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ti Demon God RAW novel - Chapter 65
65화. 은원(恩怨)이란 따로 있지 않다
소명을 안내한 곳은 담가의 내원이었다. 몇 개의 담과 문을 지나서 어느 한 곳에 멈춰 섰다. 그곳은 볼품없이 갈라진 나무문이 굳게 닫혀있었고 두른 담 또한 낡아 있었다.
지나온 화려한 전각들과는 전혀 달랐다.
전혀 엉뚱한 곳으로 온 듯했지만 문설주 좌우에는 담가의 글자가 적힌 등불이 분명히 빛을 발하고 있었다.
서한처(西寒處).
오래 손질하지 않아 검게 삭은 편액에는 그리 적혀 있었다.
“이곳은?”
“예, 이곳이 삼부인께서 머무시는 곳입니다.”
가인들이 어색한 얼굴로 답했다.
소명은 새삼 눈을 돌려 서한처의 전경을 바라보았다. 이곳은 송가의사에서 마주했던 삼부인의 화려한 차림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게다가 장원에서 외따로 떨어져 있는 퇴락한 전각이라니.
담 가주의 총애를 받는다는 셋째 부인의 처소로 보기에는 참으로 볼품이 없는 곳이었다. 다섯의 가인들이 안쪽으로 소식을 알리니 등불을 든 시비가 낡은 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냈다.
등불에 비친 여인의 얼굴은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한쪽 얼굴이 녹아내린 것처럼 흉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러나 가만히 보는 그녀의 두 눈은 맑았다.
“함모, 가주께서 청하신 손님입니다.”
“아하, 이분이. 들어오시지요. 소명 소협.”
함모라 불린 그녀는 가인들의 말에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소명을 반겼다. 소명은 슬쩍 고개 숙여보였다. 그리고 그를 이곳까지 안내한 가인들은 안으로 들어서지 않고 번을 서듯이 문 앞에 늘어섰다.
함모는 한쪽 다리가 불편한 듯이 절뚝이며 느릿하게 앞장섰다. 서한처의 내부는 외견에 못지않게 황폐했다. 문득 그녀가 입을 열었다.
“듣자하니, 소협께서 우리 아인 공자를 구해주셨다지요.”
“예?”
소명은 의아해 함모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흉한 얼굴이 무색하게 푸근한 미소를 그렸다. 그녀는 곧 소명에게 깊이 허리를 숙였다.
“늦게나마 감사합니다. 소협.”
함모라는 시비는 본래 담아인의 유모였던 여인이었다. 그녀는 담아인에 대한 깊은 정을 품고 있었다. 몇 마디에 불과했지만 그녀가 담아인을 얼마나 걱정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사이 두 사람은 서한처 깊숙한 곳으로 들어섰다. 함모가 이끈 곳은 내실이었다.
얇은 문을 넘어서 쿨럭거리는 기침소리가 계속해서 들렸다. 함모가 안쪽을 향해 말했다.
“가주, 소명 소협이십니다.”
서한처의 내실에는 수십이나 되는 황촉불이 밝았다. 휘장을 걷어 올린 침상에 중년 사내, 담 가주가 누워 있었다. 병색이 더욱 짙었다.
며칠 만에 상태가 더욱 안 좋아진 듯했다.
그는 연신 밭은기침을 터뜨렸다. 곁에 삼부인 성씨가 앉아 그를 간호했다. 밖에서 알리는 시비의 목소리가 들렸다.
“가주, 소명 소협이십니다.”
그 말에 담 가주는 번쩍 눈을 떴다. 그는 성씨에게 눈짓해보였다. 그녀가 대신 바깥을 향해 외쳤다.
“들라 하시게.”
문이 열리고, 허름한 장포나마 단정히 입은 소명이 안으로 들어섰다. 누워 있던 담 가주는 성씨의 도움을 받아 윗몸을 일으켰다.
그는 소명의 모습을 보자 곧 힘없는 웃음을 지으며 두 손을 맞잡았다. 그 손은 앙상하여 뼈 밖에 없었다.
“이리 볼품없는 모습으로 대하게 되어 미안하구려. 내 담가의 가주를 맡고 있는 담모라 하오. 쿨럭.”
