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 Chapter 1131
로그인 무림 1131화(1131/1141)
멈춰 버린 시간과 영원과도 같은 정적 속에서, 나는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머릿속은 자욱한 안개에 휩싸인 듯 몽롱한데, 시야는 어느 때보다 또렷했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이 꿈은 아닐까 생각될 만큼.
하지만 곧이어 귓가에 닿은 나직한 음성은, 지금 이 순간이 결코 허상(虛像) 따위가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우기에 충분했다.
“보았느냐?”
나는 고개를 들어 멍하니 노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금 전 공간을 양단(兩斷)하며 날아들었던, 고작 실 한오라기 차이로 빗나갔던 무형의 기를 떠올리며 닫혀 있던 입술을 열었다.
“예. 보았습니다.”
모든 것이 자연스러웠다.
어느덧 지극히 공손해진 존대도, 그런 내 태도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노인의 모습도.
“무엇을?”
“한 줄기의 빛을, 선을 보았습니다.”
노인이 무릎까지 내려온 새하얀 수염을 쓰다듬었다.
“어찌 그럴 수 있었을까. 분명 무형(無形)이었을 터인데.”
“유형(有形)이었습니다. 그 순간만큼은.”
“눈을 감고 있었는데도?”
“눈으로 본 것이 아닙니다.”
“보았으되, 보지 않았다니. 하면 무엇이란 말이냐.”
“그건.”
나는 문득 혼란에 빠졌다.
노인의 질문에 대한 답을 몰라서가 아니라, 듣는 순간 뇌리를 스친 생각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터무니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침묵인 동시에 대답이나 다름없었다.
도무지 깊이를 짐작할 수 없는 노인의 시선은, 이미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있었으니까.
“인간은 종종 진실을 눈앞에 두고도 믿지 못해 지나쳐 가 버리곤 하지. 참으로 애석한 일이야.”
저벅.
한 걸음.
단 일보(一步)로 모든 거리를 지워 버린 노인이 나를 향해 속삭인다.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보았고, 피하지 못할 것을 피했다. 한데 너는 어찌하여 스스로 행하고도 믿지 못하느냐?”
“……!”
“가부좌를 틀어라.”
여전히 꿈처럼 몽롱한 의식 속에서, 나는 노인의 말에 따라 홀린 듯 자세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어느덧 귀가 아닌 머릿속에서 울려 퍼지는 노인의 음성을 들었다.
– 정신을 시냇물처럼 맑게 하여, 집중을 유지하고 흐름에 몸을 맡겨라.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의 이 상황을, 비슷한 내용을 언젠가 들어 본 적이 있던 것 같다는 생각이.
하지만 일순간 머릿속을 스친 짧은 상념은, 깊이 가라앉는 의식과 함께 사라졌다.
화아아악.
끊임없이 명멸(明滅)하며 눈앞을 어지럽히는 빛과 어둠.
그 아득한 혼란 속에서 나는 모든 것을 잊었다.
이곳이 어디이며, 내가 누구인지.
그러나 어디선가 들려오는 목소리만큼은 놀라울 만큼 선명했다.
– 다시 한번 떠올려라. 네가 보았던 것을. 그 순간의 감각을.
나는 느리게 심호흡했다.
그와 동시에 형체도, 색과 향도 존재하지 않던 그것의 이름을 마음속으로 뇌까렸다.
‘기(氣).’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것.
세상 모든 만물을 이루는 근원이자 씨앗.
그래.
비록 잠시뿐이었으나, 나는 그것의 실체를 똑똑히 보았다.
감각을 넘어선 새로운 영역을 통해서.
그리고 내 영혼 깊숙한 곳에서 울려 퍼지는 저 목소리의 주인은, 이미 그 영역에 발을 디딘 존재나 다름없었다.
– 다시 묻겠다. 너는 무엇으로 그것을 볼 수 있었느냐?
맞다.
