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 Chapter 1085
1085화
소문은 순식간에 퍼졌다.
입에서 입으로.
전서구의 날갯짓으로.
채찍질에 따라 산과 들을 질주하는 말발굽과 하늘을 뿌옇게 물들이는 봉화(烽火)의 연기로.
그리고 이 엄청난 소문을 듣고 동요한 사람들이 진위 여부를 가리기도 전에, 그들은 두 눈으로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쾌속하게 강물을 가르며 나아가는 수많은 선박과 순풍을 받아 위풍당당하게 흩날리는 깃발들을.
장강수로맹(長江水澇盟).
순풍을 받아 한껏 부풀어 오른 깃발에 적혀 있던 다섯 글자를 확인한 순간, 사람들은 더 이상의 부정은 현실 도피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 그들이 보고 들은 모든 것은 헛소문 따위가 아니었다.
진실이었다.
천하의 묵인하에 장강에 기생하여 살아가던 한낱 수적들이, 마침내 장강의 진정한 지배자로 거듭난 것이다.
그것도 무려 천하의 주인인 대국을 상대로.
“……천지신명(天地神明)이시여.”
누군가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침음은 공허했다.
바로 그 천명(天命)을 받아 세워진 이 거대한 제국이 몰락하고 있었으니까.
아니, 그들의 하늘이.
“이것이 역천(逆天)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 역천이란 말인가!”
군웅할거의 시대가 종막을 고하고 통일 왕조가 탄생한 지 어언 일백여 년.
천자가 다스리는 대국을 하늘로 떠받들던 촌부들은 불안에 떨었고, 당연했던 이치가 무너졌음을 깨달은 유생들은 신음했으며, 배신당한 무림인들은 분노와 경악에 휩싸였다.
“저 도적놈들이 기어코……!”
“처음부터 석연치 않았소. 애당초 흑도(黑徒) 따위를 믿어선 안 되었단 말이오!”
하지만 모두를 충격에 빠트린 소식은 장강수로맹의 배신만이 아니었다.
“이틀 전, 호북과 섬서 일대에서 녹림도들이 반기를 일으켰다고 합니다!”
장강수로맹과 함께 천하의 흑도를 양분하는 녹림맹의 준동.
그리고 거기에 더하여, 저 머나먼 장성(長城) 밖에서도 먹구름이 몰려들고 있음을 사람들은 뒤늦게 알아차렸다.
“사천에서 전해온 급보요! 서장(西藏)의 포달랍궁(布達拉宮)이 움직이고 있소!”
포달랍궁.
북해의 빙궁, 남만의 야수궁과 함께 새외삼세(塞外三勢)라 일컬어지는 밀승(密僧)들이 마침내 오랜 침묵을 깨고 몸을 일으켰다는 소식에는 무림인 중 그 누구도 놀라지 않았다.
엄연히 중원에 속한 그들의 시선에서, 포달랍궁은 아득한 과거부터 사악한 교리를 따르는 사이비(似而非)에 불과한 존재들.
이미 신 무림맹 창설 이후부터 여러 차례 사자를 보내어 동맹을 청했음에도, 늘 묵묵부답으로 일관해 왔던 그들이 지금 같은 상황에 나선다는 것은 한 가지 사실만을 뜻했다.
“……암천, 또다시 놈들이군.”
하지만 다행히도 사천에는 강력한 지원군이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중도(中道)를 지키고 있는 북해빙궁과 달리, 한 청년의 놀라운 활약으로 내전의 위기를 극복하고 무림맹과 동맹을 결의한 남만야수궁이.
그렇기에 세간의 이목은 장강수로맹과 녹림맹의 움직임을 향해 집중되었다.
처음 진실을 접하고 충격에 휩싸인 것도 잠시, 이제는 이런 흑도들의 준동을 비웃는 목소리들도 적지 않았다.
“제아무리 한 차례 대승을 거두었다고는 하나, 흑도는 흑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그리 틀린 말은 아니었다.
장강수로맹과 녹림맹 산하의 총 전력이 이만에 가까울 정도라고는 하나, 단순히 머릿수만으로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다면 천하 무림은 개방의 것이었을 테니까.
무림맹을 중심으로 완전히 결집한 정파 무림의 전력은, 고작 이 정도로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모두에게 있었다.
