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ti Demon God RAW novel - Chapter 80
80화. 백보신권(百步神拳)
법공은 하늘과 땅이 뒤바뀌는 경험을 했다.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땅을 밟아가던 두 다리가 하늘로 치솟았다. 잿빛의 승포 자락이 펄럭였고 덩치가 허공을 크게 돌았다.
턱!
꼼짝없이 머리부터 처박히게 생겼는데, 충격은 없었다. 땅바닥에 민머리가 닿기 직전, 소명이 옷자락을 틀어쥔 덕분이었다. 법공은 드러누워서는 멍한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앞에는 소명의 주먹이 멈춰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소명이 물었다.
법공은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가 없어서, 묻는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과정이야 어떻든 지금 누워 있는 것은 그였다.
법현도 눈을 크게 뜨고 벌어진 일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어느 쪽이든 크게 상할까 봐 가슴 졸였건만, 그것이 아까울 정도로 허망한 결과였다. 그러나 넋 놓은 것도 잠시, 법현은 혀를 질끈 깨물었다. 터지려는 웃음을 겨우 부여잡았다.
소명은 법공이 말 못하고 멍청히 있으니 곧 손을 거두고 물러섰다. 법공은 주저앉은 채 있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일 초의 공방을 이제야 복기한 것이다.
“이, 이런 비겁한!”
당장 발끈해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가 생각한 겨룸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호쾌한 권각의 충돌을 기대했건만 기껏해야 눈속임의 잔재주라니. 그러나 소명은 가만한 미소로 법공의 달아오른 얼굴을 바라보았다.
소명이 펼친 것은 월녀검 중 옥녀침산(玉女針散)의 허초였다. 본래는 검광으로 눈을 현혹하여 상대의 허점을 유발하는 수법이었다. 말이야 쉽지 막상 상대를 앞에 두고 펼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소명은 그저 담담한 미소로 법공을 바라보았다. 붉으락푸르락하던 법공의 얼굴이 점점 굳어 가더니 결국 고개를 떨어뜨렸다. 잔뜩 힘이 들어간 어깨에서 힘이 쭉 빠졌다. 뭐라 떠들어도 지금 주저앉아 있는 것은 자신이었다. 법공은 시무룩해하며 법현에게 말했다.
“법현, 소명 시주를 방장께 안내해 드려라. 일심정(一心庭)이다. 여기 일은 내가 하마.”
“그, 그러지요, 사형.”
법현은 힘내어 웃음을 참았다. 그는 더듬거리며 겨우 답했다. 법공은 바위 같은 두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쌓인 빨랫감만 바라보았다.
소명과 법현은 그대로 약왕전을 나섰다. 법수는 법공이 일을 대신한다는 말에 크게 놀랐지만 이내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보아하니 법공도 약왕전을 쉬이 벗어나지는 못할 것 같았다.
소명과 법현, 두 사람은 잠시간 말이 없었다. 소림사의 붉은 벽돌담을 따라서 걸었다. 법공이 말한 일심정은 소림사의 내전, 깊은 곳에 자리한 작은 법당이었다.
“이곳입니다. 소명 시주.”
위에 일심이라 적힌 오래된 현판이 걸려 있었다. 법현은 문 앞으로 다가가 공손히 알렸다.
“제자 법현, 소명 시주를 모시고 왔습니다.”
문이 좌우로 열렸다. 순간 법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헛 하며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찰나의 머뭇거림이었지만 소명은 그 모습을 똑똑히 보았다.
“법현 스님?”
의아한 일이었다. 법현은 뻣뻣하게 고개를 돌려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드, 드시지요, 소명 시주.”
그리고 잽싸게 한쪽으로 물러섰다. 영 수상한 모습이었다. 소명은 고개를 갸웃하며 법당의 좁은 문으로 들어섰다.
‘헙.’
소명 역시 헛바람을 들이켰다.
햇빛이 부서지는 법당의 낡은 처마 아래로 여럿의 승인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하나같이 지긋한 연배로, 모두가 눈가에 깊은 주름을 잡은 채 소명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호기심이 역력한 그 눈길 하나하나가 소명에게는 천근의 부담으로 다가왔다.
