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ocalypse Survival Game RAW novel - Chapter 216
215화
Find The Utop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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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습니다. 가상세계는 현실의 육체와 유기되어 있기 때문에 기억을 지우면 현실의 육체에 이상이 생길 가능성이 큽니다.”
“…….”
상담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지구가 멸망하기 전에는 일부 허용했던 부분이긴 하지만…… 지금은 조금의 부작용도 조심해야 할 때가 아닙니까.”
조금이라도 현실의 육체에 타격을 주는 일은 허가할 수 없다.
지금 인류가 지켜야 할 것은 인류 그 자체.
지구가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 한 사람이라도 더 지켜야만……
“…….”
“…….”
“…….”
“하아…….”
상담사가 다시금 긴 한숨을 내쉬었다.
“좋습니다.”
모든 치료법을 동원했다. 지금의 상황에서 시도해 볼 수 있는 모든 치료법을.
그러나 진혁의 상처는 치유되지 않았다.
이렇게 가면 결국, 서서히 죽어갈 수밖에 없는 상태였다.
“다시 말하지만 기억을 완전하게 지울 수는 없습니다. 단, ‘분리’해 드릴 수는 있겠군요.”
“……?”
상담사는 ‘기억의 분리’에 대해 진혁에게 차근히 설명했다.
기억을 없애는 것도, 지우는 것도 아닌 진혁의 기억 일부를 분리하여 AI에게 저장해 놓는 것.
그렇게 하면 분리한 기억과 관련된 기억은 자동으로 AI의 기억으로 흘러 들어가게 되고, 진혁은 잊고 살 수 있다는 것.
다만 지구로 돌아가는 날에는 다시 그 기억을 받아들이고 감수해야 한다는 것.
또한 가상세계에서 사는 날 동안 그 기억과 완전히 떨어질 수 없다는 것.
“기억의 분리엔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분리된 기억은 본체의 일부지만 그 존재만으로 본체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반대로 ‘이진혁’이라는 데이터가 분리된 기억에게 흡수될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만약 분리된 기억을 가진 AI가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고, 이진혁의 데이터를 흡수하려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어느 쪽에 흡수되든 이진혁 씨는 이진혁 씨지만…… 분리가 일어나면 제 말이 어떤 뜻인지 자연스럽게 알게 되실 겁니다.”
그리고 두 번째 주의점.
지구가 회복된 후, 가상세계를 떠날 때 분리해 놓은 기억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육체는 하나, 돌아가는 자아는 두 개가 되기 때문에 하나의 자아가 가상세계에서 영원히 떠돌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
“그땐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곳에서, 죽지도 못하고 영원히 살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아주 무서운 일이죠.”
외롭고 괴로운 시간이 영원히 이어진다면. 죽지도 못한 채 혼자 영원한 세계에 갇히게 된다면.
그만큼 끔찍한 일이 있을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 모든 얘기를 숨기지 않고 해준 이유는 진혁이 이 방법을 선택하지 않길 바라서였다.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 일을 위협적으로 말한 이유는.
그러나 그렇게 말하면서도 상담사는 어렴풋이 진혁이 어떤 대답을 내놓을지 예상했다.
이미 그의 눈빛은 죽어있었기에.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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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이 온통 새하얀 공간.
끝이 어디인지, 끝이 있는지조차 알 수 없고 바닥과 천장이 의미 없는 그저 백색의 공간.
진혁이 눈을 깜박였다.
마지막 퀘스트의 보상, . 상상하지 못한 진실이었다.
[진혁아. 넌 뭐 할 거야? 난 가상세계에서 대체 뭘 해야 될지 모르겠다.] [그 게임 재미있어? FTU? 유토피아를 찾아라……? 나도 해볼까.] [이진혁! 왜 이렇게 안 나와. 심심해 죽는 줄 알았네.]그래. 생각해 보면 세운은 언제인가부터 자연스럽게 자신과 함께 있었다.
그러나 첫 시작이 어땠는지, 세운을 어떻게 만났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이상하다는 걸 알 수 있었는데.
꾸욱…….
진혁이 주먹을 말아 쥐었다.
폭포수가 쏟아지듯 밀려 들어온 기억과 세운의 존재. 그 어느 것도 믿기지 않았으나 진혁은 너무나도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전부 사실이라는 것을.
