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ocalypse of the Cataclysmic Predator RAW novel - Chapter 178
재앙급 포식자의 아포칼립스 178화
황무지의 끝에서(完)
마침내 이 세상을 파괴하려던 신이 쓰러졌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들고 있던 무기를 떨구었다.
와-아아아아아!
그리고 터져 나오는 환호.
우리가 이겼어! 이겼다고! 하하하!
피투성이가 된 사람들이 서로 끌어안고 환호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증오와 분노만이 넘실거리던 이 전장은 지금 기쁨과 안도감 환희가 휘몰아쳤다.
그건 유신의 동료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으하하하! 별것 아니군!”
“만세! 만세엣! 살았다아!”
그리고 이 기쁨을 자신들의 리더이자 친구와 나누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어?”
그러나 그들은 당황했다.
유신은 쓰러진 상태로 미동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신! 야!”
에피가 제일 먼저 달려 나갔다.
곧 엉망진창이 된 유신을 더듬거리다가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수, 숨을 안 쉬어…….”
“뭐요?! 나와봐요! 지금 당장 치료를…….”
그 뒤를 이어 도착한 클레르가 다급히 포션을 꺼냈다.
그러나 곧 그녀는 두 눈을 부릅떴다.
……!
쓰러진 유신의 시신이 빛으로 화하며 사라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자신이 짊어지고 있던 모든 책임감과 운명을 내려놓았다는 듯.
홀가분한 얼굴로 잠든 채로.
“아,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돼애애애애!”
여인이 절규했다.
“어디가! 어디 가냐고! 어?! 이제 다 끝났는데……. 어디…….”
소녀는 사라지는 빛을 잡으려 애썼다.
그러나…….
구원자는 돌아오지 않았다.
* * *
“그는 최고의 리더였으며 최고의 친우였다. 언제나 이 세상을 위해서 헌신하던 진정한 영웅이었다. 클레이모어 블레이드. 아니, 유신. 우리의 구세주.”
“우리는 이제 그를 보내주려 한다.”
검은 양복을 입은 메이슨이 울적한 얼굴로 주례를 끝마쳤다.
그러자 파인 구덩이 안으로 관 한 짝이 들어갔다.
“흐으으윽…….”
검은 드레스를 입은 델리아가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이제 좀 편하게 쉬어보나 했는데. 이렇게 먼저 가버리면 어떡합니까. 팀장…….”
“등신 같은 새끼. 날 구해주고 폼 잡을 땐 언제고……. 네가 죽어버리면 어떡하잔 거야…….”
레이시스터가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에바그린은 먹먹한 얼굴로 욕설을 내뱉었다.
그 밖에도 백휘도, 클레르, 메이지, 매드독, 헤카테, 마리안, 이벨과 기어워크 팀, 레이첼, 베르망과 율리아나까지.
유신과 가장 가까웠던 친구들이 제각각 눈동자를 붉혔다.
그들뿐만이 아닌.
눈을 감은 엘프와 흑발의 아기를 안고 있는 엘프.
배불뚝이 중년.
늑대 모피를 쓴 거한.
주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 추모를 하고 있었다.
전부 다 유신에게 은혜를 입었거나 관계가 있던 사람들이었다.
메이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관 위로 흙이 덮이기 시작했다.
오열 소리가 더 커졌다.
바로 그 순간.
사람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퍼졌다.
욕설과 함께 파도처럼 갈라진 그 틈에서 일단의 무리가 나타났다.
에피가 그들을 보고는 대뜸 리볼버를 꺼내 들었다.
“무슨 낯짝이라고 여길 기어들어 와! 어?!”
마시아 파이퍼와 성녀 마리아.
흑기사 카단과 천궁 등.
일행과 싸웠던 본사의 이사진들이 유신의 장례식에 찾아온 것이다.
뿌득.
“말 잘했어요! 지금 당장 죽여 버려야 해요! 당신들만 아니었다면! 네놈들만 아니면……!”
클레르가 분노하며 에스트를 끌어올렸다.
백휘도가 그런 클레르를 말리며 어느 한쪽을 고갯짓했다.
으아아앙!
