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ti Demon God RAW novel - Chapter 89
89화. 살풍경한 재회
“뭐 이렇게 오래 걸려!”
“하하, 겸사겸사.”
소명은 싱긋 웃었다. 전보다 밝은 모습이었다. 흉중의 어둠을 한 조각 털어낸 듯했다. 가벼운 걸음으로 내려온 소명은 위지백의 어깨를 툭 치고는 말했다.
“가자.”
위지백은 잠시 앉아서 소명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입가를 삐죽이며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젠장, 저 자식 예전보다 더 골치 아파졌잖아.”
고작 십여 보 안쪽에 들어서고서야 소명의 기척을 감지했다. 나름 기감을 세우고 있었음에도 그러했다. 위지백은 미간에 깊은 골을 만든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위지백과 잠시 눈을 마주했던 젊은 사내는 급한 걸음으로 망산 산길을 올랐다. 그는 주변에 늘어선 묘비, 묘석들을 빠른 눈으로 훑어갔다.
고요해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묘비를 살피는 눈동자는 조급한 듯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묘 앞에 우뚝 멈춰 섰다. 그 묘는 아무런 표시도 없는 묘였다.
“드디어…….”
내내 침착하게 가장했던 표정이 한순간에 무너졌다.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러나 얼굴은 이내 의혹으로 굳어졌다.
눈 쌓인 다른 묘역과 달리 이곳은 말끔했다. 눈은 물론 잡초 하나 없었다. 그리고 거의 다 타들어가는 향 자루와 한 잔의 술잔이 있었다. 향냄새가 무덤 주변을 배회했다. 불과 얼마 전에 누군가 왔다 간 모습이었다.
굳어 있던 그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급히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누, 누가?”
이곳을 찾기 위해 꽤나 고생을 해야 했다. 가문의 눈과 귀를 피해 가며 일대를 샅샅이 뒤져 기어코 이곳을 찾았다.
그런데 선객(先客)이 있다니, 쉽게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퍼뜩 고개를 치켜들었다.
망산을 오를 때, 멀리서 마주했던 한 사내의 모습을 번쩍 떠올랐다. 다른 산길 초입의 바위 위에 앉아 죽통을 기울이던 사내였다. 먼 길을 왔는지 마른 죽립을 목 뒤로 넘기고 방풍의를 걸치고 있었다.
그는 서둘러 높은 곳으로 올랐다. 비호(飛虎)처럼 날랜 동작이었다. 일시에 보인 보신경의 조합은 그가 이미 무경에 가까운 고수라는 것을 드러냈다.
순식간에 마른 가지 위에 올라선 그는 동서남북을 서둘러 둘러보았다. 그러나 어디에도 인적은 없었다. 이는 찬바람만 쓸쓸히 울고 있었다.
“대체…….”
그는 한참이나 자리를 떠날 줄 몰랐다.
인적이라고는 찾을 길 없는 망산 어귀, 둘러보는 그의 눈길은 혼란함으로 가득했다. 문득 바람이 멎어 무덤 앞에 꽂아놓은 굵은 향 자루에서 보랏빛 향연이 솔솔 피어올랐다. 그 위로 하늘이 이제 붉어지고 있었다.
* * *
망산을 내려온 소명은 상화촌으로 발길을 돌렸다. 서두르지 않고 느릿한 걸음으로 나아간 탓에 마을 어귀에 닿았을 무렵에는 땅거미가 짙게 깔렸다. 옹기종기 모인 가옥에는 따뜻한 불빛이 아른거렸다. 문득 위지백이 물었다.
“아니, 들릴 셈이야?”
“뭐, 굳이.”
소명은 담담한 어조로 답했다. 그는 어느 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높이 자란 삼나무 아래의 큰집, 호가무관이었다. 그곳은 상화촌 어느 집보다 불을 환히 밝히고 있었다. 언덕 어림에 선 소명은 무관 내부의 전경을 훤히 볼 수 있었다. 높이 세운 담 너머로 저녁 무련을 행하는 소리가 힘차게 울려퍼 졌다.
“흐압! 하압!”
마치 어린 시절, 호가무관의 모습을 다시 보는 듯했다. 쇠락해 가던 모습은 간데없었다. 앞마당 가득, 청년들이 열 지어서 권련을 행했다. 그 사이로 느릿하게 걸으며 한마디씩 호통치는 호 관주의 모습이 보였다.
