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ti Demon God RAW novel - Chapter 54
54화. 분노(忿怒)는 고요하다
소명은 닥쳐오는 누런 도파(刀波)를 목도하고 차분하게 숨을 들이켰다.
여량산에서 월부대도, 노 노사의 도기를 경험하였으나 그것은 지고한 경지에 이르러 수발이 자유로운 상황이었다. 지금은 그야말로 필살의 살기를 품은 채 덮쳐오고 있었다. 일말의 주저함은 없었다. 모든 기력을 다한 일도였다.
아차 방심하면 도기의 파도에 휩쓸려 피 모래가 될 판국이었다.
소명은 허리춤에 양권을 바짝 붙였다. 물러서거나 회피하지 않았다. 그리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았다. 그는 밀려오는 황천도파에 맞서 나가며 양권을 번갈아 떨쳤다.
금강권식 금강포추(金剛砲墜).
꽝! 꽝! 꽝!
권경과 도파가 연이어 충돌했다. 땅이 들썩일 만큼 큰 굉음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동시에 비좁은 골목을 가득 메워가던 황색의 도파가 점차 흩어졌다.
“흐억!”
갑갑한 신음성과 함께 팽오성은 골목 구석에 처박혔다.
황천도의 여파는 상상 이상으로 골목길이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소명이 버티고 선 자리만 멀쩡할 뿐. 이외의 곳은 모두 땅거죽이 뒤집혔고 담벼락에 무수한 금이 가서 당장이라도 무너질 듯 위태했다.
소명은 후, 짧은 숨을 흘렸다. 문득 손을 내려다보았다. 덜덜 손이 떨렸다.
몰아쳐오는 도파에 맞서 금강포추를 좌우 전력으로 서른 번이나 내쳤다. 한 호흡이라도 늦었다가는 크게 험한 꼴을 당했을 터였다.
떨리는 손을 꾹 움켜쥐었다.
전력을 전력으로 응하여 내단이 흔들릴 정도였다. 그러나 숨을 고르는 것으로 공전무융의 내단은 고요히 진동했다. 서서히 퍼져가는 진력이 내외를 다스렸다. 곧 신색을 회복한 소명은 고개를 돌렸다.
구석에 처박힌 팽오성이 몸을 들썩이며 어떻게든 일어나려 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처지였다. 결국 축 늘어져 숨만 헐떡였다.
그를 향한 소명의 눈초리가 삼엄했다.
다가서자 그는 어렵게 고개를 들었다. 소명을 노려보던 팽오성은 문득 피 섞인 마른기침을 터뜨렸다.
“쿨럭, 쿨럭…….”
상당한 내상을 입은 듯했다.
소명은 주저앉은 팽오성과 눈높이를 맞췄다.
“왜 장 소저를 노렸습니까?”
“난 모르네.”
묻는 말에 팽오성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처음 등장했을 때의 기세는 조금도 없었다. 그는 다만 힘없이 고개만 저었다. 그런 팽오성을 소명은 탓하지 않았다.
축 늘어진 팽오성의 모습은 마치 버려진 헝겊인형처럼 보였다.
이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다못해 입을 다무는 것. 그뿐이었다. 그는 눈을 감고 귀를 닫고 입을 다물었다.
소명은 다시 묻지 않았다.
물끄러미 팽오성을 내려다보았다. 늘어뜨린 손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분노한 가운데 싸늘한 살심(殺心)이 슬쩍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소명은 숨을 고르며 손을 풀었다.
화풀이나 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소명은 바로 발걸음을 돌렸다. 자박거리는 발소리가 빠르게 멀어졌다. 팽오성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순식간에 소명의 모습은 사라지고 보이는 것은 텅 빈 골목의 어둠뿐이었다.
스산한 바람이 일었다. 팽오성은 당황하여 허리를 세웠다가 곧 신음하며 흙벽에 기대 누웠다.
“허, 이 팽오성이 그리 하찮다는 뜻인가.”
