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ti Demon God RAW novel - Chapter 78
78화. 소림사(少林寺)
졸지에 주신이 된 위지백은 숭산의 어둑한 산길로 접어들었다. 날 저문 지는 오래라 달빛도 구름 뒤에 숨었다. 그가 걷는 길은 수많은 산중소로(山中小路) 중 하나로, 소림사 산문으로 향하는 길은 아니었다.
제아무리 위지백이라도 이렇게 술 냄새를 풍기면서 산문을 넘을 깜냥은 없었다. 나올 때처럼 뒤쪽 산길로 하여 슬쩍 들어가 몸을 누일 작정이었다. 그는 볼록한 배를 슬슬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쩝, 중원의 술은 달달하기는 한데, 뭔가 영 맹물 같단 말이야. 배만 부르고…….”
양껏 퍼마시기는 했지만 그런 만큼 취기가 오르지를 않아서 못내 아쉬운 얼굴이었다. 본래라면 사흘 밤낮, 죽자고 술을 기울여도 모자랄 판국이었는데. 그래도 옆에 낀 술독을 보자니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절로 그려졌다. 다시 고개를 든 순간 위지백은 흠칫하며 멈춰 섰다.
“흡!”
서너 걸음 앞에 웬 그림자 하나가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그림자를 발견하기가 무섭게 위지백의 두 눈에 시퍼런 날이 섰다. 찰나 몽롱하던 취기는 간데없었다. 즉각적으로 자세를 낮추었다. 언제든지 반응할 수 있는 자세였다. 당혹감은 이후에 다가왔다.
‘내 감각을 속이고 이만큼이나.’
아무리 새벽부터 밤까지 온종일 술을 퍼부었다고 하지만 위지백의 감각은 조금도 무뎌지지 않았다. 그런 감각을 뚫고 코앞까지 다가온 것이었다. 서너 걸음이란 그야말로 생사가 오가는 거리나 다름없었다. 위지백 정도의 고수가 이 정도의 거리를 속절없이 내주었다는 것은 가볍게 여길 일이 아니었다.
내린 어둠 속에서 위지백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신중한 눈으로 그림자를 노려보며 옆구리에 끼고 있던 술독을 등 뒤에 내려놓았다. 다른 손은 뒤 춤에 꽂은 칼자루를 단단히 틀어쥐었다.
“누구냐!”
짓씹듯이 내뱉었다. 웅크리고 있던 그림자가 흘깃 고개를 들었다. 어둠이 무색하게 밝은 눈빛이 일었다. 멀뚱히 있던 그림자는 돌연 킁킁거리더니 위지백에게 물었다.
“그거 차냐?”
“예?”
“차냐고, 곡차(穀茶).”
“곡차? 그, 그렇소만.”
늙은 목소리였다. 태연하게 물어오니, 칼을 세웠던 위지백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그림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거리를 바짝 좁혔다. 옷자락이 펄럭이는 소리가 거칠었다. 위지백은 신형을 비트는 것과 동시에 발도했다.
챙!
보도가 울었다. 시퍼런 도광이 번개처럼 피어올라 어둠을 밝혔다. 그러나 칼날은 들린 채로 멈췄다. 하늘 향해 뻗어 올린 칼끝이 징징 울었다.
위지백은 뽑아든 칼을 휘두르지 못했다. 찰나에 거리를 좁혀왔던 그림자가 시야에 없었다. 목표를 놓친 것이었다. 천하의 위지백도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도첨에는 일시에 끌어 올린 공력이 꿈틀거리는 데, 정작 그 공력이 향할 상대가 없는 것이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순간 등 뒤에서 홀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위지백은 굳은 고개를 겨우 돌렸다. 그러자 옆구리에 끼고 있던 술독이 어느 틈엔가 저만치 가 있었다. 웅크린 그림자가 술독의 봉인을 뜯고는 술독이 무슨 술잔이라도 되는 양 가볍게 들어서는 홀짝거리고 있었다. 위지백은 잔뜩 긴장한 채 바라보다가 그만 맥이 탁 풀리고 말았다. 치켜든 칼날이 무색할 따름이었다.
