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ti Demon God RAW novel - Chapter 85
85화. 하산하다
일심정의 작은 문 앞에 닿은 소명은 숨을 고르며 의복을 단정히 했다. 이후에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러자 반기는 목소리가 들렸다.
“왔는가.”
법당 처마 아래에 무자배들이 자리하여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소명은 얼굴을 붉힌 채 급히 합장해 보였다.
“제자 소명, 늦었습니다.”
“아니, 아닐세. 우리 늙은이들이 엉덩이가 가벼워 그런 게지.”
무오는 껄껄 웃었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소명이 앉을 틈도 없이 강론을 시작해 버렸다.
“나한십팔수에 대해 강론하겠네. 나한십팔수는 본사를 특히 대표하는 무공인바 그 풍모는 강건, 소박, 그리고 온후함에 있으니.”
소명은 허겁지겁 좌정하여 무오를 바라보았다. 무오는 나한십팔수의 형을 보이며 요결을 일일이 풀어냈다. 소명은 숨마저 멈추고 무오의 일거수일투족은 물론이거니와 호흡까지 훔칠 작정으로 집중했다.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았다.
나한십팔수의 강론은 단지 권로에서 끝나지 않았다. 수많은 실전요결들까지 포함했다. 무오는 열성적이었다. 소명에게 전하고자 스스로 기본공을 다시 연마하는 수고까지 감수했다. 그것은 십여 명의 다른 무자배들도 마찬가지였다.
나한십팔수 뿐만 아니라 소림오권의 각 부 기초와 더불어 소림곤, 소림내공의 근간이 되는 역근, 세수경에 대한 강론을 들었다. 그뿐만 아니라 불경의 기본으로 삼는 금강경에 대한 강론 또한 이어졌다. 문무를 모두 아울러서야 소림 공부라 할 수 있었다.
이는 소림 제자라면 누구나 거치는 과정들이었다. 본산과 속가의 차이가 없었다. 그리고 지금 소명에게는 무엇보다 필요한 요소이기도 했다.
소명은 온전치 않은 금강권을 바탕으로 수미금강권의 진체에 가까이 다가섰다. 이는 여공의 비결을 체득하여 정한 신체를 이룬 덕이었다. 이를 두고 여공이 말하기를 정여신(精如身)이라 일체의 삿됨과 바르지 않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리라 하였다. 그리하여 수미금강권과 흡사한 역량을 발휘하고 있되 정작 그 길에 어찌 올랐는지는 알지 못했다. 이는 균형이 맞지 않는 것이었다.
소명 또한 어렴풋이나마 한계를 깨닫고 있었다.
장우상의 심모원려로 금란지경처럼 내외공이 상조하는 경지에 올랐으나, 이후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으니.
지금 무자배 승인들에게 기본공을 배우는 것은, 이를테면 토양을 다시 다지는 길이었으며 또한 보다 높은 경지를 이루기 위한 발판을 새롭게 다져가는 과정이었다. 소명은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해가 중천에서 밝을 무렵에 시작된 강론이 저만치 기울 때까지 계속되었다.
“흐압! 하압!”
무오가 검은 수염자락을 날리며 세찬 진각을 밟았다. 일심정의 바랜 처마가 바르르 떨렸다. 사미들도 다 배우는 나한십팔수이며, 또 입문 이전에 공부하는 역근, 세수경이련만.
소명은 다른 세상을 보는 듯하였다. 그리고 시간은 촌음과도 같았다.
* * *
겨울이 더욱 깊어갔다. 밤새 내린 눈이 산사를 하얗게 물들였다. 눈의 무게에 잔뜩 기울었던 나뭇가지가 툭 하고 쌓인 눈을 떨어뜨렸다.
새벽 어슴푸레함이 밀려오는 가운데 둔중한 범종 소리가 울렸다. 소림사가 깨어났다. 일어난 승려들은 새벽 수련 대신에 내린 눈을 치우느라 분주했다.
소명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그는 이제 다른 승려들처럼 잿빛의 승복을 걸치고 있었다. 소림사에 머문 지 이제 석 달이었다. 초겨울에 온 것이 이제는 겨울이 깊고, 깊어 조만간에 날씨가 풀릴 듯했다.
그는 소맷자락을 걷어 올리며 하얀 경내를 둘러보았다.
“눈이 제법 내렸는데.”