아이가 울고 있었다.
“유신은…… 이런 걸 원하지 않았을 거예요.”
델리아가 붉어진 눈가로 힘없이 말했다.
성녀는 고개를 들지도 못한 채 죄스럽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희한테 자격이 없다는 것은 압니다. 하지만 추모만이라도…… 부디…….”
“…….”
이를 악문 클레르와 에피가 고개를 돌렸다.
유신과 적대하던 이사들은 각각 유신의 관 앞에서 손을 모으며 고개를 숙였다.
마침내 이 땅에서 넘실거리던 반목과 분쟁이 종지부를 찍었다.
그러나 구원자는 돌아오지 않았다.
* * *
따뜻하고 안온하다.
어머니의 품에 안겨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나는 계속해서 이 유토피아 속을 유영했다.
계속, 계속 말이다.
그때.
콕콕.
누군가가 나를 찔렀다.
무시하려고 했으나 그것은 집요하게 나를 건드려 댔다.
아이 씨.
누구야 진짜!
좀 쉬게 내버려 둬.
지금까지 달려왔잖아.
지쳐 버렸다고.
이제 그만…… 편해질 때도 됐잖아.
난 이렇게 주장했다.
콕콕.
그러나 녀석은 이를 무시한 채 여전히 나를 찔러댈 뿐이었다.
마치 이제 일어나라는 듯.
…….
결국 나는 눈을 떴다.
내 눈앞에는 이목구비란 게 없는 웬 그림자 인간 하나가 쪼그려 앉아서 나를 보고 있었다.
어딘가 많이 지친 듯 보이고 많이 아파 보이는 그림자 인간은 가만히 나를 주시하다가 어느 한 곳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문 하나가 존재했다.
열린 문틈 사이로는 밝은 빛도 아른거렸지만 어두컴컴하고 음울한 빛이 대부분이었다.
저곳으로 간다고 해도 이곳만큼 행복할 것 같진 않았다.
꼭 가야 돼?
그냥 여기 있으면 안 되는 거야?
나는 물었다.
하지만 그림자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나는 욕설을 내뱉으면서 문으로 향했다.
그리고…….
유신이 눈을 떴다.
* * *
휘이이잉!
눈을 뜨자마자 보인 것은 모래 먼지가 불어닥치는 샛노란 하늘이었다.
마치 이 세상에 처음 깨어났을 때처럼 유신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황무지에서 깨어났다.
익숙하군.
엿 같아. 그러나 조금 반갑기도 해.
“살아 있는 건가?”
유신은 몸을 더듬거렸다.
자신은 분명 죽었다.
시간의 마검을 과도하게 사용한 대가로 모든 수명을 잃어버리고 육신과 영혼이 무너져 내렸다.
그러나 부활했다.
유신은 자신을 되살린 존재가 누구인지 깨달았다.
외신이 말했던 이 세상의 주인.
우리가 태곳적부터 파괴하고 짓밟은 존재.
지구.
유신은 존재에게 감사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또 한 번의 기회가 주어졌으니 이제 모두를 보러 갈 수 있었기에.
일단 여기가 어딘지부터…….
유신이 생각할 때.
터벅!
황무지의 모래 먼지를 뚫으며 무언가가 나타났다.
날카로운 발톱과 헝클어진 털.
샛노란 눈동자와 침을 질질 흘리는 주둥이까지.
방사능 늑대였다.
이 황무지에서 가장 나약하지만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이는 괴물.
오랜만에 보는구만.
유신은 코웃음을 치며 에스트를 끌어올렸다.
그러나 곧 당황했다.
언제나 강맹한 힘이 넘쳐흐르던 내면이 텅 비어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에스트란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이.
뿐만 아니라 단단했던 육신 역시 삐쩍 말라비틀어져 있다.
마치 처음 이 땅에서 눈을 떴을 때처럼.
“엿 됐군.”
유신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이러다가 부활한 지 얼마나 됐다고 다시 죽게 생겼다.
뭐 휘두를 만한 거 없나?
유신이 다급히 주변을 두리번거릴 때.
부아아앙!
