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y singer is one RAW novel - Chapter 74
69. 시험 >
아침부터 몸이 무겁다.
어제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
녹화를 마치고 집에 오는 내내 분한 기분이 들었다.
슈스케를 겪으면서 나도 모르게 방송이란 이런 것이라는 선입견이 있었던 것 같다.
아니 그보다는 방송에 익숙해졌다고 여겼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제 나의 그런 생각은 철저히 박살이 났다.
방송이라고 다 같은 방송이 아니다.
내가 우울한 표정으로 녹화장을 나서자 설이 누나가 그런 나를 보고는 이해한다는 듯이 말했다.
“예성아, 기대랑 다르지? 그냥 말만 하면 빵빵 터지고 그럴 줄 알았지?”
설이 누나의 말에 할 말이 없었다. 난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너만 그런 게 아니야. 누나도 처음 예능에 나가서는 그냥 병풍이었어. 우리는 그룹이잖아. 아리 언니만 열심히 뭔가를 하려고 애썼지. 그랬는데도 편집 당해서 얼마 나오지도 않고 그랬어. 아리 언니 방송 보면서 울고 그랬다. 처음에는 다 그런 거야.”
“저는 제가 꽤 재밌는 사람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아닌가 봐요.”
“글쎄다. 네가 재미없는 아이는 아니지. 하지만 재미있다고 예능에서 다 성공하면 개그 프로에 나오는 개그맨들이 예능을 다 씹어먹고 있겠지.
하지만 그렇지 않잖아? 개그맨들이 예능에 나와도 웃기는 이들은 손에 꼽아. 너도 오늘 예능을 경험했지만, 예능은 타이밍 싸움이야. 아 이거를 해야겠다. 생각하고 기다리다가는 오늘처럼 끼어들지도 못해.”
“그러게요. 하고 싶은 말은 하나도 못하고 그냥 대답만 하다가 나왔네요. 그나마 누나들이 도와줘서 이 정도지. 혼자 왔으면 시청만 하다가 왔겠어요.”
“너도 시간이 지나면 잘하게 될 거야. 그리고 재미없을 거라는 생각은 접어둬. 이런 예능은 편집이 방송 전부니까.”
“하아, 라디오 시대 모니터링 한다고 결제한 돈이 아까워요.”
그리고 그걸 본다고 고생한 나도 안쓰럽기 그지없다. 난 무엇을 위해 잠을 줄여가면서 그렇게 라디오 시대를 봤던 걸까?
“너 오늘 멍해 보이던 게 잠을 못 자서 그런 거야?”
“그런 것도 조금은 있죠.”
내 말에 나를 바라보던 설이 누나의 표정이 압권이었다. 뭐 이런 놈이 다 있나 싶은듯한 어이없는 표정.
“너 내일부터 기말고사 아니야?”
“그렇죠.”
“그런데 그러고 있었어?”
“에이, 시험이야 본래 평소 실력으로 보는 거죠.”
내 말에 누나가 또다시 뭐 이런 놈이 다 있냐는 듯한 눈빛을 보내왔다.
“그건 평소에 공부하는 아이들 이야기고. 표정이 왜 그래? 누나가 뭐 틀린 말 했어?”
“하아, 누나 전 이미 길을 정했잖아요. 가수를 해서 성공을 하고 말 거에요.”
“그런데?”
“그런 제가 공부를 열심히 해서 다른 친구들보다 성적이 좋으면 어떻게 해요? 제 성적이 오르는 만큼 누군가는 괴로워하겠죠.
전 친구들이 저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이 싫어요. 전 친구들의 내신을 위해 이 한 몸 희생하기로 마음을 먹었어요.”
“허, 가관이다. 가관이야. 그런 주둥이를 아까 녹화 때 털었어야지. 왜 하필이면 지금이야?”
“그러게요. 왜 지금일까요?”
나도 아쉽다. 이런 편한 분위기였으면 좀 더 잘할 수 있었을 텐데.
*****
방문을 열고 나가니 동생이 식탁에 앉아서 요점정리 노트를 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입이 근질거렸다.
‘아! 그러게 덕질 좀 작작하고 공부 좀 하지 그랬어? 이렇게 말하고 싶지만···.’
했다가는 내 영혼까지 탈탈 털어버릴 동생이기에 참아야 했다.
“동생아, 잠은 잘 잤어?”
“응. 오빠는?”
“나도 그럭저럭.”
“아들, 오늘 시험이지?”
“응. 엄마.”
엄마가 식탁에 두부 튀김과 달걀부침을 놓으면서 말했다.
