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 Chapter 249
#248화
대웅전(大雄殿)에 앉아 꾸벅꾸벅 졸던 법왕 굉도는 문득 눈을 떴다.
잠에서 깬 그의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우두커니 선 채 불상을 올려다보는 누군가의 자그마한 등이었다.
“언제 왔나?”
“일각쯤 됐던가.”
“그래, 자랑스러운 제자는 만나고 왔고?”
적천강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자는 무슨.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오, 그럼 자랑스럽긴 한가 보군.”
“크흠. 그 정도는 당연히 해 줘야지. 성라대연 예선이 뭐 별거라고.”
“자네도 해 본 적 없잖나.”
“노부 때는 저런 게 없었지. 정파들끼리도 서로 남무림이네, 북무림이네 하면서 치고받고 싸우던 것들이 무슨.”
“그것도 그렇지.”
굉도는 기지개를 켰다. 우두둑, 하는 소리가 몸 곳곳에서 울렸다.
“그나저나 귀신이 곡할 노릇이로군. 기척도 느끼지 못했는데. 못 본 사이 또 무공이 는 겐가?”
“귀신이 곡을 왜 하나. 부처가 노할 노릇이지. 소림사 방장이라는 놈이 대웅전에서 병든 닭처럼 졸고 있으니.”
“같이 늙어 가는 처지에 너무 뭐라 하지 말게.”
돌아선 적천강이 버럭 외쳤다.
“아, 늙기는 누가 늙어! 그러게 무공 수련을 꾸준히 했어야지. 노부를 봐. 십 년은 팔팔할 것 같지 않나?”
적천강을 찬찬히 뜯어본 굉도가 염주를 굴렸다.
“적 시주. 부디 극락왕생하시게.”
“이런 염병할 땡중을 봤나!”
오랜 지우의 반응에 굉도가 피식 웃었다.
“십 년은 모르겠고, 삼 년 정도는 괜찮을 것도 같네.”
“그것도 천기(天氣)인지 뭔지가 알려 준 건가?”
“천기라, 오래전 빈승이 본 바에 의하면 자네는 진즉 죽고 없는 몸일세.”
“뭐라?”
순간 적천강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굉도의 표정과 태도에서 진심을 읽었기 때문이었다.
“왜 미리 말해 주지 않았나?”
“흐름이 바뀌었으니까.”
“흐름이 바뀌었다?”
“하늘은 참으로 광활하면서도 변화무쌍한 공간일세. 자네의 별이 빛을 잃어 가던 그때 북쪽 땅에서 신성이 떠올랐지.”
“……진태경. 그 아이로군.”
“천기가 빈승에게 알려 주었네. 신성이 가는 길에 화왕이 있노라고. 지난 일 년간 지켜보니 과연 그러했네. 자네의 별은 그 어느 때보다 밝았어.”
적천강의 뇌리에 지금까지의 일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노쇠했고 노환을 앓고 있었다. 오래전 떠나보낸 장천을 찾기 시작한 것은 떠나기 전 마지막 정리를 하기 위해서였다.
지금도 세상 어딘가에서 악행을 벌이고 있을 옛 제자를 자신의 손으로 직접 처치하고 화산의 검성에게 열화문의 후대를 맡기고자 했다.
그리고…….
‘녀석을 만났지.’
노환은 세월의 저주인 동시에 마음의 병이다.
적천강이 삶이라는 단어를 떨어트리려 할 때, 진태경이라는 손이 그것을 붙잡았다.
그렇게 적천강은 변화했다.
말 많고 천방지축인 녀석을 볼수록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던 불씨가 되살아났다.
‘더, 더 오래 살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시각각 정신을 좀먹는 노환에서 벗어나야 했다.
지난 일 년, 그는 무공에 더욱 깊이 몰두했다. 가르치면서 배웠고 상념을 통해 깨달았다.
열화동에서 성장한 것은 진태경뿐만이 아니다. 적천강 또한 한 발 나아갔다.
“삼 년이라…….”
적천강의 낮은 목소리가 대웅전을 울렸다.
“조만간 그 삼 년을 십 년, 아니 백 년으로 만들어 주지.”
굉도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욕심이 과하군. 도대체 언제까지 살 셈인가?”
“몰라. 어떻게든 꾸역꾸역 살아 볼 거야.”
“환골탈태를 세 번 정도는 해야 할 텐데?”
“빌어먹을. 그렇다면 그냥 십 년으로 만족해야겠군. 그러니 자네도 그때까지만 버텨. 아직 건재함을 보여 줘야지.”