고급스러운 검은 세단이 나타나 방사능 늑대들을 후려쳤다.
나뒹군 녀석들은 컹컹! 이빨을 드러내며 덤벼들려 했으나 세단에서 내린 존재들을 보고는 꼬리를 말며 도망쳤다.
그건 세미드레스를 차려입은 두 명의 동양인 남녀였다.
남자 쪽은 허리춤에 웬 근미래적 디자인의 칼을 차고 있었고 여성은 검은 웨이브진 머리칼을 찰랑거리고 있었는데. 그녀에게선 마리안과 비슷한 냄새가 났다.
흡혈귀?
클레이모어?
“괜찮으십니까?”
사내가 물었다.
유신은 사내를 바라봤다.
자신 못지않게 풍파를 겪은 눈이었다.
그러나 그 눈동자는 지금 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광인이 아닌, 행복을 쟁취한 자의 눈.
유신이 감사 인사를 전했다.
“도와줘서 고맙다.”
“별말씀을요.”
그때 여자가 사내에게 속삭였다.
모든 힘을 잃어버렸기에 유신은 그 대화를 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곧 그 제스처의 뜻을 알 수 있었다.
“어떻게 표류하게 되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일단 타세요. 안전지대까지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사내는 그러면서 트렁크에 실린 옷가지를 유신에게 휙 던졌다.
무슨 열대지방에서나 입을 법한 꽃무늬 셔츠와 반바지였다.
취향 하곤.
유신은 옷을 입으며 물었다.
“이름을 물어봐도 되겠나? 나중에 꼭 보답하겠다.”
보답이란 말에 사내와 여인이 웃었다.
유신의 행실이 마음에 든 듯했다.
사내 쪽이 입을 열었다.
“전 강수혁입니다.”
그다음은 여자 쪽이었다.
“카타기리 미레이예요. 당신은요?”
“유신이다.”
“좋아요 유신. 우리 신혼여행을 방해한 대가는 클 거에요. 아주 등골까지 빼먹을 거라고요. 알겠어요?”
설마 했는데. 진짜 허니문이었어?
유신은 헛웃음을 지었다.
“허…….”
부아아앙!
검은 세단이 다시금 질주를 시작했다.
아득하게 펼쳐진 저 황무지의 지평선 너머로.
* * *
탄탄한 기럭지를 가진 한 여인이 다급히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뒤를 따라가던 메이지가 말했다.
“에피. 가, 같이 가요!”
“빨리! 빨리!”
두 사람은 잘 손질된 정원을 가로질렀다.
낙원에 위치한 저택들 중에서도 가장 화려하고 아름답다는 대저택이었다.
그리고 그 저택의 주인인 델리아가 손수 문을 열어주며 그런 두 사람을 맞이했다.
“어서 와. 제일 먼저 왔는걸.”
“그래? 야호! 1등이다!”
“델리아 양. 오랜만입니다. 그리고 이건 선물입니다. 요즘 유행한다는 유니온제 라디오에요.”
“어머. 뭘 이런 걸 다……. 고마워 메이지. 마침 가지고 싶던 거였어.”
드레스를 걸친 델리아가 메이지로부터 받은 선물을 만지며 건강하게 웃을 때.
에피는 집안을 둘러보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를 찾는 듯이.
그리고 아가씨가 된 소녀는 어느새 목표를 찾을 수 있었다.
“어이!”
“으, 으아아앗!”
앞치마를 걸친 채 주방에서 요리를 하고 있던 클레르가 당황했다.
도마 위에는 서투르게 잘린 야채들과 고기가 한가득하였다.
“조심 좀 하라니깐. 칼도 그렇게 잡지 말고.”
“호, 혼자서 충분하다고 했잖아욧.”
유신은 그런 클레르를 도와주다가 에피를 보고는 피식 웃었다.
“왔냐?”
“밥은?”
“넌 오자마자 밥 타령이야?”
“배고파 죽겠는걸 어떡해 그럼? 이제 곧 애들도 다 올 거…… 켁!”
“그럼 땍땍거리지 말고 도와.”
에피는 얼굴 위에 있던 행주를 훔치며 씨이 소리를 내다가 얌전히 식탁을 닦았다.
