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ti Demon God RAW novel - Chapter 47
47화. 예기치 못한 일
“젠장!”
괜히 떠올렸다 싶다. 그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코 밑을 훔치며 몸을 일으키다가 퍼뜩 제 손을 보고 놀랐다.
“어? 어! 피!”
호되게 맞은 주먹에 코에서 붉은 핏물이 계속해서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는 성질에 못 이겨 버럭 소리를 높였다.
“이 옥면신풍(玉面迅風)의 잘생긴 얼굴에 흠집을 내다니! 죽었어!”
“에휴.”
그 모습에 백의 사내는 푹 한숨을 흘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산서 일대를 주름잡는 흑선당(黑扇黨)의 소당주가 이런 사람이라고는 누가 생각이나 할까.
그의 몸종이자 수하인 매향은 어이없는 눈으로 소주를 보다가 곧 얼굴을 가린 면구를 벗었다. 저피(猪皮)로 만든 면구 아래 여인의 이목구비가 드러났다.
“이제 어떻게 하실 거예요?”
“어떻게 하기는 뭘 어떻게 하겠어. 정주표국의 방조자가 누군지는 확인했으니, 알려나 주고 손 털면 되지.”
생각 없이 중얼거리는 소당주의 말에 그녀는 큰 눈을 찌푸렸다. 어이없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소당주, 지금 제정신입니까?”
“뭐? 이 자식이…….”
“상대는 십련당을 한 호흡에 때려잡은 고수예요, 고수. 이번 의뢰는 실패인 셈 쳐요. 실패.”
“야, 흑선당 역사에 실패란!”
실패라는 말을 거듭 강조하는 매향의 말에 소당주는 발끈하다가 다시 주룩 흐르는 핏물에 급히 콧등을 눌렀다.
“아고고, 아야.”
“정말……. 어디 봐요.”
* * *
손을 털고 나니, 골목길이 워낙에 복잡해서 헤매고 나오는 데만도 한참이 걸렸다. 어떻게 된 것이, 큰길로 나오고 나니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젠장, 하루 편히 쉬려 했더니.”
상황이 안 풀리려니 이렇게도 풀리지가 않는다. 소명은 툴툴거리며 객사로 향했다. 문 앞에 닿고 보니 하숙이 눈에 불을 켜고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하숙? 왜 그러고 계십니까?”
“아이고, 자네 왜 이제야 오는 건가!”
허겁지겁 달려와 옷자락을 붙잡았다. 무슨 마음고생을 한 것인지 얼굴이 다 핼쑥하다.
“소명, 자네 그러니까. 아니, 아니지. 긴말 할 것 없이 어서, 어서 들어가세.”
그는 두 손으로 소명을 잡고 안으로 끌었다. 영문을 몰라 하다가 문지방을 넘고 나서야 상황을 알 수 있었다.
“아, 이런.”
그의 얼굴에 귀찮은 기색이 역력했다.
객사의 담벼락 너머에는 불을 크게 밝혀 환했다. 그리고 담아인이 크게 긴장한 기색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의 모습을 보고서야 알 만했다.
자신을 알아본 것이다.
담아인이 허겁지겁 달려나왔다. 그리고 소명의 앞에서 대뜸 허리를 접었다.
“은공!”
“하, 하하.”
담아인의 모습에 소명은 어색하게 웃으며 슬쩍 물러서려고 했다. 그런데 뒤를 보니 이미 고 표두가 자리해 있었다. 그 역시 관도에서 소명에게 목숨의 구함을 받은 처지.
“과연 은공이시군요.”
그는 결연한 표정으로 두 손을 맞잡고 크게 허리를 접었다. 두 사내 사이에서 소명은 난감함에 식은땀만 흘렸다.
‘아니,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일이 더욱 커지려는 것을 사정하다시피 해서 겨우 만류했다. 그래서 조촐한 주연을 마련하는 것으로 타협할 수 있었다.
조촐하다고는 해도 미주(美酒)에 가효(佳肴)라. 충분히 호사스러웠지만 담아인에게는 많이 부족하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술상을 두리번거리며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은공, 정말 이 정도로 괜찮으시겠습니까? 말씀만 하시면 당장이라도…….”
“아아, 저를 더 어렵게 만들지 말아 주십시오.”
“죄, 죄송합니다.”
소명으로서는 이 자리도 크게 부담스러웠다. 딱히 이런 대접을 바라고 행한 일도 아니니.
‘후우. 잘사는 집안이다, 그건가?’
애써 불편한 기색을 지우며 술잔을 기울였다. 좋은 술이다. 노장시의 백화주에 비견할 만했다.