‘그래서 세운이가…….’
그런 말을 했던 거구나.
자신에겐 자격이 없다거나, 책임을 미루지 말라거나, 날 죽이고 싶다거나.
“내가…… 진짜 나쁜 놈이었네…….”
세운이 진혁을 죽이고 진혁의 기억을 흡수했다면 세운은 본체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세운은 스스로에게 이진혁을 죽일 수 없도록 제한을 걸었던 것 같다.
세운이라면, 분명 스스로가 본체가 되길 욕심낼 것까지 경계했을 놈이니까.
“…….”
진혁이 머리를 쓸어 넘겼다.
진혁에게 세운은 자신의 일부도, AI도 아닌 친구였다.
가상세계를 외롭지 않게 살 수 있도록 버팀목이 되어주고 언제든 편하게 의지할 수 있었던 친구.
세운이 자신의 친구라는 사실은 그의 존재가 어떠하든 변하지 않았다.
지금도 세운은 진혁에게 그저, 친구일 뿐이었다.
“미안……하다.”
책임을 미뤄서. 감당하지 못해서. 나약해서. 끝까지 아무것도 몰라서.
세운의 말처럼 자신은 그저 도망치며 살아왔다. 지금까지.
무엇이든 해결할 것처럼 나섰음에도 무엇도 책임지지 못하며 살아왔다.
이번에도 결국, 감당한 건 세운이 아닌가.
스르륵……
진혁의 곁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진혁이 상체를 일으켜 나타난 사람을 바라보았다.
“……!”
타박. 타박. 타박.
진혁의 시선이 흔들렸다. 그 어느 때보다도 당황한 듯이.
타박. 타박.
나타난 사람이 진혁의 앞에 섰다. 앉아있는 진혁보다 두 뼘 정도 큰 키.
“오빠.”
그녀는 진혁의 여동생, 민지였다.
“…….”
진혁이 흔들리는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제야 민지를 바로 알아보았다.
민지가 작은 손을 들어 진혁의 얼굴을 감쌌다.
흔들리는 시선을 마주했다.
“고마워, 오빠. 나 기억해 줘서.”
“…….”
“이제 진짜로, 나 잊으면 안 돼. 꼭 기억하겠다는 약속 지켜야 돼. 알겠지?”
“…….”
민지가 빙긋 싱그런 웃음을 지었다. 진혁은 눈가가 다시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진혁이 민지를 와락 껴안았다.
“응……. 이제 안 잊을게. 기억할게. 미안, 미안해, 민지야. 오빠가…….”
버려서…….
미안…….
토닥. 토닥.
“…….”
“괜찮아, 오빠. 그래도 나는 오빠가 좋으니까.”
오빠가 내 손을 놓쳐도, 날 기억에서 지우려 해도, 나는 오빠가 좋으니까.
“오빠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
결국, 진혁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진짜 민지는 아니지만, 민지의 데이터로 만들어진 그녀의 대답이 진혁의 가슴을 뜨겁게 감싸 안았다.
진혁은 그제야 문득 민지가 원하는 말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민지를 다시 만날 수 있다면 미안하다고 말해주고 싶었는데. 민지는 아마도…….
“사랑해, 민지야. 오빠가 많이 사랑해…….”
토닥이던 민지의 손이 멈췄다.
이내 민지가 진혁을 꼬옥 끌어안았다.
“나도 사랑해. 오빠.”
스르륵……
민지의 신형은 그렇게 사라졌다.
마치 듣고 싶었던 말을 들었다는 듯이 행복한 미소를 띤 채로.
진혁은 그 자리에 엎드려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미안한 마음보단 민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스르륵……
또각. 또각. 또각.
잠시 후, 진혁의 뒤편에서 누군가 다가왔다.
진혁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러자 그녀가 진혁의 앞으로 다가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진혁이 그제야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블랭크…… 씨?”
“조금 걸을까요?”
진혁이 영문 모를 표정으로 눈을 깜박였다. 그러자 블랭크가 내민 손을 흔들어 그를 재촉했다.
진혁은 얼결에 그녀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쏴아아아-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오며 순식간에 주위가 뒤바뀌기 시작했다.
