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ti Demon God RAW novel - Chapter 84
84화. 인연의 고리
“어디를 가려고?”
소명이 돌아보지 않고 물었다. 그 말에 움찔한 위지백은 억지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하, 하하. 무, 물이라도 좀 떠올까 해서. 하하.”
“…….”
“아, 알았어. 앉아 있으면 되잖아.”
침묵한 채 가만히 있으니, 위지백은 소명의 뒷모습에 위축되어 다시 쪼그려 앉았다. 둘의 모습에 노인은 가만한 웃음을 흘렸다.
“흘흘흘.”
실로 재미있다는 투였다. 그 눈동자는 활기로 가득해, 맑게 반짝였다. 노인은 넌지시 물었다.
“아이야, 네가 공천의 제자라더냐?”
“노선사께서 어찌 그 법명을.”
소명은 흠칫해 되물었다. 공천은 장우상의 법명, 소명도 방장의 입을 통해서야 듣게 된 이름이었다. 노인은 입을 말아 물었다. 그는 마른 눈자위를 가만하게 굴렸다. 옛적의 기억을 다시 돌이키는 듯했다.
“속명이 장, 장우상이었지, 아마.”
“스승님을 아십니까?”
법명에 이어 스승의 속명이 노인에게서 나왔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소명은 저도 모르게 소리를 높였다. 크게 뜬 눈에는 격랑이 일었다. 소림사에서 장우상이라는 속명을 기억하는 사람이 달리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노인은 담담한 표정으로 느릿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그래, 그 이름이었어.”
노인은 문득 타오르는 모닥불을 바라보았다. 마른 눈가에 초점이 흐려졌다. 마치 불꽃 속에서 갈 곳을 잃고 헤매는 듯했다.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소명의 가슴에는 수많은 말들이 뒤엉켜 있었지만, 노인의 멍한 얼굴에 쉽게 입을 열 수는 없었다. 위지백은 가운데에 쪼그려 앉아서는 두 사람의 눈치만 살폈다.
‘뭐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한참 만에야 노인은 모닥불에서 눈길을 거두었다. 그는 잔잔한 어조로 물었다.
“그 아이는 어찌 살았더냐?”
소명은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나 곧 그가 아는 장우상의 사연을 풀어놓았다. 노인은 눈을 감은 채 그 말에 귀를 기울였다. 간간이 고개를 끄덕이며 때로는 젖은 한숨을 흘리기도 했다. 소명은 마지막으로 장우상이 남긴 유언을 전하며 입을 닫았다. 행복했다는 그 한 마디였다.
노인은 장탄식을 흘렸다.
“허어, 수라의 길을 걸으려 그리 발버둥을 치더니만 결국은 그리 가 버렸구나. 아미타불.”
그는 마른 손을 마주 합장했다. 세상에 없는 장우상을 향한 불호였다. 그런 노인에게 소명이 물었다.
“노선사께서는 누구신지요?”
“허허, 이 늙은 것이야 조만간에 죽어 썩을 몸뚱이인데, 이름이 무어 중요한가.”
회한이 가득하다. 노인은 고개를 돌렸다. 어둔 구름 사이로 달빛이 흐릿하게 빛났다. 그 빛을 보던 노인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다만, 그 어린 것의 손을 잡고 소림으로 이끈 것이 이 늙은이였지.”
소명은 흠칫했다. 장우상을 소림을 이끌었다함은 곧 그에게는 사조(師祖)가 되는 셈이었다. 그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깊이 절을 올렸다.
“제자 소명이 사조를 뵙습니다.”
그러자 노인은 설레 손을 흔들었다.
“허허, 사조는 무슨 사조인가, 나는 자격 없는 사람일세.”
“하지만.”
노인은 소명을 외면하듯이 쓸쓸한 얼굴로 달빛을 바라보았다.
“다 내 탓이다. 녀석의 무재(武才)를 알았음에도 호투심(好鬪心)이 걱정되어 일부러 약왕전에 두어 욕심을 부렸으니. 그렇지 않았다면 그리 탈문하지 않았을 터이건만, 그리 속세의 풍진에 어지럽지 않았으련만.”
