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ti Demon God RAW novel - Chapter 56
56화. 길고 긴 하루
대수롭지 않게 뻗은 소명의 손끝에 닿기가 무섭게 픽픽 바닥에 고꾸라지고 던져졌다. 손속을 어떻게 하였는지 보아도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손끝이 살짝 닿았을 뿐이고 옷깃이 슬쩍 잡혔을 뿐이건만, 균형을 잡지 못하고 호되게 바닥에 처박혔다.
금나연환수의 수법이었다. 얼핏 간단하게 보이는 손동작이었지만 일식지간 장정 대여섯이 고스란히 바닥에 처박혔다. 그리고 맨 뒤에서 등불을 들고 있던 장정 하나만이 남았다.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널브러진 제 동료들의 모습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무가의 비복들이라 그들도 제법 힘쓰는 재간이 있던 터였다. 그럼에도 이렇게 손 쓸 틈도 없이 쓰러져 버리다니. 멍청하게 서 있는 그에게 소명이 다가섰다.
“이부인께서는 어디에 계시오?”
“…….”
낮은 물음에 사내는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한곳을 가리켰다. 흘깃 본 소명은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고맙소.”
“에, 에에…….”
소명이 돌아서서 자리를 벗어나자, 그 모습을 멍하니 보던 사내는 오금이 풀려서 자리에 주저앉았다.
“하이고…….”
맥 빠진 한숨 소리가 겨우 비집고 나왔다.
소명은 빠르게 걸었다. 이곳 어딘가에 장인지가 있을 터였다.
문득 멈춰선 소명의 고개가 어느 한 곳으로 향했다. 그렇지 않아도 화려한 동연각이었지만 눈길이 닿은 전각은 그 화려함이 또한 남달랐다.
발길이 그쪽으로 향했다. 그러자 여럿의 시비들이 다급히 소명의 앞을 막아섰다.
“이, 이곳은 가모께서 계시는 곳이오! 어디를 감히!”
찢어질 듯 높이 외쳤다. 그러나 두려움을 감추지 못해 목소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두 팔 벌려 막아선 시비들을 소명은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찌, 어찌 아녀자의 침소를 무도하게 침범할 수 있단 말이오! 썩 물러서가시오!”
나이 지긋해 보이는 시비가 소리를 높였다.
소명의 눈길이 그녀를 지났다. 옆에 같이 선 다른 시비들에게로 향했다가 곧 그녀들 뒤편, 닫혀 있는 문으로 향했다. 그는 말했다.
“이부인께서 저를 찾으셨다 들었습니다. 안에 전해주시지요. 남호동의 필부, 소명입니다.”
“뭐, 뭐라?”
소명의 차분함에 시비의 눈에는 당혹감이 스쳤다. 그러나 곧 안색을 굳혔다. 이 판국에 그런 말을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부인을 뵙고자 한다면 날이 밝은 뒤에나 찾아올 일이 아니오?”
시비의 말에 답하기도 전에 뒤쪽에서 전각의 문이 벌컥 열렸다. 시비들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문 앞에 팽씨가 노한 인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앞을 시비들이 다급히 막아섰다.
“부, 부인. 어찌.”
“치워라!”
걱정 어린 시비들을 물리치고 팽씨는 쿵쿵 걸어 나왔다. 여느 장정만큼 기골이 상당한 그녀였다. 문지방을 넘어 댓돌을 밟고 내려오니 앞에 선 시비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자태를 보였다. 그녀는 높이 도끼눈을 뜬 채 소명을 노려보았다. 거의 그와 눈높이를 같이할 정도였다.
그녀는 턱을 치켜들고 소명을 눈 아래로 보았다. 천생에서 드러나는 오만함이었다. 비릿한 조소를 머금고 입을 열었다.
“내가 네놈을 찾았다고?”
소명은 팽씨의 노려보는 눈길을 마주하며 두 손을 맞잡아보였다.
“남호동의 소명입니다.”
‘남호동?’
팽씨의 눈매가 순간 흔들렸다. 그녀는 혼란한 심중을 애써 감추었다. 그리고 주변에서 영문을 몰라 팽씨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 시비들을 돌아보았다.
“모두 물러가거라.”
“허, 허나, 부인.”