“이 정도야 뭘.”
뒤따라서 위지백이 나왔다. 그 역시 승복 차림이었다. 그런데 그는 홑옷이나 다름없었다. 누비옷을 껴입고도 추위에 부르르 몸을 떠는 다른 승인들과 달랐다. 위지백은 일 년, 열두 달 중에 눈 없는 날이 더욱 드문 서장 출신이니 여기서는 혹독하다 하는 칼바람도 그에게는 그저 부는 바람에 지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승인들이 모인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눈을 치우는 도구를 챙겼다. 때마침 법현이 다가왔다.
“두 분 시주, 일어나셨습니까.”
말할 때마다 입에서 하얀 김이 일었다. 그는 히죽 웃었다.
“하하, 아침 공양은 꽤나 늦어지겠습니다.”
“나한당도 눈을 치우는 데에 고생이겠습니다.”
“저희야 뭐, 하하하.”
소명의 말에 법현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는 슬쩍 두 사람에게 말을 건넸다.
“좀 도와주십시오. 소명 시주, 위지 시주.”
“어허, 법현 사형. 그렇게 나오깁니까?”
따지는 목소리가 뒷덜미를 잡아챘다. 법현이 움찔해 고개를 돌리니 턱 어림에 거뭇한 수염이 자란 젊은 승인이 도끼눈을 뜬 채 노려보고 있었다. 달마원의 법각(法刻)이었다.
“저번에 큰 눈이 내렸을 때에도 나한당이 도움을 받지 않았습니까?”
“그야.”
“이번에는 달마원을 도와주셔야지요.”
“아니, 법각. 여기 두 분 시주가.”
“치사하게 이러깁니까?”
“치사하다니.”
법현과 법각이 서로 아옹다옹할 새, 소명과 위지백은 마주 보더니 숨죽여 자리를 피했다. 확실히 두 사람이 눈 치우는 솜씨는 다른 승인들에 비할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간결했고 빨랐다. 후다닥 빗자루질을 하여 묵직하게 쌓인 눈을 좌우로 쓸었다. 아무리 깊이 내린 눈도 두 사람의 힘찬 빗자루질에는 버티지를 못했다. 그리하고 나면 동산만큼 쌓인 눈을 삽으로 퍼서 담 밖으로 던졌다. 남은 흔적은 볼이 발간 어린 사미들이 쓸어내는 것으로 충분했다.
소명과 위지백은 손발이 척척 맞았다. 비단 나한당이나 달마원 만이 아니고 다른 곳의 승인들도 도움을 청했다. 느지막이 고개를 내민 햇살이 높아질 때까지 경내의 곳곳에서 쌓인 눈을 치우는 빗자루 소리가 들렸다.
늦은 겨울, 산사의 풍경이었다.
어느 정도 눈을 치우고 난 후에 아침 공양을 늦게 챙기고 각자 맡은 일을 하러 흩어졌다. 여전히 소명의 공양은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그러나 이제 놀라는 사람은 없었다.
아마도 소림사에서 가장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은 소명일 터였다. 주로 약왕전의 일을 도왔지만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도와달라는 말이 오면 싫은 내색 없이 일을 도왔다.
소명은 약왕전으로 향했고 위지백은 사찰을 개보수하는 곳으로 가서 일을 도왔다.
약왕전에서도 눈을 치우는 것은 큰일이었다. 이만큼 눈이 내렸으니 산을 오르내리기도 힘들련만 그 눈을 뚫고 온 환자들이 하나둘이 아니었다. 본래 의술을 행하는 곳이 그러했다. 일을 아무리 해도 줄어들지가 않았다. 소명 정도 되는 일꾼이 있으니 약왕전의 다른 승인들은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리고 소명이 한참 일에 열중할 때면 어디선가 보정이 나타나서는 일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는 했다. 그리고 어디서 구하는 지, 술병 하나를 꺼내 들었다. 어김이 없었다. 그는 술병을 기울이며 기이한 경문을 계속해서 읊었다. 하루도 빠짐이 없었다. 소명은 그러려니 하였고, 보정 또한 경문에 대하여 말하는 일은 없었다.
한참 후에야 소명은 보정이 읊은 경문이 ‘능엄경(楞嚴經)’이라는 불경임을 알았다. 이를 법현에게 부탁하여 구해 읽어 볼 수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광목천 빨래에 한참 열중하던 소명은 흘깃 고개를 들었다.