“수안상수(手眼相隨), 수도안도(手到眼到)라 했다. 손과 눈이 따르고, 손이 이르면 눈 또한 이르러야 한다. 되는 대로 휘둘러서는 무련이 아니다!”
“예, 관주!”
“다시!”
“흐압!”
호통 소리에 제자들의 힘찬 기합성이 시원시원하게 울려 퍼졌다.
“하, 하하하.”
가만히 바라보던 소명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자리를 털고 일어선 호 관주의 모습은 옛적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엄사(嚴師)의 건재함을 눈으로 확인하니 가슴이 벅찼다.
위지백은 한참이나 자리를 지킨 채 바라만 보고 있는 소명의 모습이 영 마뜩잖았다. 무련은 다 끝나고 무관 마당에 남은 사람도 없건만 소명은 움직일 줄을 몰랐다. 이러다가는 날 샐 때까지 이리 있어야 할 듯싶었다. 참다못해 버럭 소리쳤다.
“그것참, 청승은. 아,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야!”
소명은 흘깃 고개를 돌렸다. 날이 한참 저물었음을 이제야 깨달은 모양이었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나?”
“에효, 저 빌어먹을 인사.”
소명의 담담한 어조에 위지백은 고개를 흔들었다. 저리 나오니 얼굴 붉힌 쪽이 한심해질 따름이었다. 축 늘어지는 위지백의 모습에 소명은 짧은 웃음을 흘렸다. 돌아서던 그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무관에 눈길을 주었다.
‘다음에는 꼭 찾아뵙겠습니다, 관주님.’
그리고 발걸음을 돌렸다. 소명은 불평하는 위지백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가자!”
“끅! 아니, 이 인간이!”
두 사람은 불평하며 자리를 옮겼다. 상화촌 외곽에 면해 있는 어느 공터였다. 본래 소명의 집이 있던 그 자리였다. 그곳에 작은 불을 피워 놓고 준비한 먹을거리를 늘어놓았다. 위지백은 잘도 먹고 마시면서도 불평불만 늘어놓기를 멈추지 않았다.
“야, 마을까지 들어와서는 풍찬노숙(風餐露宿)이라니. 이거 너무한 거 아니냐. 어디 빈방이라도 하나 빌리면 될걸.”
“그것 참 말 많네. 그렇게 떠들 거면 먹지 마, 먹지 마.”
“아니, 누가 안 먹는데!”
채가려는 소명의 손을 피해서 위지백이 허겁지겁 움직였다. 두 사람이 다투는 손 그림자가 어지럽게 흔들렸다.
상화촌의 어두운 거리에 두 인영이 두 마리의 말을 끌고 천천히 걷고 있었다. 두 사람은 꽤나 먼 길을 온 듯한 모습이었다. 먼지를 수북하게 뒤집어쓴 채 상당히 초췌했다.
한 명은 남색 경장 차림의 젊은 사내였다. 한 손에는 두 마리의 말고삐를 쥐고 다른 손에는 고풍스러운 문양의 검 한 자루를 들고 있었다. 지친 기색이었지만 두 눈에는 고요한 정기가 머물러 있었다. 다른 한 명은 여인이었다. 그러나 외모는 보이지 않았다. 녹색의 기이한 가면으로 얼굴의 반을 가린 까닭이었다. 드러난 두 눈은 상화촌의 전경을 빠르게 훑어갔다. 사내는 그런 여인의 눈치를 살피며 뒤를 따라서 걸었다. 한참 만에야 그는 조심스레 물었다.
“저, 당 소저. 이곳에는 대체 어떤 사연으로 오신 겁니까?”
“…….”
그러나 당 소저라 불린 여인은 묵묵부답이었다. 가면 아래 붉은 입술은 열리지 않았다. 말을 꺼냈던 사내는 그녀의 무반응에 민망했던지 슬쩍 헛기침을 흘렸다.
‘허, 참. 천하의 남궁유가 이렇게 쩔쩔맬 줄이야.’
그는 쓴웃음을 흘렸다.
남궁유라 하면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관중일대에 무명을 떨친바, 약관의 나이에 절정경에 근접하여 관중검(關中劍)이라 불리는 젊은 고수였다.
