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ti Demon God RAW novel - Chapter 74
74화. 날은 다시 밝아온다
남호동을 재건하는 공사는 하루가 다르게 진척되어갔다.
소명에 더해, 솜씨 좋은 위지백까지 가세하니 순식간이었다. 어지간한 일은 반나절이면 뚝딱이었다.
솜씨 좋다하는 도편수들도 감탄할 지경이었다.
물론 장인들에 비하면 투박하기 그지없었지만 일에 소홀함이 없고 허점이 없으니. 이만한 일꾼들은 어디서도 쉽게 찾을 수 없었다.
일을 돕던 소명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사방에 번듯하니 담이 생기고 지붕이 착착 올라가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이곳이 그 폐허가 된 남호동이 맞는가 싶을 정도였다.
이제 부는 바람도 제법 서늘하니. 하늘에는 추색(秋色)이 짙었다. 슬슬 동장군(冬將軍)이 올 때도 되었다.
“그래도 늦지는 않겠군.”
겨울 오기 전에 일이 마무리 될 듯했다. 중얼거린 소명은 문득 눈을 돌렸다. 어디선가 근질한 시선이 느껴지는 탓이었다.
흑선당이나 홍유선처럼 감시하는 눈길이 아니었다. 뭔가를 원하는 듯한 눈길. 법현이었다.
슬쩍 그쪽을 살피니 부단히 일을 하면서도 소명을 흘깃거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는 뭔가 간절한 눈으로 소명을 압박하고 있었다. 물론 그가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는 위지백에게 들어서 잘 알고 있었다.
‘위지백 그놈…….’
“소림에서 아주 목을 빼고 기다리고 있는가 보던데. 흐흐.”
그는 반은 놀리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물론 실실거리는 그 얼굴에 주먹을 꽂아주기는 했지만 며칠이나 지난 지금에 다시 생각해봐도 속이 부글거리며 끓는다. 뜬금없이 서장에서 여기까지 찾아오다니. 그러나 소명은 곧 맥 빠진 사람처럼 한숨을 흘렸다.
“후, 소림, 소림이라.”
언제고 찾아가야할 곳임에는 틀림없었다. 장우상의 마지막 바람이 떠올랐다.
소림, 크나큰 마음의 빚을 지고 있는 곳. 그리고 언제나 그리워하던 그곳. 장우상에게 그곳은 떠나온 고향과 다르지 않았다. 제 발로 나와 버렸기에 차마 돌아갈 수 없는 고향이었다.
소명은 추색이 완연한 하늘을 한참이나 올려다보았다. 가을의 햇살이 이제 끝이라는 듯 따갑게 쏟아졌다.
법현은 크게 용기를 내었다. 지금까지는 집을 다시 짓는 일이 급하여 어찌 용건을 꺼낼 여가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큰 공사도 오늘, 내일 하는 때이니 만큼. 잠시 숨을 고른 법현은 스스로를 달래려는 듯이 나직이 불호를 읊조렸다.
“아미타불…….”
그리고 용기 내어 소명에게 다가갔다. 다가서자 소명이 흘깃 고개를 돌렸다.
“법현 스님.”
“궈, 권야 시주.”
막상 얼굴을 마주하자 입안이 바싹 말랐다. 법현은 마음을 다잡았다. 소명의 눈초리는 담담하여 다른 기색이라고는 일절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한눈에도 긴장한 모습이 역력한 법현의 모습이 의아했다.
“어쩐 일이십니까?”
“빈승, 한 가지 청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청이시라면?”
“…….”
법현은 쉽사리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질끈 물었다. 오래도록 골몰했던 한마디의 물음이 목구멍까지 올라왔건만 도무지 입 밖으로 내뱉을 수가 없었다.
“원하는 것이 달리 있으신지요.”
“읍, 네, 그렇습니다.”
법현은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불제자답지 못한 서두르는 기색이었다.
“드, 듣기로 백보권과 흡사한 공력을 이루셨다 들었습니다.”
“백보권?”
“예, 감히 청할 수 있을는지요?”
소명은 입을 벌린 채 멈칫했다. 백보권이라니. 그러나 둘러대기에 법현의 얼굴은 간절했다.
“아, 이것 참.”
“권야 시주, 본사의 염원을 모른 척 하지 말아주십시오. 아미타불.”
합장한 법현은 재차 허리를 숙였다. 물끄러미 보던 소명은 결국 한숨을 흘렸다. 오늘은 단단히 각오를 하고 온 모양이었다. 아예 모른 척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이번에는 아주 각오를 단단하게 한 모양이었다. 입술을 질끈 문 법현의 모습을 보던 소명은 결국 손을 들었다.
“후우, 좋습니다. 무엇을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그러자 법현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계인이 뚜렷한 민머리가 붉게 달아올랐다.
“차, 참말이십니까?”
어찌하면 좋겠느냐는 말에 법현은 생각한 바를 털어놓았다. 헌데, 그 방법이라는 것이 무식 살스러운 지라 소명은 일단 눈살을 찌푸렸다.