“별말씀을요. 필부, 소명이라 합니다.”
소명 또한 예를 취했다. 담담한 모습이었다.
얼핏 일문을 이끄는 주인에 대한 예의로 부족해 보이나. 과하지 않았고, 자신을 감추지도 아니하다. 유심히 보던 담 가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다른 마음을 품은 자로는 보이지 않은 까닭이었다.
성씨가 자리를 청했다.
“소협께서는 자리에 앉으시지요.”
침상 앞에 미리 의자와 다탁을 마련한 참이었다.
“감사합니다.”
소명은 의자에 앉아 침상 위의 두 부부를 마주했다. 담 가주가 느릿하게 말문을 열었다.
“우선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소. 못난 자식의 목숨을 두 번이나 구해주신 데다가 이번에는 담가의 명운을 도와주었으니. 담가는 공에게 큰 은혜를 입었소이다.”
“그렇지 않습니다.”
소명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담 공자를 돕게 된 것은 때마침 제가 그 자리에 있었을 뿐이고 담가의 명운을 도우셨다 하는데, 그들이 장 소저에게 패악을 부렸기 때문입니다.”
“…….”
“담가를 위한 마음은 조금도 없었으니 굳이 은혜라 하실 것 없습니다. 오히려 제가 가주의 뜻을 거스른 듯합니다만.”
지극히 담담한 목소리였다.
뜻밖의 말인지라, 성씨마저 놀라 눈을 크게 뜰 정도였다. 담가를 위한 마음은 없다니, 담가의 가주 앞에서 쉬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지 않은가.
성씨는 급히 눈을 돌려 담 가주의 안색을 살폈다. 행여나 그가 노여워하지나 않을까 두려웠다. 그러나 담 가주는 오히려 미소 짓고 있었다.
그 미소는 지난 수년 동안 옆에서 모셔온 성씨로서도 좀처럼 본 적 없는 온후한 미소였다. 담 가주는 문득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잠시 생각하는 듯하던 그는 곧 말했다.
“그대는 본 가주를 부끄럽게 만드는군.”
“설마요.”
“꿰뚫고 있었던 것인가? 그리 허술하게 일을 벌이지는 않았을 터인데.”
“그저 짐작만 하였을 뿐입니다. 가주께서 확인해주시는 군요.”
“하, 하하하.”
담 가주는 돌연 호호탕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병색이 완연했던 마른 눈동자에 빛이 번뜩이더니 기운이 들어차는 듯했다. 그는 기침을 억누르고 묵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담가에는 눈이 많소이다. 팽가의 입김은 몰아냈지만 다른 무가련의 가문들은 어찌하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지. 내 다음에 담가가 외압에 흔들리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소. 그러기 위해…….”
담아인을 밖으로 내돌린 것도 갑작스레 불러 중책을 맡긴 것도 이런저런 어려움에 내몬 것도. 전부 강한 후계를 만들기 위한 담 가주의 뜻이었다. 소명은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듣기만 했다. 한참 침묵이 앉았다.
성씨는 앉은 채 고개 숙였다.
침묵 끝에 담 가주는 변명하듯 말했다.
“아인, 그 아이가 어서 강해졌으면 했소. 그것이 그리 잘못이었소?”
담 가주는 안광을 발하며 소명을 돌아보았다. 소명은 그 눈길에 난감했다. 답을 아니 할 수도 없으니. 그는 쓴 웃음을 머금었다.
담 가주의 모습에 소명은 문득 아비, 대일의 모습을 떠올렸다. 자식의 앞날을 위해 무엇이든 해주고 싶은 것은 부모의 당연한 마음이다.
없는 빈한함 속에서도 자식만큼은 굶기지 않으려 했고 그 속에서도 배움의 기회를 주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그 이전에는 친부의 정이 있었으니.
소명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제가 주제넘게 무슨 잘잘못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부모가 자식에게 기대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담 가주께서는 방법이 잘못 되셨습니다.”
“방법이…… 잘못 되었다고?”
“조급함이란 결코 득이 될 수 없는 법이지요. 가주께서는 공자를 강하게 만드셨으되 정을 주지 않으셨으니…….”