문득 구름이 흩어지며 달빛이 새삼 고개를 내밀었다. 어둑한 산길을 비추니, 위지백은 그림자의 정체를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었다. 산발한 백발을 한 채, 부러질 듯 앙상한 손목은 여느 장정의 몸통만 한 술독을 가볍게 받들어 입가를 향해 기울이고 있었다. 노인은 조금도 힘들어 보이지 않았다. 백발아래로는 세월이 오래되어 색을 잃은 가사 자락이 보였다.
‘승인?’
위지백은 칼날을 늘어뜨리고 의아한 눈으로 노인을 바라보았다. 기울였던 술독이 점점 올라갔다. 노인은 숨도 차지 않는 모양이었다. 입술 한번 떼지 않고, 계속해서 술독을 비워갔다. 홀짝거리던 소리가 이제는 콸콸거렸다. 꿀꺽꿀꺽 술이 넘어가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보는 사람이 숨 막힐 지경이었다.
위지백은 와락 이맛살을 찌푸렸다. 눈 뻔히 뜨고 술독을 빼앗긴 것도 억울할 지경인데, 한 모금도 못하고 전부 내어 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아니, 혼자 다 마실 참인가!”
“꿀꺽, 꿀꺽.”
발끈한 위지백의 일갈에도 꿀꺽거리는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이런!”
험악한 얼굴로 다가서려는 순간이었다. 노인이 손가락을 튕겼다. 돌연한 파공성이 날카롭게 울렸다.
핑!
위지백은 반사적으로 신형을 비틀었다. 무언가가 요혈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위지백은 헛바람을 집어삼키며 허리를 비틀었다. 흩날리는 옷자락이 꿰뚫렸다. 신형을 가눌 틈은 없었다. 노인의 손속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연이어 날아들었다. 위지백의 두 눈에서 전광이 번뜩였다.
“흐압!”
벼락같은 일성을 내지르며 칼을 맹렬히 휘둘렀다. 파란 도광이 활짝 펼친 산처럼 넓게 펼쳐졌다.
몽상순천도(夢想順天刀), 풍열산(風裂傘)의 일식이었다.
쩡! 쩌정!
묵직한 소리가 연이어 울렸다. 위지백은 풍열산을 거듭 펼치면서도 다섯 걸음을 물러섰다. 그리고 멈췄다. 그는 흔들리는 신형을 겨우 부여잡았다. 늘어뜨린 보도의 광채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위지백이 중원에 든 이후로 처음으로 펼친 절초다운 절초였다. 그러나 조금의 이득도 취하지 못했다. 지금의 고요함은 풍열산이 완벽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노인이 더 손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위지백은 알 수 있었다.
눈앞의 노인은 어둠 속에 반쯤 파묻힌 채 여전히 술독을 기울이고 있었다. 위지백의 칼자루 쥔 손이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갔다.
‘대체 얼마만한 괴물인 건가?’
긴장하여 노인을 노려보고 있자니 그때 노인은 드디어 술독에서 입을 떼었다.
“꺼어으으윽!”
대뜸 내뱉는 트림 소리가 시원하기도 했다. 그리고 노인은 히죽 하고 웃었다. 술기운이 슬쩍 돌아 눈가가 벌겋게 달아올랐다.
“잘 마셨다. 아이야.”
노인은 위지백에게 빈 술독을 휙 하고 던졌다. 무슨 속이 텅텅 빈 강정이라도 던지는 듯한 가벼운 손짓이었다.
“흡!”
위지백은 저도 모르게 칼을 뻗어 술독을 도신을 받아내는 묘기를 보였다.
비스듬한 도신을 타고 술독이 주르륵 미끄러졌다. 위지백은 어려움 없이 술독을 받아들었다. 퍼뜩 고개를 들어 보니 노인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위지백은 멈칫하여 한참 동안이나 멀뚱히 서 있었다.
뭔가에 단단히 홀린 듯했다. 멍청히 눈을 돌려 안아 든 술독 안을 살폈다. 당연하게 안은 텅텅 비어 있었다. 술 냄새만 남아 코끝을 간질였다.