“어서!”
나직한 말에 시비들은 눈치를 보며 분분히 흩어졌다. 팽씨는 정원 앞에 우뚝 서 있는 소명을 노려보았다.
‘그 계집의 집에 신세 진다는 촌것이 이놈이란 말인가. 대체 어찌된 일이야?’
짐작은 하였으나, 팽씨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금, 아태만이 아니라, 본가에서 보내온 도객 셋이 같이 움직였다. 그들은 어디로 가고 하찮은 자가 정명장, 그것도 깊이 내원의 심처에 들어와 있다는 말인가.
시비들이 모두 물러서자 팽씨는 뿌득 악문 잇새로 험상궂게 물었다.
“……보낸 자들은 어디가고 네놈 따위가 어찌 이곳에 들어온 게냐?”
한마디, 한마디에 독기가 뚜렷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움츠러들기보다는 적의를 불태우니, 참 대단한 여걸이다. 그러나 마주하는 소명의 얼굴에는 어떤 변화도 없었다.
쏘아보는 눈길을 마주하며 소명은 담담히 말했다.
“그들이라면 알아서 자리를 피했던지, 아니면 아직 그 자리에 있겠지요.”
팽씨의 눈길이 더 감출 수 없을 만큼 크게 흔들렸다. 그 말인 즉, 눈앞의 볼품없는 사내가 그들을 제압했다는 뜻이 아닌가.
“이, 이 천한 것이…… 감히…….”
팽가의 도객들이 당했다는 것에 팽씨는 당황하기보다는 먼저 분노했다. 빠득 이를 갈아붙였다. 움켜쥐었던 오죽의 접선이 더 버티지 못하고 우지직 부서져나갔다.
소명은 팽씨의 분노한 모습에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오히려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장 소저는 어디에 있습니까?”
“장 소저? 오호라, 네놈이 그 계집을 찾겠다고 이 소란을 떨었단 말이구나.”
눈을 치뜬 팽씨는 차갑게 코웃음 쳤다. 순순히 답해주지는 않을 모양이었다. 소명은 한숨을 삼키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흔들리는 심중을 애써 가다듬었다. 더 이상 입씨름하고 있을 여가는 없었다.
눈을 감은 모습이 팽씨를 더욱 자극한 모양이었다. 노기가 역력한 외침이 소명의 귓전을 날카롭게 찔렀다.
“그래, 네놈이 지금 알량한 재간을 믿고 본가를 눈 아래에 두는 모양이구나!”
그녀 소리가 신호인 것처럼 여럿의 기척이 서둘러 달려왔다. 소명은 천천히 눈을 떴다. 동연각 곳곳에서 칼 찬 무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소명을 포위한 채 당장이라도 손을 쓸 듯이 발도의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칼자루를 움켜쥔 것만으로도 가볍지 않은 기세를 발하며 소명을 짓눌렀다.
소명은 말없이 그들 모습을 둘러보았다. 모두 스물. 정문에서 마주한 호원무사들과 같은 수였지만 그 기질은 전혀 달랐다. 명가의 풍모가 아닌 들개의 야성을 지녔다. 고개 숙인 채 번뜩이는 눈초리가 그러했다. 주린 들개처럼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소명에게 이들의 기질은 익숙한 데가 있었다.
‘그렇군, 이들이었어.’
태원부로 향하는 길, 그때에 표행을 습격했던 정체모를 칼잡이들 중 몇이 이들이었다. 백살도라는 녹림도적과 한 무리를 지었던 자들이었다. 노골적으로 흘리는 살기와 발도의 자세를 보아 확신할 수 있었다.
소명은 눈을 돌려 이들 뒤에서 기세등등한 모습으로 서 있는 팽씨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는 새삼 목소리를 낮추었다.
“이부인.”
아울러 고요한 기세가 일어났다. 그녀 직속의 도객들이 이룬 기세를 자연스레 밀어냈다. 팽씨가 뭔가 이상한 점을 느꼈을 때는 이미 늦었다.
“흡!”
팽씨는 순간 폐부를 짓누르는 듯한 느낌에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노화(怒火)를 품었던 눈가에 당혹한 기색이 떠올랐다.
‘무, 무어냐!’