‘이런…….’
낭패한 심정을 어찌 추스르기도 전에 방장이 웃으며 소명을 맞이했다.
“허허, 오셨는가.”
“예, 방장. 제자 소명이 인사 올립니다.”
소명은 급히 합장하며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축 늘어진 소맷부리에서 맺힌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침묵 속에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유달리 컸다. 고개 숙인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어려운 자리에 이런 민망한 몰골이라니.
“약왕전에서 자네를 제법 부렸나 보구먼.”
“아, 아닙니다. 방장.”
방장은 흥미로운 눈으로 머쓱해하는 소명을 바라보았다. 그는 떠오르는 미소를 잠시 누르고 곧 주변 사형제들을 둘러보았다. 그들은 하나같은 눈길로 방장을 재촉하고 있었다.
‘쯧쯧, 채신머리없이들.’
다 늙은 노승들이 눈을 반짝거리며 재촉하는 꼴이라니. 한시라도 바삐 소명의 무공을 견식하고 싶은 것이었다. 방장은 눈살을 찌푸린 채 내심 혀를 찼다. 그러나 정작 방장의 마른 손가락도 염주를 분주히 돌리고 있었다. 헛기침을 잠시 흘린 방장이 넌지시 물었다.
“커흠, 커험. 이미 들어 아는 바이나 확인 차 묻겠네. 소명 자네는 무공을 무엇, 무엇을 익혔는가?”
“예, 방장. 제자는 본래 하남 상화촌 출신으로 그곳의 무관인 호가무관에서 관주 호경한에게 금강권과 일심기공을 배웠습니다. 이후 탈문 제자 장우상에게 다시 금강권과 곤음수, 철비각을 수련하였습니다. 무기술은 나한곤, 백가창, 단전도, 그리고 월녀검을 사사했습니다.”
“허어…….”
소명은 고개 숙인 채, 차분하게 말했다. 몇 번이고 되뇌며 준비했던 답이었다. 감출 것도 거리낄 것도 없었다. 소명의 차분한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누군가의 입에서 한숨 소리가 새었다. 그러나 그의 심정이 이곳에 자리한 모두의 심정이었다.
막상 당사자에게 들으니 더욱 믿을 수가 없는 까닭이었다. 어느 기인에게 사사한 것이 아니라 속가의 무인이며 탈문한 제자라니.
호가무관의 관주인 호경한에 대해서는 익히 알았다. 양천호격, 달리 하남의 호랑이라 불리던 용맹한 속가무인인즉. 그러나 탈문 제자 장우상이라는 이름은 대부분의 기억에도 없었다.
더구나 소명이 익힌 무공 중에 절기라 할 것이 무엇이 있는가. 모두가 강호상에 널리 알려진 공부들이었다. 소림사 본산에서도 달리 수련하는 이가 없는 공부들이기도 했다.
방장이 다시 물었다.
“다만 그뿐으로 백보권을 복원하였다는 것인가?”
“제자, 백보권인지 아닌지 알지 못합니다. 그저 보잘것없는 수준이나 경력을 발할 수 있을 뿐입니다.”
소명은 조심스럽게 답했다. 그는 보는 눈길들이 무거워 숙인 고개를 들지 못했다. 방장은 하얀 수염을 쓸어내리며 새삼스런 눈으로 소명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허, 보잘 것이 없다라. 보잘것없는 권경에 쓰러질 정도로 법현이 모자란 아이였던가?’
이내 쓴웃음을 머금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리야 없었다. 뭐라 하여도 법현은 다음 소림을 이끌어 나갈 동량 중의 하나였다. 이루어 낸 경지가 어떠한지 방장은 잘 알고 있었다. 금강일기공, 철나한이라면 어지간한 경력도 능히 감당할 수 있었다. 헌데, 법현이 말하기를 서른여 걸음을 사이에 두고 떨친 일권의 경력을 감당하지 못했다 하였다. 방장은 고개를 돌렸다. 주변 승인들이 소리 낮추어 저들끼리 웅성거렸다.
‘아니, 백보권은 차치하고 금강권에서 경력을 체득할 수가 있기는 한 건가?’
‘그럴 리가.’