보정이 볕 좋은 곳에 앉은 채 좌우로 고개를 까딱거리며 경전을 읊고 있었다. 그 온화한 표정을 보고 있자니, 소명은 절로 푸근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보정의 앞에 마주 앉아서 그의 경소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오래지 않아 보정이 눈을 떴다. 그는 마주 앉은 소명의 모습에 물었다.
“어이해 손을 멈추느냐? 시간이 그리되었더냐?”
“예, 사조.”
“허허, 그렇구나. 오늘이 어린 것들에게 배우는 마지막 날이렷다?”
“하하.”
어린 것들이라 칭하는 사람들이 무자배 노승이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보정은 자리에서 사뿐히 일어섰다. 그리고는 온다간다는 말도 없이 또 모습을 감추었다.
매일 있는 일이었다. 소명은 그저 사라진 곳을 향해서 합장할 따름이었다. 그는 곧 주변을 정리하고 일심정으로 향했다. 소림 기본공의 강론을 듣기 위함이었다.
“오늘이 마지막이로군.”
“예, 선사.”
무오가 아쉬운 듯이 말했다. 단지 기본공을 전하였을 뿐이건만 그 사이에 무오를 비롯한 무자배들이 얻은 성취는 지금의 소명보다 더욱 컸다. 바탕을 다시금 다진 덕분이었을까.
그러한 시간이 이제 끝이라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무오는 곧 자리에서 일어나 강론을 시작했다.
“자, 오늘은 지금까지 배웠던 것을 다시 돌이켜 보세나. 나한십팔수와 소림오권의 다섯 가지 권법은 금강권과 함께 소림 무공의 바탕일세. 이는…….”
소명은 무오의 강론에 더욱 집중했다.
어느 틈에 사위가 어둑했다. 산사 초입에서 울리는 범종 소리가 은은히 들려왔다. 무오를 끝으로 강론을 마쳤다. 장장 한 계절 동안 이어온 소림 무학의 강론이 모두 끝난 것이었다. 자리한 무자배들은 소명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소명은 자리를 지킨 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두 눈을 감은 채 좌정해 있었다. 호흡은 끊긴 듯했다. 그러나 자리한 승인들은 조급해하지 않고 소명을 바라보았다.
가부좌를 취한 소명의 몸이 가만히 흔들렸다. 아마도 깊은 심상 속에서 배우고 익힌 바를 행하고 있을 터였다. 그러한즉 시간이 얼마나 흐르던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승인들 역시 좌정한 채 선정에 들었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소명의 눈앞으로 수많은 동작과 문장들이 어지럽게 뒤엉켰다. 지금까지 배운 나한십팔수 삼십팔식, 소림오권의 다섯 가지 권법, 역근, 세수경의 요결 등등, 심지어 금강경의 경문이 맴돌기도 했다.
석 달이라는 시간 동안 쉴 틈 없이 배운 소림 공부의 기본, 그 전부가 일순간 눈앞에 확 펼쳐졌다. 그리고 소명은 하나의 길을 발견했다.
‘이것은 금강, 금강권. 그렇구나!’
마치 다른 눈이 트인 듯했다. 소명은 그 길을 천천히 되짚어 나갔다. 결국 다시 발견한 것은 금강권이었다. 고신정립, 정법권운, 나한소사, 법륜무애 등등.
이제 소명은 이해할 수 있었다. 금강권의 금강포추, 그 일초에 백보권이 있었다. 심상 속에서 소명은 금강포추를 펼쳐갔다. 크게 발을 구르는 것과 동시에 진력이 솟구쳤다. 허리가 돌아가며 진력은 중단에서 속도를 더했다. 그리고 촌음 만에 활시위처럼 한껏 당긴 주먹의 권심(拳心)에 맺혔다.
그 위력을 감지하며 소명은 일순 깨달았다.
지금까지의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백보권이 아니었다. 공전무융의 내단을 통해서 체득한 권공에 지나지 않았다.
‘이것이 백보권이다!’
심상의 일권을 내지르며 소명은 깨어났다.
소명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벼락이 관통하는 듯했다.
“하.”
