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ti Demon God RAW novel - Chapter 44
44화. 올 때나, 갈 때나
두 팔을 번갈아 휘저으며 낮게 발길을 내지르는 모습은 금강권 중 나한포렴(羅漢布簾)이었다.
순차적으로 뻗어 한 호흡에 마무리 짓는 나한포렴을 소명은 숨을 잊고, 시간마저 잊은 듯이 느리고 느리게 펼치고 있었다.
금강권과 일심기공이 전부라는 말이 하도 같잖아서 성질을 있는 대로 부렸건만, 지금 눈앞에서 연무하는 모습은 정말로 딱 금강권이었다.
그러나 보통의 금강권은 아니다.
노장시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직이 탄성을 흘렸다.
“태완(太緩)을 넘어서 그야말로 정여동(靜如動)의 경지로구나.”
움직임과 멈춤이 다르지 않으니, 이는 곧 내외공부가 상조(相助)하지 않고는 이룰 수 없는 것이다.
헌데, 누가 있어 금강권과 같은 기초권법을 저 정도까지 연마한다던가. 노장시는 대체 스승이란 작자가 누구인지 더욱 궁금했다. 그런 한편으로 또 소명이 소림제자가 아니라 했던 말을 믿을 수 있었다.
“쯧, 적어도 정신머리가 제대로 박힌 놈이라면 저렇게까지 금강권을 익히게 하지는 않았을 테니.”
노장시는 불퉁하게 중얼거렸다.
천하 무학의 경지란 다 제각각이니, 딱 꼬집어 어떤 무경을 이루었다고 해서 절대경지라고는 말할 수 없다. 무학의 상하고저(上下高低)는 그런 단순한 비교로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지금 소명이 닿아 있는 무경은 남달랐다.
기존의 일류니 절정이니 하는 구분이 무의미할 것이다. 노장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음, 이 몸께서 크게 사정을 두었다고 하여도, 천하의 월부대도에게 주먹질을 한 녀석이니…… 당연한 일이겠지.”
그러다가 곧 콧등을 찌푸렸다. 슬그머니 눈꼬리가 사납게 올라가니, 또 변덕이 인 것이었다.
“아, 다시 생각하니 새삼 열 끓는구먼, 그래. 사마 놈보다 일단 저놈을 먼저 족쳐놓는 편이…….”
말끝을 흐렸다. 찌푸린 눈가에서 스산한 한기가 맴돌았다. 착각인지, 발끝으로 버티고 선 소명의 신형이 잠시 흔들렸다.
소명은 노장시가 보고 있는 것을 알았다. 어찌할까 잠시 고민했지만 곧 신경을 껐다.
‘숨길 게 무어 있다고.’
권로에 집중했다.
조금 과장되게 말해서, 강호에 굴러다니는 무공 중 가장 흔한 것이 금강권이었다. 자신의 금강권도 느리다는 것만 제외하면 별다를 것이 없었다.
‘그래도 그렇지, 뭘 저렇게 뚫어져라 보시나.’
속으로 불만을 표하면서도 두 눈은 손끝을 향했다.
어슴푸레할 무렵에 시작한 금강권의 투로는 이제 막바지에 다다랐다. 소명은 내기와 동작에 더욱 집중했다. 체내에서 내단이 고요하게 진동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새벽의 찬 기운 다 사그라지고, 해가 머리를 덮을 무렵에야 소명은 금강권을 온전하게 마무리했다. 문턱에 앉아 있던 노장시는 그제야 몸을 일으켰다.
그는 불만스레 툴툴거렸다.
“원, 뭔 놈의 것이 그리 길어.”
아이처럼 투정이었다. 소명은 땀을 훔치며 불만 어린 노장시에게 히죽 웃어 보였다.
“이리 배운 것을 어쩌겠습니까?”
그러자 노장시는 두 눈썹을 번쩍하고 치켜들었다.
“오호? 그리 배웠다라? 그래, 누가 그리 가르치더냐?”
아끼고 말 않던 것을 캐물을 만한 꼬투리를 잡은 것이었다. 호기심이 솔직하게 드러나 반짝거리는 눈빛에 아차 싶었다.
“그것이…….”
말끝을 흐리자, 노장시는 더욱 눈을 반짝이며 한 걸음 다가섰다.
“누가 있어서 금강권을 그리 가르칠 수 있다는 말이더냐? 응? 응?”
산만 한 덩치로 고개를 기울인 채, 채근하는 모습에 머뭇하던 소명은 피식하고 웃어버렸다.
두 손 들었다.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고, 소명이 한 소리를 던졌다.
“저 같은 범부(凡夫)의 내력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자꾸 물으십니까?”
“뭐라, 범부? 이놈아 그럼 자칭 범부란 놈한테 처맞은 노부는 뭐냐? 졸부(拙夫)란 말이더냐!”
‘그런 막무가내가…….’
결국에는 주먹 몇 대 맞은 것이 원인이다. 아닌 척, 호탕한 척 껄껄 웃어놓고는 이제와 꽁한 심사를 드러내다니.