빈 술잔을 다시 채우며 담아인은 소명의 눈치를 살폈다. 뭔가 말하고 싶은데 차마 말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모양새였다.
“왜 그러십니까?”
“그것이……. 저, 은공께선 정말 소림의…….”
‘젠장, 왜 안 물어보나 했다.’
속으로 혀를 차며 애써 표정을 다스렸다. 그리고 마음을 먹었다. 아주 모르는 척하기로.
“예?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만.”
“녹림의 백살도를 상대할 때 도와주지 않으셨습니까. 그때에 백살도가 말하기를 소림의 탄지신통이라 하였습니다.”
“전혀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소명은 연신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주로 향하는 관도에서 도와준 일은 빼도 박도 못하니 어쩔 수 없다고 해도, 태원부에서 도운 일은 백살도, 그 작자의 입방정 때문에라도 조용히 넘어가는 것이 제일 좋은 일이었다.
‘괜히 탄지신통 어쩌고 해서 얽히면 일만 번잡해지지. 노장시, 그 어른 때처럼 귀찮은 일에 얽히고 싶지 않단 말이야.’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 속내를 담아인이 어찌 알겠는가. 그저 굳이 겸양한다 생각하여 한층 감격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흘깃 돌아가는 눈치를 본 소명은 내심 한숨을 흘렸다.
‘젠장, 씨알도 먹히지 않았구나.’
그래도 담아인의 감탄의 눈길을 꿋꿋이 모른 체하며 음식을 비워나갔다.
다음 날, 날이 밝자 계획대로 정주표국은 태원부를 나섰다. 원래라면 정주로 향하는 여러 표물들을 수령해야 하지만, 담아인은 표사들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모두 물리쳤다. 그리고 빈 수레에는 거동이 힘든 부상자들을 실었다.
정주를 나선 지 열흘 만에 돌아가는 것이다.
짐이 가벼운 덕인지 행렬의 속도는 빨랐다. 이틀 만에 성의 경계를 넘었고, 다시 이틀 만에 드디어 정주에 닿았다. 긴장은 했으나 우려하던 습격은 없었다.
소명은 멀리 정주의 모습을 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흠, 그때 놈들을 혼내준 것이 제대로 먹힌 건가?’
태원부 뒷골목에서 난리 쳤던 당시 백의 사내의 모습을 떠올렸다. 눈초리가 심상치 않았지만 적어도 말귀는 통하는 상대인 듯했다.
어쨌든 잘된 일이라, 어깨만 으쓱했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니 아쉬워하는 기색이 역력한 하숙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에고, 이제 가면 또 언제나 보려나, 소명.”
“하하, 어찌 그러십니까. 같은 정주인 것을요.”
“내 이리 대한다고 설마 서운해하거나 하지는 않겠지?”
하숙은 말하며 흘깃 행렬 선두의 담아인과 고 표두의 눈치를 살폈다. 그날의 자리에 같이 있던 하숙이었다. 걱정될 만도 한데, 소명은 웃으며 말했다.
“그런 말씀 마세요. 하숙께서 어려워하셨으면 오히려 제가 더 마음이 무거웠을 것입니다.”
“헤, 헤헤. 그런가? 헤헤.”
소명의 말에 하숙은 밝게 웃었다. 나이답지 않게 명랑한 모습이다.
정주에 들어서고, 소명을 비롯한 다른 짐꾼들은 그 자리에서 흩어졌다. 그런데 담아인이 소명에게 다가왔다.
“은공.”
“무슨 일이십니까?”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
머뭇거리는 기색으로 보아 무슨 어려운 부탁이라도 하려는 듯했다. 그는 연신 붉은 입술을 깨물며 쉽사리 말문을 열지 못했다.
어려워하는 속내가 빤히 들여다보였다.
“백살도라는 이름 앞에서 굳건하던 모습은 어디로 갔습니까, 담 공자.”
“예? 그, 그것은.”
소명의 차분한 목소리에 담아인은 퍼뜩 고개를 치켜들었다. 소명의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은 아무런 감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그 눈동자에 비춘 것은 멍청한 얼굴을 하고 있는 자신이었다. 순간, 담아인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내가, 내가 대체 무슨 짓을…….’
그는 급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은공. 제가 큰 결례를 범했습니다. 이리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다니…….”
“…….”
소명은 담담한 눈으로 담아인을 바라볼 뿐이다. 다시 고개를 든 담아인은 분명 조금 전과 달랐다. 백살도의 앞에서도 당당했던 한 무인의 모습을 되찾은 것이다.
한순간에 단단해진 모습으로 담아인은 다시 말 위에 올랐다. 그는 다시 한 번 소명과 눈길을 마주하고는 이내 말을 몰아갔다.