말끝을 흐린 소명은 눈을 똑바로 뜨고 자신을 노려보는 담 가주의 살벌한 눈길을 직시했다.
“이미 알고 계시지 않으십니까?”
“그래, 그래, 그렇지…….”
정광을 발하던 눈가에서 빛이 사그라졌다. 담 가주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담아인은 가주대행으로서 일을 훌륭하게 처리하고 있었다. 노회한 가문의 중진들 사이에서도 자신의 주관이 흔들리지 않았다.
가문의 안팎으로 담아인을 칭찬하는 말들이 많아졌다.
담 가주의 뜻대로 되어가는 듯했다. 그러나 담아인은 결코 가주가 되지 않겠다고 못을 박아버렸다.
담 가주는 노했으나 담아인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었다.
진노하고 달래보아도 담아인은 요지부동. 그 뜻을 굽히지 않았다. 아픈 아비의 모습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정, 정, 정이라…….”
담 가주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가만히 중얼거렸다. 그는 문득 어린 시절의 담아인의 모습을 떠올리려 했다. 그러나 기억에 남은 모습이 없었다.
아니, 기억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곁에 두고 보지를 않았으니 기억이랄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새삼 깨달은 담 가주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참았던 기침이 발작적으로 터졌다.
“쿨럭! 쿨럭!”
“상공.”
성씨가 당황해 담 가주를 부축했다. 그러나 담 가주는 일어날 줄을 몰랐다.
한참만에야 겨우 기침이 멎은 그는 멍한 얼굴로 창가를 바라보았다. 그곳에 떠오른 달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그 달빛이 담 가주에게는 마치 자신을 꾸짖는 듯했다. 새된 숨소리로 담 가주는 신음했다.
“아, 아아아…….”
“상공…….”
성씨는 그런 담 가주를 가만히 다독였다. 두 사람의 모습 앞에서 소명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담 가주는 가슴을 쥐어뜯었다. 병색이 완연한 얼굴은 괴로움으로 크게 일그러졌다. 내뱉는 숨소리는 회한으로 가득했다.
“괴, 괴롭군. 괴로워.”
그의 손이 힘을 잃고 툭 떨어졌다.
“악! 상공!”
성씨가 놀라 부르짖었다. 담 가주가 그대로 정신을 잃은 것이었다. 소명이 급히 다가와 축 늘어진 담 가주를 부축했다. 살피니 희미하게 호흡이 이어지고 있었다. 소명은 문득 이맛살을 찌푸린 채 담 가주의 상세를 살폈다.
옆에서 가슴 졸이고 있던 성씨가 소명의 찌푸린 얼굴에 놀라 채근했다.
“왜, 왜 그러신가요? 무, 무슨 일이?”
“아니요, 아닙니다.”
소명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담 가주를 침상 위에 눕히고 다시 한 번 맥을 살폈다.
‘이건 아무래도.’
생각하던 소명이 문득 성씨를 돌아보며 물었다.
“혹시, 담 가주께서 쓰러지기 전에 누군가와 겨룬 적이 있습니까?”
“그것은.”
돌연한 물음인지라 성씨는 흠칫했다. 그녀는 곧 아미를 모은 채 곰곰이 생각에 잠겨 들었다. 큰 눈동자가 잠시 구르다 싶더니 곧 크게 끄덕였다.
“예, 있었습니다. 분명히. 그분은 무가련의, 헉! 설마!”
성씨는 말하다 말고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놀라 크게 벌린 입을 두 손으로 덮었다. 소명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말해도 모를 일이었다. 다만 한 가지가 명확해졌을 뿐이었다. 담 가주는 병이 아닌 것이었다.
소명은 담 가주의 맥문을 그러쥐었다. 고요한 진동음이 일기 시작했다. 크게 당황하여 있던 성씨는 돌연 울리는 소리에 흠칫 고개를 들었다.
우우우웅.
그녀는 어디서 울리는 소리인지 몰라 어리둥절하다가 곧 소명을 돌아보았다.
“소, 소명 소협.”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성씨는 감히 끼어들지 못했다. 담 가주의 몸이, 그리고 그가 누운 침상이 가만히 떨리고 있었다.
소명은 집중했다.