혼란한 그녀에게 소명이 처음과 다르지 않은 목소리로 물었다.
“장 소저는 어디에 있습니까?”
팽씨는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흐, 흥! 처, 천한 것이 지금 본부인을 겁박하는 게냐?”
그러나 생각과 달리 움츠러드는 자신을 주체할 수는 없었다. 강한 척 소리를 높였지만 목소리는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일이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되었다는 불길함이 뇌리를 가득 채웠다. 그러나 팽씨는 인정할 수 없었다. 그녀는 버럭 소리쳤다.
“뭣들 하는 게야!”
외친 소리가 쩌렁하게 울렸다. 동시에 스무 명의 도객들이 발도했다.
차차차창!
일제히 뽑아든 스무 자루의 칼날. 날카로운 예기가 부챗살처럼 순차적으로 솟구쳤다. 소명은 자신을 향해 겨누어진 칼날 앞에서 가만히 소매를 걷어 올렸다.
그의 차분함이 팽씨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는 악다구니 쓰듯 연신 소리쳤다.
“무얼 주저하는 게야! 어서 죽여! 죽이란 말이다!”
채근하는 노성에 무사들이 움직였다. 칼날의 원진이 서서히 돌아갔다. 무사들 또한 소명이 녹록치 않은 상대라는 것을 인지한 것이다.
그들이 일제히 발한 기세를 단번에 지워버린 상대이니.
바짝 세운 칼날이 밝힌 불빛을 받아서 어지러운 빛을 뿌렸다. 칼날 뒤에 붉은 눈은 소명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먹이를 노리는 들개와 다름없는 눈이었다. 그 한복판에서 소명은 두 손을 늘어뜨린 채 짧게 숨을 골랐다.
숨을 뱉는 순간, 괴성과 함께 공세가 시작되었다.
“크합!”
소명은 차분한 눈으로 달려드는 흉흉한 도광을 직시했다. 들개처럼 거친 기세와 달리 이들의 합격은 실로 정교했다. 정방(丁方), 삼향(三向)에서 칼날이 동시에 내쳐왔다. 같이 움직이는 것은 네 자루의 칼날이었다.
섣불리 맞받으려 들면 좌우에서 도첨이 비집고 들어오고 물러서면 그 자리로 다른 네 자루 칼날이 맞물리듯이 치고 들어온다. 그야말로 추살진의 전형이라 할 만했다.
경험이 일천한 자라면 아무리 무공이 높아도 순식간에 손발이 어지러워질 법했다. 그러나 소명에게는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는 차분한 기색을 잃지 않았다. 흘깃 시선을 돌렸다. 원진 바깥에서 이쪽을 노려보는 팽씨의 표독한 얼굴이 보였다.
“어딜 한눈을 파는 게냐!”
소명의 눈길을 읽은 한 도객이 노호성을 터뜨리며 머리를 쪼개어 왔다. 소명은 머리 위로 한 손을 들어보였다. 마치 덮쳐오는 칼날을 맞받으려는 듯한 동작, 그 모습에 자리한 모든 이들은 끝났다고 여겼다.
일도에 파산의 위력이 실려 있었다. 무슨 재간으로 혼신의 일도를 감당할 수 있을까. 그러나 결과는 그들의 미소를 무너뜨려버렸다.
“흡!”
도를 휘둘렀던 도객은 헛바람을 집어삼키며 찢어질 듯이 눈을 치떴다. 전 공력을 다한 일도가 상대의 손에 조용히 붙들려 있었다.
“어, 어어…….”
도신에 가득했던 공력은 기이한 떨림이 이는 것과 함께 반탄력조차 없이 사라져버렸다. 마치 스스로 칼날을 건네준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그는 멍청히 입만 벌렸다. 그 사이 소명은 가볍게 손목을 비틀었다. 넋을 놓은 도객의 손에서 도는 용문의 잉어처럼 힘차게 튀어 올랐다.
소명은 담담한 표정으로 칼자루를 붙잡았다. 그리고 좌우로 크게 휘둘렀다.
좌우에서 동시에 쳐오던 참격이 소명의 도적에 튕겨 나갔다. 불똥이 거칠게 튀었다. 소명은 넋을 놓아버린 도객을 그대로 스쳐 지나쳤다. 서슬에 그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차가운 기운이 목덜미를 핥고 지나가는 듯했다.