노인은 눈을 감았다. 읊조리는 한 마디에는 비탄(悲嘆)마저 어렸다. 주름진 눈가가 가만히 젖어 갔다. 소명은 공손히, 그러나 단호하게 말했다.
“사조, 그런 말씀 마십시오. 스승께서는 온 힘을 다해 세상을 살았습니다. 가슴 한곳에는 가족과 또한 소림에 대한 그리움을 품었으나 결코 후회하지는 않았습니다. 사조께서 자책하실 일이 아닙니다.”
노인은 뜻밖의 말에 눈을 돌렸다. 소명이 무릎을 꿇은 채 살짝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아래로 내리깐 눈동자는 단단했다. 허허 웃고 말았다.
“허, 그것참. 그래, 네 말이 옳다. 한세상 힘껏 살아간 그 아이에게 할 소리가 아니었다. 이거 부끄럽구나.”
노인의 말에 소명은 크게 민망해했다.
“아, 아닙니다. 제가 주제넘게.”
“아니다. 아니야. 이 보정의 삼십여 년 수행이 영 헛된 짓거리였느니. 허허허.”
노인, 보정은 그리 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앞에 소명과 위지백은 눈을 치떴다. 보정이라는 법명 때문이었다. 무자배보다 윗대의 배분이었다. 세월을 감안하면 눈앞의 노인은 무려 백여 년의 세월을 훌쩍 넘겼다는 뜻이었다. 소명, 위지백에게는 그야말로 까마득한 선대의 인물이었다.
둘은 놀란 눈으로 마주 보았다. 입은 뻐끔거렸지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타오르는 모닥불의 하얀 연기를 따라서 보정 노선사의 웃음소리가 가만하게 울렸다.
“헌데, 그 아이가 가정을 이루었다더냐?”
“예, 선사.”
“그래, 그랬구나. 그랬어.”
소명은 하북 정주에 머무르는 두 모녀의 이야기를 하며 밤을 지새웠다. 보정 노선사는 귀를 기울였다.
* * *
동녘이 밝아 왔다. 비치는 햇살은 숭산의 깊은 산중에도, 지객당의 허물어진 담장에도 아침의 햇살이 내려앉았다. 그 자리에는 위지백이 낙담한 사람처럼 주저앉은 채 푹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소명이 그 앞에서 가만히 호흡을 골랐다. 막 금강권을 마무리 지은 참이었다.
위지백은 흘깃 눈을 들었다. 헌데 그의 얼굴이 참 가관이라, 한쪽 눈가는 시커멓게 멍들어 있었고, 입술은 터져서 피딱지가 앉아 있었다.
보정 노선사와 함께 산중에서 밤을 지새우고 난 후 소명에게 곡소리 나게 쥐어 터진 참이었다. 그는 엉망인 얼굴로 이죽거렸다.
“그놈의 금강권은 참 질기게도 한다.”
불만이 가득한 위지백의 구시렁거림에 소명은 흘깃 눈길을 돌리고는 피식 웃었다.
“적어도 네놈의 칼질처럼 사방에 피해는 주지 않잖아.”
“쳇!”
거칠게 혀를 찬 위지백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드러난 몰골은 볼만했다. 얼굴이 붓고 터지고 멀쩡한 곳이 하나도 없었다.
“그렇다고 사람을 이 꼴로 만들어 놓기냐!”
“어허, 인과응보(因果應報)라. 누가 이 난리를 치라더냐?”
발끈해 언성을 높이니 소명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태연하게 대꾸했다. 그 말에 위지백은 입술을 말아 물었다. 더 말하지 못했다. 마당은 정리했지만 소명의 등 뒤로 무너진 담벼락은 그대로였다. 저지른 일이 눈앞에 있으니 무슨 말을 더 할까. 머쓱함에 고개를 돌렸다.
그는 소매를 뒤적였다. 어디서 어떻게 구했는지 계란 하나를 꺼내 들어 멍든 눈자위에 살살 굴렸다.
“아이고, 아야.”
계란을 굴리는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소명은 그 모습에 실소를 금치 못했다.
소명은 한쪽에 벗어 놓은 남색 장삼을 챙겨 들었다. 흔들리는 장삼 자락에는 불탄 흔적이 아직도 역력했다. 물끄러미 보고 있던 위지백이 넌지시 물었다.