새삼 천하오대고수에 대한 환상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그러나 싫은 감정은 없었다. 오히려 강한 체하는 노인의 모습에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소명은 차분히 입을 열었다.
“처음 무학을 가르쳐주신 분은 하남 호가무관의 호경한, 호 관주님입니다. 그분께 금강권과 일심기공을 사사했지요.”
“무관?”
짐짓 심각한 체 안색을 굳혔다. 직계 속가도 아니고, 속가의 무관에서 금강권 하나 배운 놈이 탄지신통을 펼친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소림 속가 중 제일인이라는 등용문주 문심룡조차 탄지신통의 공력은 이루지 못했건만.
‘그렇다고 이놈이 거짓부렁이를 씨불이는 것 같지는 않고.’
새삼 얇아진 눈은 의심으로 가득했다. 그리 보고 있는데, 소명이 말을 이었다.
“시작은 그분께 배웠습니다만, 이후에 저를 가르친 분은…….”
“아니, 그걸 먼저 얘기해야지!”
다른 이가 있다는 말에, 노장시는 고민하던 것이 억울하여 언성을 높였다. 그러자 소명은 슬쩍 뒤로 물러섰다.
눈살을 찌푸린 채, 불퉁하게 말했다.
“자꾸 그러시면 저 말 안 할랍니다.”
“뭐, 뭐야?”
이렇게 나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노장시는 어이없다는 눈으로 소명을 보았다. 월부대도라는 이름을 앞에 두고 저런 식으로 나온다니. 문득, 입꼬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그리고는 곧 무릎을 탁 치며 큰 웃음을 터뜨렸다.
“크, 크하하하. 이놈, 이놈 정말 걸작일세. 크하하하.”
노장시는 소명의 대범한 모습이 크게 기꺼웠다.
‘이름 앞에서 움츠러드는 놈들보다 백배는 재밌구먼!’
터진 웃음을 겨우 진정시킨 노장시는 뜻밖에도 선선히 소명에게 사과했다.
“미안하구먼. 이 늙은이가 조급증이 있어 그런 게야. 자자, 그러지 말고 어서 말해봐. 네 스승이 대체 누구더냐? 어느 기인이사인지, 진실로 궁금하구나.”
“저, 그럼…….”
머뭇머뭇하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러나 나온 이름 석 자에 노장시는 잠시 멈칫했다.
미간에 깊은 골을 만들었다. 찌푸린 채 한참을 있었다.
“장……우상?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가물거리는 기억을 애써 돌이켰다. 아주 낯선 이름은 아니었다. 그는 장 씨 성을 쓰는 온갖 무인들을 다 떠올려봤지만 우상이라는 이름은 없었다.
‘저런 놈을 키워낼 정도의 위인이라면 내 모를 리가 없지 않은가.’
골몰하는 와중에 소명을 흘깃 보았다. 그의 눈에 비친 소명은 위험한 애송이였다.
외견으로 보면 삭아 보이기는 해도, 아직 서른도 안 되는 녀석이다. 스물 중반인 놈이 당금 소림에서도 연성한 이가 몇 안 되는 탄지신통을 척척 펼쳤다. 그런데 익힌 것은 금강권과 일심기공이란다. 그것만으로도 소림에서 기함한 일인데. 기이한 권법으로 천하의 월부대도의 턱을 내갈기지 않았던가.
그때, 소명이 넌지시 말을 보탰다.
“과거, 여량산에서 어르신을 한 번 뵈었다고 들었습니다만.”
“여량산에서 나를 봐? 그럼 녹림의 종자이던가? 아니지, 당시 녹림 종자라면 내가 죄 쓸어버렸으니.”
노장시는 더욱 골똘히 기억을 더듬었다.
퍼뜩 소명이 보였던 괴상한 몸놀림을 떠올렸다. 딱 꼬집어 무슨 권법이라기에는 모호했으나 좌우로 건들거리는 그 모양새는…….
“아하!”
순간, 앉은 채로 무릎을 철썩하고 내리쳤다. 한 사내의 모습을 기억해낸 것이다. 그리고 버럭 외쳤다.
“그 건방진 놈!”
과거 여량채를 칠 때, 그를 따라서 산에 오른 무리가 몇 있었다. 개중에는 천하의 고수라는 그를 보기 위해서 온 자도 있었고, 또 여량채에 원한을 가진 자들도 있었다. 그리고 낭인 놈들도 여럿 있었으니, 그중에 그 이름이 있었다.
딱 봐도 이삼류에 겨우 턱걸이한 놈이었는데, 이상하게도 저보다 강한 산적 놈들을 척척 쓰러뜨리던 녀석이었다. 감히 자신 앞에서 빤히 보이는 허세를 부리기도 했었다.
“허, 어째 기억을 못했을까.”
주로 다리를 썼지만, 그 기괴할 정도로 변칙적인 모습은 크게 닮았다.
게다가.