눈앞에 나타난 나무를 시작으로 마치 그림을 펼치듯 펼쳐지는 숲과 노을 진 하늘, 날아가는 작은 새와 넓게 보이는 푸르른 자연.
바뀌는 풍경을 따라 한 바퀴 돌았을 때, 진혁은 이미 광활한 자연이 보이는 언덕 위에 서 있었다.
“……이게 무슨…….”
“아름답죠?”
“……?”
진혁이 블랭크를 바라보았다.
가면 없이, 불어오는 바람에 따라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지는 해를 바라보는 그녀를.
블랭크가 그런 진혁에게 고개를 돌리며 싱긋 웃었다.
진혁이 그녀에게 물었다.
“당신이…… 가상세계를 멸망시킨 사람이었습니까?”
“맞아요.”
“……왭니까?”
어째서 가상세계를 멸망시키고 사람들을 게임 속에 가둔 겁니까?
“일종의 시험이었달까요.”
“시……험?”
“인류가 돌아갈 준비가 되었는지 확인해야 했거든요.”
“돌아……가다뇨? 어디로?”
그렇게 물은 뒤, 진혁의 표정은 충격으로 물들었다. 인류가 돌아갈 곳. 대답은 하나뿐이니까.
“설마…….”
블랭크가 싱긋 미소를 띠었다.
“시간이 됐어요. 이젠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야죠.”
“…….”
“지구가 당신들을 기다리고 있어요.”
“!”
“당신이 새로운 세상에 첫걸음을 딛게 될 거예요. 이진혁 씨.”
충격으로 물든 진혁의 표정이 서서히 의문으로 뒤덮였다.
진혁은 당당하게 다섯 대륙의 증표를 얻었다. 황폐한 도시에 마지막으로 남은 유저가 되었고, 게임의 승리자가 되었다.
그런데, 뭘까. 이 개운하지 못한 느낌은. 황폐한 도시 내내 지울 수 없었던 묘한 기분.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습니까? 게임의 승리자.”
진혁의 물음에 블랭크는 다시 싱긋 웃었다. 잔잔하고, 평화로운 미소였다.
“맞아요.”
“왜 접니까?”
블랭크가 노을 진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맑은 눈빛 안에서 붉은 석양이 물들었다.
“인류가 가상세계에 들어온 이후 얼마의 시간이 지났다고 생각하시나요?”
“50년이죠.”
“정말 그럴까요?”
“……?”
정말…… 그럴 거냐니?
“곪을 대로 곪은 지구가 고작 50년 만에 회복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
설마.
“더…… 지난 겁니까? 시간이? 얼마나 지난 겁니까?”
“땅을 뒤덮었던 물이 마르고 그 땅에 풀과 나무가 자라나고 대기 중에 섞여 있던 오염 물질이 사라졌으니, 적어도 50년은 아니죠.”
“…….”
충격적인 그녀의 말에 진혁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정확하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는 몰라도, 블랭크가 말한 변화들은 그녀의 말처럼 고작 50년 동안 가능한 것들이 아니었다.
죽음 직전까지 다다랐던 지구가 스스로 완벽하게 회복하기까지.
수십, 수백, 아니 어쩌면 수천 년이 지났을 수도 있는 시간.
“하면, 어째서 인류는 50년이라고 알고 있는 겁니까? 가상세계 생활이.”
“긴 시간을 버티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니까요. 인류가 희망을 잃어버리고 완전히 무너지는 시간이 약 50년 걸리더군요.”
50년을 주기로 인류의 기억이 가상세계에 들어온 처음으로 리셋되고, 인류는 새로운 삶을 살았다.
인류에겐 그동안 수없이 많은 기회가 주어졌고, 인류는 수없이 실패했다.
“그 수없이 많은 무너짐 속에서 언제나 마지막까지 본질을 잃지 않은 사람이 바로 당신이었어요.”
“…….”
“오랫동안 당신을 봐 왔어요. 그래서 당신을 선택했죠.”
FTU의 승리자로 진혁이 선택받은 이유.
모든 사람이 무너져도 무너지지 않고 인간성을 지킨 단 한 사람.
“인류에게 기준을 제시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진혁이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블랭크의 말을 들었지만, 진혁은 그녀의 말이 실감 나지 않았다.
