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ti Demon God RAW novel - Chapter 45
45화. 올 때나, 갈 때나
소명은 피식 웃고는 정주를 찾은 첫날 겪은 일을 말했다. 캄캄한 뒷골목에서 장인지에게 호된 꼴을 당한 일이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노장시는 실로 통쾌하다는 듯이 크게 웃었다.
“흐, 흐하하하.”
면전에서 이렇게 대소를 터뜨리다니. 소명은 머쓱함에 고개만 숙였다.
“그래, 그 아이가 발재간은 훌륭하지. 제 아비를 닮아 그랬던가.”
그는 옛적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새삼 당돌한 꼬마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떻게든 하나라도 더 배우겠다고 용을 쓰던 아이였다. 그러나 자신의 무공과는 맞지 않아 제 아비가 남겼다는 절기를 손보아주고, 마땅한 수법을 같이 전수했었다. 아이가 독기가 있었으니, 이후로 수년이다. 지금쯤이면 능히 일류경에 올랐을 터였다.
시커먼 얼굴이 붉어질 때까지 무련에 힘쓰던 모습이 새삼 떠오르니 노장시의 입가에는 절로 쓴웃음이 그려졌다.
“흐, 흐흐흐. 다른 녀석들은 어쩌고 있을지 원.”
“뭐, 송 의원은 환자들을 잘 돌보아주고 있습니다. 홍 소저는 이번에 담가와 혼담이 오간다고 하더군요.”
“오호, 홍아가? 그런 일이 있구먼. 아니, 가만…… 네가 그놈들은 어찌 알았더냐? 그 녀석들이 그리 입 싼 녀석들도 아닌데.”
“아…….”
세상에 월부대도의 제자들이 누구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았다. 제 놈들도 떠벌리고 다니지 않았다. 스승 이름을 팔고 다니기는 싫다나. 그런 녀석들인데, 소명이 세 제자들을 알고 있으니.
새삼 수상쩍은 눈으로 소명을 보았다. 그 눈길 앞에 소명은 아차 싶었다.
“그, 그것이…….”
머뭇하던 소명은 이내 사실대로 고했다.
세 제자가 모여 얘기 나누는 장면을 목격했다는 사연이었다. 이는 자칫 민감할 수 있는 일이었다. 다른 사심이 없다고 하여도 일문의 일을 정탐한 것 아닌가. 그러나 노장시는 껄껄 웃으며 개의치 않아 했다.
“네가 죄스러워 할 필요는 없어. 그놈들 공부가 부족하여 가까이 있음에도 몰랐던 것 아니더냐.”
“하지만…….”
노장시는 이어서 말했다. 호선을 그린 눈가는 장난기로 가득했다.
“그놈들이 머리가 굵었다고 사부 알기를 우습게 알아. 내 언젠가는 큰 코 다치는 날이 올 줄 알았지, 요놈들. 흐흐흐.”
음산하게 숨죽여 웃는 모양새가 도리어 고소해하는 듯했다. 노장시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
창천, 파란 하늘에 하얀 구름이 고요히 흐르고 있었다. 해는 중천에서 밝았다.
“해가 높구나, 높아. 이제 정오로군.”
소명도 따라서 고개를 들었다. 시간이 벌써 이리 되었던가. 소명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어르신. 잘 받으셨다는 확인서 좀 써주시지요.”
그런데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노장시가 멀뚱히 바라보았다.
“가? 가긴 어딜 가?”
“그야, 정주로 돌아가야지요.”
“누구 마음대로?”
이제는 왜 그러냐고 묻기도 질렸다. 엉거주춤한 채 있다가 눈을 꼭 감고,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한숨을 다시 끄집어 내렸다. 물건을 받았다는 확인서도 없이 무턱대고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
소명은 다시 자리에 앉아서 차분하게 물었다.
“시키실 일이라도 있으신지요?”
“일이야 많지. 일단 밥이나 해오거라. 다 되면 깨우고.”
말한 노장시는 방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제는 불만도 나오지 않았다. 아직 하루도 다 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힘겹다.
하루가 이틀이 되고, 이틀이 사흘이 될 때까지 노장시의 부림은 끊이지를 않았다. 수년 동안 밀린 일을 지금에 해치우려는 셈인지. 별의별 일을 다 시켰다.
어느 계곡에 가서 무슨 약초를 캐오라든가, 어디 산촌 마을에 일을 도와주기로 약조했었으니 가서 하고 오라든가, 또 한밤중에 육고기가 고프니 잡아오라 하는 둥, 그야말로 쉴 틈을 아예 주지 않았다.
“소명, 자네 괜찮나?”
