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 Chapter 369
#368화
소년, 아니 문경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는 발아래를 굽어보았다.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그를 바라보는 무수한 시선들. 그중 낯익은 얼굴이 있었다.
오래전 단 한 번 마주쳤을 뿐이지만 그를 알아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오랜만일세, 화왕.”
그의 인사에 화왕 적천강의 눈동자가 격동으로 떨렸다.
“……정말 당신이었다니.”
천하제일의 살수. 숱한 무인들로부터 지탄과 경멸을 넘어 경외를 불러일으킨 그는 어느 날 홀연히 사라졌고, 두 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적어도 촌각 전까지는.
“어째서 당신이 이곳에…….”
“많은 일이 있었지. 참으로 많은 일이. 그렇지 않으냐?”
물음이 향한 곳에는 한 노인이 있었다. 형용할 수 없는 눈빛으로 신의, 아니 동봉을 바라보던 그가 입술을 열었다.
“다행이구나. 늦지 않아서.”
그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목소리가 천지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육합전성(六合傳聲).
눈앞에서 펼쳐진 아득한 무학의 경지에 전율이 흐르는 가운데, 늙은 의원은 작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늦으셨습니다.”
안타까움이 담긴 한마디가 이어졌다.
“지난 세월을 되돌리시기에는 말입니다.”
“어찌하겠느냐, 이미 엎어진 물을 주워 담기란 어려운 일인 것을.”
“후회하지 않으십니까.”
“후회라.”
제자의 말에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영원히 쏟아질 것 같던 빗줄기도, 햇빛을 가리고 있던 먹구름도 사라진 그곳에 푸르른 창천이 펼쳐져 있다.
‘이것이 당신의 뜻이오?’
저 위에서 하계(下界)를 내려다보고 있을 누군가에게 던지는 물음.
그러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언제나 그래 왔듯이.
‘참으로…… 빌어먹을 일이로군.’
그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피와 투쟁으로 점철된 기억이 스쳐 지나간다.
살수로 키워져 살수로 살았던 지난 삶. 타고난 업이 살수라 사람을 죽였고, 타고나길 사람이라 살생이 싫었다.
대륙을 피로 물들인 대전쟁의 끝자락에서, 늙은 살수가 병장기를 파묻고 의원으로 살아간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끝내 이렇게 되었는가.
작은 중얼거림과 함께 감았던 눈을 떴다.
새하얗고 부드러운 소년의 손.
수년 전 찾아온 반로환동(返老還童)은 피륙을 바꿔 놓았을지언정, 손에 배인 혈향마저 지울 수는 없었다.
“의원으로 사십여 년을 살았다. 의원으로 죽고자 했다.”
거대한 공력을 담은 목소리가 천둥이 되어 귓전을 파고든다. 심령(心靈)을 뒤흔들리는 듯한 충격을 받은 흑의인들이 신형을 휘청거렸다.
“한데, 너희는 어찌하여 이곳에 왔느냐.”
전신의 털이 곤두서는 듯한 살의. 하늘 위의 존재를 보며 얼어붙어 있던 부단주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그대가 정녕 살성이라 한들, 관여할 일이 아니오.”
“관여할 일이 아니다?”
낮게 뇌까린 그가 손에 들고 있던 행낭을 던졌다.
쿵, 땅에 떨어진 행낭에서 튕겨 나간 무언가가 부단주의 발치에 닿았다.
“이, 이건.”
그것은 두 사람의 수급이었다. 부릅뜬 눈동자와 일그러진 표정은 각기 다른 사람임에도 똑 닮아 있었다.
마치 한날한시에 태어난 쌍둥이처럼.
부단주의 시선은 그중 하나에 고정되어 있었다.
“단주!”
일괴의 수급을 보고 경악하는 부단주를 향해, 그가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하나만 묻지. 청성(靑城)에 있던 것이 기련삼괴 중 둘째인가, 아니면 셋째인가?”