“그거 수선이라도 하지 그러냐? 타고 눌어붙은 채로 입고 다닐 참이야?”
“이대로 좋아, 수선은 무슨.”
소명은 담담한 어조로 답했다. 장 부인이 밤을 뜬눈으로 지새워 가며 손수 지어준 옷이었다. 소명에게는 어느 비단, 어느 금포에 비할 것이 아니었다. 그는 옷깃을 잠시 쓸어내리며 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고개 들어 먼 동녘을 바라보았다. 햇살이 밝아오고 있었다.
‘건강하실는지.’
하북 정주의 정경이 새삼스레 떠올랐다. 그리고 이내 히죽 하고 쓴웃음을 흘렸다. 생각하면 그곳에서나 이곳 소림에서나, 소명의 하루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정주에서는 벌이를 하고자 열심히 일을 했고, 소림에서는 또한 손을 거들고자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다. 송가의사에서나 소림사 약왕전에서나 하는 일에는 큰 차이가 없었다. 다만 양이 훨씬 많을 뿐이었다.
고소를 머금는 소명의 모습에 위지백은 입매를 삐죽거렸다.
“체헷, 그놈의 궁상은.”
구시렁거리는 위지백에게 소명이 말했다.
“겨우내 소림사에서 머물기로 했다.”
“엥? 왜?”
“왜기는 소림 제자가 되었으니까 그렇지.”
“이런…….”
위지백은 퍼뜩 고개를 치켜들었다. 생각지 못한 말을 들은 듯했다. 소명은 위지백의 놀란 눈길에 뭘 당연한 것을 묻냐는 듯이 태연하게 대꾸했다. 피식 웃는 모습에 위지백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졌다. 난감한 기색이 솔직했다. 물론 소명은 신경 쓰지 않았다.
소명은 아침 공양을 챙겼다. 그가 공양을 취하는 모습을 보자니 주변 승인들은 눈을 휘둥그레 해졌다.
수북하게 쌓인 것은 밥알이요, 못지않게 쌓인 것은 만두라. 장정 서넛이 달려들어도 어찌 못할 양을 소명은 마다치 않고 죄 먹어치웠다. 꾸역꾸역 먹는 모습에 기가 질릴 지경이었다. 앞에 앉은 위지백이나, 법현이나 질린 얼굴을 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뭐라 말하지는 않았다. 소명의 일과가 얼마나 빡빡한지 잘 아는 참이었다.
순식간에 어마어마한 양의 공양을 깨끗하게 비운 소명은 채 트림 한번 할 겨를도 없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소명은 불현듯 위지백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말은 없었다. 그저 눈길만으로도 충분했다.
외면하는 듯했던 위지백은 맥아리 없는 한숨을 토했다.
“하아, 아, 알았어. 알았다고. 제대로 하면 될 것 아니냐.”
눈에 날을 세우고 노려볼 것은 또 무어란가, 무슨 의미인지 위지백은 잘 알았다. 아주 잘 알았다. 지객당의 담벼락을 아작 내어 버린 죄과로 소림사의 오래된 전각이나, 담장 등, 보수를 돕게 생긴 것이었다. 꾀부리지 말라고 저리 노려보는 것이다.
위지백은 구시렁거리며 쿵쿵 성난 걸음으로 자리를 나섰다. 뒷모습까지 내내 노려보던 소명은 이내 히죽 웃었다. 강압했다고는 하지만 위지백은 제 입으로 내뱉은 말은 반드시 지키는 서장의 사내였다.
저리 말했으니 소림사도 이번 겨울에 제법 멀끔해질 터였다. 그리고 소명은 약왕전으로 향했다. 닿으니 다들 반가이 맞이했다.
“소명 시주, 이거 면목없습니다. 하하.”
“별말씀을요, 오늘은 다른 약재 창고를 정리하지요.”
“감사합니다, 아미타불.”
“그런 말씀 마십시오.”
소명은 합장하며 고개를 숙였다.