“시험 잘 봐.”
“알았어. 하지만 기대는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엄마도 그동안 겪어온 게 있는데 기대는 않는다. 하지만 지레 포기하고 엎어져 자지 마.”
“엄마, 포기는 엄마 김장할 때 배추 셀 때나 쓰는 거야. 나 신예성 포기를 모르는 남자란 거 몰라?”
“그래 두부랑 달걀 많이 먹고 가. 머리 회전에 좋다고 하더라.”
“응. 동생아, 너도 많이 먹어라. 나보다는 네가 더 필요할 테니.”
“알았어. 그리고 자.”
동생은 필통에서 연필을 한 자루 꺼내어 내밀었다. 육각 연필.
의미는 알겠다. 대놓고 찍으라는 거냐?
“고···. 고맙다. 하지만 시험 당일 이런 걸 받다니 기분이 좀 그렇다.”
“오빠, 헷갈리면 그냥 굴려. 올해 오빠의 생활을 봤을 때, 대운이 든 게 틀림없어. 그냥 찍는 것보다는 하늘의 보살핌에 기대는 게 확률이 높을 거야.”
이것이 이 오빠의 고뇌와 방황을 모르니 쉽게 말하는구나. 나름 나대로 우여곡절이 많았는데.
여동생이 준 연필을 바라봤다. 대운이라.
대운은 모르겠지만, 연필은 쓸만할 것 같았다.
시험을 보면 꼭 정답이라고 보이는 게 두 개가 있다. 그리고 이거다 싶어 찍으면 꼭 틀린다.
‘그래. 할머니와 아버지가 도와주실 거야.’
밥을 먹고 학교로 향했다.
학교에 가니 복도가 적막하기 그지없다.
적막한 복도를 지나 교실에 들어가도 마찬가지다.
평소라면 어제 녹화는 잘했냐, 강구라는 정말 턱이 자라냐 이런 어이없는 질문을 마구 날릴 텐데 교실에는 책장 넘기는 소리와 사각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자리에 앉으니 내 책상 위에 프린트물이 놓여 있다.
시험에 나올만한 것을 정리한 요점정리 프린트물이다.
상우가 자기 것을 칼라 복사해서 만든 것이다. 물론 상우가 만든 것은 아니다. 상우는 그냥 복사만 했다.그것도 쓸데 없이 고퀄리티로.
프린트의 내용은 상우 서포터즈의 작품이다.
여러 명이 합심해서 많던 요점정리라서 정말 꼭 나올만한 것만 적혀 있다.
다만······.
‘상우야, 이건 꼬옥 나오니까 외워야 돼.’
‘상우야, 이건 선생님이 강조한 거니까 꼬옥 외워.’
‘상우야.’
‘상우야’
여러 가지 색깔의 형광펜으로 상우 이름과 하트가 깔려 있어 보기에 심히 불편하다는 게 단점이라고 할까?
읽으면 읽을수록 왠지 패배감을 느끼게 하는 프린트물이다.
그래도 이 프린트물 덕에 우리 네 명 중에서 전교 꼴찌는 나오지 않는다는 게 위로 아닌 위로가 된다.
자, 이제 선택과 집중이 필요한 시간이다.
‘수학은 당연히 패스, 생물 오케이, 물리는 세모, 시간 남으면 보자. 사회 문화는 당연히 오케이. 오늘 시험은 할 만하겠다.’
요점을 보니 배웠던 기억이 나는 부분이 많이 보였다.
수학이나 물리 영어 같은 과목은 어려워서 들어도 잘 모르지만, 나머지 과목들은 제법 열심히 들었다. 가끔 풀로 잠들 때 빼고는.
하지만 기억이 난다고 해서 안심할 수는 없다. 항상 시험에는 답이 두 개인 것처럼 비슷한 문제가 나오니까.
그래서 머리에 욱여넣을 필요가 있다.
고등학생이라면 누구나 단기기억 향상능력을 갖추고 있다. 나도 고등학생이라 물론 가지고 있다. 단기 기억능력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노동이 필요하다. 그 노동의 정도에 따라서 짧은 시간 기억력이 증가한다.
일명 빽빽이라 불리는 필살기.
하얀 연습장에 미친 듯이 글자를 적고 또 적으면 글자가 글자를 잡아먹어 점점 까맣게 변하면서 보이지 않게 된다.
그리고 그 사라진 글자는 머릿속에 스며들어 간다는 믿거나 말거나 한 기술이다. 하지만 고등학생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다고 봐야 하는 버프 스킬이다.