“섬서에는 화산과 종남, 호북에는 무당과 제갈세가가 있소. 더불어 천자 휘하의 금군(禁軍)이 나선다면 놈들은 암천과 손잡은 것을 후회하게 될 거요.”
그러나 이 예측에는 몇 가지의 치명적인 오류가 있었다.
첫째는 본산에 남아 있는 종남파의 전력이 극히 미미했다는 것이었고.
둘째는 수십여 만에 달하는 금군 중 대부분이 천자가 머무르는 황도(皇都)가 위치한 강소성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이었으며.
마지막 셋째는, 모습을 감출 생각도 없이 훤한 대낮에 거침없이 서쪽을 향해 나아가는 녹림맹과 장강수로맹의 군세가 생각 이상으로 거대하다는 사실이었다.
마치, 눈 덮인 비탈길을 따라 서서히 크기를 불려가는 눈덩이처럼.
“호북에 결집해 있던 녹림도들이 반 시진 전 통산(通山)을 넘었답니다! 현재까지 추정된 머릿수는 약 오천!”
“오천이라니, 그 무슨……!”
“반나절 전만 하더라도 삼천 남짓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 그것이. 아마 각 산채에 흩어져 있던 병력들이 합류한 것 같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만 전령이 가져온 소식을 강력히 부정하던 그들은 곧 알게 되었다.
이미 감숙성에서의 대전투가 벌어지기도 전, 은밀하게 호북과 섬서 일대를 중심으로 결집한 두 집단의 도적들에게 또 다른 지원군이 합류했음을.
그것도 중원 무림이 가장 경계하고 있던 모종의 수단을 통해서.
“……빌어먹을, 놈들이 바로 그 저주받을 사술(邪術)을 쓴 것이 틀림없소.”
“사술이라면. 설마?”
“맞소. 이동진(移動陳)이오.”
처음에는 철저한 보안으로 틀어막았던 이동진의 존재는, 이제 더 이상 극소수만의 비밀이 아니었다.
사람에게 눈과 귀가 있는 한, 언제고 비밀은 새어 나가는 법.
무림맹 수뇌부와 천면호리 송호가 이끄는 은영각이 전면에 나섰지만, 어째서인지 이동진에 관한 비밀은 알려졌고 오늘날에 이르러 마침내 그 실체를 확인한 문주와 가주들은 서늘한 한기를 느꼈다.
‘쳐야 한다. 지금 바로.’
장강수로맹과 녹림맹은 어디까지나 저마다의 연합체다.
적게는 수십, 많게는 수백에서 일천까지의 수하를 거느린 채주들이 각자의 맹주에게 충성을 바치고 명령에 따라 집결과 해산을 반복한다.
따라서 놈들을 칠 수 있는 가장 좋은 적기는 바로 지금이었다.
아직 적들이 완전히 결집하지 않았을 때. 한자리에 모여 강력한 군집체를 이루지 않았을 때.
하지만 기어코 모두가 내심 우려했던 변수가 발생하고야 말았다.
도무지 어딘가에 있는지조차 모르는 이동진과 이를 통해 흑도들에게 합류하고 있는 암천의 강력한 전력이었다.
‘만약, 지금 놈들과 맞선다면?’
위험하다.
이동진의 존재 자체도 엄청난 위협이지만,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당장 무림의 태산북두인 소림이, 치명적인 독과 암기로 오대세가의 일익을 차지한 사천당문이, 그리고 새외의 남만야수궁과 하북팽가마저 극심한 피해를 입었으니까.
그뿐인가. 알려진 바에 의하면 공동과 종남 역시 감숙에서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고 했다.
누구도 기억하기 싫은 정마대전 당시와 비견해도 절대 뒤떨어지지 않을 정도의, 아니 그 이상의 타격을.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천하 무림을 지탱하는 열다섯 그루의 거목(巨木)들마저 암천이라는 먹구름이 일으킨 태풍 앞에 뿌리가 흔들리고 있는 현재,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걸고 위험과 직면할 용기를 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혈혈단신이 아닌, 식솔들의 목숨을 책임져야 하는 문주와 가주들에게는 더더욱.
“나는…… 포기하겠소.”
“석 대협! 그게 무슨 말이오!”
