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ti Demon God RAW novel - Chapter 60
60화. 돌아온 일상
홍유선이 밖으로 나가고 나자 실내에는 새삼 침묵이 앉았다. 풀 죽어 있는 장인지에게 소명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정 부인을 뵙고 오는 길입니다.”
장인지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이 무슨 말이 있었느냐고 묻는 듯했다.
“정 부인께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십니다.”
“어, 엄마가요?”
장인지는 안절부절 못했다. 그렇다고 이 모양새로 정 부인을 찾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니.
얼굴에 든 멍에는 색도 빠지지 않았고 붓기도 가라앉지 않았다. 장인지는 손을 들어 얼굴을 감쌌다.
젖은 한숨 소리가 새었다.
정 부인은 소식이 없는 장인지의 걱정뿐이었다. 무슨 일이 생긴 것이 아니냐고 거듭해서 물었다. 둘러대는 것도 일이었다.
“어서 회복하세요. 그게 최선입니다. 장 소저.”
“……네.”
장인지는 겨우 대꾸했다. 그녀는 흘깃 눈을 들어 소명의 눈치를 살폈다. 입술을 잘근거리는 모습이 무슨 말을 꺼내려는 듯했다.
“무슨……?”
소명이 조심히 묻자, 장인지는 자리에서 들썩일 정도로 눈에 띄게 동요했다.
“저기, 그러니까.”
장인지는 으득하고 어금니를 깨물고는 힘내어 말했다.
“고, 고, 고맙……습니다.”
소명은 물끄러미 장인지를 바라보았다. 지금 그녀의 얼굴은 참으로 가관이었다. 찌푸린 미간에 눈은 한쪽으로 돌아가 있고, 입매는 억지로 끌어올린 채였다. 게다가 멍 든 곳을 빼고는 귀 끝까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쓴 웃음을 삼키고 소명은 차분히 답했다.
“별 말씀을요.”
“흐, 흐흠.”
장인지는 헛기침을 억지로 쥐어짜내며 소명의 눈길을 애써 외면했다.
* * *
날이 뜨거웠다.
이른 시간이었지만, 늦더위가 기승을 부려 가만히 있어도 땀이 주르륵 흐를 지경이었다.
소명은 요 며칠 일을 하고 있는 채가 유방에 들어섰다. 닿으니 상당수의 일꾼들이 모여 있었다.
채가 유방의 주인인 채 노반이 일을 크게 서두르기 때문이었다.
이번에 큰 거래가 들어왔는데 그에게는 이 거래가 참 중요했다. 지금껏 창고 가득 쌓여있던 묶은 기름들을 죄 처분할 수 있는 기회인 까닭이었다.
소명을 비롯한 일꾼들이 일찌감치 모이자 채 노반은 그들을 채근했다.
“일이 많네. 삯은 어제보다 더 쳐줄 터이니 서둘러 주게나. 어떻게든 오늘 중에 마무리를 지어야 해.”
“예, 노반.”
일꾼들은 별 걱정을 다한다는 듯이 대꾸하고, 유방의 창고로 향했다. 그곳에는 기름이 가득 든 동이들이 줄지어 있었다.
하나하나가 장정의 가슴 어림에 올만큼 크고 무거웠다. 안에 기름이 찰랑거리니 아무리 용력 좋은 장사라도 하나를 옮기기가 쉽지 않았다.
채 노반이 조급해하는 이유가 있었다.
벌써 사나흘이나 일꾼을 부렸건만 아직도 남은 것이 백 서른 동이였다. 게다가 오늘이 기한의 마지막 날이었다.
본래 부리던 일꾼, 하나 둘로는 답이 나오지 않는 일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머리 위에서는 이제 염천(炎天)의 태양이 이글거렸다. 헐벗은 일꾼들은 땀을 뻘뻘 흘려가며 묵직한 기름 동이를 날랐다.
“헉, 헉, 헉.”
아무리 덩치 좋은 사내들도 숨을 몰아쉬면서 동이를 겨우 날랐다.
무거운 동이와 뜨거운 열기로 초죽음이 되어가는 사내들과 달리 소명의 안색에는 제법 여유가 있었다. 다른 이들이 단지 하나를 끌어안고 끙끙거리며 옮기는 동안에 소명은 봉한 기름 동이의 입구를 두 손에 하나씩, 둘을 동시에 움켜쥐고는 다른 이보다 한걸음 빠르게 움직였다.
보이기로는 질질 끄는 것 같지만 실상 동이의 바닥은 살짝 떨어져 있었다. 온전히 악력으로 이백여 근의 무게를 감당해내는 것이었다. 기름동이의 무게만도 상당하건만 그에 기름까지 가득했으니, 그 이상일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소명은 숨결 하나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소명보다 더 덩치가 좋은 장정들도 부지기수였고, 그만큼 힘 좋은 장정들도 여럿이었지만 지금 소명만큼 일하는 자는 없었다.