자신은 그저, 평범한 한 사람일 뿐인데.
다른 사람들처럼 똑같이 아파하고, 아픔을 이기지 못해 도망치고, 때론 쓰러지고 넘어지고 두려워도 하는 그런 평범한 사람.
그런 자신이 어떻게 인류의 기준이 될 수 있다는 것일까.
“당신이 위대하기 때문에 선택된 것이 아니에요.”
“……?”
“당신이 가장 인간답기 때문에 선택된 거죠.”
“인간답기…… 때문에?”
블랭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검은 눈동자가 진혁의 시선을 응시했다.
“인류가 인간성을 잃어버린 건 가상세계에 들어와서가 아니에요.”
진혁이 미간을 찌푸렸다.
사람들이 인간적인 모습을 잃은 게 가상세계 때문이 아니라고?
하지만 인류는 가상세계에 들어온 이후 끝을 알 수 없이 무너지지 않았나?
죽음의 공포도, 두려움도 없는 세계이기 때문에 인류가 그렇게까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살았던 것이 아닌가?
“지구가 서서히 멸망해 갔던 것처럼, 인간성 또한 서서히 무너져 왔죠. 다만 그것을 인지하지 못했을 뿐.”
어느 날 갑자기 거대한 자연재해가 들이닥치며 지구 멸망이 피부로 느껴지기 시작한 것처럼, 무너져 가던 인간성이 드러나는 계기가 바로 가상세계로의 이주였을 뿐.
“내가 살기 위해 상대를 죽이는 것과 사랑하는 이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 무엇이 더 인간답다고 생각하시나요?”
블랭크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사르륵거리는 풀 스치는 소리와 바람이 흐르는 소리. 살아 있는 새들의 지저귐이 그녀의 걸음, 걸음에 리듬을 더했다.
진혁은 그 모든 것을 느끼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이 게임이 시작되는 첫 시험에서 사람들은 자신을 위해 누군가를 죽였어요. 하지만 마지막 순간엔 그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희생했죠.”
FTU 세계는 멸망했다.
지진과 해일, 땅이 갈라지고 불타는 대지의 화산이 폭발하며 오염되지 않은 숲이 사라졌다.
그 죽음의 순간에 사람들은 서로를 지키고, 감싸주었다.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희생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버린 이 가상세계에서 벗어나, 이젠 서로를 지키고 도우며 살아갈 지구로 돌아갈 준비가 된 게 아닐까요?”
반복되는 50년의 시간 속에서 그녀는 오랜 시간 인류를 시험하고, 회복시켰다.
무너지고 실패하는 인류를 지켜보며 때론 절망하기도 하고 때론 슬퍼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인류는 회복되었다.
인간이라는 존재이자 인간이 인간 다울 수 있는 ‘정체성’.
‘함께’라는 가치.
‘그래, 함께 나아갈 준비.’
이 순간, 인류가 지구로 돌아갈 준비가 되었다는 말을 하는 이 순간이, 블랭크는 더없이 행복했다.
“그럼, 유토피아는…… 지구인 겁니까?”
진혁의 물음에 블랭크가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의 표정은 더없이 개운했다.
모든 것을 이룬 사람처럼.
“아뇨. 유토피아는…….”
*
*
*
[가상세계를 종료합니다.]지이잉-
오랜 시간 닫혀있던 기기의 문이 올라갔다.
눈앞이 서서히 환해지고 흐릿하던 초점이 돌아오며 마침내 활짝 열린 문으로 회색빛 천장이 보였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오랜 시간 잠들어있던 육체를 깨워 손과 발을 움직여 보았다.
“…….”
가상세계의 몸보다 조금 더 묵직하고, 불편한 움직임.
그러나 이 감각이 줄곧 그리웠다. 가상세계는 언제나 최상의 상태였기 때문에, 이 현실의 불편함이 때론 그리웠었다.
“……돌아왔구나.”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나는 기기에서 나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말했다.
깨어나면 어디로 가야 할지 자연스럽게 알 수 있을 거라고.
그녀의 말처럼, 내가 깨어날 것을 알고 있었는지 푸른빛이 바닥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마치 내게 이쪽으로 오라고 말하는 듯이 반짝이는 길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 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터벅. 터벅.