더듬 고개를 돌리자 소명이 동료들을 상대하는 모습이 보였다. 도광이 번쩍번쩍하는 데 동료들이 하나둘 바닥을 굴렀다. 그들의 합격진, 추살종횡(追殺縱橫)의 도진은 전혀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를 제외한 열아홉의 일류 도객들이 모두 쓰러지는 데에 걸린 시간은 고작 몇 호흡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눈을 잡은 것은 쓰러진 동료들이 아니었다. 소명이 그들을 상대로 펼치는 도법 때문이었다.
굳은 혀가 겨우 움직여 신음 소리 같은 한마디를 흘렸다.
“마, 말도, 말도 안 돼…….”
“악, 으억, 꺽!”
연이어 때리는 타격에 골고루 비명을 지르다가 목덜미에 떨어진 일격에 숨넘어가는 소리를 흘리며 마지막 도객이 고꾸라졌다.
놓친 칼날이 바닥에 떨어지며 쨍그랑 소리를 울렸다.
소명은 ‘후’ 짧은 숨을 뱉었다. 그는 거꾸로 돌린 칼날을 바르게 했다. 도배로 쳤으니 며칠은 족히 요양해야겠지만 생사의 위험은 없을 터였다. 주변을 둘러보자 도객들이 전부 인사불성이 되어 쓰러져 있었다. 정신을 차려도 다시는 칼을 잡지 못할 터였다. 그들이 놓친 도들이 버려진 것처럼 바닥을 굴렀다.
소명은 손에 든 칼날을 흘깃 보았다. 예광이 번쩍이니 보기 드문 명도임에 분명하나 살기가 너무 강하여 가까이 둘 만한 물건은 아니다. 미련 없이 도를 바닥에 꽂아 세웠다. 그리고 돌아서려는 순간 멍청히 서 있던 도객이 급히 외쳤다.
“자, 잠깐!”
소명의 고요한 눈길이 그에게로 향했다.
“다, 단전도(短戰刀). 설마 단전도…… 요?”
더듬거리며 묻는 말에는 불신이 가득했다. 아니기를 바라는 얼굴이었다. 소명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허, 허어…….”
크나큰 충격을 받은 듯 그는 신형을 크게 휘청거렸다. 더 버티지 못하고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단전도라니.”
힘 잃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도법이라기에도 민망한 것이었다. 군문(軍門)에서 병사들에게 단병접전(短兵接戰)의 기본을 가르치기 위해 창안한 것으로 오직 베기만이 있을 뿐인 단조로운 수법이었다. 그런 단전도에 자신과 동료들이 무너졌다니. 아무리 무공이 아니라 익힌 사람이 중요하다고는 하나, 정도란 것이 있었다.
소명은 그를 놓아두고 바짝 얼어버린 팽씨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얼굴은 참담할 지경이었다.
“너, 너……너…….”
그녀는 더듬거리며 말문을 잇지 못했다. 소명은 나직이 말했다.
“장 소저는 어디에 있습니까?”
팽씨는 바르르 몸을 떨었다. 그녀의 눈이 소명을 보다가 다시 그의 뒤에 널브러진 수하들에게로 향했다. 그녀의 오라비가 은밀한 일에 쓰라고 보내준 자들이었다. 그들은 강호 낭인중의 도객으로 하나하나로는 간신히 일류경에 오른 자들이었지만 모이면 능히 절정의 고수들도 상대할 만한 자들이었다.
그녀는 떨리는 몸을 애써 가눠보려 하지만 도통 말을 듣지 않았다. 무엇을 의지하면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소명이 한걸음, 두 걸음 다가왔다. 그에 팽씨는 저도 모르게 주춤 물러섰다. 감정이 드러나지 않은 소명의 두 눈이 이제야 눈에 들어왔다.
그녀로서는 더 소명의 눈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녀는 손을 들어 한쪽을 가리켰다. 후원으로 향하는 월동문이었다. 입을 열지 않은 것은 그녀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소명은 물끄러미 그녀를 보다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가 안으로 사라지자 팽씨는 답답한 한숨을 토하며 그만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