노장시는 얼굴이 새카만 계집아이의 모습을 떠올렸다. 막무가내로 제자로 삼아달라고 쫓아다니며 귀찮게 굴었다. 나중에야 그놈의 여식이란 것을 알고는 한숨 쉬며 거두지 않았던가. 비록 가까이 두고 오래 가르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거둔 것은 사실이었다.
헌데, 인연이 복잡하여 자신에게 그놈의 제자가 나타났으니. 세상 오래 산 노장시도 이와 같은 인연의 굴레에 잠시 실소를 지었다. 그러나 얼굴은 다시 굳어졌다.
머릿속이 더욱 복잡해진 것이다.
소명은 노장시가 무릎을 탁 치며 외치는 말에 큭, 하고 침음했다. 터지려는 웃음을 겨우 참았다.
‘우와, 첫마디가 건방진 놈이라니……. 어땠을지 뻔하구나.’
보나마나 월부대도면 다냐고 대거리 해댔을 것이 뻔하다. 그 광경이 절로 그려졌다. 소명은 다급히 입술을 깨물어 웃음을 감췄다.
‘그놈한테 배웠다니, 그것 참.’
더 이해가 안 가는 일이었다.
그의 기억으로 당시의 장우상은 잘못된 무공을 익히고 있었다. 지금 소명처럼 내외상조한 경지를 이루지 못한다는 뜻이었다.
‘무슨 기연이 있었던가?’
그러나 아무리 대단한 기연이 있다손 치더라도 바탕을 고칠 수는 없을 것인데. 눈살 찌푸린 채 수염자락을 긁적였다. 노장시는 문득 고개 들어 물었다.
“헌데, 그놈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예? 그것이…….”
노장시가 짐짓 거친 어조로 묻자, 소명은 입을 열려다가 곧 말끝을 흐렸다. 할 말이 없다는 듯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답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노장시 역시 강호의 사람이었다. 그는 입 안이 쓴지 쯧 혀를 찼다. 그는 고개를 돌렸다.
노장시의 주름 깊은 눈이 먼 여량산의 굴곡진 능선을 한참이나 헤아렸다. 잠시간의 침묵 끝에 노장시는 입을 열어 착 가라앉은 음성을 냈다.
“그래, 갔구먼, 가버렸어.”
“예.”
노장시는 그 사연까지는 묻지 않았다. 입가에는 다만 쓴웃음이 맺혀 있었다.
소명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장우상의 사후 몇 년간 세외를 떠돌다가 이제야 중원에 돌아왔으며, 장우상의 유언이 있어 그의 가족들을 찾았다는 사연이었다.
노장시는 물었다.
“그래, 그래서 그놈 식솔을 네가 살피는 게냐?”
“그래서만은 아닙니다만.”
머쓱하게 웃었다. 말끝을 흐리는 그 모양에 노장시는 고개를 흔들었다.
“네놈 사연은 뭐가 그리 비싸냐? 하나 얻어 듣기가 정말 어렵구나.”
“제 사연에 관심을 두시는 어르신께서 이상하신 겁니다.”
“햐, 이놈 보게. 혼자 사는 노인이 다른 사람 사연을 궁금해하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한 거지!”
“그게, 그리 됩니까?”
“그럼!”
당연하다는 듯 노장시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곧 쓴웃음을 그렸다.
“그러고 보니, 그놈의 여식이 내 막내 제자이지. 아느냐?”
소명은 그 말에 놀라기보다는 아차 싶었다. 한밤중 송가의사에서 목격했던 장인지와 두 사람의 만남이 떠올랐다. 산중에서 오래 머무른다던 스승이 노장시였을 줄이야.
소명이 당황해하는 것을 모르고 그는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거참. 새파랗게 어린 꼬마 계집이 제 어미를 지켜야 한답시고 막무가내로 제자 삼아 달라 떼를 쓰는데, 어찌나 난감하던지.”
우스운 것은 어렸던 장인지는 노장시가 누군지도 모르고 제자로 받아 달라 난리를 쳤다는 것이었다. 그저 들고 있던 대도 한 자루를 보고는 막연히 무인이라 생각하고 무작정 매달린 것이었다.
기가 막힌 사제의 인연인 셈이었다.
“인연이란 것이 참 신기한 일이구나. 장가의 제자라는 놈과 이렇게도 만나니. 흐흐.”
노장시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웃었다. 그러나 나오는 웃음소리는 소태를 씹는 듯 쓰디썼다.
“내 비록 오래 신경 쓰지는 못했다만 그래도 제법 성질이 있는 녀석이지.”
노장시는 마주한 지 수년 된 장인지의 모습을 가만히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그는 넌지시 물었다.
“그래, 그 녀석은 어떻게 잘 지내나?”
“첫 대면한 날에 저를 주저앉혀주시고는 아직 이렇다 할 대화를 나눈 적이 없습니다.”
“주저앉혀?”
그 말이 노장시의 관심을 끌었다. 눈이 과하게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