“냉정하게 봅시다.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우리의 전력만으로 놈들에게 맞설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그건!”
“그대도 알고 있지 않소. 결과는 정해져 있다는 것을. 지금은 조금이라도 힘을 아껴야 할 때요. 다행히 암천과 손을 잡은 저 배신자들은 오직 서쪽으로만 향하고 있으니, 당장의 충돌은 피할 수 있을 거요.”
“다행? 지금 다행이라고 했소? 놈들이 무엇을 노리는지 정녕 모르고 하는 소리요?”
“알고 있소. 중원의 지원군을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들고 청해성을 완전히 손아귀에 넣는 것. 그게 놈들의 목적일 테지.”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하지만 이번만큼은 어쩔 수 없소. 나는 초절정 고수도, 구파일방의 문주도 아니니. 미안하오.”
“석 대협!”
“부디 대협이라 부르지 마시오. 내게는 그럴 만한 자격이 없소. 그저 식솔들의 안위만 챙기고자 하는 비겁한 문주일 뿐이지.”
씁쓸하게 뇌까린 그가 자리를 뜨자, 침잠한 얼굴로 고개를 떨구고 있던 몇몇 문주들도 그를 따라 일어났다.
그리고 상석(上席)에 앉아, 조용히 그 광경을 바라보던 청수한 인상의 중년인 역시도.
드륵.
배신감과 분노, 더불어 마음 한구석에 존재하는 공감으로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던 이들은 중년인의 그런 모습에 눈을 부릅떴다.
설령 이곳에 있는 모두가 자리를 뜰지라도, 그만큼은 아닐 거라 굳게 믿고 있었으니까.
“가, 가주(家主)!”
“이게 무슨!”
하지만 그들의 불길한 짐작과 달리, 중년인은 담담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해 보일 뿐이었다.
“아, 오해하지 말게. 잠시 바람이나 쐬고 올 테니까.”
사람들은 안도했지만,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호북 무림의 영수 중 삼분지 일이 빠져나간 상황에서 바람이나 쐬고 온다니.
실로 그 다운 말이었지만, 어처구니없기는 매한가지였다.
“하필이면 지금 말입니까?”
“그렇네. 지금.”
“논의할 사항이 너무 많습니다. 당장 무림맹에서도 제대로 된 결단을 내리지 않고 있…….”
“정 급하다니 알겠네. 그럼 여기서 싸지, 뭐.”
“예?”
어리둥절해하는 사람들을 향해, 중년인이 심각한 표정으로 바지춤을 움켜잡았다.
“방광이 터질 것 같네.”
“……!”
“이제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아니면 한참 동안 본가를 벗어나 바깥 생활을 오래 해서인지는 몰라도 오줌보가 약해진 모양일세. 게다가 그저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도 엉덩이의 은밀한 부위가 저릿저릿한 것이…….”
주절주절 말을 이어가던 중년인이 사람들의 표정을 보고 입맛을 다셨다.
“이것 참, 내가 괜한 얘기를 했군. 앞서 하던 얘기나 계속하세.”
“……그냥 다녀오십시오.”
“아니긴 뭘. 그냥 여기에서 지리겠네. 제갈무후(諸葛武侯)께서도 한창 바쁠 때는 그러셨을 거야.”
“다녀오십시오. 제발.”
“어라, 그럼 그래도 되겠나?”
“예. 부디 저희를 위해서라도.”
“자네들이 이토록 간절하게 세 번이나 청하니, 삼고초려(三顧草廬)의 고사를 따라야겠구먼.”
반쯤 체념한 사람들을 보며 빙긋 웃은 중년인, 아니 제갈세가의 가주인 와룡객(臥龍客) 제갈풍은 후다닥 자리를 벗어났다.
그리고 측간이 아닌 미로처럼 얽힌 길을 지나길 한참, 가주에게만 허락된 내당의 화원에 이르러 비로소 발걸음을 멈추었다.
“눈에 띄지 않게 머무르시는 건 좋지만, 그래도 어디에 계실지 정도는 알려주셔야지요.”
넓은 화원의 한구석.
과거 제갈공명이 손수 심었다는 뽕나무밭을 바라보고 있던 누군가의 뒷모습을 향해, 제갈풍이 나직이 덧붙였다.
“안 그렇습니까? 맹주(盟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