“어서 와. 어머. 헤카테는 근육이 더 늘어난 것 같은데.”
“하하하! 당연하다! 끝없이 단련하고 있으니까! 참 이건 선물이다. 용고기인데. 몸보신에는 그만이다.”
“휘도. 그건 뭐야? 냄새 좋은데.”
“우리 가게의 신상 메뉴다. 연일 매진을 기록하고 있는 화재의 피자지.”
그러는 동안에도 속속들이 손님들이 도착했다.
그 안에는 컴퍼니의 회장을 맡고 있는 전설적인 여자도 있었고 저 깊은 지하제국의 지배자도 있었다. (구)러시아를 양분하는 얼음성채의 주인도 있었다.
하나같이 대단한 인물들이 이 촌구석에 위치한 저택으로 몰려들었다.
곧 널따란 식탁을 중심으로 앉았다.
그 위에는 술과 음식들이 한가득 차려져 있었다.
“다들 와줘서 고맙다.”
유신은 술을 들이켜며 말했다.
이날은 외신을 물리치고 사라졌던 유신이 다시금 되돌아온 날이었다.
그리고 요양 중인 유신을, 그리고 친구들끼리의 단합을 위해 모두가 한자리에 모이는 날이기도 했다.
각자 지난 1년 동안 있었던 일을 말하면서 말이다.
제일 먼저 입을 연 것은 마시아 파이퍼였다.
“우리는 이번에 유니온에 다녀왔단다. 과연 대단했단다. 과거의 문화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단다.”
이제는 완연한 인간처럼 보이는 마시아 파이퍼는 배를 만지작거렸다.
그 안에는 따스하게 맥동하는 무언가가 있었는데.
그녀는 구태여 그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그녀의 옆에는 성녀와 마녀 역시 앉아 있었다.
“문화적인 가치가 높긴 하지만 그뿐이었어요. 너무 삭막했습니다.”
“그래? 난 좋기만 하던데. 아스팔트. 매연. 콘크리트 건물 좋지 않아?”
전쟁이 끝나고 유신이 되돌아온 후.
유신은 마녀를 데리고 왔다.
그녀는 이제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고는 전 세상을 유랑하고 있었다.
그다음은 헤카테였다.
“언니의 아이가 더 커졌다. 이제는 혼자서 멧돼지도 잡는다!”
더 강해지기 위해 유랑도 하고, 가끔씩 고향으로 돌아가기도 하는 헤카테가 보여준 사진 속에는 맨손으로 멧돼지의 골통을 깨부수는 사내아이가 찍혀 있었다. 그 얼굴은 유신을 닮아 있었다.
“흠흠.”
유신이 헛기침을 했다.
어째선지 양옆에서 시선들이 느껴졌다.
델리아는 유순하게 눈을 떴으나 부럽다는 눈빛을.
클레르는 도끼눈을 뜬 채 자신을 보고 있었다.
설화란 역시 아닌 척했으나 은근하게 시선을 보냈다.
그 분위기를 바꾼 건 이벨이었다.
기계 팔로 술잔을 들어 원샷을 한 그녀가 탁 소리 나게 잔을 내려놓았다.
“7위계에 올랐습니다.”
“오오. 축하한다.”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이걸로 이사님을 노리는 그 간악한 무리들을 더 확실하게 죽일 수 있겠지요.”
부팀장에게 팀장 자리를 인계한 이벨은 유신의 개인 경호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아직 소탕되지 못한 빌런들부터 시작해서 호승심이 넘치는 전사들까지.
알게 모르게 유신을 노리는 잡배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은 한 번도 이 강철의 여전사를 넘지 못했다.
“좋은 소식들을 전하는 와중에 미안하다만. 이 얘기를 안 할 수가 없구나.”
그다음은 설화란이었다.
“얼음성채 부근에 초월체가 나타났다. 잠들어 있던 냉룡이 깨어났어.”
에피처럼 이제는 다 큰 아가씨가 된 율리아나에게 구태여 고기를 덜어주던 베르망이 고개를 저었다.
