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ti Demon God RAW novel - Chapter 63
63화. 은원(恩怨)이란 따로 있지 않다
밤이 깊었다. 열어놓은 창문으로 서늘한 바람이 풀벌레 소리와 함께 흘러들어왔다. 눈을 감고 잠들어 있던 소명은 문득 입을 열었다.
“무슨 볼일이십니까?”
방 안에서 소명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그 말에 응할 사람의 기척은 어디에도 없었다. 찌르륵 벌레 우는 소리만 들렸다. 답이 없자 소명은 곧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살짝 열린 창가를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
“달리 볼일이라도 있으십니까? 그날의 은원이라도 정리하자는 것인가요?”
그러자 창밖에서 그림자 하나가 불쑥 솟았다.
“들어가도 되겠소?”
묻는 목소리가 묵직했다. 뜻밖이었지만 소명은 머뭇거리지 않고 문을 열었다. 달빛이 미치지 못한 어두운 곳에 초췌한 몰골의 팽오성이 서 있었다.
“들어오시지요.”
팽오성은 사양하지 않았다.
소명은 서둘러 방 안에 불을 밝히고 자리를 마련했다. 팽오성은 지친 모습으로 자리에 앉았다. 추레한 모습은 며칠 전에 마주했을 때의 차림 그대로였다.
앉은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쉬이 입을 열지 못했다. 소명은 마주하고 앉아 팽오성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고작 며칠이 지났을 뿐이지만 팽오성의 모습은 족히 수년을 흘려보낸 듯했다. 소명은 가만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고개 숙인 그에게서는 어떤 적의도 느껴지지 않았다.
문득 소명의 눈길이 그의 한쪽 손으로 향했다. 탁자 아래로 숨기다시피한 손은 천으로 단단히 동여매고 있었다.
입은 내상은 수습한 모양이었지만 손목의 부상은 어찌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손속이 과했었나.’
그러나 소명은 곧 고개를 짧게 흔들었다. 다시 돌이켜도 그때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팽오성의 마지막 일도는 실로 위력적이었다. 어찌 사정을 둘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그때, 팽오성이 고개 숙인 채 말문을 열었다.
“실은…….”
무슨 어려운 말을 꺼내려는 것인지 이를 악문 턱이 부르르 떨렸다.
“여, 염치없소이다. 허나, 감히 청하겠소. 우리 녀석들을 살펴주시오.”
소명은 멈칫했다. 뜻밖이었다. 팽가의 도객은 외인의 도움을 받지 않기로 유명했다. 헌데 그 자존심을 꺾고 이 깊은 밤에 구명(求命)을 청하러 오다니.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팽오성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며 소명은 의아함을 잠시 접어두었다. 지금 그의 얼굴은 마치 독배라도 들이킨 사람처럼 처절했다.
“제가 도와도 괜찮겠습니까?”
소명의 조심스런 물음에 그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초췌하여 우묵하게 들어간 눈자위에 잔 경련이 일었다. 팽오성은 곧 얼굴을 굳히며 강한 어조로 말했다.
“청하겠소.”
“그럼, 가시지요.”
소명은 선뜻 자리에서 일어섰다.
소명과 팽오성은 새벽걸음을 재촉했다. 팽오성이 안내한 곳은 정주 외곽의 한 폐가였다. 몰라도 팽가의 인물들이 머물만한 곳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안으로 들어가니 먼지 앉은 침상에 두 청년이 드러누워 앓고 있었다. 그리고 한 여인이 자리하고 있었다. 순한 인상의 그녀는 들어서는 팽오성의 모습에 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숙부, 오셨습니까.”
“으음.”
팽오성은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침상에 다가서자 여인은 자리에서 물러섰다. 그녀 역시 며칠은 고생한 듯 힘겨운 얼굴이었다.
팽오성은 이를 악문 채 누워 있는 둘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곧 고개를 돌려 문가에 서 있는 소명에게 청했다.
“부탁하겠소.”
소명은 다른 말없이 다가갔다. 그는 두 사람의 맥문을 잠시 살폈다. 맥이 불규칙했다. 둘 모두 침습한 경력을 해소치 못한 모양이었다. 아니, 단순히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소명은 손을 놓고 팽오성을 돌아보았다.
“내가요상을 시도하셨습니까?”
“그렇소.”
묻는 말에 팽오성은 침중한 안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상태가 악화된 것은 그 무렵이었다. 내상에 괴로워하기는 해도 이렇게 인사불성이 되지는 않았었다. 그때, 옆에 있던 여인이 이어서 입을 열었다.
“날이 갈수록 기맥뿐만 아니라, 근골이 약해지고 있습니다. 약을 쓰고는 있습니다만.”
그녀는 소명을 여느 의원이라 생각했는지 자신이 취한 처방을 줄줄이 늘어놓으려 했다. 그러자 소명은 급히 손을 들었다.
“되었습니다.”
“예?”
“저는 의원이 아니니 그리 어려운 말씀을 하셔도 알 수가 없습니다.”