그리고 이 버프는 시험 기간만 유지되기에 시험이 끝나면 효과가 사라져 머릿속에 담았던 수많은 내용도 자연히 잊힌다.
하지만 상관없는 이야기다. 나에게는 오직 그 짧은 시간 동안만 필요할 뿐이니까.
시험이 시작되었다.
첫 시간은 수학이기에 예린이 나에게 준 연필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할머니, 아버지, 부처님, 예수님, 알라에게 빌면서 경건한 마음으로 연필을 굴렸다.
연필이 구르기를 멈추고 나에게 말한다. 4번이라고.
하지만 맞는지 의심도 확신도 할 수 없다. 그저 포스가 나와 함께하길 바랄 뿐이다.
나는 연필과 끊임없이 의논하며 답을 써 내려 갔다.
간혹 5번이나 6번이 나왔다. 역시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가는 것인가? 너무 많은 이들에게 기도했나 보다.
다시 굴릴까 하다 한번 아닌 것은 그냥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포기했다. 그리고는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문제의 보기를 쳐다봤다.
이렇게 눈을 뜨면 왠지 진하게 보이는 보기가 있다. 그리고 그것을 나는 선택을 한다. 맞는지는 모른다. 그저 이번에도 포스가 함께하길 바랄 뿐이다.
연필과 나는 이렇게 힘을 합쳐 수학이라는 숲을 헤쳐 나갔다.
하지만 연필과 나로서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이 나타나 앞을 가로막았다. 주관식이었다.
어차피 어설프게 계산해봐야 답은 틀릴 게 뻔하다. 시험지를 쭉 훑었다. 그러면서 그럴듯한 숫자를 뽑아 조합해서 적어넣었다.
맞을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내가 계산한 것보다는 믿음직한 답이었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고 했던가? 연필과 힘을 합치니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았다.
시간이 남으니 머릿속으로 잡생각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시험이 끝나면 얼마 안 있어 방학이구나. 방학이 시작되면 콘서트 준비도 해야 하고 녹음도 시작하겠지? 장 프로듀서님이 해주시려나?’
방학이 되면 다시 나의 본업이 시작된다. 진정한 가수의 길로 접어들게 되는 것이다. 콘서트를 하고, 녹음한다.
이제 정말 코앞까지 미래가 다가온 느낌이다. 하지만 아직도 확신이 서지 않는다. 솔직히 운이 너무 좋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만약 이번에 이 운이 통하지 않으면 난 어떻게 되는 것일까?
내가 연예계에 대해 아는 것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라는 생각을 어제 하게 되었다.
어제 녹화를 하면서 느꼈던 것은 MC들이 하나의 방송을 같이하지만 마치 영역 다툼을 하면서 서로 으르렁거린다는 모습을 깨달았다.
마치 암컷 공작새에게 구애하는 수컷 공작새처럼 어떻게 하면 자신이 더 돋보일까 생각을 하면서 경쟁을 하는 듯했다.
방송으로 봤을 때는 서로의 포지션을 맞추어서 게스트를 공격하는 모양새지만 녹화장의 분위기는 전혀 아니었다.
그들은 정상의 자리에 서봤던 이들이지만 여전히 치열하게 살고 있었다.
‘어쩌면 나는 그들의 기백에 밀려서 많은 것을 보여주지 못한 건지도 몰라. 앞으로도 계속 이런 일이 있겠지?’
오히려 더 치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가수는 기본적으로 경쟁체제가 아닌가? 노래가 나올 때마다 순위가 뜬다.
그리고 어떻게든 순위를 더 높이기 위해 노력을 한다. 그러다 보면 다른 가수들과 비교가 되고 경쟁은 더 치열해질 것이다.
‘더 노력해야겠어. 지금처럼 하고 싶은 거만 하면 안 돼.’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한 사람 손! 없지? 맨 뒷사람이 일어나 답안지 걷어와.”
답안지를 가지고 선생님이 나가자 친구들은 서로 답을 맞혀본다고 난리다.
“이거 2번 아니었어?”
“야, 3번이야.”
“아! 3번 하려다 2번 골랐는데? 난 왜 답이 딱 안 떨어진 거지?”
어차피 나중에 되면 정답을 말해줄 텐데 왜 벌써 저러는지 이해가 안 된다.
‘에휴, 빽빽이나 하자.’
제일 어려운 관문이던 수학시험이 끝나자 나에게도 시험이 시험같이 다가왔다.