“하, 하이고. 이봐, 적당히 해. 그러다 골병들면 누굴 탓하려고?”
“하하, 괜찮습니다.”
그 모습에 질린 일꾼 중 한 사람이 타박하듯이 말을 건넸다. 소명은 태연한 기색으로 대꾸했다.
이백여 근의 기름동이를 하나도 아닌 둘이나 동시에 옮기면서도 걸음에 흔들림이 없고, 또 창고 안에 들어갔다가 숨 돌릴 틈도 없이 다시 짐을 옮기는 모습에 일꾼들은 혀를 내둘렀다.
“아이구야. 남호동에 장사(壯士)가 하나 있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정말 기가 막히는구먼. 기가 막혀. 저건 소문 이상인데?”
감탄하고 있자니 일을 감독하던 채 노반이 버럭 언성을 높였다.
“아, 이 사람들이 일 안 할 것이여! 삯만큼은 해야 할 것 아닌가!”
“예, 예. 합니다. 해요.”
채 노반의 채근에 덥다고 손 놓고 주저앉아 있던 일꾼들이 뭉그적거리며 일어났다.
“에잉, 쯧쯧.”
못마땅한 얼굴로 혀를 차던 채 노반은 바쁜 소명의 모습을 보고는 곧 안색을 환히 폈다.
여튼간에 다른 이의 두 배로 일을 해내니 지켜보는 채 노반으로서는 기껍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지막 날인지라 조마조마하던 가슴이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 성성한 흰 수염 사이로 웃음소리가 절로 나왔다.
“허, 허허. 이대로라면 오늘 중으로 어떻게 끝나겠구먼.”
이전에도 두어 차례 일을 맡긴 적이 있기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할 수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채 노반은 부지런히 오고가는 소명의 모습을 눈여겨보며 왜 자신에게는 딸이나 손녀가 없는지를 안타까워했다.
언제 다 끝나나 싶었던 기름 동이들이었다. 해가 높이 솟았다가 슬며시 기울어가자, 눈에 띌 만큼 줄어들었다. 그늘 진 곳에서 열 서넛의 일꾼들이 주저앉아 숨을 돌렸다.
“그나저나 요즘이 채 노반한테 무슨 길일인가 봐. 묶은 기름까지 죄 끄집어내는 걸 보니.”
“그러게나 말이야. 누가 이렇게 기름을 사들이는 거지?”
“우리야 알게 뭔가. 삯이나 두둑하게 쳐주면 그만이지. 하하하.”
일꾼들은 연신 땀을 훔치면서도 웃고 떠들었다. 문득 그들이 소명의 모습을 찾았다.
“이봐, 소명. 자네도 요령껏 좀 일하게. 덕분에 일이 뚝딱하고 끝나니 좋기도 한데. 그러다가 몸 상하겠네.”
“이래 뵈도 한껏 요령 부리고 있답니다.”
걱정하듯 건네는 말에 소명은 나지도 않는 땀 훔치는 시늉을 하며 하하 웃었다.
웃음이 잠시 잦아들었다. 그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어째 뒤통수가 근질거렸다.
주변 일꾼들이나 채 노반의 눈길 때문은 아니었다. 달리 보는 눈이 소명을 쫓아다니고 있는 것이었다.
은밀히 한답시고 꽤나 잘 숨어 있기는 했지만 소명의 눈과 감각을 피할 수는 없었다.
보는 눈초리는 정확히 다섯이었다.
둘은 창고 지붕 위에 납작 엎드려 있고, 다른 둘은 건너 길목 그늘에 은신하고 있었다. 다른 한명은 일꾼들 속에 섞여 적당히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닿는 눈길이 짜증스럽기도 했지만 굳이 손을 쓰지는 않았다. 지켜보든 말든, 지금은 일이 바빴다. 그리고 그런 소명을 보는 눈들도 당혹스러웠다.
그들로서는 왜 소명과 같은 자를 감시해야 하는 지 알 수가 없었다. 위에서 시키는 명령이라 따르고는 있었지만 지난 며칠 동안, 뒤따른 바에 의하면 소명이란 사내는 정말 특별한 점 하나 없는 촌부에 지나지 않았다.
맡은 일에 불평 없이 부지런하다는 것이 특이할 점이라면 특이할 점이었다. 그러나 상부에서 그를 분류하기를 경계하여, 섣불리 다가서지 말라는 뜻인 을중(乙中)에 놓았다.
현장요원인 그들에게는 이해 못할 분류였다.
어지간한 강호인사라도 그 구분이 을하(乙下), 병상(丙上)에 불과했다. 아무리 봐도 촌부에 불과한 자에게 을중의 구분은 과하지 않은가.
일꾼들 중에 숨어든 감시요원인 종칠은 무거운 동이를 부여잡고는 주춤주춤 움직였다.
‘아니, 그런데. 뭐가 이렇게 무거워?’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던 중 벌써 동이를 놓아두고 다시 돌아 나오는 소명과 슬쩍 부딪쳤다.