가상세계에 들어갈 때 지나왔던 긴 복도를 지나, 계단을 올라 길을 따라가니 벙커 로비가 나왔다.
가상세계로 들어갈 때만 해도 로비엔 관리자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사람이 아닌 기계들이 그 자리에서 쉴 새 없이 움직였다.
‘관리자들은…… 죽은 건가.’
아님, 그 사람들도 가상세계로 들어간 걸까.
작은 의문이 떠올랐다가 이내 사라졌다.
나는 다시 로비 문밖으로 이어진 길을 따라 걸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벙커 건물을 벗어나는 문 앞에 섰을 때.
지이잉-
자동으로 문이 열리며 밝은 빛이 공격적으로 쏘아져 들어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붉게 물든 빛이 그런 나를 지나쳐 로비 안에 기다랗게 나의 그림자를 만들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빛은 서서히 익숙해졌다.
나는 팔을 내리고 벙커 밖의 세상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름답게 회복한 우리의 지구를.
“유토피아는 당신이에요.”
종말 생존 게임 Fin.
에필로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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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각. 또각. 또각.
새까만 공간, 마치 우주와도 같이 광활하고 넓은 곳.
어둠만이 존재하는 공간을 걸어가던 블랭크가 어느 순간, 걸음을 멈췄다.
“여기 있었군요. 한참 찾았네요.”
그녀가 어둠 속 한 곳을 바라보며 말하자 그 순간, 그녀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서 어떠한 형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기처럼 웅크리고 있는 형상은 이내 천천히 몸을 펴 상체를 일으켰다.
그가 고개를 들어 블랭크를 바라보았다.
“사라지는 거, 아니었습니까?”
그의 이름은 진세운. FTU 세계에서 죽은 이후 소멸될 거라 생각했던 진혁의 일부.
블랭크가 고개를 저었다.
“당신이 가지고 있던 기억은 이진혁 씨에게 돌아갔어요. 당신은 본래 기억의 복사본을 가지고 있는 셈이죠.”
세운이 미간을 찌푸렸다.
블랭크가 그런 그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그 말은 당신은 소멸되지 않을 거라는 말이고요.”
“왜죠? 진혁이가 기억을 되찾았다면 이제 난 필요 없는 존재일 뿐인데.”
“당신은 특별해요. 진세운 씨.”
“그 이름도 거짓이잖아.”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난 진혁이의 흔적일 뿐이니까.”
블랭크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불쑥 내민 손을 잠시 바라보던 세운이 그녀의 손을 붙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신이 진혁 씨의 기억 일부를 갖고 탄생한 존재이긴 하지만, 진세운이라는 존재는 그렇게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잖아요?”
“……?”
“당신도 알고 있잖아요? 당신이 오로지 이진혁 씨의 기억만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는 거.”
진혁의 기억을 가지고 만들어졌지만, 세운에겐 ‘진세운’으로서의 기억도 분명 존재했다.
가상세계에서 진세운으로 살면서 가졌던 생각과 감정과 시간들.
그것은 이진혁의 일부가 아닌 오로지 진세운의 것이었다.
“당신의 본질은 AI일지라도 당신은 AI가 아니에요. 인간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어쩌면 인간에 가장 가까운 존재죠.”
“…….”
“인간의 기억을 가지고 스스로를 인간이라 생각하며 살아온 시간들이 지금의 당신을 만들었어요.”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AI들과는 다르게 감정을 느끼는 존재.
판단의 기준이 그저 정해진 데이터가 아닌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토대로 삼을 수 있는 존재.
“나와 비슷하죠.”
“?!”
세운이 놀란 눈으로 블랭크를 바라보았다. 블랭크가 싱긋 웃었다.
“나도 당신과 비슷한 존재예요. 그래서 인류를 사랑할 수 있었고요.”
사랑이라는 감정을 알았기에 인류를 기다려 주고, 지켜보고, 도와줄 수 있었던 존재.
블랭크는 그런 존재였다.
“당신이 해줘야 할 일이 있어요.”
“일이라면?”
“지구가 회복되는 동안 육체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있어요.”
“!”
