 상대하는 흑의인이었다. 그는 재촉하는 외침에 흘깃 눈살을 찌푸렸다가 곧 담아인에게 집중했다. 그 역시 사정을 두고 있었던 모양인지, 새삼 집중하는 순간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기세를 발했다.
담아인은 퍼뜩 고개를 치켜들었다.
두건 사이로 드러난 그의 눈매가 전혀 달라졌다. 일 푼의 여유를 두고 마치 가지고 놀듯이 칼을 휘두르던 모습이 일시에 사라졌다. 스산한 눈매를 마주하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는 눈 깜빡할 사이 없이 일도를 내쳐왔다. 그러자 일진의 도풍이 일어 무섭게 휘몰아쳐왔다. 담아인의 하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이, 이건!’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은 닿기도 전에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몸은 알아서 움직였다. 지금까지의 고련이 헛되지 않았다는 듯이.
뒤로 물러나는 것과 동시에 화려한 검적이 허공을 갈랐다. 몰아쳐오는 도풍에 맞닿은 것과 동시에 검신이 크게 휘어졌다.
“이공자!”
고 표두는 저도 모르게 크게 외쳤다.
전력을 다한 풍인도월(風引渡鉞)의 일초가 그대로 깨져나갔다. 이어 검도 깨졌다.
쩌정!
백련의 강검이 이는 경풍을 감당하지 못하고 산산이 부서져 나간 것이다.
“큭!”
날카로운 파편이 담아인의 하얀 얼굴을 스쳤다. 피가 주룩 흘렀지만 그보다는 입은 내상이 문제였다. 악문 잇새로 선홍의 핏물이 울컥 새었다. 자루만 남은 검을 든 채 휘청거렸다.
다시 일도를 휘두르면 담아인의 명은 끝이다. 그러나 흑의인은 움직이지 않았다. 착 가라앉은 눈으로 휘청거리는 담아인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가 침묵하자 곧 주변도 고요함에 짓눌렸다. 벅찬 와중에도 숨을 제대로 쉬는 자들은 없었다. 살아남은 흑의인들은 신속히 뒤로 물러섰다.
그들의 수장은 깊이 가라앉은 눈을 돌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느 고인이시오.”
묵직한 목소리를 토해냈다. 감정이 격앙되어 토해냈다고 하는 표현이 정확했다. 가라앉은 눈동자 깊은 곳에서 타오르는 노기가 선명했다.
분노 어린 한마디는 길게 퍼져갔지만 응하는 자는 없었다. 내린 고요함의 무게만 더할 뿐이다.
두건 위의 눈썹이 크게 일그러졌다. 그는 코 아래를 가린 두건을 홱 내렸다. 그러자 턱가를 가로지르는 큰 흉터를 지닌 중년 사내의 모습이 드러났다.
“다, 당신은!”
고 표두는 그의 모습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놀란 것은 그만이 아니었다. 옆에 있던 다른 흑의인도 크게 당황했다.
“구, 구 형! 아니, 어찌…….”
그러나 정작 그 사내는 두 사람의 놀람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며 소리를 높였다.
“본인은 녹림의 백살도(百殺刀) 구전당이라 하오. 고인께서는 어디의 누구신지요?”
“…….”
백살도라 자신을 밝힌 구전당은 서슬 퍼런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의 진면목이 드러나자 정주표국의 모든 사람들은 숨을 멈췄다. 녹림 중의 인물이나, 백살도는 절정의 도객. 하북 일대에서 악명을 떨친 위인이었다.
“이토록 무시하다니…… 과연 소림이라 이건가!”
계속되는 무응답에 참다못한 그는 버럭 노성을 터뜨렸다. 그 말에 담아인을 비롯한 정주표국 표사들은 또다시 당황했다.
‘소, 소림? 그게 무슨?’
“구 형, 무슨 소리요?”
옆에 있던 흑의인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두건 위로 드러난 두 눈이 크게 흔들렸다. 소림이라는 이름은 분명 놀랄 만한 것이었다.
당황할 새, 구전당의 분노 어린 눈길이 그대로 표사들에게로 향했다.
“끝까지 아니 나오시겠다면…… 나오게 만들어 드리겠소!”
그는 채 말을 맺기도 전에 땅을 박찼다. 아직 정신 차리지 못하고 있는 표사들을 향해서였다.
“어, 어어!”
당황해하는 그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멈, 멈추시오!”
고 표두가 힘을 다해 외쳤다. 그는 우왕좌왕하는 표사들 앞을 막아섰다. 유엽도를 바짝 세워 칼날을 맞이했지만 한 번의 충돌에 속절없이 튕겨나갔다.
캉! 카캉!
비명 지를 새도 없었다.
소명은 흥분하여 날뛰는 구전당의 모습에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손가락 사이에 하나 남은 돌조각을 굴리며 지그시 전면을 바라보았다.
“이래도 아니 나타날 텐가! 이래도!”
캉! 카캉!
“끄윽! 으억!”
구전당은 붉은 눈으로 거침없이 도를 휘둘렀다.
표사들의 입에서 다 죽어가는 소리가 절로 튀어나왔다. 그 앞에서는 배신한 표사든, 아니든 상관없었다. 눈에 보이는 것 없이 흥분해 날뛰는 것이다. 그 기세가 너무도 흉흉하여 같은 흑의인들도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잔뜩 달아오른 그 얼굴을 보며 소명은 쯧, 혀를 찼다.
“으으으…….”
그나마 고개 들고 있던 하숙과 쟁자수들이 바들바들 몸을 떨었다. 그들을 보던 소명의 눈이 담아인에게로 향했다.
담아인은 한쪽 무릎을 꿇고 헐떡이며, 날뛰는 흑의인을 빤히 보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한 모습이었지만, 그 눈은 아직 죽지 않았다.
‘그래, 근성을 보여 봐.’
담아인은 머리가 멍했다. 살인적인 경력이 실린 도풍을 무리해 받은 것이 탈이었다. 가슴이 타는 듯 뜨거웠다. 호흡기로 핏물이 넘어와 숨을 쉴 때마다 괴로웠다. 그러나 아직 정신을 놓지는 않았다.
“하아…… 하아…….”
흩어진 공력을 겨우 끌어 모으며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딱 한 번, 한 번이면 돼…….’
그리고 난리치는 구전당의 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는 마지막 표사까지 쓰러뜨린 후에 홱 고개를 돌렸다. 흉광이 번뜩였다. 조금도 힘이 떨어지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는 고개를 떨군 담아인의 앞에 섰다. 그리고 칼날을 그의 목 위에 올렸다.
스산한 눈빛이 주변을 훑었다.
“그래, 다 죽여야 고인의 모습을 볼 수 있다면, 내 사양치 않지.”
말하며 칼날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늘어뜨린 목이 단박에 잘려나갈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