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ti Demon God RAW novel - Chapter 99
99화. 낙양에 저무는 달
촌각의 시간이 지났을 뿐인데, 궁 서생이라고 불렸던 사람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사람이었던 흔적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사내는 책상머리에 머리를 기대고서는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어찌 보자면 피곤해하는 듯 보이기도 했다.
“어떻게, 보고하오리까?”
피투성이가 된 공노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하얀 수염이 젖어서는 핏물 뚝뚝 떨어지는 몰골이 사뭇 기괴했다. 공노는 다른 이들과 달리 전혀 공경의 기색이 없었다. 말하는 것도 마치 귀찮다는 투였다. 사내는 슬쩍 눈을 떴다. 그는 눈살 찡그린 노인의 모습에 쯧! 혀를 찼다.
“죽을 날 앞둔 노인네가 건방지구나.”
“헹, 남이사.”
사내는 스산하니 살기마저 발했다. 그 또한 일세의 고수인가, 사나운 기세를 발하니 넓디넓은 대전의 피비린내 나는 공기가 일순간에 가라앉았다. 그러나 공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니 마치 들으라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그는 유달리 길게 자란 새끼손톱으로 귓전을 벅벅 긁었다. 태연스런 모습이었다.
다른 이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사내의 위세에 몸을 움츠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그들의 주인이나, 여기 노인이나 허구한 날 이리 툭탁거려 왔으니. 가운데 끼면 오히려 피곤한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사내는 찌뿌둥하니 오만상을 쓰며 몸을 일으켰다.
“육시랄 늙은이 같으니.”
대뜸 험한 소리를 내뱉었다. 귀공자다운 모습을 하고서는 시정잡배나 할 법한 거친 말투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책상 위에 서안을 냅다 걷어차고는 턱 하니 올라앉았다. 머리에 꽂은 금장용잠을 뽑았다. 깔끔하게 틀어 올렸던 머리카락을 귀찮다는 듯이 대충 흩어 산발을 했다.
“어서 씨부려 봐.”
“그럽죠.”
노인은 냉큼 말을 이었다. 그는 드러난 혈맥 관절을 하나하나 집어가며 말했다. 설명이 줄줄이 이어지는데, 지금이 사체를 검안한 결과를 보고하는 자리인지, 아니면 그에 대한 강론을 듣는 자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누구도 불만을 말하지 않았다. 공노의 말을 막으면 얘기가 훨씬 더 길어진다는 것을 다 아는 까닭이었다.
사내 역시 오만상을 쓰면서도 공노의 말을 막지 않았다. 그리고 장장 두어각 동안 이어진 강론이 끝났다.
“그렇게 된 거요.”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뭐 심장 터져 죽었다는 말이지.”
“그렇군. 공노, 그대가 모르는 이종진기가 있단 말이지.”
“아니, 얘기가 왜 그리로 가.”
사내가 툭 던진 말에 공노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구시렁거렸다. 그렇지만 더 말하지는 못했다. 파악할 수 없었기에 말이 길어진 것이 사실이었다. 사내는 손바닥으로 무릎을 쫙 때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아, 낙수부주마저 죽은 마당에 미련 둘 것 없고,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겠지. 하남 거점은 실패, 당분간은 지켜만 보도록.”
수하들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사내는 사자의 갈기처럼 크게 산발한 머리카락을 벅벅 긁었다.
“그것참 귀찮은 일이야, 설마하니 이 몸이 백가의 싸가지 없는 놈처럼 실패할 줄은 생각도 못했는데 말이야. 괜히 아까운 수족만 잃었군.”
“어쩌실 거요?”
“뭐가?”
공노가 넌지시 물었다. 수하치고는 참 불손한 태도였지만 사내는 딱히 탓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퉁명스레 되물었다.
“몰라서 묻소? 낙수부에서 벌어들이는 수입이 뚝 끊겼으니, 이제 어쩔 거냐는 말이오.”
“쳇! 왜 돈 얘기를 안 하나 했지.”
사내는 입매를 삐죽였다. 대충 넘어갈 작정이었는지 구시렁거리는 모습에 공노는 발끈했다. 낙수부에서 들어오는 돈이 곧 그의 활동 자금이기도 한 까닭이었다.