“……!”
부단주는 그제야 깨달았다.
왜 청성파에서 아무 소식이 없었는지. 그리고 긴급을 알리는 신호를 보고도 돌아오지 않은 형제들은 어디에 있는지.
결국 그에게 남은 길은 하나뿐이었다. 섬광 같은 깨달음과 함께, 공력을 실은 외침이 터져 나왔다.
“모두 공격하라! 놈을 죽…….”
서걱!
부단주의 외침은 이어지지 못했다.
목을 스치는 바람과 함께 비틀거리는 그의 뒤에, 어느새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이, 이것이 정녕…… 사람의 움직임이란 말인가.’
마지막으로 뇌리를 스치는 의문.
천하제일, 아니 고금제일의 살수가 펼친 유령환살보(幽靈幻殺步)를 알아보지 못한 그를 기다리는 것은 죽음뿐이었다.
푸화아악!
잘려 나간 목의 단면에서 피 분수가 솟구쳤다. 무너지는 신형을 스치며 한 사람이 걸음을 내디뎠다. 동시에 혈향을 머금은 바람이 불었다.
서걱, 서걱, 서걱!
넋 나간 얼굴로 상관의 죽음을 지켜보던 흑의인들의 목이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핏줄기가 땅이 닿기도 전에 유령처럼 희끄무레한 무언가가 그들을 지나쳤다.
“그토록 원했던 삶이었건만.”
그는 낮게 읊조리며 양손을 뻗었다. 열 개의 손가락에서 가늘고 긴 실이 흘러나온다.
아름다우면서도 파괴적인 강기(劍罡)의 실이.
“너희는 어찌하여…….”
슈와아악!
구부려진 열 개의 손가락이 허공을 그어 내리자, 강기가 공간을 찢었다.
동시에 막아서는 모든 것이 베이고 갈라졌다. 조각조각 난 갑옷과 병장기, 사지와 목이 사방으로 솟구쳤다.
피와 죽음으로 정지한 세상 속에서, 오직 한 사람만이 자유로웠다.
“나를 깨웠느냐.”
한탄과 분노에 사로잡힌 그는 더 이상 명랑하던 소년도, 제자에게 신의라는 두 글자를 물려준 의원도 아니었다.
신의라는 이름을 얻기 전, 역병으로 처자식을 잃어 슬픔에 잠겨 있던 젊은 목수를 만나기 전, 그리고 병장기를 파묻고 무림을 떠나기 전의 그로 돌아가 있었다.
“살성(殺星)……!”
누군가 내지른 비명 같은 외침.
심연보다 깊이 가라앉은 눈빛을 한 그가 양팔을 떨쳤다. 어느덧 폭풍이 된 바람이 백여 명의 흑의인들을 집어삼켰다.
콰아아아!
* * *
사천당문의 동쪽에는 높은 언덕이 있다.
당문의 경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그곳에는 작은 망루와 교대로 번을 서는 무인들이 존재했다. 아니, 존재했었다.
투둑, 툭.
망루에서 떨어진 핏방울이 풀잎을 적셨다. 더러는 언덕을 따라 미끄러져 누군가의 손에 닿기도 했다.
자글자글하게 주름진 손등과 오랫동안 익힌 독공(毒功)의 영향으로 녹색을 띤 손톱.
손의 주인은 사천당문의 당대 가주인 만독수라(萬毒修羅) 당사독이었다.
“쿨럭.”
바싹 마른 입술 사이로 핏물이 튀었다. 언제나 서늘하고 힘 있던 눈동자는 금방이라도 꺼질 것처럼 위태로웠다.
“이렇게 끝나는가.”
당사독은 희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모든 것이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자신의 명(命)도. 사천당문의 찬란했던 역사도.
“수백 년에 걸쳐 쌓아 올린 본가가…… 하루아침에 무너져 내리는구나.”