그 말에 여인은 크게 당황했다. 놀란 눈으로 팽오성을 돌아보았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는 듯했다. 그러나 팽오성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한걸음 나서 소명에게 물었다.
“가능하겠소?”
“……잠시 자리를 비켜 주시지요.”
“알겠소이다.”
“수, 숙부!”
여인은 당황했다. 그러나 팽오성은 그녀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문을 닫히자 여인의 황망한 외침이 높이 울렸다.
‘대체 저자가 누군데. 아니, 의원도 아닌 자에게 오라버니들을 어찌…….’
‘어허, 진정하거라. 다 들리겠구나.’
‘숙부!’
팽오성은 놀란 그녀를 달랬다. 그러나 제대로 말은 않고 진정하라고만 하니, 어찌 안심이 될까.
숙질간의 소란을 막기에 이곳의 벽은 너무 얇았다. 소명은 쓰게 웃었다. 그러나 곧 표정을 굳히고 누운 두 사내, 팽지강과 팽지표를 바라보았다.
이제부터 할 일은 꽤나 어려운 일이었다. 소명은 소매를 걷어붙이고 두 사내를 일으켜서 앉혔다. 그리고 벽에 기댄 채 축 늘어진 그들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긴장을 풀려는 듯 잠시 숨을 고른 소명은 곧 그들의 명치에 두 손을 바짝 밀어붙였다. 그리고 집중했다.
단전 아래 깊이 잠든, 작은 내단이 가만히 진동했다.
공전무융의 내단이었다. 그러자 두 사내의 내부에 깊이 침습한 소명의 공력이 호응하기 시작했다.
“흐으..으으…….”
“끄……끄으…….”
두 사내는 앉은 채, 절로 허리를 쫙 폈다. 순간 치밀어 오르는 극통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사시나무 떨듯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 떨림이 얼마나 격렬했는지 앉은 두 침상 바닥이 당장이라도 꺼질 듯했다.
파고든 공력을 다시 거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는 사람에게나 받는 사람에게나.
소명은 집중했다.
공전무융의 공력은 이른바 양날의 검과 같았다. 자칫 마음을 놓았다가는 서로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빠질 지도 몰랐다.
눈을 감은 소명은 두 형제의 기경팔맥을 선명히 그릴 수 있었다. 이들 형제가 본래 지닌 공력은 크게 위축된 상태였다. 이를 다스려 돋우지 않으면 침습한 공력을 거두어도 폐인이 되기 십상이었다.
이는 섣불리 내가요상을 시도한 때문이었다. 외부의 진기로 형제의 공력을 도우려 했던 것이 오히려 역효과를 일으킨 것이다.
시간이 가만히 흘러갔다.
어느 순간, 두 사람의 떨림이 가라앉았다.
집 바깥에서 여인, 팽문빙은 붉은 입술을 잘근거리며 씹었다. 초조한 기색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른 새벽에 들어간 사내는 머리 위로 해가 뜰 때까지 소식이 없었다.
참다못한 그녀는 홱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도끼눈을 뜬 채, 한쪽에 말없이 좌정한 숙부, 팽오성을 노려보았다.
“숙부!”
“하아…….”
날선 그녀의 목소리에 팽오성은 한숨을 흘리며 감은 눈을 떴다.
“정말 이러고 계실 거예요?”
“아니면, 어찌하라는 것이냐.”
“당장 본가로 돌아가야지요. 저 정체 모를 사내에게 오라버니들을 어찌…….”
“돌아간다고 해도 다른 수가 없다. 저 사내가 아니면 아이들을 고칠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야.”
팽오성은 한층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그 차분함에 팽문빙은 더 참지 못하고 그만 소리를 높였다.
“그러니까, 대체 누구냔 말입니다!”
“…….”
다그치듯 외친 말에 팽오성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더 말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까지 돌렸다. 팽문빙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지만 이내 맥 빠져 푹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녀는 팽오성의 옆에 앉아서 닫힌 문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문이 열리며 땀으로 흠뻑 젖은 소명이 걸어 나왔다. 그 모습에 팽오성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아픈 손목을 어찌할 새 없이 급히 소명에게 다가갔다.
“어, 어떻소. 우, 우리 아이들은…….”
애써 침착하며 팽문빙을 다독였던 모습은 간데없었다. 급박하기 그지없었다. 소명은 곧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다행이 위험한 고비는 넘긴 듯합니다. 침습한 내경은 모두 거두어들였으니…… 나머지는 어찌 정양하느냐에 달렸겠지요.”
“하아…… 고, 고맙소. 고맙……소…….”
소명은 고개 숙인 팽오성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밤에 도망한다는 이유로 두 목숨을 가차 없이 베고 자신에게 칼부리를 돌렸던 서슬 퍼런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지금의 그는 제 혈육의 안위에 눈물겨워 하는 숙부의 모습이었다.
‘뭐라고 말할 수가 없군.’
소명은 고개를 들었다. 쬐는 햇살을 찡그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해가 높이도 떴다.