“아니, 그딴 식으로 나올 거요? 이공자!”
“아, 알았어. 알았다고. 어떻게든 메워주면 될 것 아닌가!”
“약속하시는 거요?”
공노는 눈매를 얇게 뜬 채 확인하듯이 되물었다. 사내는 짜증스레 외쳤다.
“그것 참! 천룡의 이름 앞에 번복이 있을까!”
“흐흐흐, 그럼 되었소.”
능글맞은 괴소를 흘리며 물러서는 그의 모습에 사내는 오만상을 찌푸렸다.
“하여튼, 늙을수록 음흉해져서는.”
“어쩌겠소, 이게 다 늙은이의 처세인 것을.”
“쳇, 공노. 당신이 형님의 수하였다면 채 사흘도 버티지 못했을 거야.”
“그것이 당신에게 엎드리는 이유라오, 이공자.”
“이, 이이! 하여튼 한 마디도 지지 않는군!”
사내는 크게 울컥했지만 어찌 울화를 삼켰다. 다른 이들은 그를 소천룡이라 칭하건만, 공노만큼은 끝끝내 이공자라 칭하였다. 사내는 험하게 외쳤다.
“꼴 보기 싫어! 당장 물러가라고!”
“아무렴요. 늙은 비복은 이만 물러가오이다. 이공자께서는 천세하시구랴, 크크크.”
공노는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 주변 모인 이들은 쓴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불경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지만 이들 중에 나서서 공노를 탓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비록 공노가 사내의 수하라 자처하지만 그의 배분은 까마득하게 높은 까닭이었다. 그리고 괴팍한 만큼이나 유능한 자이기도 했다.
사내는 벅벅 머리를 긁었다. 그렇지 않아도 산발한 머리카락이 더욱 치솟았다.
“이거야, 원. 뜻대로 되는 일이 없군. 본가에서는 다른 말 없나?”
“왜 없겠습니까?”
기다렸다는 듯이 한 수하가 나섰다. 사내는 떨떠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고하라는 뜻이었다. 그러자 수하는 냉큼 허리를 숙여 보이고는 소매에서 비단 친서를 꺼내 들었다.
“천룡가회(天龍家會)에서 명하기를 금년 소가회합에 참석하라 하셨습니다.”
“……빌어먹을.”
잠시 침묵하고 있던 사내는 짜증스럽다는 듯 욕지거리를 짓씹었다. 수하는 그에게 다가가 비단 친서를 전했다. 받아 든 사내는 주르륵 적힌 글자를 읽어 내렸다.
금장비단에는 용문이 새겨져 있었고, 위에는 웅혼한 필체가 적혀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의 직인, 아홉의 용이 서로 꿈틀거리는 직인은 틀림없이 천룡가회의 것이었다. 천룡의 부재 중, 세가를 이끌어나가는 천룡가회였다. 아무리 소천룡이라도 천룡가회의 명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그는 짜증스레 중얼거렸다.
“젠장, 그런 애송이들이랑 얼굴을 마주해야 한다는 말인가. 어이, 여봐들. 내가 꼭 참석해야겠어?”
“본가의 뜻이니 도리가 있겠습니까?”
“그런 시답잖은 소리나 할 셈이면 어디 가서 내 수하라 하지 말게.”
“하하하.”
수하들은 한마음으로 웃었다. 그러자 사내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아니, 이것들이. 대체 누가 상전이야?”
그때, 친서를 전한 수하가 나섰다.
“소천룡, 솔직히 말씀드리오리까?”
“내가 왜 그대들을 곁에 두겠나.”
“솔직히 말씀드리면 소천룡 또한 그 애송이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뭣이!”
사내는 진정 분노하여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당장 험악한 기세가 일었다. 그러나 자리한 이들 중 두려워하거나 고개 숙이는 자들은 없었다.
“이번 일만 하여도 그렇습니다. 섬서백가의 소가주가 실패하였듯이, 소천룡께서도 실패하지 않으셨습니까?”
“끄응.”