당사독의 한탄은 공허했다. 그에게는 더 이상의 분노와 슬픔을 느낄 기력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사지가 으스러지고 심각한 내상을 입은 늙은 가주에게 유일하게 허락된 것은, 이름 모를 나무에 기대어 자신의 가문이 멸망하는 광경을 지켜보는 것뿐이었다.
‘이것이 자네에게 주는 내 마지막 선물일세.’
미소 띤 중년인의 얼굴이 당사독의 눈앞을 스쳤다.
중년인, 서천마군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사천당문의 멸문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던 것이나 다름없었다.
“우웁. 쿠에에엑!”
들불처럼 일어난 심화(心火)가 내상을 더욱 악화시킨다. 한 됫박은 될 법한 핏물을 쏟아낸 당사독은 숨을 헐떡였다.
“미안하네. 미안해…….”
사천당문의 선조들과 못난 가주를 만나 애꿎은 목숨을 잃은 식솔들, 그리고 지금쯤 서천마군에 의해 처참한 죽음을 맞이했을 진태경 일행에게 보내는 사죄였다.
물론 그들 중 어느 한 사람도 당사독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을 테지만.
‘구천(九泉)에서 만나거든, 내 직접 사죄하겠네.’
당사독이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던 그때.
스스슥.
수풀이 들썩이며 가까워지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아니, 그건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당사독은 코앞까지 다가온 후에야 이 묘한 기척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쉬릭, 쉭.
날름거리는 혀와 뿔이 달린 세모꼴의 머리. 새하얀 몸통을 지닌 한 마리의 뱀이 당사독의 품을 파고들었다.
“허, 허허.”
당사독은 기쁘기도 하고 허탈하기도 하여 풀썩 웃어 버렸다.
“너였더냐.”
취릭.
천년독각사, 미미가 주인의 말에 대답하는 것처럼 쉭쉭거렸다. 차가운 혓바닥이 핏물에 엉겨 붙은 수염을 핥는다.
“영리한 녀석, 어찌 여기까지 찾아왔을꼬.”
당사독은 흐릿한 눈빛으로 자신의 애완뱀을 바라보았다.
혹여나 난전(亂戰) 중에 상하지는 않을까 걱정되어 풀어 두었던 녀석이다.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마지막 이별을 하게 될 줄도.
구구구궁!
거대한 굉음과 함께 진동이 언덕까지 전해진다. 흙이 떠오르고 나무가 가지를 흔들었다.
당사독은 고개를 들어 굉음의 진원지를 찾으려 했지만, 이미 흐려진 시각으로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한 가지 사실을 유추할 따름이다.
‘때가 되었나.’
진천뢰(震天雷)와는 차원이 다른 굉음. 마침내 대 사천당문의 멸망이 코앞까지 들이닥친 것이다.
지그시 눈을 감았다 뜬 당사독이 입을 열었다.
“떠나거라.”
취릭?
세모꼴의 주둥이가 갸우뚱 기울어졌다.
“노부도, 당문도 얼마 남지 않았다. 이곳에 있으면 너 역시 화를 입게 된다.”
당사독은 사천당문의 가주. 서천마군이 아니더라도 누군가는 반드시 찾아와 그의 생사를 확인할 것이다.
그때 주인의 곁을 지키는 천년독각사를 본 흉수들이 어찌할지는 능히 짐작하고도 남았다.
“그러니 어서 가거라. 어서!”
호통이라도 치고 싶건만, 쥐어짜 낸 음성은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처럼 가느다랬다.
그러나 당사독과 오랜 세월을 함께한 영물(靈物)은 주인이자 친구였던 그의 마지막 뜻을 알아차렸다.
투둑, 툭.
당사독의 주름진 손등 위로 축축한 액체가 떨어졌다.
몇 방울의 눈물을 남긴 천년독각사, 미미는 새하얀 몸통을 이끌고 미끄러지듯 사라졌다.
기척이 멀어지자 당사독의 입가에 언뜻 씁쓸한 미소가 맺혔다.