그는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문득 덜렁거리는 오른손을 바라보았다. 황천도파의 여력을 감당 못해 손목이 나가버린 것이다. 이 손으로 다시 칼을 쥘 수나 있을는지. 실상 오늘이 팽가의 절정도객 창후도의 마지막 날인 셈이었다. 그는 깊이 한숨을 흘리며 눈을 감았다.
다 놓아버리려는 순간 갑작스런 기침소리가 그를 깨웠다.
“쿨럭! 쿨럭!”
팽오성은 퍼뜩 눈을 치떴다. 고개를 돌리자 바닥에 뒹굴고 있던 두 조카는 움찔거리며 몸을 떨며 기침을 터뜨렸다. 괴로운 모습이었다.
“하, 하하……하하…….”
하지만 그 모습을 보며 팽오성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입으로는 웃으나 눈가에서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팽오성은 이런 자신이 참 방정맞다고 생각했다. 눈물이라니. 그래도 두 조카의 생사(生死)에 무엇보다 마음이 놓였다.
자신의 손목은 아무래도 좋았다.
소명은 팽가의 세 사람을 남호동 골목에 놓아두고, 밤길을 걸었다. 가슴이 불안하게 뛰었다. 그러나 머리는 한없이 차가웠다. 마치 옛적, 고묘의 한담에 머리를 담그고 있는 것 같았다. 캄캄한 골목길을 걷는 발걸음 소리가 무거웠다. 골목을 돌자 불을 밝힌 송가의사의 모습이 보였다. 의사의 간판이 눈에 들어오자 소명은 잠시지간 숨을 돌렸다.
“후우…….”
숨을 내쉬고 다시 눈을 뜬 소명의 얼굴은 평상심을 찾은 듯 보였다. 그리고 의사 안으로 들어갔다.
마당에서는 초용이 약재를 널고 있었다.
“어? 소명 아저씨.”
“정 부인은?”
인사도 없이 먼저 묻는 말에 초용이 별 생각 없이 대답했다.
“정 아주머니는 병사에 누워 계세요. 아까 탕약 드리고 나온 참이에요.”
“그래…….”
소명은 지그시 입술을 물었다. 정 부인의 무사를 확인한 것에 일단 가슴을 놓았다.
“장 누님이 저녁에 모시러 오겠다고 했는데 아직까지 소식이 없네요. 어찌된 거예요?”
“음, 일이 생겨서. 일단 정 부인께는 다른 말 말거라. 내일 중으로 모시고 갈게.”
“뭐, 큰일이라도 났어요?”
“아니다. 조금 귀찮은 일이 생겼을 뿐이야.”
둘러대는 말에 초용은 입술을 삐죽였다. 그리고는 장난스레 말했다.
“설마, 장 누님이 또 요리한답시고 집에 불 낸 건 아니죠?”
“하하.”
농에 소명은 쓰게 웃어주었다. 그리고 의사를 나섰다.
그 모습을 빤히 보던 초용은 머리를 벅벅 긁고는 다시 약재를 살폈다. 문득 한쪽 창문이 덜컹하고 열렸다. 송 의원이 빠끔하게 고개를 내밀었다. 찌푸린 눈으로 두리번거리더니 초용을 보고는 물었다.
“아용. 장인지, 그 녀석 아직도 안 왔느냐?”
“지금 소명 아저씨가 대신 왔다 갔는데요.”
“응? 소명, 그 사람이?”
송 의원은 마른 얼굴을 더욱 찌푸렸다. 그는 창밖으로 몸을 빼며 물었다.
“그래, 뭐라더냐?”
“장 누님이 급한 일이 있어 내일 다시 모시러 오겠대요.”
“…….”
“그나저나 무슨 일인데 그러지?”
초용은 송 의원의 심각하게 굳은 얼굴은 보지 못하고 이리저리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송 의원은 자리에서 일어날 듯하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지그시 입술을 문 그는 곧 초용을 불렀다.
“용아, 그건 관두고 지금 철방에 가서 유선이를 좀 불러오너라.”
“엑? 홍 누님을요? 이 시간에요?”
“어서.”
뒷말은 듣기 싫다는 듯, 송 의원은 창문을 닫았다. 멀뚱히 마당가에 서 있던 초용은 이내 입술을 삐죽였다.