‘본사에서 금강권을 익힌 제자가 부지기수이나, 그중 단 한 명도 이루지 못하였음이네.’
‘허어, 그렇다고 금강권을 허투루 가르친 것은 또한 아닐진대.’
소명은 웅성거리는 소리에 흠칫 고개를 들었다. 자리하고 있는 소림 승인들에게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들에게 있어 금강권이란 권법의 이치를 깨닫게 하고, 연골연신의 기반을 세우는 기초인 까닭이었다.
그 사정을 짐작하지 못하는 바가 아니었다. 소명은 내심으로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달리 무슨 설명을 할 수 있겠는가. 그때, 방장이 문득 날 선 눈초리로 홱 주변을 노려보았다. 한차례 눈길 주는 것으로 웅성거림이 싹 가라앉았다. 나이 지긋한 노승들이 방장의 눈초리에 합죽이 입이 되어 버리는 모습은 어지간히 보기 쉬운 광경은 아니었다.
‘흡!’
소명은 어찌해야 할지 몰라 터지려는 웃음을 어금니로 꽉 깨물었다. 방장은 그 사이에 한 번 더 사형제들을 눈빛으로 제압하고는 소명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자네, 수고스럽겠지만 금강권을 보일 수 있겠는가?”
“예, 방장.”
소명은 선뜻 답하고 옷자락을 걷어 올렸다. 잠시간 호흡을 골랐다. 낯빛이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그리고 천천히 허리를 폈다. 금강권의 시작인 고신정립이었다. 동시에 자리한 승인들 모두가 눈을 빛내며 소명의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장내는 일시지간 숨이 멎었다.
지금 자리에 있는 사람치고 금강권을 모르는 이 없었고, 소싯적에 공들여 익히지 않은 이 또한 없었다.
사미 시절, 금강권 속에 수미산으로 향하는 길이 있다는 말을 듣고, 어린 마음에 들떠 연공했던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십수 년이 지난 지금에도 눈을 감고 금강권을 펼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소명처럼은 할 수 없었다. 소명의 움직임은 금강권이 분명하나, 또한 금강권이 아니었다. 보보, 권권마다 자연스레 경력이 일어났다.
무학의 기초를 세우는 방편에 불과한 금강권에서 이와 같은 현상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호기심으로 뜬 눈동자들이 촌각 만에 경악으로 한껏 벌어졌다.
그네들의 상식이 산산이 부서졌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뻗어 가는 일권, 동시에 마당에 쌓인 낙엽이 조용히 밀려났다.
“허어…… 저, 저.”
“아, 아미타불.”
탄성이 절로 흘렀다. 지금의 현상을 굳이 경력을 발하는 것이 아니라 권형에 의해 자연스레 경력이 일어나는 것이었다. 놀라는 승인들의 눈길을 받으며 소명은 무겁게 금강권을 펼쳐갔다.
뻗어 가는 주먹을 노려보는 소명의 눈동자는 극도로 신중했다. 지금 펼치는 금강권은 처음의 형태에 가장 가까웠다. 호 관주에게 호되게 혼나며 배웠던 금강권이었다. 이는 소명에게 제일 어려운 금강권이기도 했다.
권로를 밟아가니 체내에서 운기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권각을 내뻗고 거둘 때마다 절로 경력이 발출되었다. 그리고 소명은 숨을 고르며 마지막 금강여일에 이르렀다.
소명은 눈을 감으며 고요히 합장했다. 그러자 지금껏 법당의 마당을 휘몰았던 모든 기파가 두 손바닥 사이로 남김 없이 모여들어 자취를 감추었다.
승인들 중 누군가 감탄하며 외쳤다.
“오오, 금란지경(金蘭至境)!”
무오였다. 그는 검은 눈썹을 치켜든 채 진정 놀란 얼굴을 했다.
금란의 지극한 경지. 이는 공력의 수발이 완전하여 조금의 낭비도 없으며 뜻에 거스름이 없음을 뜻했다. 그 말에 반박하는 사람은 없었다.