“어억!”
살짝 스친 듯한데, 종칠은 균형을 잡지 못하고 그대로 바닥을 굴렀다. 겨우 안아든 동이가 쿵 하고 떨어졌다. 그 소란에 분주하던 일꾼들이 손과 발을 멈추고 이쪽을 돌아보았다.
다행히 동이는 깨지지 않았다. 소명이 급히 그에게 다가가 부축했다.
“괜찮으시오? 내가 부주의해서. 미안하오.”
“아, 아니. 아니오. 별일 아니오.‘
종칠은 고개를 숙인 채 급하게 손사래 쳤다. 그런 사내에게 소명은 부축하면서 슬쩍 귓가에 속삭였다.
“감시하는 건 좋은데 말이야. 기왕이면 일도 열심히 하지 그래.”
“!”
그 말에 종칠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하지만 얼굴에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도 일단은 흑선당의 요원이었다.
오래 훈련 받은 그대로 영문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소명을 올려다보았다. 무슨 소리냐고 되물으려는 데 소명이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하나, 하나 가리켰다.
동료 요원들이 은신한 장소들이었다.
종칠의 표정은 그대로였지만 얼굴에 핏기는 싹 가셨다. 그래서 몰골이 더 기괴했다. 지금 종칠은 머리 위에서 쬐는 염천의 열기도 느낄 수 없었다.
무슨 얼음물이라도 뒤집어쓴 것 인양 모골이 송연해졌다. 그런 종칠에게 소명은 웃어 보이며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그럼, 수고하시오.”
어깨에 닿을 때마다 종칠의 심장은 쿵쿵 내려앉는 듯했다. 대꾸는커녕 아무 소리도 낼 수가 없었다.
소명은 손을 탁탁 털었다.
자신을 두고 감시하는 것은 좋았다. 그러나 제대로 일은 않고 있는 모습은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
“어디서 요령질이야. 요령질은.”
중얼거리며 다시 기름동이를 향해 걸었다. 그 뒤에 넋을 놓고 있던 종칠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그는 당장 소매를 팍팍 걷어붙이더니 잽싸게 오가며 기름을 무섭게 나르기 시작했다. 몸 힘든 것을 따질 겨를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그의 눈동자는 소명을 계속 흘깃거렸다.
이제 입장이 완전히 바뀌어서 소명을 감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눈치를 살피게 된 것이었다. 종칠은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리고 해가 어느 정도 기울 무렵이 되자 이곳의 일을 모두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꽉 채웠던 창고가 이제는 텅텅 비었다.
채 노반은 준비한 삯을 일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한명 한명에게 지급할 때마다 눈살을 찌푸리고 혀를 차던 채 노반이었지만 소명의 차례에는 환히 웃었다.
“자네가 참으로 수고했네, 그려. 덕분에 하루에 일이 다 끝났어.”
“아닙니다. 할 일을 한 것뿐인데요.”
“다음에도 꼭 와주시게나.”
“예, 어르신.”
소명은 자신의 손을 꼭 잡는 채 노반에게 웃어보였다.
받은 품삯은 동전으로 서른. 이 정도면 반나절 고생한 보람이 있었다. 그는 동전을 절그럭 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일꾼들 중 한 사내가 슬쩍 다가왔다.
“이봐, 자네. 일도 끝났는데 같이 가서 한잔 안 할 텐가?”
그는 실실 웃으며 술잔을 기울이는 흉내를 냈다. 소명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저는 또 일이 있어서요.”
“일?”
“예, 철방 일을 돕기로 한 것이 있어서.”
“햐, 사람 그것 참 잔정 없기는.”
말은 잔정 없다 탓하지만 아쉬운 눈은 소명의 손을 향해 있었다. 같이 뜯어 먹어볼 작정을 한 모양인데 그런 눈치도 없을 소명이 아니었다.
소명은 동전 서넛을 사내의 손에 슬쩍 쥐어주었다.
“같이 자리 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얼마 안 되지만 보태 쓰시지요.”
“아니, 그것 참. 젊은 사람이…… 참, 세상 살 줄을 아는구먼.”
정색하는 가 싶던 사내는 이내 환히 웃었다.
“아쉽지만 다음 기회에는 꼭 한 잔 하세. 하하.”
전혀 아쉬워하는 얼굴은 아니었다. 그는 동전을 쥔 손을 흔들어 보이며 모여있는 일꾼들에게 다가갔다.
그 모습을 소명은 흐릿한 미소를 머금은 채 바라보았다.
하루를 벌어 하루를 겨우 먹고 사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이들이 각자 추렴해 겨우 마시는 몇 잔의 술은 그들이 누릴 수 있는 유일한 사치였다.
소명은 저들을 탓할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남은 동전을 챙겨 넣고 발걸음을 돌렸다.
지금쯤이면 철방에서 목 빼고 기다리고 있을 시간이었다. 그는 뒤에 따라 붙는 눈들을 신경 쓰지 않고 태연히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