다시 고개를 들어서 주변을 보았다. 위지백이 허겁지겁 물러서며 남긴 공방의 흔적만 남아 있었다. 풍열산의 경력에 휩쓸린 자국이 뚜렷했다. 멍하니 있던 위지백은 문득 술독을 내려놓고 허리를 숙였다. 발치 여기저기에 깊숙하게 틀어박힌 것이 보였다. 하나하나 주어서 살피니 손때로 거뭇한 염주 알이 다섯이었다. 위지백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이것이 있다는 말인즉 뭔가에 홀렸다던가, 꿈을 꾼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차라리 그런 것이었으면 좋으련만.
늘어뜨린 도신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위지백은 다른 것은 생각할 수 없었다.
“요, 요, 요귀다!”
냅다 괴성을 내질렀다. 그는 쏜살같이 소림사 경내를 향해 막무가내로 도망했다. 떠난 자리에 텅 비어 버린 술독 하나만 덩그러니 남았다.
불 꺼진 선방에 흐릿한 달빛이 창틀 사이로 스며들었다. 그 빛을 받으며 소명은 두 눈을 감고 좌정하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참 분주한 하루였다. 한없이 약왕전의 일을 돕고 있자니 스승 장우상의 옛적 자취를 따라가는 듯했다. 모은 두 손에는 약향이 남아 있었다. 소명은 문득 짧은 숨을 뱉으며 눈을 떴다. 그는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렇게 일찍 돌아와?”
의아해 중얼거렸다. 그 순간 우당탕! 하며 시커먼 그림자가 선방의 문을 박차고 뛰어들어 왔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이게 무슨 날벼락인지. 그러나 소명은 당황하는 기색 없이 그림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너 뭐하냐?”
그는 구르다시피 들어온 그림자, 위지백에게 퉁명스레 물었다. 위지백은 퍼뜩 고개를 치켜들었다. 시퍼렇게 질린 얼굴로 헉헉 숨 몰아쉬는 꼴이 기이했다.
“요, 요, 요…….”
그는 연신 요, 요 거릴 뿐,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새파랗게 질려 있는 얼굴은 숨이 차서도 내리는 달빛 때문도 아니었다. 더듬거리는 모양새를 보던 소명은 문득 가운뎃손가락을 차분히 접었다. 그리고 튕겼다.
딱!
“으억!”
미간을 꿰뚫는 듯한 충격에 위지백의 고개가 뒤로 홱 젖혀졌다.
“정신이 좀 드시나? 안 들면 한 번 더 하고.”
“아니다, 이제 괜찮다.”
위지백은 맞은 미간을 부여잡은 채 다른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자리에 앉았다. 눈가에 눈물이 찔끔해 있었다. 소명은 쯧, 혀를 차고는 등잔에 불을 밝혔다. 방 안이 환해졌다. 그는 침상 위에 털썩 앉았다. 위지백은 미간을 문지르며 끙끙거렸다. 소명은 눈살을 찌푸린 채 타박하듯 물었다.
“오밤중에 무슨 호들갑이냐?”
“호들갑이 아니야! 이봐, 소명. 요, 요귀가 나타났어. 요귀가!”
위지백은 퍼뜩 정색하며 말했다. 맞은 미간이 벌겋게 달아 있었다. 요귀 타령에 소명은 순간 대꾸할 말을 잃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소림사 앞마당에서 요귀라니. 그는 새삼 고개를 뒤로 빼며 위지백의 위아래를 살폈다. 온몸에는 술 냄새가 진동했다. 핏발 선 눈동자는 흔들리고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흙먼지를 뒤집어쓴 몰골은 또 어떠한가. 소명은 이내 안쓰러운 눈으로 물었다.
“너 취했냐?”
“취하기는! 이 위지백이 술 몇 동이에 취할 사람으로 보이냐! 진짜 요귀라니까!”
위지백은 마구잡이로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술 마시고 올라오는 길에 마주했다는 요귀의 이야기에 소명은 대놓고 불신의 눈길을 보냈다.
“에이…….”
“뭐야, 지금 내 말을 못 믿겠단 거냐!”
“아니, 못 믿겠다고 하기보다는.”