아는 문제들이 쏟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건 2번이고, 요건 3번, 이건 4번인가? 아니, 1번’
시험에 아는 문제가 나오는 것은 당연한 건데 왜 이리도 신이 나는 건지 모르겠다.
신나게 답을 표시하니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헷갈리는 문제에서 고민도 하게 되니 시험시간이 빠듯했다.
4교시까지 시험을 마치자 저절로 한숨이 쉬어졌다.
“잘 봤어?”
상우가 피곤한 얼굴로 물었다.
“글쎄다. 잘 봤다고 할 정도는 아니겠다.”
“그럼 이번에 내가 일인자가 되는 건가?”
이건 또 웬 자신감이야? 상우나 나나 수학이 안 되기는 마찬가지다.
“잘 봤냐?”
“생물 완전히 잘 본 것 같아. 요점에서 다 나왔던데?”
“상우야, 상우야, 잘생긴 상우야. 네가 잘 봤으면 다른 이들도 잘 봤을 것 같지 않아? 수학을 잘 봤다고 하면 몰라도.”
“그 말은 너도?”
“생물은 나도 어느 정도 본 것 같아. 하지만 수학과 물리는······. 하아”
“그렇지. 그럼 이번에도 혈투가 벌어지겠군.”
“홍수와 규석이, 너희들은?”
내 물음에 기운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말해 뭐해? 도긴개긴이지.”
“하기는,”
“난 수학 몇 개 풀었는데?”
“뭐? 규석이 네가?”
“그래. 답도 맞는 것 같은데,”
“이건 말도 안 돼 어떻게 네가?”
“흐흐, 이렇게 되면 내가 일인자가 될 가능성이 제일 높은 건가?”
“아니지. 레이스는 이제 막 시작됐을 뿐이지.”
“첫 끗발이 개 끗발이라는 말 몰라?”
규석이에게 야유를 퍼붓다가 문득 생각이 떠올랐다.
“야! 그런데 몇 개 풀어서 점수가 엄청 잘 나올 것 같지는 않은데?”
“듣고 보니 그러네. 몇 개 풀었어?”
“3개.”
“야! 장난해? 3개 풀고 일인자를 언급해? 난 이제껏 찍었는데도 30점 밑으로 나온 적이 없어.”
당당하게 말하고 나니 쪽팔렸다. 이게 자랑거리는 아닌데.
그런 내 생각과 다르게 상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성이가 수학은 잘하지. 관심법도 아닌데 실눈을 뜨고 문제를 노려 보면 답이 보인데. 난 아무리 해도 안 돼.”
“잘하는 게 아니라 잘 찍는 거지.
“야, 그만하자. 친구들 보기 쪽팔린다. 다 우리 쳐다보고 있거든.”
내 말에 홍수가 고개를 돌리고 친구들을 봤다.
“그럴 수밖에 재들 지금 우리 가지고 내기 중이시다.”
“뭐? 무슨 내기?”
“우리 등수 맞추기.”
“뭐? 정말”
“그래.”
“이 자식들, 내 성적을 가지고 내기라니···.”
“야! 재미로 하는 건데 왜 그래?”
“그런 거면 나도 끼워줬어야지. 얼마 빵이야?”
“오천 원”
나는 지갑에서 오천 원을 내밀었다.
“나 일등, 상우 2등, 규석 3등, 홍수 4등이다.”
“호오, 저번이랑 같을 거라고 말하는 거야?”
마스터 피자집 아들내미가 전주를 맡았나 보다. 하긴 이놈은 매번 야구나 축구 점수를 가지고 내기판을 돌리는 놈이다.
“나도 한다.”
상우가 낀다고 말하자 홍수나 규석이도 질 수 없다는 듯이 끼게 되었다.
이로써 내기에 반 전체가 끼게 되었다.
“마스터, 내 배당이 어떻게 돼?”
“너 하나야.”
“뭐? 아니 왜? 나 저번에 1학기 기말과 중간 다 1등이야. 1등.”
“그래서 그런 거지. 운빨 다 됐다고 보고 있거든. 상우가 배당률이 제일 낮아.”
“상우가 1등을 한다고? 너희들이 뭘 모르나 본데 일인자는 쉽게 무너지지 않아. 어깨에 짊어진 게 다르다고.”
“하여간에 잘해봐. 너 1등 하면 너 혼자 다 먹는 거야.”
“이렇게 된 이상 오기로라도 1등 해주겠어.”
“열심히 해봐. 시험은 아직 이틀이나 남았어.”
그렇다. 시험은 이제 시작되었을 뿐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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