금란지경을 무공 최고의 경지라 할 수는 없었지만 응당 이루어야 할 경지임에는 분명했다. 실제로 강호상에 무경에 이르렀다고 함에도 금란지경을 이루지 못한 이는 부지기수였다. 소명처럼 젊은 나이에 금란지경을 이루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아니, 이제껏 강호상에 그와 같은 얘기는 들은 적이 없었다.
“저 정도라니, 백보권도 충분히 가능하지 않겠는가?”
“그러게나 말이야.”
승인들은 감탄한 눈으로 소명을 바라보며 수군거렸다. 그때, 돌연 한 중년의 승인이 벌떡 일어섰다. 삐죽삐죽하게 자란 억센 수염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법공에 못지않은 덩치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기세를 수습한 소명에게 대뜸 외쳤다.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빈승은 나한당을 이끌고 있는 공무라 하네.”
“공무 스님을 뵙습니다.”
호흡을 고르던 소명은 흠칫 놀라서 부랴부랴 공무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공무는 크게 손을 흔들었다.
“되었네. 그대에게 예를 받자 나선 것이 아니야. 금강권은 잘 보았으니, 어디 그 백보권이나 한번 견식 해보세.”
우렁우렁한 목소리에 작은 법당의 기왓장이 들썩일 정도였다. 그리고는 공무는 대뜸 앞으로 걸어 나왔다. 주변의 다른 승인들이 말리고 어쩌고 할 틈도 없었다. 순간 커다란 그림자가 소명의 눈앞을 덮어 버렸다. 새삼 가까이서 마주한 공무의 덩치는 더욱 거대했다. 품이 넉넉한 승복이 터질 듯했다. 옷 아래로는 극도로 단련한 근육이 무섭게 꿈틀거렸다.
공무는 바위 같은 가슴을 탕탕 두드리며 말했다.
“자, 빈승에게 펼쳐 보시게.”
“아니 잠깐!”
반대쪽에서 또 다른 중년의 승인이 몸을 일으켰다. 그는 공무와 달리 비쩍 마른 모습이었지만 두 눈에는 서늘한 신광이 머물고 있었다.
“빈승은 달마원의 공료라 하네. 빈승에게 펼쳐 보이시게나.”
말하며 성큼 걸어 나왔다. 그의 등장에 공무는 와락 송충이 같은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어허, 백보권과 같은 천하 절기를 달마원의 빈약한 몸으로 어찌 감당한다고 그러시는가.”
“흥, 무식하게 몸으로 감당할 생각은 없으니. 걱정 접어 두시구려.”
“뭐야, 무식?”
“빈약한 몸은 어떻고.”
두 사람은 소명을 사이에 두고 서로 험악한 말을 내뱉었다. 그러다가 동시에 소명을 돌아보며 외쳤다.
“어디 자네가 직접 정하시게, 누구에게 펼쳐 보일 텐가?”
“그래, 그리하면 되겠군.”
“허걱!”
소명은 대꾸하지 못했다. 일시에 노려보는 두 승인들의 뜨겁고 차가운 눈길 앞에서 그는 주춤 물러설 뿐이었다. 백보권을 펼쳐 보라는 것이야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고 하지만, 방법이 문제였다.
‘으아, 이 무슨 무식한…….’
법현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방법이지 않은가. 대뜸 나서서는 자신을 향해 백보권을 펼쳐 보라 하니, 게다가 누구를 향해 펼칠지 결정하라 하다니.
소명은 난감한 신색으로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만류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나같이 호기심 충만한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아니, 그에 더하여 기대감마저 역력했다.
나선 공무는 아예 가사 자락까지 걷어붙였다. 색 바랜 잿빛의 승복 아래 근육이 꿈틀거렸다. 공료는 은근한 공력을 일으켰다. 그 서슬에 치렁한 가사 자락이 점차 부풀어 오르락내리락하기 시작했다. 어찌하면 좋을지 몰라 안절부절못하던 소명은 방장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자 방장은 싱긋 미소를 보이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괘념치 말고 해보라는 뜻이다.
소명은 눈을 꾹 감았다. 치미는 한숨을 애써 삼켰다. 이런 상황에서 아니할 수도 없는 노릇이오, 누구를 선택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소명은 천천히 주먹을 말아 쥐었다.
“제자, 두 분께 모두 펼쳐 보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