“괘,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럼요. 괜찮습니다. 빈승이 청하겠습니다. 시주.”
말하고는 눈을 반짝거렸다. 소명은 그 의욕 넘치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고개를 절래 흔들었다.
‘에라 모르겠다.’
지금 상황을 보면, 인적 없는 골목길에서 법현이 십수 걸음 멀리 떨어진 채 마보를 단단히 취한 채 버티고 섰다. 그런 법현의 복심을 향해 백보권의 권력을 떨치라는 것이었다.
소명은 가볍게 손을 풀었다.
“아미타불! 부탁드립니다. 시주!”
힘차게 외친 법현은 이내 전력을 다해 공력을 운기했다. 위지백에게 귀띔으로 들은 바도 있으니 감히 태만히 대할 수는 없었다. 순간, 전신의 근육이 한껏 응축되며 은은한 금광이 일어났다.
소림의 나한일기공(羅漢一氣功), 십성지경인 철나한(鐵羅漢)이 발현된 것이었다. 외문기공 상의 육신갑에 비견할 만한 공력이었다.
백보권이라면 철나한의 방호공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이었다.
법현은 마른 입술을 살짝 축인 채, 소명을 향해 외쳤다.
“아미타불! 빈승은 준비가 되었습니다!”
“그럼 가겠습니다.”
“예!”
답한 소명의 말에 법현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작은 것 하나라도 놓칠 새라 눈을 부릅뜨고는 소명의 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는 듯하던 소명은 이내 두 팔을 크게 벌리며 자세를 잡았다. 헌데 그 모습이 많이 익숙했다.
법현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엇? 금강?”
그 순간, 소명은 법현을 향해 일권을 곧게 내질렀다.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정권 지르기의 동작이었다. 그러나 그 목표점이 된 법현에게는 그렇지 못했다.
꽈앙!
체내에서 뇌락이 떨어지는 듯했다. 어마어마한 거력이 법현의 복심을 몰아쳤다. 비명이고 뭐고 없었다. 닿는 순간 의식이 끊겼다. 그러나 한가지만은 분명했다.
‘이것이 백보…신권!’
“허걱!”
소명은 뻗은 주먹을 서둘러 거두었다. 그러나 법현의 몸은 이미 수장 밖으로 튕겨 멀리멀리 날아가 버렸다.
중간에 힘을 뺀다고 했건만 저렇게 볼썽사납게 나뒹굴 줄이야. 고개를 절래 흔든 소명은 서둘러 법현을 찾아서 자리를 벗어났다.
“아니, 그러니까, 왜 몸으로 받겠다고 그래서. 하, 이거 참…….”
한숨 섞인 중얼거림이 저도 모르게 흘러나왔다.
* * *
모여 앉은 고승들은 묘한 얼굴을 한 채 방장의 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방장은 한 장의 전서를 넓게 펼친 채 유심히 읽고 있었다.
법현이 급하게 보내온 전서였다.
‘하이고, 대체 어떻다는 건가?’
조바심이 일었지만 밑에 제자들도 있는 자리인지라 차마 채근도 못하고 방장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문득, 방장은 펼친 전서를 내려놓으며 깊은 숨을 흘렸다.
“허어.”
“바, 방장 사형.”
“역시, 아니었던 것입니까?”
방장의 한숨 소리에 승인들은 솔직하게 실망감을 드러냈다. 백보권의 복원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이었다. 방장이 절레절레 고개를 가로저었다.
“법현이…… 법현이 제대로 당한 모양이네.”
“예? 법현이 당하다니요?”
“아니, 이 요령 없는 놈이 글쎄 제 몸으로 상대의 권력을 맞받은 모양일세.”
“그래서요?”
승인들은 방장의 말을 이해 못했다. 법현이라면 나한일기공이 경지에 올라 철나한을 이루었으니 어지간해서는 큰 일이 없을 터였다. 멀뚱히 보고 있는 승인들에게 방장은 이어 말했다.
“주먹질 한방에 고스란히 나가떨어졌다더군. 백보권이 틀림없어.”
“오오! 세존이시여!”
방장의 담담한 말에 승인들은 눈을 크게 치떴다. 이제는 누구 눈치를 볼 것도 없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는 다그치듯이 물었다.
“대체 언제 돌아온답니까?”
“언제입니까? 방장 사형!”
“으음, 그것이…….”
방장은 뭔가 곤란하다는 듯이 슬쩍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는 눈을 돌려 내려놓은 전서를 바라보았다.
* * *
소명은 마지막 기왓장을 얹어 올리고는 손을 털며 몸을 일으켰다. 저도 모르게 긴 숨이 흘렀다. 일이 힘겨움 때문이 아니었다. 이로써 남호동의 가옥은 다 정리한 셈이었다.
대화재 이후 남호동은 빠르게 정상을 되찾았다. 다행하게도 첫눈 오기 전에 남호동 주민 모두가 추위를 피할 벽과 눈비를 막아줄 지붕을 마련했다.
여기에 소명과 사람들의 노고는 물론이오, 담가의 물질적인 지원 또한 큰 몫을 했다. 담가의 가주 대행은 관아까지 움직여 지원을 받아냈으니.