굉도가 가만히 염주를 굴렸다.
“우리는 이미 흘러간 물결일세. 그토록 강건하던 창왕(槍王)도, 누구보다 패기 넘치던 낭왕(浪王)도 이미 세상을 떠났고 남은 이들도 늙을 만큼 늙었어. 행방을 모르는 누군가는 이미 죽었을지도 모르지.”
십왕은 정마대전 당시 맹위를 떨친 열 명의 초절정 고수에게 붙은 이름이다.
그들 중 누군가는 세월에 스러지고, 누군가는 적의 손에 죽었다.
십왕이라 불리지만 실상은 여덟이었고 이제는 죽음을 준비해야 할 나이였다.
침음성을 흘리던 적천강이 버럭 외쳤다.
“약한 소리 집어치우게! 그게 웬 청승인가?”
그러나 굉도는 평온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무명. 그 아이에게 어젯밤 녹옥불장을 맡겼네.”
“……!”
“나한동(羅漢洞)에서 준비를 끝마치고 나올 때쯤이면 괜찮은 그릇으로 성장해 있겠지. 그때까지 방장 직을 맡을 이도 정해 두었어.”
“뭐, 뭐라고?”
적천강은 자신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녹옥불장은 천 년간 내려져 온 소림사의 신물이다. 그런 신물을 제자에게 맡긴 것으로도 모자라 차기 방장까지 정했다니.
지금 적천강의 눈에 비친 굉도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떠날 준비를 하는 사람의 그것과 같았다.
“땡중. 자네 혹시…….”
말꼬리를 흐렸지만 이어질 말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이었다.
굉도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걸렸다.
“빈승은 이번 성라대연을 마지막으로 물러날 생각이네. 하늘이 허락한다면 일 년 정도는 더 명줄을 붙잡고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거기까지일세.”
“천기, 천기가 그리 말하던가?”
“쉬어야겠네. 오늘은 이만 나가 주시게.”
“이보게, 굉도!”
“아미타불.”
굉도는 목탁을 들어 두드리기 시작했다. 대웅전을 울리는 맑은소리에 입을 다문 적천강은 한참 후에야 발길을 돌렸다.
* * *
사흘 동안 진행된 예선 심사는 그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오만여 명에 달하는 지원자 중 본선에 올라갈 자격을 얻은 것은 고작 1%, 오백여 명에 불과했으니까.
주최 측은 그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았다.
아, 물론 그중엔 나도 포함되어 있었다.
“저기 봐. 산서잠룡 진태경이다.”
“뭐? 저 새파란 놈이? 내 막내 사제보다 어려 보이는데.”
“나이가 무슨 상관인가? 지닌 무재가 중요한 거지. 그나저나 대단하군. 화왕의 제자가 된 지 고작 일 년 만에 이렇게까지…….”
“염병. 천무지체라도 된다는 건가?”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서른 초반으로 보이는 사내가 움찔하더니 슬쩍 시선을 피한다.
내가 한 소리 할 줄 알았던 모양인데, 완전히 잘못 짚었다.
‘자식, 감 좋네.’
시스템의 가능성은 끝도 없었다. 과거에도 적천강이 천무지체라 부를 만큼 뛰어났던 근골은, 구화산에서 수련하는 동안 더욱 발전했다.
나중에는 적천강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정도였다.
‘괴물 같은 놈. 얼마나 더 위로 올라갈 셈이냐?’
‘갈 수 있는 데까지는 가 봐야죠.’
‘노부가 네 녀석이 가진 근골의 절반만 갖고 있었어도 지금쯤 강호에는 일신(一神)이 아니라 이신(二神)이 있었을 텐데.’
‘근데 없으시잖아요.’
‘……철구 백 근 추가.’
괜히 깝죽거렸다가 더 고생하긴 했지만, 결국 그런 과정들조차 빠짐없이 내게 큰 도움이 되었다.
노력은, 아니 시스템은 결코 나를 배신하는 법이 없었으니까.
시스템은 칼같이 포인트와 경험치를 지급해 주었고, 기본 능력치가 말도 안 되게 높으니 어떤 무공을 펼쳐도 효과가 몇 배는 뛰어났다.
‘각 분야에서 잘나간다는 십봉룡을 셋이나 제칠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지.’
그중 장강수로맹의 철수신룡은 성라대연에서 자진 하차하기까지 했다.
왜 그렇게까지 하냐고 물었더니 어차피 내가 있는 한 우승은 못 할 테니 빨리 집에나 가기 위해서란다.