“그래, 조심히 가거라.”
젊은 시절에는 전장을 누볐고, 종전 후에는 아버지인 독왕을 도와 사천당문을 일으키는 것에 평생을 바쳤다.
늘 냉철하고 철두철미해야 했던 그에게는 마음을 나눌 만한 벗도, 연인도, 피를 이은 자식도 없었다.
오랫동안 곁을 지킨 영물이 없었다면, 그는 지금껏 외로움을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오늘부터 네 이름은 미미다. 당미미.’
자그마한 천년독각사와 처음으로 마주했던 그 날, 당사독은 녀석에게 당씨 성을 붙여 주었다.
몸 안에 흐르는 피도, 심지어 종(種)도 달랐지만 당미미는 가주가 인정한 사천당문의 일원이었다.
‘모두를 잃고 오직 너 하나를 살려 보내는구나. 허허허.’
당사독은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눈을 깜빡였다.
흐릿해진 감각 속, 언덕 아래에서 들려오는 굉음과 누군가의 비명이 아련하게 울려 퍼졌다.
멸문이라는 두 글자를 막아선 이들이 벌이는 최후의 항쟁이리라.
‘노부도 있다. 나, 대사천당문의 가주 당사독이 있단 말이다! 내게 오너라!’
피를 토하는 듯한 외침은 혀끝에서 맴돌 뿐이다.
당사독은 서서히 전신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무거워진 눈꺼풀이 조금씩, 아주 조금씩 밑을 향해 기울었다.
‘피곤하구나.’
이대로 눈을 감고 깊은 잠에 빠지는 건 어떨까.
짧은 단잠을 자고 가주전의 태사의에서 깨어나면, 식솔들의 낯익은 얼굴들을 마주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버지의 죽음을 포함한 지금까지의 모든 일이 한낱 호접지몽(胡蝶之夢)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 그랬다면.’
스르륵. 파르르 떨리던 당사독의 눈꺼풀이 마침내 굳게 닫혔다.
아니, 닫히려던 그 순간이었다.
“미미! 전광석화(電光石火)!”
취리이이잇!
“……?”
아니, 이게 무슨 개소린가.
당사독은 자신도 모르게 번쩍 눈을 떴다.
환해진 시야 속에서 달려오는 한 청년과 화살처럼 쏘아지는 미미의 새하얀 몸통이 보였다.
“자, 자네는?”
“와! 야생의 당 할아버지 발견!”
피를 뒤집어쓴 얼굴로 해맑게 웃는 청풍의 모습에, 당사독은 눈을 깜빡였다.
“이, 이게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가? 자네가 어떻게…….”
청풍이 힘차게 대답했다.
“미미! 회오리치기!”
취리리릭!
당사독에게 한 줌만큼의 힘이라도 남아 있었다면, 쌍욕을 내뱉었을 것이다.
뒤늦게 실수를 알아차린 청풍과 미미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아, 죄송해요.”
취릭.
“…….”
반쯤 죽어 가던 것도 잊은 채, 멍하니 눈앞의 일인일사(一人一蛇)를 바라보던 당사독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본가, 본가는 어찌 되었나?”
“다 죽었어요.”
“……!”
“아. 당문 분들이 아니라 암천의 흑의인들이요.”
그걸 먼저 말했어야지!
충격과 분노로 말을 잇지 못하던 그때, 청풍의 손이 당사독의 명문혈을 짚었다. 봄날처럼 따스한 온기가 그의 육신을 어루어만졌다.
“청풍! 진기도인!”
이 새끼가 끝까지…….
당사독은 무엇이 어떻게 되었는지 묻고 싶었지만, 이번만큼은 쏟아지는 졸음을 참을 수 없었다.
눈꺼풀이 감기기 직전, 봄바람처럼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이제 다 끝났어요. 안심하시고 주무세요.”
그것은 그 어느 때보다 길고 어두웠던 하루의 끝을 알리는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