물끄러미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사람 참 순진하네. 대충 주워섬긴 말이 이렇게 잘 먹히다니.”
중얼거린 소명은 곧 피식 웃으며 몸을 돌렸다.
소명은 홍화철방에 먼저 들렀다. 달아오른 화로의 열기가 멀리서도 느껴졌다. 안으로 들어서니 철방 사람들은 바쁜 와중에도 손을 멈추고 소명을 반겼다.
“아이쿠, 왔구먼. 고생했네, 고생했어.”
“아이구야, 이거 얼굴색이 더 좋아진 것 같은데?”
소명은 같이 웃으며 받아온 서찰을 홍씨에게 전했다.
“노반, 그 어른께서 전하라 하셨습니다.”
“아아. 그렇군. 제대로 전했어…….”
홍씨는 흘깃 눈치를 보다가 넌지시 물었다.
“고생 많았지? 듣자니 일이 좀 있었다 하던데.”
“고생이랄 정도는 아닙니다.”
“허허, 그것 참. 그분이 좀 괴팍한 분이라 이상한 주문만 잔뜩 하신단 말이야. 도대체 그런 대도를 사람이 어떻게 쓸 수 있다고.”
그간 사연이 있었는지 홍씨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 새삼 한탄하듯 중얼거렸다.
“유선, 그 녀석은 대체 어디서 그런 기인과 인연은 맺어가지고서는…… 에잉…….”
눈치를 보아하니, 홍씨는 월부대도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모양이었다. 소명은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대신 농으로 한마디를 툭 던졌다.
“혹시 다음에 뵐 기회가 된다면 노반의 그 말씀 꼭 전해드리지요.”
“아, 아니, 이 사람이.”
“하하하.”
그 말에 홍씨는 기겁했다. 자리에서 펄쩍 뛰는 모습에 철방 사람들 모두 크게 웃었다.
일을 마무리 짓고, 소명은 철방을 나섰다.
받은 수고비를 짤랑거리며 복잡한 정주시전을 거닐었다. 여느 때처럼 많은 사람이 모여 물건을 사고팔고 있었다. 소명이 지나가니 여기저기서 알은체해왔다.
“아니, 소명이 아니야? 이게 얼마 만이야?”
“어디 갔다 온 건가? 요새 통 얼굴이 보이지 않더라니.”
“예, 일이 좀 있었습니다. 별일들 없으셨죠?”
알아보는 상인들에게 다 인사를 해가며 시전을 지났다. 남호동 골목이 이제 코앞이었다.
마음까지 들떠서 발걸음이 한없이 가벼웠다. 그러나 막상 집 앞에 선 순간, 소명은 굳어버렸다.
“이, 이게…….”
소명은 당황했다. 정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집안은 휑하여 인기척도 없었다.
“자, 정 부인! 장 소저!”
머뭇하던 소명은 크게 소리치며 안채로 달려 들어갔다. 기척 없는 것을 보았지만 그래도 두 눈으로 확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텅텅 빈 침상.
막상 눈으로 보니 머릿속이 복잡하게 뒤엉켰다. 가슴이 쿵쿵 거세게 뛰었다. 황망함을 애써 부여잡았다. 소명은 당장 날선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방 안은 어질러져 있었지만, 외부에서 침입한 흔적은 없었다. 마치 서둘러 뛰쳐나간 듯했다. 달리 수상쩍은 점을 발견하지 못한 소명은 일단 밖으로 뛰어나갔다.
찾은 것은 옆집이었다.
쿵, 쿵, 쿵!
“공 부인, 공 부인!”
급하게 문을 두들기며 외쳤다. 안쪽에서 기척이 들렸다.
“누구요?”
“저 옆집에 소명입니다. 부인.”
“응? 아이고, 소명 총각!”
공 부인은 급히 문을 열어주었다. 후덕한 부인의 얼굴이 보였다. 그녀 얼굴에는 반기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이구, 어디 갔다가 이제야 돌아왔는가.”
“무,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정 부인이…….”
“정씨하고 인지는 지금 송가의사에 있네. 오밤중에 정 부인의 상태가…….”
말을 들은 소명은 허둥지둥 인사하고는 급하게 돌아섰다.
공부인은 새삼 소명이 뛰어가는 모습을 보더니 혀를 내둘렀다.
“하이구야, 빠르기도 해라.”
놀람은 잠시, 곧 이맛살을 찌푸렸다.
“아니, 그래도 말은 끝까지 듣고 가야지. 이제 괜찮아졌다고 하던데…….”
말끝을 흐린 공 부인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집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