단순하다고 해야 할지, 똑똑하다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쿨가이인 건 확실하다.
반면에…….
“허어, 강호의 도의가 땅에 떨어졌구나. 어찌 저리 경박스럽고 난폭한 자가 힘을 갖게 되었을꼬. 아아, 하늘이여!”
“개똥에 밥 비벼 먹을 놈. 석 달 열흘 동안 똥통에 담가 놔도 성에 차지 않을 놈.”
“이건 말도 안 돼. 본 공자의 지식이 저자의 무공에 비해 부족하단 말인가? 그럴 리 없다. 기관진식에 대한 이론을 새로이 정립해야겠어.”
저 세 놈은 그냥 답이 없다.
등 뒤에서 쉴 새 없이 중얼거리는 말들을 듣고 있던 나는 고개를 홱 돌렸다.
“어이, 세 얼간이.”
내 부름에 중얼거림이 뚝 멈췄다.
그리고 다음 순간, 번쩍 고개를 쳐든 ‘세 얼간이’는 각자의 방식으로 차례차례 분노를 표출했다.
“허어, 얼간이라니. 어찌 저리 상스러운 말을.”
먼지 한 톨 묻지 않은 새하얀 백의를 걸친 이 도사는 곤륜운룡 백우다. 3차 심사에서 내게 얼굴을 밟혀 추락했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결벽증이 있어 심사가 끝나자마자 샤워를 두 시진이나 했단다.
“아가리에 똥을 처넣을 놈.”
백우와는 달리 보기만 해도 지린내가 진동하는 이놈은 뼛속까지 거지다.
개방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마침내 훗날 개방을 이끌 후개의 지위에까지 오른 이놈의 이름은 궁기방이었다.
이른바 거지 왕자, 성골 거지, 상거지.
궁기방은 4차 심사에서 내 뒷덜미를 잡은 대가로 명치를 얻어맞았다.
“얼간이? 그거 본 공자에게 한 말이오? 어떤 의도로 꺼낸 말인지, 혹 얼간이라는 단어의 뜻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면 본 공자에게 설명해 주실 수 있소?”
마지막은 제갈세가의 신기묘룡 제갈균이었다.
반듯한 문사 차림의 복장에 단정한 영웅건. 옷차림만 보면 이놈이 제일 제정신으로 보인다.
옷에 먼지 한 톨 묻는 것도 질색하는 결벽증 도사와 입에 오물이 튀어도 맛있게 먹을 것 같은 거지 사이에 끼어 있으니 어쩌면 당연하다.
하지만 짐작했듯이, 저놈도 만만치 않은 별종이었다.
5차 심사였던 기관진식에서 자신이 진 것에 대해 상당한 유감을 표시했었다.
‘라인업 꼬라지 봐라…….’
퍼거슨 감독 시절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보다 짱짱한 멤버.
그런 세 놈을 나란히 세워 놓으니 숨이 턱 막히고 눈앞이 깜깜해진다. 숨을 가다듬은 나는 입을 열었다.
“다들 주둥이 좀 다물어라. 정신 사납게 쫑알거리지 좀 말고.”
“허어, 지금 주둥이라 했는가? 이보시게, 진태경 도우(道友). 어찌하면 그렇게 하는 말마다 상스러울 수 있는가?”
“멍석에 둘둘 말아서 매단 다음 개몽둥이로 한 달 보름 동안 두들겨 패도 시원치 않을 놈.”
“주둥이를 다물어라. 쫑알거리지 마라…… 본가에서는 잘 쓰이지 않는 단어요. 본 공자가 개인적으로 궁금해져서 그러는데, 혹시 평소 자주 쓰는 말을 옮겨 적어서 줄 수 있겠소?”
“…….”
아, 그냥 싹 다 두들겨 패고 싶다.
나는 그럴 수 없는 현실에 안타까워하며 세 얼간이에게 말했다.
“너희는 진짜, 비무에서 만나면 다 뒈진 줄 알아라.”
“……!”
“……!”
“……!”
역시 미친놈들에게는 몽둥이가 약이지.
세 얼간이가 입을 꾹 다문 채 눈빛을 교환하던 그때였다.
또각. 또각.
단단한 무언가로 바닥을 찍는 소리가 모두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이내 단상 위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한쪽 다리에 목제 의족(義足)을 단 노인이었다.
“늦어서 미안하네. 보다시피 다리가 이래놔서 말이야.”
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씩 웃은 그가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만나서 반갑군. 나는 천면호리(千面狐狸) 송호라고 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