“이제 막 활동을 개시했는데. 그 기세가 심상치 않다. 이대로 두면 재앙이 일어날 거다.”
“흐음. 나보고 나서 달라는 얘기지 이거?”
와인잔을 홀짝이던 에바그린이 웃었다.
그녀는 죽은 알렉산더 대신 새롭게 컴퍼니의 회장이 되었다.
그리고 막무가내인 성정을 억누르며 제 역할을 다하고 있었다.
그건 지난 전쟁으로 인해 그녀의 사고에 변화가 생긴 것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이 세상의 정세 때문이었다.
모든 재앙과 외신을 물리치고, 빌런들을 토벌하고 반목하던 사람들을 규합했지만 여전히 이 세상은 혼란스러웠다.
우선 저 대해 너머 (구)인류의 후손들이 자리 잡고 있던 새로운 땅 유니온의 출몰과 여전히 남아 있는 강대한 괴물들 때문이다. 최악의 경우 외신 같은 녀석이 또 나타날 수도 있었으니까.
“돌아가면 토벌전을 준비하도록 하지. 물론 이건 친구가 아닌 회장으로서 나서는 거니 그만한 대가가 필요할 거야.”
“고맙다. 아이언 나이트.”
설화란이 안도하며 식사를 시작했다.
레이시스터가 유신에게 텔레파시를 보냈다.
-팀장. 언제 복귀하십니까? 빨리해 주십시오. 저 마녀를 모시고 살려니…… 죽을 것 같습니다!
(신)컴퍼니의 이사로서 에피를 따라나선 메이지 대신 에바그린을 보좌하고 있던 레이시스터가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좋은 집과 명품들에 둘러싸여 그토록 원하던 행복한 삶을 쟁취했지만 지독한 일 중독인 에바그린 때문에 인생이 그렇게 행복하진 않았다.
-글쎄.
유신은 애매모호하게 답했다.
무거운 주제가 끝나자 마리안이 붉은 입술을 핥으며 유신을 보며 웃었다.
“왕자의 실력이 눈에 띄게 높아지고 있어. 조만간 너한테 복수하겠다고 찾아올지도 몰라.”
죽은 바하무트의 왕세자가 어느새 그렇게 컸나?
하지만…….
유신은 피식 웃었다.
“오라고 해.”
식기들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이벨과 클레르가 섬뜩한 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한 번 유신을 잃었었기에 그녀들은 과잉보호하다시피 유신을 보살피고 있었다.
“어어! 깨진다!”
매드독이 호들갑을 떨었다.
마리안이 장난스럽게 손을 저었다.
“농담이야. 농담. 내가 잘 조절하고 있으니까. 그런 일은 없을 거야. 안심해.”
델리아가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해 피자를 한 입 베어 물며 말했다.
“음. 이거 너무 맛있는데. 대체 뭘 넣은 거야?”
“후후.”
백휘도가 웃었다.
악명높은 테러리스트이자 칼잡이였던 그는 현재 킹덤과 대도시들을 아우르는 거대한 피자 체인점의 주인이었다. 이 자리에서 사업가로서는 제일 성공한 사람이었다.
“영업기밀이다. 그저…….”
“그저?”
“용. 이라고만 말해두지.”
“…….”
피자를 씹던 델리아의 얼굴이 떨떠름해졌다.
아까는 그렇게 맛있었는데. 비밀을 알고 나자 맛이 좀 이상한 것 같았다.
아무튼 에바그린의 토벌전에 백휘도가 낄 것은 자명해 보였다.
그때 레이첼와 꽁냥거리던 매드독이 흠흠 헛기침을 했다.
곧 결연한 표정으로 손을 내밀었는데. 거긴 청첩장이 들려 있었다.
“형님 누님들. 우리 결혼합니다.”
“세상에…….”
델리아가 입을 헤 벌렸다.
다른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언젠가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충격적이었다.
펑크시티 사건 때의 인연이 이렇게 발전하다니.
세상 참 모를 일이다.
“축하해요.”
결혼식이란 말에 눈을 빛낸 델리아가 레이첼에게 많은 질문을 던졌다.
헤카테가 와하하 웃었다.