소명은 말끝을 흐렸다. 그 모습에 위지백은 억울하다는 듯이 가슴을 쾅쾅 두들겼다. 그러다 퍼뜩 품을 뒤적여 한 주먹의 염주 알을 꺼내 보였다.
“이딴 걸 쏘아댔단 말이다. 풍열산으로 겨우 맞받아 낼 정도의 위력이었다니까.”
소명은 위지백의 손에서 염주 하나를 집어 들어 유심히 살폈다. 염주는 손때로 거뭇했다. 불빛이라고는 흐릿한 달빛 하나였지만 소명의 눈에는 미세한 흠집까지 또렷하게 보였다. 이것은 약재 창고에서 소명의 뒤통수를 노렸던 염주 알 중 하나가 분명했다. 소명은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꽤나 짓궂은 분이시군.”
“짓궂다니, 누가?”
“누구긴 네가 무서워하는 요귀 노인 말이지.”
“무, 무섭기는 누가!”
“아아, 됐고. 이건 내가 챙긴다.”
발끈하는 위지백의 말을 끊으며 소명은 염주 알을 모두 수습했다. 위지백은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울컥하기는 잠시였다. 그는 이내 축 어깨를 떨어뜨렸다. 더 할 말이 없었다. 소명은 멍해 있는 위지백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가 한마디 툭 던졌다.
“자라.”
“응, 저, 저기.”
“뭐?”
“부, 불은 끄지 말자.”
“…….”
소명은 등잔불에 손을 가져가다가 어이없어 위지백을 돌아보았다. 크게 흔들리는 위지백의 눈동자를 보자니, 다른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결국에는 불 밝힌 그대로 두 사람은 각자 침상에 드러누워 있었다. 위지백은 드러누운 채 불빛에 일렁이는 천장만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쉬이 잠이 오지 않았다. 한참을 있던 그는 순간 벌떡 몸을 일으켰다.
“으엇!”
갑자기 내지른 놀란 소리에 소명은 또 뭐야, 라는 눈으로 위지백을 돌아보았다. 위지백은 째진 눈을 크게 치뜨고는 멍청하니 한쪽 벽을 바라보았다. 이내 치뜬 눈꼬리가 힘없이 늘어지며 서글픈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 내 술…….”
모를 요귀 인에게 그대로 빼앗긴 술 생각이 이제야 난 것이었다. 소명은 당장 울상 짓는 위지백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에효, 말을 말아야지, 말을.’
그는 침상 위에 털썩 돌아누워 버렸다. 위지백은 침상 위에서 빠득거리며 이를 갈아붙였다. 그의 심중에 요귀에 대한 두려움은 어찌 털어냈으나, 대신에 울화가 들끓었다.
* * *
깊은 밤, 불 꺼진 선방에 기이한 소리가 계속해서 울렸다.
“끄으응, 으으으…….”
병자가 크게 앓는 듯했다.
맞은 편 침상에 누워 있던 소명은 더 버티지 못했다. 그는 한숨을 내뱉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런…….”
그는 눈살을 찌푸린 채 소리가 들려오는 한쪽 침상을 바라보았다. 위지백이었다. 그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채 마냥 앓고 있었다. 모습을 딱 보자면 무슨 지독한 열병에라도 걸린 듯한 몰골이었다. 소리는 또 어찌나 처량한지. 그러나 보는 소명의 눈길은 결코 곱지 않았다.
소명은 위지백이 어찌 저러고 있는지 잘 알았다. 결코 아파서 저리 구는 것이 아니었다. 술을 빼앗기고, 호되게 당한 것에 더해서 제 성질을 못 이겨 저리 앓고 있는 것이었다. 무슨 말을 달리할 수 있을까.
발끈하려다가도 소명은 혀만 찼다.
“쯧쯧, 못난 놈.”
위지백의 앓는 소리 탓에 편히 자기는 다 글렀다. 소명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밖으로 나서니 산 위에서 내려오는 밤바람이 제법 매서웠다. 겨울이 깊어가고 있었다.
머리 위에 펼쳐진 밤하늘은 짙고 길었다. 지객당의 담 너머로 등불이 아직 불을 밝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