사내는 변명의 여지가 없어, 앓는 소리를 흘리며 다시 책상머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십여 년 동안 련의 행사에 개입하지 않은 본가입니다. 이번 기회에 천룡의 좌를 꿈꾸는 자들에게 현실을 깨워 주어야 할 필요 또한 있습니다.”
“흠, 그렇군.”
“소천룡, 이는 천룡의 위를 향한 걸음이기도 합니다.”
그는 눈을 빛내며 두 손을 단단히 맞잡았다.
“크, 알았다. 알았어.”
사내, 소천룡은 쓴웃음을 흘렸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동시에 뒤로 손을 뻗었다. 의자 팔걸이에 걸쳐놓은 청의장포가 홀연히 솟구쳐서 그의 손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는 성큼성큼 대전을 크게 걸으며 장포를 걸쳤다.
옷자락이 펄럭이며 새겨진 문양을 드러냈다. 하늘 향해 솟구치는 용문이 금실로 수놓아져 있었다. 용을 상징하는 강호문파는 하나둘이 아니었지만 하늘 향해 솟구치는 천룡백영문(天龍白影紋)은 달리 없었다. 오직 천룡세가만의 문장이었다.
자리를 벗어난 공노는 실실 경박한 웃음을 흘리며 흐느적 걸었다. 그의 뒤로는 두 비복이 사체의 흔적을 그대로 올린 들것을 들고 지나갔다. 공노가 그들을 불렀다.
“어이, 이봐.”
“예, 공 호법.”
“그 사체는 내 숙소로 옮겨놓게.”
“그리하겠습니다.”
별일 아니라는 듯이 태연한 지시에 비복들은 별생각 없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리고 공노는 느릿느릿하게 걸었다. 그는 곧 자신의 처소에 닿았다. 천천히 문을 닫은 그는 고개를 돌렸다.
그의 방은 소천룡의 대전만큼이나 넓었는데, 그 넓은 공간을 가득 메운 것은 온갖 고서들과 사체의 내부를 그린 그림들이었다. 그중에는 수많은 뼈와 마른 시신들 또한 있었다. 공노는 눈을 번뜩였다.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그는 서둘러서 닫아 걸고 불을 밝혔다.
당긴 불길은 어느 유등의 불빛보다 밝았다. 그는 뚫어져라 갈라진 낙수부주, 궁 서생의 시신 내부를 살폈다.
‘이런 증상은 가주의 그것과 흡사하다. 이것이라면…….’
빛을 발하는 공노의 눈은 절박함마저 어려 있었다. 그는 이전보다 신중하고, 그리고 신속한 손놀림으로 사체의 곳곳을 헤집어 갔다.
* * *
백운장의 후원, 시체로 가득하던 곳이 말끔하게 정리가 되어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그곳의 정자 아래에 당민이 앉아 있었다.
바람이 서늘하게 불었다.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있었다. 처마에 고인 물줄기가 주르륵 쏟아졌다. 하늘은 먹구름이 가득해 한낮임에도 사위가 어둑했다.
당민은 석탁 위에 턱을 괸 채 물끄러미 내리는 빗물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문득 눈을 감았다.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수개월 전에 떠나온 당가타(唐家沱)의 모습이 홀연 떠올랐다.
사천은 비가 많이 오는 지역이었다. 기척 없이 비가 쏟아지고 어느 틈엔가 개어 맑은 하늘 태양이 열기를 더하기도 했다. 처음 사천 땅을 밟았을 때에는 그런 하늘이 너무도 싫었다.
덥고, 습하고, 그리고 배척하는 시선들. 하나부터 열까지. 어린 당민에게는 힘든 것뿐이었다. 그것을 이겨내기 위해서 그녀는 무공에 매달렸다. 배척하는 사람들을 무시하기 위해서였다. 녹안옥수라는 무명은 그때에 나온 것이었다. 당민은 하얀 손을 뻗었다. 다탁에 놓인 녹색의 기괴한 가면을 더듬었다.
“무슨 청승이냐?”
들려오는 목소리에 당민은 고개를 돌렸다. 소명이었다. 그는 후원 바닥에 깔아놓은 포석을 밟아가며 다가왔다.
“청승은 무슨.”