“축하한다! 순풍순풍 많이 낳아라!”
“맞습니다! 그래야 세금도 많이 걷지요!”
메이지 역시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
에피가 그런 메이지를 걷어차며 등신이라고 말했다.
유일하게 우울한 얼굴이던 메이슨이 한숨을 쉬었다.
“이제는 하다 하다 부하직원의 주례까지 서게 될 줄…….”
“제가 왜 부하입니까? 이제 제가 더 높은데요?”
레이첼이 대꾸했다.
그녀는 격을 쌓은 능력자로서 이사진들 중 하나가 되었다.
반면 메이슨은 여전히 펑크시티의 지부장이었다.
메이슨의 얼굴이 구겨졌다.
“젠장. 나도 빨리 벽을 깨부수든지 해야지…….”
“그래도 짬은 제가 더 높습니다.”
“이이익! 레이체에에엘!”
“후후후.”
“하하하하!”
여전히 저 황무지에서는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고 괴물이 득시글거렸다.
그러나 지금 이 저택 내부에서는 따듯한 온기와 웃음이 퍼져 나갔다.
레이시스터가 눈치 없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두 분은 언제 결혼하실 겁니까?”
“하하. 그게…….”
델리아가 유신의 눈치를 살폈다.
클레르 역시 혼자서 작게 중얼거렸다.
“빨리해야 하지 않겠어요? 그, 그래야 나도…….”
어, 음.
유신은 머리를 긁적였다.
지금껏 요양하랴 쌓인 문제들을 해결하랴 이 일에 대해서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아니, 어쩌면 그냥 제쳐둔 건가?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십쇼. 형님. 한 살이라도 젊을 때 하는 게 최곱니다! 형님은 부인도 많으…… 윽!”
매드독이 엄지를 치켜올리다 레이첼에게 발을 밟히며 울상을 지었다.
유신이 턱을 쓰다듬었다.
“그래?”
하긴 네가 사람 된 거 보면 그럴지도.
그렇게 살짝 어색한 공기가 흐르던 그때.
에바그린이 술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너희끼리 셋이서……. 아니, 넷인가? 물고 빨든 단체식을 올리든 아무래도 괜찮은데. 복귀는 언제 할 꺼야?”
유신은 헛웃음을 지었다.
참 저 여자답다는 발언이라 생각하며.
“은퇴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부려 먹을 생각인가?”
-아이참! 눈치 없게!
-한창 좋은 얘기 중인데. 왜 찬물을 끼얹고 그러십니까!
주변에서 볼멘소리가 튀어나왔다.
“시끄럿!”
에바그린은 살짝 붉어진 얼굴로 꽥 소리쳤다.
그 모습이 강대한 무력단체의 수장이라기보단 일에 치여 사는 불쌍한 샐러리맨을 보는 것 같았다.
“인력이 부족해. 쓸 만한 것들이 없다고.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빼면 말이야.”
에바그린이 머리칼을 헝클이며 한탄했다.
유신은 피식 웃었다.
내가 만약 모든 힘을 잃지 않았더라면……. 지금 저 꼴이 되어 있었을까?
그건 좀 끔찍한데. 그래도…….
“생각 좀 해보고.”
“진짜?!”
의외라는 듯 에바그린이 눈을 반짝였다.
“그래, 일단 결혼식부터 올리고.”
“……!”
유신의 말이 끝나자 모두가 눈을 부릅떴다.
곧 와하하 웃으며 오늘은 축제라고 소리치며 집에 있는 모든 술을 다 가져오기 시작했다.
유신은 그 틈에 끼어서 기분 좋게 웃었다.
그러면서 주먹을 꽉 쥐었다.
외신과의 싸움 직후 자신은 모든 힘을 잃었다.
강탈의 권능은 사라졌으며 방대한 에스트 역시 소멸했다.
육신 역시 나약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고오오오.
유신의 내면에서는 어느새 새로운 기운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늘 남의 능력을 빼앗기만 하던 강탈자로서의 힘이 아닌, 오직 그 자신만이 가진 새로운 힘이.
재앙급 포식자의 아포칼립스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