짧은 숨을 토하며 눈을 떴다. 삼매에서 깨어난 그는 고개를 드는 순간 흠칫 당황했다. 주변에 같이 선정에 든 승인들의 모습 때문이었다. 마치 호법이라도 서듯이 둥글게 앉아 있지 않은가, 황망하여 일시에 말을 잊지 못하고 있는데 먼저 무오의 눈이 열렸다. 그는 흐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염화시중(拈華示衆)이라. 일심정, 이 자리에서 작은 깨우침을 얻은 이후 무오는 강맹일도의 기세를 잊어 가고 훈풍처럼 유해지고 있었다. 검은 수염 아래에 맺힌 가만한 미소가 그의 수양을 절로 드러내고 있었다. 무오는 나직이 물었다.
“성취가 있으셨는가?”
소명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깊이 허리를 숙였다.
“예, 제자 미흡하나 약간의 성취를 얻었습니다.”
“좋구먼.”
무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든 소명의 눈에는 전과 다른 총지가 어려 있었다. 그것이 완성이라는 단계를 향해 나아가는 무자(武者)의 눈임을, 이제 무오도 알 수 있었다.
소명은 지체 없이 그가 득한 바를 전했다. 그것은 진정 백보권에 이르는 길이었다. 자리한 무자배 승인들은 행여나 숨소리가 방해될까 싶을 정도로 지극한 고요 속에서 소명에게 집중했다.
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듣는 순간에 깨닫는 바가 있었다. 백보권이라는 것을 단순히 하나의 무공이라 생각했던 것이 잘못이었다. 이는 권경, 권풍, 권와, 권붕과 같은 권법의 경지나 다름없었다.
‘당년 백학선사께서 솟구친 일진의 경력을 내쳐, 오십여 보 바깥의 비석을 부수었다 하였는데. 이제는 이해할 수 있겠구나.’
그는 문득 고개를 돌렸다. 슬쩍 일심정의 법당 안을 둘러본 그는 해연히 놀랐다. 눈썹이 아직 거뭇한 무오는 물론이거니와 모든 무자배 승인들이 무섭게 집중한 얼굴로 소명의 한 마디, 한 마디를 놓칠세라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둘러보던 무수는 순간 흡 하고 눈을 치떴다. 가장 뒷자리에 방장이 슬쩍 끼어 앉아서는 다른 승인들처럼 소명의 말에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허, 허허. 마치 사미 시절로 돌아간 듯하구나.’
새삼 생각하니 흥이 올라 절로 웃음을 머금었다. 돌연 생각하니, 어리고 어린 시절 사형제들이 모여 스승의 말씀 한 자라도 놓칠세라 귀담던 때로 고스란히 돌아간 듯했다. 무수는 열심히 설명하는 소명의 모습을 다시 바라보았다.
‘진정 소림의 홍복이로다. 홍복이야. 아미타불.’
그날, 소림사에 백보권이 돌아왔다.
* * *
이른 아침, 겨울 무렵이니 때는 새벽이나 아직 하늘은 어두웠다. 소명은 선방을 나섰다.
문 앞의 마당에는 위지백이 앞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는 홑옷 한 장 걸친 채 신중한 얼굴로 도법을 펼쳤다. 도갑을 씌운 채 움직이는 무광도의 궤적은 무겁게 어둔 공기를 갈랐다. 그는 일체의 내력 없이 근력으로만 도법을 펼쳐 갔다. 그러다 문득 소명의 기척에 도법을 멈췄다. 그는 후, 짧은 숨을 토하며 무광도를 어깨에 걸쳤다.
“이야, 덥다, 더워.”
한겨울은 지났다지만 이는 바람은 아직 살을 에어 낼 듯한데, 위지백은 홑옷 자락을 연신 펄럭거렸다.
“일어났냐?”
“웬일로 부지런이야?”
“오늘 동인방이라는 곳에 도전한다면서.”
“그런데?”
“몸이나 풀자.”
위지백이 웃으며 말했다. 웃는 입매 위로 두 눈에서 형형한 빛을 뿌렸다. 끓는 투지를 감추지 않았다. 소명은 물끄러미 마주하다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
“후회 안 하겠냐?”
“후회는 무슨, 오늘이야말로 네놈에게 도법의 위력을 알려 주마.”
“허, 참.”
소명은 별소리를 다 듣겠다는 듯이 혀를 찼다. 그러면서도 걸친 장삼을 벗어 한쪽에 걸쳐 놓았다. 그는 마당에 내려서며 소매를 차분히 걷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