“체엣. 소리 듣는 건 스승님이 아니라 저란 말이에요.”
들리지 않게 소곤거리며 불평했다. 그러면서도 손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의사를 나선 소명은 느릿한 걸음으로 골목 어두운 길을 걸었다. 그는 문득 멈춰 서서 고개를 들었다.
캄캄한 하늘, 별빛은 총총했다. 북방 먼지 때문인지 달이 붉었다. 내리는 월광은 음산했다.
“후우…….”
복받치는 한숨이 깊었다. 그것은 잠깐의 안도였다. 정 부인의 무사함이 감사했다. 그는 곧 고개를 바로 했다. 흔들렸던 눈가는 깊이 가라앉았다. 얼굴에서는 표정이 사라졌다. 다시 내딛는 발걸음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이제부터 어디로 가야할지 잘 알았다.
어느 순간, 그의 신형은 골목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어두운 길을 순식간에 가르고 지난 소명은 어느 거대한 장원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담가의 본가인 정명장(正明莊)이었다.
정주표국이 있는 중산중로의 대로가 아니라 정주 외곽에 위치해 있었다. 장원은 한 길의 대부분을 차지할 만큼 거대했다.
‘정명담가(正明潭家)’
굳게 닫힌 문 위에 규모에 걸맞은 큰 편액이 걸려 있었다. 좌우에 등불이 밝았다. 노란 등에는 담가의 담(潭)자가 굵게 적혀 있었다.
소명은 닫힌 문을 두들겼다. 묵직한 소리가 한밤의 고요를 깨뜨렸다. 그 소리는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또렷하고 묵직했다. 한참 후에 발소리가 들렸다.
“이 시간에 대체 누구요?”
“사람을 찾으러 왔소.”
“뭐? 사람?”
문 너머의 목소리는 소명의 말에 어이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이 오밤중에 무턱대고 사람을 찾으러 왔다 하니. 문을 열어줄 리가 만무했다.
“일 없소. 볼 일이 있거든 날이 밝고서나 찾아오시구랴.”
문지기는 퉁명스레 쏘아붙이고는 돌아섰다. 그 기척을 읽은 소명이 재차 외쳤다.
“화급을 다투는 일이오! 담 공자. 담 둘째 공자를 불러 주시오!”
“뭐요? 이 공자를?”
“그렇소.”
“아니, 그래도 이 시간에…….”
자정도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 문지기는 주저했다. 그러나 소명은 순순히 물러서지 않았다.
“지금 담 공자를 불러주지 않으면 당신이 큰일 날 수도 있을 것이오.”
“뭐, 뭐야? 아니, 이 사람이. 지금 누굴 겁박하는 거야!”
“…….”
문 너머에서 문지기는 크게 발끈했지만, 곧 쳇 혀를 찼다. 그리고는 넌지시 물었다. 아무리 그래도 담가의 둘째 공자의 이름을 무시하기는 꺼림칙한 것이었다.
“그 뉘신데 이 공자를 찾는 게요?”
“남호동 소명이라는 필부요. 그리 전해 주시오.”
담담한 목소리에 문지기는 들으라는 듯이 헹 하고 코웃음 쳤다. 그러나 당황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늦은 시간이었다. 아니, 늦어도 한참 늦은 시간이었다.
이 공자의 처소로 소식을 전하기는 했지만 딱히 답변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 어디 혼 좀 나봐라 라는 심보가 더 강했다. 그런데 지금 이 공자가 헐레벌떡 정문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하이고, 이거이 대체 무슨 일이랴.”
문지기는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서두르는 담아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로서는 뭘 어찌하면 좋을지 몰랐다.
담아인은 침의 차림 그대로였다.
남호동 소명이라는 말을 듣기가 무섭게 침상을 박차고 달려나온 것이었다. 그의 등장에 문지기들은 죄 놀란 토끼 눈을 한 채, 멍청하게 서 있었다. 담아인은 그들을 다그쳤다.
“뭣들 하는 건가? 어서 문을 열지 않고!”
“예, 예. 공자.”