더구나 무가련을 이끌어가는 세가 중 하나인 안휘남궁(安徽南宮)의 직계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이름은 눈앞의 여인에게는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남궁유는 쓴웃음을 거두었다. 한참을 걷던 여인의 걸음이 멈췄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어느 폐가 앞에 섰다. 그곳은 발길이 끊긴 지 족히 수년은 지난 듯했다. 가면 사이로 드러난 여인의 두 눈에 깊은 파랑이 일었다.
“하아.”
오래 침묵하고 있던 그녀에게서 짧은 한숨이 흘렀다. 그 소리에 남궁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먼 길을 동행하는 동안에 단 한 차례도 입을 열지 않았던 여인이었다.
‘이상한데, 당 소저가 하북의 이런 벽촌에 대체 무슨 연고가 있다는 건가?’
그로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나서서 묻기에도 뭐한 일이라 남궁유는 그저 투레질하는 말 두 마리를 달래며 여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여인은 상화촌의 이곳저곳을 말없이 걸었다. 남궁유에게는 딱히 볼 것 없는 궁벽한 벽촌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녀에게는 다른 의미가 있는 듯했다.
남궁유는 난감했다. 본래는 낙양에 처소를 마련해 두었던 참이었다. 그런데 여인이 일언반구(一言半句)도 없이 이곳으로 말머리를 돌리는 바람에 도리 없이 남궁유마저 뒤를 따르게 된 참이었다. 설마하니 이렇게 밤바람을 맞이하며 돌아다니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앞서 걷던 그녀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남궁 공자께서 괜한 수고를 하시는군요.”
기괴한 가면 사이로 흘러나오는 그녀의 목소리는 옥음이라 하여도 부족하지 않을 정도였다. 잠시 딴생각을 하고 있던 남궁유는 화들짝 놀라며 급히 손을 흔들었다.
“아니, 아닙니다. 당 소저. 수고는요. 하하하.”
입으로는 웃고 있지만 그의 눈은 놀란 심정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무려 석 달 만에 듣는 여인의 목소리였다. 그것도 자신을 걱정하는 말을 할 줄이야. 남궁유는 오늘 여러모로 크게 놀랐다. 더구나 이런 옥음이라니. 여인의 진면목을 알고 있는 남궁유였다. 순간적이나마 그녀의 얼굴이 선명히 떠오르며 가슴이 흔들렸다.
‘이게 무슨 추태냐, 남궁유!’
그는 자신을 다그쳤다. 애써 심중을 수습했다. 당씨 여인은 이내 고개를 돌린 뒤였다. 남궁유는 그녀 몰래 조심스레 숨을 뱉었다.
그녀는 이제 마을 외곽으로 향해 걸었다. 남궁유는 그녀가 이제야 돌아갈 마음을 먹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불현듯 그녀의 걸음이 멈칫했다.
“당 소저?”
의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신중한 눈길로 어느 한 곳을 뚫어지라 노려보았다. 눈길이 심상치 않았다.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습이 이상스러웠다. 뭔가 혼란스러워하는 듯했다.
얼굴의 반을 가린 가면 아래 붉은 입술이 뭐라 읊조렸다.
“설마, 그럴 리가. 아니야.”
여인은 설레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다가 문득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녀는 퍼뜩 고개를 치켜들었다. 서늘한 안광이 번쩍였다. 그녀는 싸늘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확인해 보면 되겠지.”
강한 어조에 남궁유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그가 막 뭐라 입을 열려는 순간, 그녀가 두 손목을 크게 휘돌았다. 녹삼의 소매가 파라락 휘감겼다. 그리고 두 손을 번갈아 떨쳤다. 은빛이 번쩍였다. 돌연한 일에 남궁유는 반사적으로 검 자루를 움켜쥐었다. 여인이 손을 썼을 때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였다. 그 순간, 어두운 수풀 너머에서 당황한 비명이 터졌다.
“우어억! 이게 무슨!”
“으허허헛!”
여인은 동시에 땅을 박찼다. 녹삼자락이 거칠게 펄럭였다. 남궁유는 부랴부랴 그녀의 뒤를 쫓았다.
“흐압!”