그녀는 가면을 품에 챙겨 넣었다. 소명은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 둘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마주 앉아서는 고개 돌려 내리는 빗물만 바라보았다. 고인 물가에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는 맑았다.
“사천도 이렇게 비가 많이 오나?”
“시도 때도 없이 내리지. 덥고, 습하고. 그래도 겨울은 따뜻해. 여기저기 다 돌아다녔다면서 사천도 안 와봤어?”
“글쎄 말이야.”
소명은 쓴웃음을 흘렸다. 그는 말했다.
“내일인가?”
“응.”
무가련의 회합을 말하는 것이었다. 당민은 그곳에 당가를 대표하여 참석하게 된 터였다. 헌데, 그녀의 얼굴이 딱히 좋지가 않았다. 아니, 짜증스럽다고 할 정도였다. 와락 눈살을 찌푸리는 모습에 소명은 의아했다.
“아니, 얼굴이 왜 그래.”
“후우, 본가에서는 무가련이 어떤 곳인지 파악하라고 하기는 했는데 말이야.”
“했는데?”
당민은 찡그린 얼굴을 풀 줄을 몰랐다. 뭔가 크게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빌어먹을!”
버럭 험한 말을 토해냈다. 그녀는 느닷없이 당가에 있는 뭇 어른들에 대한 험담을 줄줄 늘어놓기 시작했다.
“결국에는 여자가 먼저 유명해진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거잖아! 이게 말이 되니, 응?”
다그치듯 묻는 말에 다른 어떤 응답을 할 수 있을까. 소명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나 말이다. 네 말이 옳아.”
“그렇지, 그렇지? 하여튼.”
당민은 여과 없이 화를 냈다. 이런 자리에 보낸 당가 어른들의 속셈이 너무 빤히 보이는 까닭이었다. 그럴듯한 사내놈 하나 물어오라는 것이 아닌가. 그런 의도 아니었으면 무가련인지 나발인지 신경 쓸 당가가 아니었다.
그녀는 쉼 없이 불평불만을 쏟아냈다. 가만히 듣다 보니 당가의 온갖 인사들 이름이 죄 나왔다.
‘아이쿠야, 녹면옥수라. 그 이름은 사천에서도 고고하기 이를 데가 없다더니.’
소명은 피식하고 이는 웃음을 애써 참았다. 옛 친구 당민의 본래 모습이 여기에 다 드러나고 있었다. 세월이 지나도 본래 모습은 잃지 않았다.
이제야 품은 말을 다 풀어냈는지 당민은 씨근덕거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는 불현듯 소명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호충인, 그놈도 꽤 유명하다면서?”
“하하, 하남의 맹호라고 떠들던걸.”
“얼씨구. 맹호의 씨가 말랐네. 개나 소나 다 맹호야?”
당민은 코웃음을 치며 이죽거렸다. 인정사정없는 그 말에 소명은 피식피식 웃었다.
“아닌 말로 하남의 호랑이가 무슨 맹호야, 사천 호랑이쯤은 되어야 맹호라 할 만하지.”
그러자 소명이 눈썹을 치켜들었다.
“어어, 이거 왜 이래. 지금 소림일문을 무시하는 거냐?”
“헹, 사천아미(四川蛾嵋)를 모르고서는 함부로 호랑이 운운하는 거 아니다.”
“하, 하하하!”
애향심으로 가득한 당민의 말에 소명은 시원한 웃음을 터뜨렸다. 아미산의 맹호가 일절이기는 하였다. 복호사를 필두로 하는 아미무공은 천하일절이라 할 만했다. 당민 또한 사천 사람이 다 된 것이었다. 그러다 문득 소명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머물렀다.
“다른 놈들은 어디서 뭐 하고 자빠져 있을지.”
종적 알 길 없는 탁연수와 이청을 생각하니 한숨이 흘렀다. 세상 천지에 흩어진 친구 놈들을 찾고자 마음을 먹었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하면 좋을지 알 수는 없었다. 어디서 잘 지내고 있을는지. 당민도 그 말에 멈칫했다. 장난스레 과장했던 표정이 흩어졌다. 그녀는 문득 고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