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 Chapter 461
#460화
여러모로 좋지 않은 날씨였다.
지난 밤사이 수십 척의 선박과 생명을 집어삼킨 동정호의 강물은 거칠었고, 저 멀리서부터 불어오는 바람은 난폭했다.
그리고 이런 기상 상황에서 배를 띄우는 것은 동정호를 제 손바닥 보듯 들여다본다는 늙은 사공의 생각으로도 과히 좋지 않은 선택이었나 보다.
“쇠, 쇤네는 못 하겠습니다요.”
그것이 처음부터 억지로 끌려온 기색이 역력했던 사공의 첫마디였다. 그는 초조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귀인들께서 가고자 하시는 곳들은 동정호에서도 유난히 폭이 좁고 물살이 거친 곳인데……. 하물며 이런 날씨라면 더더욱 무립니다요.”
“그러니 사공께 청하는 것입니다. 상선이나 군선으로는 진입할 수 없어도, 동정호에서 가장 솜씨 좋은 사공이 모는 튼튼한 나룻배라면 가능할 테니까요.”
“아무리 그리 말씀하셔도…….”
“사공?”
“예, 예?”
“부탁드릴게요.”
남자는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남자다.
홍란의 조곤조곤한 목소리와 눈부신 미모에 넋이 나간 늙은 사공은 나룻배에 오른 뒤에야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내가 미쳤지, 미쳤어. 지난밤에 그 사달이 난 걸 알면서도 배를 띄우다니. 은영귀(隱影鬼)라도 만나는 날에는 어찌하려고…….”
은영귀?
귓가를 파고드는 푸념에 낯선 단어가 섞여 있다. 고개를 돌리자, 겁에 질린 사공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침을 꿀꺽 삼키고서야 대답했다.
“말 그대로 귀신 같은 놈입지요. 근래 들어 그놈에게 당한 사공들이 수두룩합니다요. 쇤네와 오래 알고 지낸 녀석도 밤에 몇 푼 더 벌어 보겠다고 나갔다가 그만…….”
늙은 사공은 짙은 두려움이 배인 눈동자로 동정호의 출렁이는 강물을 응시했다.
“여하간 그림자도 못 보고 죽는다고 해서 은영귀라 불립니다. 이건 쇤네의 하찮은 소견인데, 요즘 벌어지는 일들도 놈의 짓이 분명합니다요. 전부 그 악귀의 소행인 게지요.”
궁기방이 혀를 차며 끼어들었다.
“악귀는 무슨. 이보시오, 사공. 내가 지금껏 그런 이야기를 한두 번 들은 줄 아시오? 만약 그 말들이 전부 사실이었으면 천하의 물고기 중 절반은 인면어(人面魚)고, 산에는 천 년 묵은 백호와 용들이 득실거릴 거요.”
“이건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사실입니다. 천인공노할 일이 계속되니 동정호의 신령께서 노하신 것이 틀림없어요.”
“악귀도 모자라서 신령까지? 됐소. 말을 맙시다.”
“아니, 호북성 뱃사람이면 누구나 다 들어 본 얘긴데…….”
“내가 뱃사람으로 보이시오?”
“그건 아닙니다요. 누가 봐도 거지 중의 상거지 아닙니까.”
“아, 맞는 말이긴 한데 갑자기 열 받네.”
“고, 고정하십시오. 귀인. 이 늙은이는 그저 들은 그대로 아뢴 죄밖에 없습니다.”
늙은 사공의 목소리에는 억울함이 가득했다.
온갖 설화와 미신이 사실처럼 여겨지는 무림에서 일평생 뱃사람으로 살아온 그다.
그래서인지 사공은 최근 잇따라 벌어진 흉흉한 사건이 은영귀라 칭한 악귀의 소행이라 철석같이 믿는 듯했다.
‘생각해 보면 아주 헛소리도 아니지.’
홍란과 청풍의 표정을 보니 그들도 나와 같은 생각을 떠올린 모양이었다.
시선이 마주치기 무섭게 두 사람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은인, 혹시…….”
“은인, 저 사공이 말하는 은영귀가…….”
“잠깐. 둘 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알겠으니까 굳이 말 안 해도 돼요. 그리고 곧 죽어도 은인이라고 하고 싶으면 차례차례 말해. 헷갈려.”
하나로도 벅찬 은인 무새가 더 늘었네.
가끔 이럴 때마다 내가 대단한 사람이 된 것 같다.
아니, 그런데 홍란은 목숨을 구해 줬으니 그렇다 쳐도, 청풍 저 인간은 배고플 때 당과 몇 개 줬다고 평생 은인으로 모실 생각인가.