법수는 입으로 면목없다 말하면서도 눈이 웃고 있었다. 흐뭇한 것이었다. 두고두고 처리 못한 일들이 소명의 손에 들어가면 뚝딱하고 말끔하게 끝맺음이 되니, 일단은 약왕전 일의 제반 사항을 관리하는 법수의 입장에서는 이보다 좋은 일꾼이 달리 없었다.
아울러 법수는 손을 멈추고 있는 사제들을 타박했다.
“이놈들아, 어디서 딴짓이냐! 소명 시주도 저렇게 쉴 틈 없이 일하시는데!”
“잠깐 숨 돌리는 것뿐입니다. 너무 하십니다, 법수 사형.”
어린 사제들이 볼멘 목소리로 항변해 보지만 씨도 먹히지 않았다.
“시끄럿! 어서 일해, 일!”
법수는 마치 파리라도 쫓듯이 휘휘 손을 휘저었다. 그의 재촉에 약왕전 제자들은 닷 발이나 입술을 내민 채 흩어졌다. 그런 와중에도 환자는 하나둘 계속해서 들어왔다. 언제나 병을 호소하는 사람들로 넘쳐나는 곳이 여기 약왕전이었다.
또 다른 창고 앞에서 소명은 분주하게 손을 움직였다. 그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 수풀을 헤치며 보정 노선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소명은 그의 등장에 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흩어진 약초 가루로 지저분한 옷자락을 털어내고는 합장하며 고개를 숙였다. 보정은 짐짓 이맛살을 찌푸렸다.
“사조 어른.”
“그 사조 소리 좀 치워라.”
“그래도 저에게는 사조 어른 아니십니까?”
“객쩍은 소리 말고 하던 일이나 계속하려무나.”
보정은 손을 휘휘 흔들었다. 소명은 싱긋 웃고 고개를 돌렸다. 오늘 일은 묶은 약초들을 정리하는 일이었다. 잘 말린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구분했다. 소명은 눈과, 코, 그리고 촉감을 모두 동원했다. 또 다른 약고 한쪽을 가득 메운 약재를 정리하는 데에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보정은 물끄러미 보고 있다가 곧 소맷자락을 뒤적거렸다. 호리병 하나였다. 마개를 여는 순간 맑은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진한 술 냄새가 일어났다.
“거, 향 한번 좋을시고.”
중얼거린 보정은 가만히 병을 기울이며 홀짝이기 시작했다. 이 또한 위지백에게서 강탈하다시피 받아온 호리병이었다. 그리고 마치 가락을 맞추듯이 어느 경문을 읊어 갔다.
“淨極光通達, 寂照含虛空, 却來觀世間, 猶如夢中事…….”
뜬금없으니, 뜻도 의미도 알 길 없었다. 소명은 잠시 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보정은 취기가 오르는 듯 살짝 달은 눈으로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경문을 읊기를 멈추지 않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보정은 소리를 멈추고 새삼 벌게진 눈으로 소명을 바라보았다. 불과 사나흘 만에 다섯 창고를 죄 정리해 놓았고 지난가을 내내 채약당 제자들이 부지런히 쌓아 놓기만 한 약재들마저 깔끔하게 정리했다.
든든한 일꾼이 따로 없었다. 보정은 옛적 약왕전에 머물 때를 생각하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때에는 장우상이 있었고 또 그의 제자들이 있었으며, 사형제들이 있었다.
‘허허허. 세이야, 세월.’
그는 소리 없이 읊조렸다.
한참 후에 소명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응?”
계속해서 이어질 듯하던 보정 선사의 경소리가 어느 틈엔가 끝이 난 것이었다. 퍼뜩 고개를 돌리자 보정이 앉았던 자리에는 마른 수풀만이 남아 좌우로 흔들거리고 있었다.
“이런, 가시기 전에 언질이라도 해주시지.”
아쉬운 듯이 중얼거렸다. 그는 흘깃 눈을 들었다. 해가 중천에 떠있었다. 일에 너무 집중했던 것이다.
“헉! 늦었다!”
소명은 화들짝 놀라 자리를 박찼다. 그는 일심정을 향해 달렸다. 아침 공양을 산더미만큼 먹어치운 이유이기도 했다. 달리는 내내 소명의 귓전에는 보정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두서없이 읊어 가던 경구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