그의 쩌렁쩌렁한 다그침에 문지기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허겁지겁 가로지른 문빗장을 치우고 큰 문을 당겨 열었다. 끼익 소리가 야공에 높이 울렸다.
담아인은 소명의 모습을 보기가 무섭게 꾸벅 허리를 접었다. 크게 감동한 얼굴이었다.
“은공, 와주셨군요.”
늦은 시간에 찾아왔음에도 불편한 기색은 조금도 없었다. 그러나 소명은 그 환대를 솔직하게 받지를 못했다. 그는 대뜸 말했다.
“담 공자. 공자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제 도움이요? 말씀만 하십시오.”
“이곳 담가에 사람을 찾으러 왔습니다.”
“사람을 찾아요?”
“장 소저. 장인지 소저를 찾아왔습니다.”
“!”
소명의 말에 담아인은 찢어질 듯이 눈을 치떴다. 맞잡은 손이 부르르 떨리더니 급히 소명의 옷자락을 부여잡았다.
벌린 입에서 목소리가 쉬이 나오지 않았다.
“자, 장 소저라니……요. 그게……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겨우 쥐어짠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
소명은 담아인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았다. 반가움에 환했던 얼굴이 순식간에 사색이 되어버렸다.
‘대체…….’
장인지와 어떤 사연이 있는 것인지.
소명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이토록 흔들리는 모습을 보면 결코 가벼운 정은 아닐 것이었다. 소명은 담아인이 정신을 수습할 때까지 기다렸다.
화급을 다투는 일이었지만 서둘러서 될 일이 아니었다. 소명에게는 지금 담아인의 도움이 필요했다.
방안에서 황촉이 환하게 타올랐다.
소명은 촛불 너머 담아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전후사정을 들은 직후, 그는 창백하게 굳어버린 채 아무런 말도 못하고 있었다. 아니, 정신 줄을 놓아버린 것처럼 보였다. 그의 시선은 탁자 위에 고정된 채 미동조차 없었다.
다 헤어진 갈색의 머리끈.
장인지의 긴 머리카락을 질끈 묶고 있었던 그 끈이었다.
지금 담아인은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소명의 말 중, 장인지가 납치되었다는 말만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런 담아인을 지켜보던 소명은 나직이 입을 열었다.
“담 공자.”
“흡!”
낮지만 힘이 실린 한마디였다.
그 목소리가 제 혼란 속에 허우적거리던 담아인의 정신을 퍼뜩 깨웠다. 그는 급히 고개를 들었다.
“으, 은공, 죄송합니다. 제가 그만 못난 모습을…….”
당황한 듯 말을 더듬던 그는 마른 침을 겨우 삼켰다. 얼핏 정신을 차린 듯 했지만 눈동자는 아직 혼몽했고 탁자 위에 맞잡은 두 손은 계속해서 떨리고 있었다.
머뭇거리던 담아인은 갑작스레 혀를 질끈 깨물었다. 화끈한 통증과 비릿한 피 냄새가 입안을 가득 채웠다. 그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다시 고개를 든 담아인의 눈동자는 또렷했다. 그 눈으로 소명을 직시했다.
소명은 잠시 담아인의 달라진 얼굴을 바라보았다.
짧지 않은 순간이었지만 충격을 이겨내고 냉정을 되찾았다. 심신의 수양이 가볍지 않다는 것이었다.
‘상당하군.’
이지(理智)를 회복한 담아인은 굳은 얼굴에 애써 미소를 그려 넣었다.
“설마 은공께서 장 소저와 연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저 또한 그렇습니다. 담 공자.”
소명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나 지금이 서로 사연이나 나누고 있을 때는 아니지 않은가. 신색을 회복한 담아인이 소명에게 들은 말을 정리했다.
“본가의 비복 차림을 다섯, 그중 둘은 삼부인의 가마꾼이었으며 다른 셋은…….”
“팽가의 도객이라, 스스로 말하더군요.”
“…….”
담아인은 뿌득하고 어금니를 악물었다. 치뜬 눈에 복잡한 심정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이부인. 기어코 팽가를 끌어들이신 겁니까…….’
가슴이 철렁하고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