한숨을 내쉰 내가 말을 이었다.
“그래, 아마도 은영귀는 동정어옹일 확률이 높겠지. 아니면 혼란한 틈을 타 노략질을 벌이는 놈들이거나.”
“맞아요, 제가 말하려던 게 그거였어요. 은인.”
청풍에 질세라 홍란 역시 고개를 끄덕인다.
“천녀도 그리 생각합니다. 은인.”
“아니, 한 사람씩만 말하라니까.”
어찌 되었건 간에 단순한 자연적 사고일 확률은 희박했다.
지금까지 말을 들어 보니 죽은 사공이 한둘이 아닌 데다가, 다음 순간 이어진 늙은 사공의 말 또한 신빙성을 더해 주었다.
“그러고 보니 죽은 사공들이 사라진 지점이 전부 엇비슷합니다. 어? 잠깐, 귀인들께서 가려고 하시는 곳도 그 주변인데…….”
순간 멈칫한 늙은 사공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말없이 우리를 차례차례 훑어본 그가, 출발을 위해 잡고 있던 노를 슬그머니 내려놓고 일어났다.
“어디 가십니까?”
내 물음에 늙은 사공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게, 소피를 보는 걸 깜빡했지 뭡니까요.”
“무진아.”
“예, 조장님.”
“사공께서 소피가 마려우시단다.”
“그렇습니까?”
이제는 척하면 척이다.
자신에 비하면 거인이나 다름없는 혁무진이 막아서자, 늙은 사공의 눈동자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송아지처럼 촉촉해졌다.
“지금도 마려우시오?”
혁무진의 낮은 목소리에 사공이 고개를 저었다.
“……생각해 보니 마렵지 않습니다.”
“잘됐구려. 우려하는 일이 벌어지기 전에 보내 줄 테니 너무 걱정하진 마시오.”
나이 든 사공에게 못 할 짓을 하는 것 같아 미안하긴 하지만, 동정어옹의 거처로 가기 위해서는 능숙한 길잡이의 역할이 필수였다.
우리가 가고자 하는 곳은 나룻배 몇 척 정도만 드나들 수 있는 좁은 길.
관부가 백 척의 함대와 수만의 관군들을 동원한다 해도 진입할 수 없을뿐더러, 되려 무거운 짐 덩어리에 불과하다.
‘만약 동정어옹과 전투가 벌어진다면 희생만 늘어날 뿐이야.’
관부는 도주를 대비하여 동정호와 장강으로 이어지는 길목을 빈틈없이 봉쇄하고, 나와 청풍을 포함한 소수 정예가 동정어옹을 추격하여 생포 혹은 척살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리고 동정어옹의 처리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더 이상의 헛된 희생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생각을 끝마친 나는 불쑥 입을 열었다.
“혁무진, 궁기방, 홍 소저. 세 사람은…….”
“싫습니다.”
“어디서 개가 짖나.”
“저도 미력한 힘이나마 보태겠어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튀어나오는 대답에 말문이 턱 막힌다. 그런 내 모습에 혁무진과 궁기방이 혀를 끌끌 찼다.
“뻔합니다. 뻔해요.”
“무슨 말 하려는지 훤히 보인다.”
“여기까지 와서 어떻게 돌아갑니까. 명색이 사내대장부가.”
“나도 마찬가지다. 대 개방의 후개가 고작 이 정도로 겁을 먹을 수는 없지.”
“조장님께서는 뭐 좀 위험할 것 같으면 무조건 빠지라고 하시더라. 하여간 이 정도면 조장님 특징이에요. 조특.”
“의외로 새가슴이라니까.”
“그런데 궁 소협은 아까부터 왜 자꾸 제 말을 따라 하십니까? 거 되게 신경 쓰이게.”
“이 빌어먹을 놈이 왜 잘 나가다가 시비를 걸지? 간이 배 밖으로 나왔냐?”
“거지 특. 객잔에서 버리는 음식으로도 부족해서 남의 말도 주워 먹음.”
“……아니, 이런 개만도 못한 놈을 봤나.”
“어쨌건 저는 조장님이 뭐라 하셔도 따라갑니다. 어릴 때 용한 점쟁이가 제 사주를 봤는데, 백 살 넘어서까지 부귀영화를 누리며 잘 먹고 잘 산다고 했습니다. 오늘 죽을 리가 없어요.”
호언장담하는 혁무진의 모습을 어이없이 바라보던 궁기방이 고개를 저었다.