“하하, 안 괜찮을 것은 또 뭐랍니까.”
사냥꾼 황씨가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그러자 소명은 호탕하게 웃었다.
그날 이후로, 황씨는 종종 노괴곡을 찾아왔다. 소명이 사냥을 해야 하면 같이 나서주기도 했으며, 노장시가 변덕을 부릴 때에는 옆에서 도와주기도 했다.
지금만 해도 그렇다. 노루 한 마리 잡아오니, 세 살 미만의 어린놈이어야 맛이 난다며 기껏 잡아온 것을 황씨에게 주라 했다. 그리고는 다시 잡아오란다.
결국에는 심술이었다.
“엇, 저기, 저기.”
황씨가 서둘러 한 곳을 가리켰다. 부스럭 먼 곳에서 소리가 들렸다. 그는 급하게 활을 재었다. 황씨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거리에서 활로 잡기는 힘들다.
소명은 황씨의 손을 내렸다.
“맡겨주세요.”
“그, 그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소명은 땅을 박찼다.
파팍!
흙먼지가 튀어 오른 것과 동시에 무서운 속도로 목표물을 향해 내달렸다.
황씨는 그 모습에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하이고야, 정말 대단하구먼.”
소명은 어린 노루를 쫓아 여량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인 관제산까지 달려 올라갔다. 아래에는 끝없이 펼쳐진 수목의 푸름이 눈 안에 가득하다.
노루는 더 도망할 데가 없어 귀 끝을 쫑긋 세웠다. 주춤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소명은 발걸음을 늦추며 슬쩍 손을 뻗어 돌멩이 하나를 주어 들었다.
험한 산길을 쉬지 않고 내달렸음에도 숨찬 기색 하나 없었다.
소명은 노루의 새카만 눈동자를 잠시 보고는 쓰게 웃어 보였다.
“너무 그런 눈으로 보지 마라.”
그리고는 손가락을 튕겼다.
스팟!
불길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그 위에서 헐벗은 노루가 통째로 익어갔다.
노장시는 구운 노루 다리를 우악스럽게 씹었다. 그리고 새삼스레 소명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소명은 고기를 굽느라 바빴다.
‘호, 저놈 봐라.’
지금까지 반은 화풀이로, 반은 호기심으로 끌고 다니며 이리저리 부려먹었는데, 한 번 발끈하지 않고 싫은 기색조차 없이 해나가는 모습이 기특했다.
나이에 비해 경지에 올랐다고 헛바람이 들 법도 하건만, 산촌 마을 사람들을 대하는 모습이나 시키는 일들을 하는 모습이나 한결같이 서글서글하니.
‘햐, 저런 놈을 제자로 들여야 되는 것인데. 난 어떻게 제자랍시고 거둔 것들이……. 에효.’
어쩌다 거둔 놈이 셋인데, 셋 다 마뜩치가 않다. 울며불며 매달릴 때는 언제고, 이제 제 놈들 머리 다 컸다고 스승은 본체만체하고들 있으니.
생각하면 다시 열불이 나, 타는 속에 술만 끼얹었다.
“크으으, 좋구먼.”
한 잔 술에 좋아하는 노장시의 모습에 소명은 웃으며 다시 잔을 채웠다. 고기 구우랴, 잔 채우랴. 손이 분주했다. 바쁘게 움직이던 소명은 흐뭇해하는 노장시를 보고는 문득 물었다.
“그러고 보니, 왜 홀로 은거하고 계십니까? 제자 분들도 있으신데.”
“쩝…….”
소명의 물음에 노장시는 입을 다물었다. 들었던 술잔을 다시 내려놓았다. 새삼 찌푸린 낯이 심상치 않다. 그 모습에 고기를 굽던 손이 멈칫했다.
‘괜히…… 물었나?’
노장시는 그러나 피식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흐흐, 뭐 크게 숨길 일은 아니니.”
문득 튀어나온 한마디는 다른 누군가가 아닌 자신에게 향하는 말이었다.
“내 한 놈을 이겨보고자 이 산중에 들어왔다.”
그리 말하는 노장시의 얼굴은 새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검백 사마종. 일생을 두고 넘으려고 하는 벽이자 목표다. 그를 떨쳐내고자 늦은 나이에도 산중에 터를 잡은 것이다. 강한 상대에 대한 열망은 무인으로서의 당연한 마음가짐일 것이다.
말하며 새삼 전의에 타오르는 노장시의 모습에 소명은 가만히 감탄했다.
‘달리 천하의 고수라 하는 것이 아니구나.’
아무리 연로하다 하여도 젊은이에 못지않은 호승심과 열정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더욱 정진에 힘쓰니.