팽문빙은 소명의 말을 듣고는 당장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침상 위에 두 오라비가 나란히 누워 있었다. 그녀는 급히 둘의 맥문을 잡아 상태를 살폈다. 아미를 깊이 찌푸린 채 집중하던 그녀는 곧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직 맥은 약했지만 이전처럼 사맥이 아니었다. 다 죽어가는 듯하던 오라비들이 기사회생한 것이었다. 그녀는 놀란 눈으로 문밖을 돌아보았다. 숙부 팽오성이 아직 그를 붙잡고 있었다.
“대체, 저 사람이 누구라고…….”
팽문빙으로서는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그녀는 곧 고개를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소명은 팽오성에게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이후로는 의원을 찾으시는 편이 저들에게 좋을 것입니다.”
“고맙소.”
마치 할 말이라고는 그것밖에 없다는 듯이, 팽오성은 고개 숙인 채 거듭 말했다. 고개 들어 소명을 마주할 염치조차 없었다.
받은 이 은(恩)을 어찌 갚을 수 있을까. 그때, 소명이 먼저 말했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보겠습니다.”
“아니, 저…….”
팽오성은 퍼뜩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러나 소명은 잡을 틈을 주지 않았다.
“모쪼록 정양(靜養)에 힘쓰시길.”
한마디 남긴 소명은 곧 폐가를 나섰다.
잡초 무성한 마당에서 팽오성은 그가 떠난 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고, 고맙소…… 정말, 고맙소…….”
정녕 그에게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팽가의 안가에서 걸어 나온 소명은 곧 정주의 시전에 들어섰다. 머리 위에서 한낮의 태양이 이글거렸다. 이는 바람마저 뜨거웠다. 길에는 더위에 지친 사람들로 가득했다.
비좁은 그늘 아래에 웃통 벗은 사내들이 서로 자리다툼을 벌였다. 여인들은 흐르는 땀을 연신 닦아가며 햇살을 피해 서둘러 걸었다. 그 사이에서 소명은 천천히 걸었다. 흘깃 고개를 들었다. 높이 뜬 햇살로 시간을 가늠했다.
‘오전에는 일이 없어서 다행이네. 술시(戌時) 무렵에 약재를 전하기로 했으니.’
생각하던 중에 문득 고개를 들었다.
시전의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눈길 하나가 소명의 감각을 자극했다. 누군지 굳이 살필 필요는 없었다. 상대도 딱히 숨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런 염천 하늘 아래에서 타는 듯한 붉은 옷을 입을 만한 사람은 적어도 정주에서는 한 사람 밖에 없다.
“홍 소저…….”
이틀 전에 한 말을 그대로 지키려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사람들을 가르고 성큼성큼 소명을 향해 똑바로 걸어왔다. 눈매를 가만히 찌푸린 채였다.
“여기서 보네요. 한참 찾았어요. 그런데 어디서 오는 길이에요?”
“……하, 하하.”
홍유선은 인사할 겨를도 없이 바로 물었다. 큰 눈동자는 소명의 변화를 잡아내려는 듯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 모습에 그저 웃음만 새었다.
“왜 대답을 안 해요?”
그녀는 바짝 고개를 내밀며 채근해왔다. 어찌 둘러대려던 소명은 문득 홍유선의 안색을 다시 살폈다.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 크게 뜬 두 눈동자마저 붉었다. 그리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홍……소저? 괜찮으십니까?”
“뭐가요?”
그녀는 새삼 눈동자를 바짝 조였지만, 이내 탁하고 풀어졌다. 이리 휘청, 저리 휘청거리는 모습이 한없이 위태해보였다.
“어엇!”
당장 주저앉을 듯한 그녀를 급히 부축했다. 달아오른 이마에 손을 얹자, 달아오를 듯 뜨거우면서도 달리 땀이 흐르지 않았다. 호흡이 가쁘고 맥이 빨랐다.
“아니, 이, 이거 뭐하는…… 짓이…….”
홍유선은 소명의 손을 치우려고 했지만 손짓에는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열이 크게 오른 것이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정말 위험할 것만 같았다.
소명은 더 생각할 것 없이 홍유선을 등에 업고 서둘러 뛰었다.
연전, 화염산에 머물렀을 때에 이와 같은 증상을 방치했다가 목숨을 잃는 경우를 목격하기도 했었다. 아무리 상승의 공부를 익힌 무인이라도 염천의 뜨거운 열기에는 도리가 없는 법이었다.
소명은 다급히 송가의사로 달렸다.
‘나 이거 참, 어제는 환자를 데리고 돌아가려 찾았건만 하루 만에 다시 환자를 업고 가다니.’
홍유선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흡사 취한 사람처럼 팔을 휘저었다.
“아니, 무, 무슨 짓이에요. 내려, 내려놔요…….”
웅얼거리는 소리는 나오다가 말았다.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아이고, 이 미련한 아가씨야…….”
소명은 축 늘어진 홍유선은 고쳐 업고는 힘주어 땅을 박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