* * *
화려한 금문(錦紋)이 그려진 다기였다. 하얀 김과 함께 깊은 다향이 가만히 피어올랐다. 그러나 다기를 쥔 손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푹 떨어뜨린 얼굴은 홍조로 인해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이 자리가 부끄러운 까닭이었다.
고개 숙인 담아인은 목이 바짝 타들어 갈 듯했지만, 찻물을 들이킬 생각조차 못했다. 그의 옆에는 장인지가 앉아서 마찬가지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불편하고 난감한 기색이 솔직했다.
‘왜 이런 자리는 만들어서…….’
그녀는 담아인의 얼굴을 흘겨보았다.
자신 앞에서도 부끄러워 어찌할 줄 모르던 사내였다. 모친까지 같은 자리에 있으니.
식은땀을 뻘뻘 흘려가며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모습이 한심하게 보이는 한편으로, 안쓰럽기도 했다. 대체 무슨 용기를 내서 이런 자리를 만들었는지.
장인지는 슬쩍 눈을 돌려 모친의 표정을 살폈다. 그녀는 순간 움찔했다.
‘헉.’
흘깃 본 정 부인의 표정이 그리 좋지 않았다.
정 부인은 슬쩍 미간에 깊은 골을 만든 채 앞에 앉은 둘의 모습을 지그시 보고 있었다. 불현듯 그녀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아효, 아무리 내 배 아파 낳은 자식이라지만 이리 비교되어서야 어디…….’
담아인의 하얗고 곱상한 얼굴은 누가 봐도 미남자라 할 얼굴이었다. 그러나 장인지는.
여식의 검은 얼굴에 정 부인은 이 자리가 크게 민망했다.
‘아니, 어쩌자고 이런 집 도령이랑. 하이고…….’
언감생심이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내려왔다.
그녀라고 담가의 이름을 모르겠느냐만 집안의 격차가 너무 크지 않은가. 게다가 결코 여성스럽다고는 아니, 오히려 걸걸하기가 여느 남정네 못지않은 장인지이니.
이 둘이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어미로서 정 부인은 당연히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의 이런 마음을 짐작했는지 담아인이 퍼뜩 고개를 치켜들었다. 홍조가 머물렀던 얼굴이 이제는 완전히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두 귀에는 아주 불이라도 붙을 듯했다. 그러나 두 눈에 품은 결의만큼은 단단했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어, 어머님, 따, 따님을…… 저, 저저저.”
결의는 단단했으나 용기는 따르지 못했다.
입을 연 것까지는 좋았지만 덜덜 떠느라 단 한마디도 제대로 잇지를 못했다. 그리고 정 부인은 결코 좋은 청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물끄러미 담아인을 바라보았다. 그 눈길에 기껏 굳힌 결의가 점차 무너졌다.
“저, 저, 저는…….”
“그만 앉으시지요.”
“예.”
가만한 한마디에 담아인은 바로 꼬리를 내리고 자리에 앉았다. 두 모녀는 그 모습에 서로 다른 생각을 했다.
‘저 바보, 앉으란다고 정말 그냥 앉으면 어떻게 해!’
속으로 외친 장인지와
‘그래, 그래도 인지 말은 잘 듣겠구나.’
속으로 한숨 쉬는 정 부인이었다.
“담 공자.”
그녀는 담아인을 불렀다. 딱딱하게 굳어있던 담아인은 그녀의 부름에 움찔하더니, 크게 답했다.
“옛!”
“담 공자께서 우리 못난 딸을 마음에 두고 있다는 것은 잘 알겠어요. 허나, 혼례라는 것이 어디 두 사람만의 일인가요? 명문인 정면담가와 빈한한 가문과의 혼례라니, 격에 맞지 않는 일이에요.”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그 모습에 담아인의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어, 어머님.”
“그 호칭은 거두어주세요.”
“저, 저는 정말로…….”
“담 공자의 마음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나 담가와 같은 명문가에서 선머슴 같은 이 아이가 어찌 견딜 수 있겠어요. 못난 딸을 둔 어미의 마음을 부디 헤아려 주시구려.”
정 부인은 잔잔하나, 단호한 기색으로 말했다. 그 말에 담아인은 흠칫하여 더 말을 잇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