그런데, 단순히 호승심만으로 보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았다. 주먹 쥔 노장시의 모습에서 알게 모르게 오기가 느껴지는 까닭이었다.
노장시는 흘깃 소명의 눈치를 보고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왜, 뭐가 이상하더냐?”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흐흐. 사마 늙은이와 맺힌 것은 단순히 호승심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이 늙은이의 뿌리와 연관이 있다.”
노장시의 뿌리, 사문을 뜻하는 바. 생각해 보니 천하오대고수 중 사문이 명확치 않은 이는 검백과 월부대도였다.
잠시 호흡을 고른 노장시는 흉중에 오래도록 품고 있던 한마디를 꺼냈다.
“이 늙은이는 본래 신검의 문하다.”
“…….”
그의 말은 지금까지와 무게가 전혀 달랐다. 그러나 소명은 멀뚱히 노장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무게는 느꼈지만, 그 의미까지는 알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소명이 말없이 눈만 깜빡거리고 있으니 노장시는 일단 인상부터 썼다.
“너, 반응이 왜 그따위냐?”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니, 이 몸께서 신검의 문하라고 하면 응당 놀라야 할 것 아니냐!”
“그래야 하는 겁니까?”
소명으로서는 더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노장시의 말이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무리 천하의 고수, 월부대도라고 해도 어미 배 속에서부터 무공을 익히지는 않았을 터이니, 스승이 있다는 것이 그리 놀랄 일은 아니지 않은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그 얼굴에 노장시는 더 성을 내지 못했다. 다만 찌푸린 채 물었다.
“너, 너 신검은중화산(神劍隱中華山)이란 말도 모르냐?”
“처음 듣는 말입니다만.”
“끄응…….”
흥분한 자신이 너무도 한심하게 느껴져서 노장시는 앓는 소리를 흘리고 말았다.
‘하아, 아무것도 모르는 놈을 붙잡고 내가 대체 뭘 하자고…….’
성마, 혈도, 뇌공, 법검, 신묘, 살주, 신검. 전대의 일곱 고수들을 이름이다.
그중 신검이 제일이라.
지금까지 전설로 남은 이름이 바로 신검이다. 헌데, 그 이름에도 멍한 소명의 모습에 노장시는 복장이 터질 지경이다. 그는 욱했지만 이내 화를 다스렸다.
“후, 그래. 하여튼 신검께서는 당년에 세 제자를 들이셨는데, 그중 하나가 이 몸이고, 다른 한 놈이 사마 늙은이지.‘
“오오, 제자 중에 두 분이나 천하고수가 되셨으니. 스승께서 정말 흡족하시겠습니다.”
“흡족은 니미……. 이놈아, 당금의 오대고수가 한자리에 모여도 스승님 옷자락 하나 건들지 못해!”
“에이이……. 그런 말도 안 되는.”
“뭐? 말도 안 돼?”
“천하오대고수가 어디 패 돌려서 딴 이름이랍니까? 설령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게 어디 사람입니까? 무신이지.”
“그래, 말 잘했다. 달리 신검이라 불리신 것이 아니다. 인간의 경지를 넘어 비인의 영역까지 홀로 돌파하신 분이 바로 그분이다.”
“…….”
노장시가 선뜻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어조가 워낙에 단호하여 소명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노장시의 눈치를 살피는데, 그는 이제 없는 스승을 그리는 듯 애틋한 눈으로 먼 산을 바라보았다.
여량산의 깊은 산중에 늦은 햇살이 저물어 가고 있었다.
“그래, 스승께서는 실로…… 대단한 분이셨지.”
소명은 문득 의아해서 물었다.
“그럼 어느 분이 사형인 겁니까?”
“응?”
“동문이시라면서요?”
“그야 당연히 내가 사형이지! 내가 먼저 들어왔단 말이야! 그런데 그놈이 자기 이름이 더 높으니까 제가 사형이라고 떠들지 않더냐!”
노장시는 이내 발끈해서 언성을 높였다. 저기 하늘의 붉은 노을보다 더욱 얼굴을 붉혔다. 그 모습에 소명은 어렴풋이 사정을 짐작할 만했다.
‘설마 했건만, 결국 서열 싸움이구나. 햐…… 천하고수라도 도리는 없는 건가.’
열정, 어쩌고 하면서 감동한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버럭버럭하는 노장시에게서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고는 굽던 고기나 마저 뒤집었다.
‘에효, 내일은 떠나야지. 내일은…….’
하지만 노장시의 눈치를 보건대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 같았다.
물건을 받았다는 확인증 하나 받기가 이리 어려워서야 어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