소명은 흙투성이가 된 옷자락을 툭툭 털면서 지붕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둘러보니 이 자리에서 남호동 거리가 한눈에 들어왔다. 낙조가 내리는 아래에 곳곳에서 밥 짓는 연기가 가만히 피어올랐다. 보는 소명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절로 머물렀다. 문득 아래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야! 끝났으면 후딱 내려오지 뭘 멀뚱히 있어!”
위지백이었다. 소명은 흘깃 아래를 보고는 피식 웃었다. 그는 대꾸하지 않고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위지백이 지붕 위로 올라섰다. 날랜 몸놀림으로 가볍게 올라선 그 역시 소명 못지않게 흙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그는 주저앉은 소명의 모습에 눈살을 찌푸렸다.
“뭘 궁상맞게 그러고 있는 거냐?”
“아니, 이제 끝났구나 싶어서.”
“응? 아, 하기야.”
위지백은 다가가 소명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흙먼지가 뽀얗게 피어올랐다. 그는 코끝을 긁적이며 소명을 따라 해질 무렵 남호동의 경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부는 바람이 제법 매서웠다. 조만간 추운 겨울이 올 터였다. 그러나 바람 앞에서 소명도, 위지백도 담담했다. 뭐라 해도 서장 혹한 속에서 생사를 돌보아온 두 사람이었다. 이 정도 바람에야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법현 스님도 정신 차렸지, 아마?”
위지백이 지나가는 말로 툭 던졌다. 그 한마디에 잔잔했던 소명의 어깨가 잠시 움찔했다. 무안한 기색으로 슬쩍 고개를 돌렸다.
“소림에는 가봐야지 않겠냐?”
“가기야 가야겠지. 아니, 잠깐.”
소명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퍼뜩 눈을 돌렸다.
“뭐야, 네놈도 가려는 거냐? 그냥 서장에나 돌아가지?”
돌아보는 소명은 귀찮다는 듯이 눈살을 찡그렸다. 그 말에 위지백은 오만상을 썼다. 그는 어금니를 꽉 물고는 험상궂게 중얼거렸다.
“아니, 해도 너무 한 것 아니냐.”
“뭐가 너무하다는 거야?”
“서장에서 여기까지 왔다! 일까지 이렇게 도왔다고! 환영까지는 바라지도 않지만, 이거 너무 괄시하는 거 아냐? 나 위지백이야. 위지백!”
발끈한 위지백이 언성을 높였다. 그러자 소명이 고개를 삐딱하게 한 채 피식 웃었다.
“그래서, 지금 어쩌자는 거냐?”
위지백은 움찔했다. 서장제일도라는 이름이 무색했다. 참다못한 위지백은 삐죽하게 입술을 모았다.
“정말 이러기냐. 내가,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기나 하냐?”
“힘들기는 뭐가 힘들어? 네놈 마누라들한테 시달리는 게 힘든 일이냐?”
소명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툭 던진 말에 위지백은 크게 어깨를 움찔했다. 다른 것보다 마누라라는 말이 가슴을 때린 것이었다. 머뭇거리던 위지백이 슬쩍 눈치를 살폈다.
“알고 있었냐?”
“대충 짐작했지.”
소명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놈이 내 핑계를 대지 않았으면 그녀들이 너를 놓아주었을 리가 없잖아.”
“알면서 나보고 그냥 돌아가라 하는 거야? 에라이, 이 박정한 인간아!”
“네놈의 우정이란 건, 마누라 등쌀에 숨겨주는 걸 말하는 거냐?”
어이없어하며 말했다. 그러자 위지백은 가슴을 활짝 펴며 말했다.
“흥! 당연하지!”
당당하다면 당당한 모습이었다. 마누라를 피해서 수천리 길을 달려온 셈이니. 소명은 말을 말아야지 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는 훌쩍 지붕 아래로 뛰어내렸다. 위지백이 외쳤다.
“어? 야, 야! 말하다 말고 어딜 가!”
“집에 간다.”
소명은 가볍게 대꾸하고는 터덜터덜 걸어갔다. 위지백은 위에서 찌푸린 얼굴로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쳇, 고약한 친구 같으니.”
구시렁거린 위지백은 흘깃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낙조는 빠르게 저물어서 이제 사방이 어둑했다. 그도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따로 마련한 객잔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서였다.
소명은 느긋하게 걸어서 새로 지은 장씨 모녀의 집 앞에 섰다. 새로 칠한 문에서부터 냄새가 났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안에서 분주한 소리가 들렸다.
“소명, 자네 왔는가?”
문 열리는 소리에 정 부인이 고개를 내밀었다.
“예, 부인.”
“저녁 먹어야지 않나? 어서 들어오게.”
정 부인은 환한 얼굴로 말했다. 소명은 다른 말 않고 정 부인의 말을 쫓아서 식탁에 앉았다. 그녀는 어느 때보다 풍성한 저녁을 마련했다. 장인지도 드물게 밝은 모습을 보였다. 그날의 일 이후로 오랜만에 보는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