여인은 일성을 터뜨리며 두 손을 연이어 떨쳤다. 비침이 계속해서 쏟아졌다. 그녀의 손속은 단호했다. 뛰어든 장소는 수풀 너머의 어느 공터였다. 모닥불 하나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 앞에 두 사내가 있었는데, 그들은 여인이 쏘아대는 비침을 피하기 급급했다. 남궁유로서는 모를 상황이었지만 그는 여인을 돕기로 작정한 참이었다.
“차합!”
시원스런 일성을 뽑아내며 남궁유는 발검했다. 뽑혀 나오는 일직선의 검신에 무지갯빛이 일었다. 발끝으로 가볍게 땅을 찍었다. 신형이 솟구치며 그는 사내들에게 덮쳐들었다. 엄습해오는 싸늘한 예기에 정신없이 물러서던 두 사내는 흠칫하며 어깨를 들썩였다. 고개 든 얼굴이 심상치 않았다.
“뭐야, 이 자식은!”
거친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한 사내가 도갑 채 휘둘러 남궁유의 검격을 맞받았다.
철컹! 차라라랑!
수레바퀴처럼 휘몰아치는 검격에 도갑은 우뚝 솟아서 모든 충격을 받아냈다.
“허!”
남궁유는 탄성인지 한숨인지 모를 소리를 내뱉으며 훌쩍 물러섰다. 그는 검날을 곧추세웠다. 검을 든 손이 반발력으로 인해 저려왔다.
‘운롱월인(雲籠月刃)을 이리 무식하게!’
불명의 상대가 가문의 절기, 창궁검법을 듣도 보도 못한 과격한 방법으로 감당해낸 것이다.
남궁유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터무니없는 상대를 건드린 듯했다. 그 사이에 여인과 다른 사내의 사정은 점점 격화일로를 향해가고 있었다. 녹의 여인이 소매를 연이어 떨칠 때마다 극히 은밀한 번뜩임이 일었다. 끝없이 쏟아지는 비침의 물결이었다. 그에 마주한 사내는 두 발은 멈춰선 채 오직 두 손으로 여인의 비침을 모두 상대했다. 낚아채고, 떨쳐서, 떨어뜨렸다. 비침들이 바닥에 떨어지며 반짝거렸다.
그러나 남궁유는 한눈팔 새가 없었다. 마주하고 있던 도객이 칼자루를 덥석 움켜쥐었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이는 기세가 전혀 달라졌다.
“흐, 흐흐흐.”
나직이 흘리는 괴소가 사뭇 음흉스러웠다. 남궁유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만한 기세를 품은 도객이라면 결코 무명소졸은 아닐 터였다. 결코 삿된 기세가 아니었다.
‘대체?’
“어디서 굴러먹던 놈인지 모르겠지만, 이 몸에게 먼저 칼을 들이댔으니 죽어도 할 말은 없겠지?”
“…….”
남궁유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런 말 따위에 흔들릴 관중검이 아니다. 그는 마치 배례하듯이 검면을 눈앞에 곧게 세웠다. 동자배불(童子拜佛), 이는 검법을 대표하는 예의 중 하나로 후배가 선배에게 가르침을 청할 때 보이는 예법이었다. 이를 취했다함은 곧 상대를 자신보다 고수로 인정하였다는 뜻이었다.
도객은 그 모습에 입매를 비틀어 올렸다. 그리고 발도하여 베어 버리려던 생각을 접어 두고 천천히 도를 뽑아 갔다. 스르릉.
나직이 울리는 칼날은 심상치 않았다. 그것은 얼핏 드러난 부분만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안휘남궁의 남궁유라 하오.”
“하하, 이제와 통성명이라니 정말 웃기는 종자일세.”
“귀하, 명호는?”
사내의 면박에도 남궁유는 낯빛 하나 달리하지 않고 재차 물었다. 그러자 사내는 칼을 마저 뽑았다. 치링 하는 소리와 함께 범상치 않은 도광이 남궁유의 눈을 어지럽혔다.
‘저런 보도라니!’
사내는 뽑아든 칼을 목 뒤에 턱 하니 걸치며 턱을 치켜들었다.
“위지백.”
짧고 굵은 한마디였다. 이름 석 자 위지백, 그러나 남궁유의 머릿속은 바삐 돌아갔다.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천하에 알려진 위지백이라는 이름은 달리 없었다.
“서장제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