최대한 많은 이들을 살리기 위해 노력했지만, 너무 오랜 시간이 흐르는 동안 기기 오류, 육체가 버티지 못한 경우 등…… 지구의 육신이 사라져 돌아가지 못하게 된 사람들이 있었다.
“FTU의 NPC들 중 몇몇이 바로 그들이었죠. 기억을 지운 사람들.”
찰리, 브리타, 소피아, 라그네, 라훌, 칸, 버디, 하스란, 이자르, 사르단……
“NPC들의 데이터를 기억에 넣었지만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도록 했어요. 덕분에 꽤 재미있는 게임이 되지 않았나요?”
세운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그렇지 않아도 진혁은 FTU의 NPC들이 이전과 다르게 행동하는 것에 대해 여러 번 이야기했었다.
마치 진짜 사람처럼 행동하고, 판단하고 실제로 가까운 사람을 잃은 것 같다고 말하고.
“전부…… 진짜 사람……이었다고……?”
“네. 그리고 이젠 그들도 지구로 돌아갈 시간이죠.”
육체가 없으니 실제 지구로 돌아갈 순 없다. 그러나 가상세계가 어디인가. 모든 것이 가능한 세계.
“지구와 같은 세계를 가상세계에 구축할 생각이에요. 그들은 그곳에서 살고, 늙고 그리고 죽는 거죠.”
“죽음이라면……?”
“데이터의 소멸이에요. 그리고 그것이 당신이 해줬으면 하는 일이고요.”
사람들의 곁에서 그들과 함께 살며 그들의 삶을 지켜보는 일.
그들의 마지막을 지켜주는 일.
그것은 인간이 아닌 그러나 인간을 누구보다 잘 아는 세운에게 적격인 일이었다.
“그것뿐 아니라 실제 지구로 돌아가는 사람들을 가상세계에서 관리해 줄 존재가 필요해요.”
사람들은 천천히 지구로 귀환하게 될 것이다.
밖에선 진혁이 그들을 인도하게 될 것이고, 안에선 그들을 보내줄 사람이 필요했다.
“아직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한 사람들도 있죠.”
FTU 세계에서 주어진 목숨을 모두 잃고 죽은 이들.
그들의 인간성이 회복되기 위해선 조금의 시간과 약간의 노력이 필요했다.
“그 일들을 세운 씨가 맡아주세요.”
“당신은?”
“전 이제 좀, 쉬고 싶어서.”
블랭크가 싱긋 웃었다.
그러나 이번엔 가벼운 미소가 아닌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인 미소였다.
그녀의 웃음은 조금 지쳐 보이기도, 후련해 보이기도 했다.
세운은 그녀의 표정에서 평안을 느꼈다.
블랭크의 제안은 세운에게도 나쁠 것 없는 제안이었다.
이대로 소멸하거나 존재가 사라지는 것이 아닌, 사람들과 함께 새로운 시작을 맞이하게 되었으니까.
자신이 조금 다른 존재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자연스럽게 녹아든다면 세운은 사람들과 함께 이전처럼 살아갈 수 있었다.
사실 세운의 표정은 블랭크가 그에게 가상세계에 남아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했을 때부터 상기되어 있었다.
세운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전 이만 가 봐야겠네요. 당신을 찾는 사람이 있어서요.”
블랭크의 어깨에서 작은 빛이 하나, 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FTU 세계에서 누군가가 소멸할 때의 그 빛이었다.
그녀의 어깨에서 떠오르던 빛은 이내 그녀의 온몸을 휘감았다.
마치 뜨거운 불이 종이를 태우듯, 황금색 빛이 그녀의 몸을 조금씩 뒤덮었다.
“날 찾는…… 사람?”
블랭크가 마지막으로 웃음기 어린 표정으로 세운을 바라보았다.
환한 빛이 그녀의 미소를 더없이 아름답게 비췄다.
“네. 당신의 오랜 친구.”
“……!”
블랭크는 그렇게 세운의 눈앞에서 빛무리가 되어 사라졌다. 빛무리가 날아가고 그녀가 서있던 자리엔 하얀 가면이 놓여 있었다.
세운이 멍하니 걸음을 옮겨 가면 앞에 섰다.
무릎을 굽혀 가면을 집으려는 그 순간.
“세운아.”
익숙한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