노인은 아직 앞서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을 듣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나 또한 망설임 없이 대답할 수 있었다.
나조차도 믿지 못했던, 내 안에 숨겨진 또 하나의 눈을.
‘마음. 아니…….’
심안(心眼).
마침내 찾아낸 두 글자가 낙인처럼 뇌리에 새겨진 그 순간.
– 늘 그래 왔듯이, 좋은 판단이다.
파앗!
노인의 나직한 음성과 함께, 쉴 새 없이 눈앞을 어지럽히던 빛과 어둠이 흩어졌다.
정확히는,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그랬다.
“아.”
나는 참았던 숨을 토해 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쩌저저적.
어째서일까.
어떻게 이런 현상이 가능한 것일까.
끝없이 광활한 회백색의 공간이 흔들리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깨질 듯한 유리처럼 줄기줄기 금이 그어지고, 이러한 변화를 따라 그 너머에 우뚝 서 있던 한 사람의 모습 역시 뒤틀리고 있었다.
“놀랄 것 없다. 단지 잠시 허락된 시간이 끝나 가고 있을 뿐이니.”
눈 앞에 펼쳐진 믿을 수 없는 광경과 달리, 침착하면서도 평온한 어조.
나는 그런 노인을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오랫동안 잊고 있던 기억의 한 조각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당신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분명히.”
노인이 빙긋 웃었다.
“그리 생각하느냐.”
부정도, 긍정도 아닌 대답.
그러나 나는 비로소 확신하고 있었다.
낯설다고 생각했던 이 회백색 공간도, 노인의 모습도 그때와는 달라졌을지언정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고.
그와 더불어, 환골탈태(換骨奪胎) 이후부터 간혹 환청처럼 찾아왔던 정체불명의 목소리가 누구의 것이었는지도.
“당신은.”
나는 가까스로 쥐어 짜낸 음성과 함께, 말없이 웃고 있는 노인을.
아니.
‘도우미’를 바라보았다.
무림이라는 미지의 세계에서 이제 막 첫발을 내디뎠던 내게, 처음으로 운기조식(運氣調息)을 알려 주었던 그를.
당시에는 그저 튜토리얼 시스템의 일부라 여겼던, 그렇기에 오랫동안 잊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미지의 존재를.
“……도대체 누굽니까.”
벼락이 정수리를 파고든다면 이런 기분일까.
마침내 마주한 거대한 진실 앞에, 나는 해일처럼 밀려오는 충격을 느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동시에,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노인은 결코 내 물음에 답하지 않을 것이며, 지금의 이 짧은 만남조차도 끝자락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사실을.
“대답은 굳이 하지 않아도 되겠군. 이미 잘 알고 있으니.”
그그그극.
일그러지는 공간 속, 나는 이제 얼굴조차 제대로 분간되지 않는 노인을 향해 외쳤다.
“그럼,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글쎄, 앞으로의 일은 나도 모르지. 다만 지금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갈 수밖에.”
“그게 무슨……!”
“진태경.”
낮게 가라앉은 음성.
불현듯 뒷말을 가로막은 노인이 입을 열었다.
“최선을 다하거라. 그래야만 모두를, 너 자신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
“자, 이제 떠날 시간이다. 네가 머물러야 할 곳으로.”
그 말에 담긴 의미를 깨달은 내가 눈을 부릅뜬 그 순간.
스아아악.
휘몰아치듯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시야 너머로, 반짝이는 무언가가 내 손에 닿았다.
환청처럼 울려 퍼지는 노인의 마지막 한 마디와 함께.
– 받아라. 이 늙은이가 주는 마지막 선물이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것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흐릿해지는 의식 사이로, 어디선가 울려 퍼지는 한 줄기의 소리를 들었다.
이제는 두 번 다시 들을 수 없을 거라 확신했던, 맑은 종소리를.
띠링.
저 멀리서 달려온 휘황한 빛이, 시야를 덮었다.