“후우, 됐다. 말을 말아야지. 그리고 나도 혁가 놈과 같은 생각이니 떼 놓고 갈 생각은 추호도 하지 마라. 나 역시 개방의 절기를 이어받은 몸. 너나 청 소협만큼은 아니더라도 이 한목숨 건사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 없어.”
“…….”
나는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거렸다.
사실 따지고 보면 두 사람 모두 어디 가서 무시당할 수준은 아니었다.
혁무진은 비교적 늦게 무공을 익히기 시작했음에도 나와 함께 위기를 넘나들며 폭발적으로 성장했고, 궁기방은 후개가 될 만큼 뛰어난 자질의 소유자이자 원숙한 경지에 접어든 절정 고수니까.
‘하지만 두렵다.’
가까운 사람을 잃는다는 것이. 다시 한번 그날의 과거가 반복될 것 같아서 두렵다.
내가 망설이던 그때, 청풍이 문득 입을 열었다.
“은인. 저도 은인이 간다면 지옥 끝까지 따라갈 수 있어요.”
“청 소협.”
“안 된다고 하지 마세요. 저도 당당한 사내이고 무인인걸요.”
“청 소협.”
청풍이 살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은인. 아무 말씀도 하지 마세요. 제가 은인을 믿는 만큼, 은인도 우리를 믿어 주시면 돼요.”
“아니, 그게 아니라 당신은 무조건 함께 가는 건데 왜 굳이 나서서…….”
“앗. 아아…….”
“괜한 소리 하지 말고 앉아 있어. 분위기 깨지 말고.”
“……예. 은인.”
시무룩해진 녀석의 모습에 피식 실소가 터져 나왔다. 나는 혁무진과 궁기방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만 명심해. 어떤 상황에서도 내 판단에 따를 것. 그것이 설령 나를 버리고 도망치라는 명령이라고 해도.”
“조장님. 그건…….”
머뭇거리는 혁무진의 옆구리를 궁기방이 슬쩍 찔렀다.
“그럼, 명심하고말고. 혁가 놈도 마찬가지일 거다. 그렇지?”
“예? 아, 예.”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상황이었지만 모르는 척 넘어갔다.
나는 그런 상황이 오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고, 녀석들이 위험에 빠지기 전에 떼어 놓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 남은 한 사람은 곤란하다.
“제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미 알고 계실 겁니다. 그렇죠?”
홍란의 붉은 입술이 스르륵 열렸다.
“정확한 길을 알려 줄 사람이 필요할 거예요.”
“괜찮습니다. 홍 소저의 말대로라면 동정호에서 가장 뛰어난 사공이 함께하고 있으니까요.
“만약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기면요?”
“잘 대처할 겁니다.”
“비록 은인과 다른 분들께 비하면 초라하지만, 저 역시 일류의 경지에 오른…….”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일류 고수가 몇 시진이 넘도록 건장한 사내를 붙잡은 채 강물에 잠겨 있다가, 정신을 차린 지 반 시진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도.”
“……!”
정곡을 찔린 홍란이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누구보다 그녀 스스로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지금처럼 거동할 수 있는 것과 치열한 전투를 치른다는 건 전혀 다른 문제라는 것을.
“이번에도 지켜볼 수밖에 없겠군요. 저는.”
“이번에도?”
“네. 오래전의 그때도, 지난밤에도. 그리고 지금도.”
내 눈에 담긴 의문을 읽어 낸 홍란이 미소지었다. 지금까지 봐 왔던 어떤 것보다 씁쓸한 웃음이었다.
“하루아침에 가문과 부모를 잃은 여아가 지금의 모습으로 있기까지는…… 참으로 많은 일이 있었지요.”
“아.”
“잠시만 실례할게요.”
반짝이는 눈동자로 나를 올려다보던 그녀가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손을 뻗는다.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헝클어진 머리카락과 목을 스치자, 나도 모르게 몸이 움찔 떨렸다.
“홍 소저, 이게 무슨…….”
“다 됐어요. 아, 훨씬 낫다. 한 번 보실래요?”
홍란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내리자, 동정호의 맑은 강물에 누군가의 모습이 비친다.
말끔하게 정돈된 머리카락과 그것을 고정한 아름다운 은비녀 하나.
고개를 들자 말갛게 웃고 있는 홍란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은인, 아니 진 대협(大俠).”
어느새 풀어 헤쳐진 그녀의 머리카락이 바람을 타고 부드럽게 흔들렸다. 출렁대고, 찰랑거리다가 어느새 찬란해진다.
“무운을 빌어요.”
나직한 목소리가 천천히 귓가에서 멀어졌다.
돌아서는 홍란의 모습을 뒤로 한 채, 사공의 노가 강물을 힘차게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