* * *
홀로 남은 노인은 한동안 말없이 텅 빈 자리를 바라보았다.
지금 막 사라진 누군가의 눈에는 회백색 공간 전체가 소멸하는 것처럼 보였겠지만, 노인은 잘 알고 있었다.
이 공간은 영원할 것이며, 진태경은 잠시 다녀온 손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그리고 자신은 또다시 기약 없는 기다림을 이어 가야만 한다는 것을.
“언제쯤 끝낼 수 있을까.”
노인은 작게 읊조렸다.
홀로 머물었던 시간만큼, 그의 혼잣말은 습관이 되어 버린 지 오래였다.
“아니, 끝나기는 하는 것일까.”
주름진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띠며, 노인은 문득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방으로 끝없이 펼쳐진 회백색 공간.
차갑고도 창백한 그곳은 노인의 유일한 보금자리이자, 출구도 창살도 없는 거대한 감옥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한 사실에서 오는 찰나의 공허함도 잠시, 노인의 눈빛은 이내 담담하게 가라앉았다.
노인이 이 감옥의 죄수가 된 것은, 다른 누구의 강요가 아닌 그 자신의 선택이었으므로.
“그래, 그러니 되었다.”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작게 중얼거린 노인은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어느 순간 불현듯 제자리에 멈춰 선 채, 고개를 돌려 자신이 돌아온 길을 바라보았다.
아니, 정확히는 오랜만에 찾아온 손님이 머물렀던 그 자리를.
“진태경.”
혀끝에 맴도는 이름을 흘려 보내며, 노인은 생각했다.
과연 그가 해낼 수 있을지.
자신의 선택이 진정으로 옳았던 것인지.
만약 자신의 선택이 틀렸다면, 앞으로 얼마나 끔찍하고도 잔혹한 미래가 펼쳐질지.
하지만 그 모든 고민은 무의미했다.
노인은 이미 선택을 내렸고, 그의 도움으로 인해 진태경은 또 한 번의 새로운 기회를 얻게 되었으니까.
“별수 없구나. 너를 믿어 보는 수밖에.”
닿지 않을 한 마디와 함께, 노인은 멈춰 있던 발걸음을 뗐다.
그리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끝없이 펼쳐진 회백색 공간을, 지금껏 늘 그래 왔듯이.
* * *
화왕(火王) 적천강은 울고 있었다.
숨이 멎은 제자의 몸뚱어리를 끌어안은 채, 숨죽여 흐느끼고 있는 그에게는 이미 주위의 모든 것이 무의미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끊이지 않고 울려 퍼지는 함성과 강철의 소음도,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도.
하지만 하나뿐인 제자를 잃은 스승은 눈물을 참지 않았다.
아니, 참을 수 없었다.
이 년.
일백여 년이 넘는 세월 중 고작 이 년에 불과했으나, 진태경과 함께한 시간은 그 어느 때보다 밝게 빛났었기에.
자신이 가장 어두울 때 찾아와 준 유일한 빛이었기에.
한데 그런 진태경이, 제자가 죽었다.
제발 살아 달라는 스승의 부탁을 뒤로한 채, 기어코 먼 곳으로 떠나고야 말았다.
‘죄송해요, 스승님.’
그 마지막 음성이 귓전에서 떠나질 않았다.
슬퍼할 스승을 위해 애써 끌어올린 입꼬리가, 반쯤 감긴 채 텅 비어 버린 눈동자가 지금 이 순간에도 낙인처럼 적천강의 가슴을 지지고 있었다.
아득한 비통함에 휩싸여 아무것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자꾸만 차오르는 눈물에 가려져,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할 만큼.
툭.
스승의 볼을 타고 떨어져 내린 눈물 한 방울이, 죽은 제자의 손등에 닿은 그 순간.
스륵.
불현듯 파르르 떨리는 수면과 함께, 핏물에 잠겨 있던 손가락이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