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 Chapter 527
#526화
와아아아아-!
쿵! 쿵! 쿵!
거대한 함성이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수천의 군웅이 공력을 실어 내지르는 외침과 강렬한 투지가 고요하던 숭산(嵩山)을 깨우고 끝없이 울려 퍼졌다.
이름도, 성격도, 지금껏 살아온 인생도, 성별도 다른 그들의 머리 위에는 드높게 솟은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무림맹(武林盟).
새하얀 천에 적힌 것은 단지 그 세 글자뿐이었다.
황제를 상징하는 깃발처럼 화려하지도 않았고, 과거 중원을 침공했던 마교 대군세의 교기(敎旗)처럼 거대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무림맹이라는 세 글자에는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이제 중원의 무림인들은 저 깃발 아래에서 하나가 될 것이다. 그들이 스스로 연 새로운 시대에서 새로운 적과 맞서 싸울 테다.
그리고…….
“새로운 영웅이 탄생하겠지.”
누군가의 나직한 뇌까림.
어느덧 울창한 잎사귀를 틔워 낸 이름 모를 거목 위에서 이 모든 광경을 바라보던 문경의 시선이 한 사람에게 닿았다.
‘진태경.’
문경의 눈에는 똑똑히 보였다. 깃발을 들고 철탑처럼 서 있는 청년의 타오르는 눈빛이.
검성과 화왕이라는 두 명의 거인, 그리고 또 다른 샛별인 화산신룡 청풍과 함께 사방에서 빗발치는 함성을 받아들이는 그의 모습은 이미 영웅이나 다름없었다.
“열화신룡!”
“열화신룡 진태경!”
무림맹의 깃발을 든 젊은 영웅의 이름을, 군웅들은 힘차게 연호했다.
그리고 그러한 광경을 바라보던 문경의 입술 사이로 작은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드디어 시작이군.”
새로운 시대. 새로운 적. 그리고 새로운 영웅들.
드디어 오랫동안 닫혀 있던 무대의 막이 올랐다.
누군가는 이름 모를 벌판에 쓰러져 영영 일어나지 못할 것이고, 누군가는 자신의 이름을 이 기나긴 무림사 한 편에 새겨넣으리라.
생과 사. 치욕과 영광.
바로 이곳. 숭산에서 천하를 둔 거대한 전쟁의 서막이 시작되고 있었다.
* * *
천하가 들썩였다. 아니, 그것은 엄청난 격동이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은 허구이며 소문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것이 비로소 현실이 되었을 때 가지는 파급력은 크고 거대했다.
숭산결의(嵩山決意).
따뜻한 어느 봄날,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를 비롯한 수많은 무림 문파가 마침내 한 깃발 아래 집결했다는 소식은 일파만파 퍼져 나갔다.
그건 즉, 곧 천하의 주인을 결정할 치열한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뜻이었다.
“장문인, 하남에서 무림맹이 창설되었다고 합니다!”
“즉시 전서구를 띄워라. 본문은 기꺼이 무림맹의 깃발 아래 설 것이다.”
“존명!”
“복건(福建)의 다른 문주들에게도 연통을 넣거라. 회동을 해야겠다.”
천하는 넓고, 존재하는 문파와 가문은 헤아릴 수도 없이 많았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미처 하남에까지 가지 못한 이들은 너도나도 무림맹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사문이 없는 무림인들 역시 각자의 행보를 결정했다.
“장 대협, 나와 함께 하남으로 갑시다. 무림맹에 참여해야 하지 않겠소?”
“미안하지만 나는 사천 무림으로 향할 생각이오. 하남은 곽 대협 홀로 가셔야겠소.”
“허어. 아직 청성과 아미가 건재하다고는 하나, 암천이 과거 마교가 그러하였듯 가장 먼저 사천으로 향한다면 복마전(伏魔殿)이 될지도 모르오.”
“그렇기에 더더욱 사천으로 가야 하오. 미약하나마 손을 보태야 하지 않겠소?”
누군가는 의협이라는 두 글자를 가슴에 품었고.
“방금 말씀하신 형장. 나와 가는 길이 겹치는 것 같은데, 함께 갑시다.”
“협객이시구려. 귀하는 존함이 어찌 되시오?”
“존함은 무슨. 그리고 나야 칼 밥 먹는 낭인에 불과하니 협객이라는 낯간지러운 단어는 넣어 두시오. 암천인지 뭔지 하는 것들이 얼마나 강한지는 몰라도, 닥치는 대로 쳐 죽이면 이름도 알리고 한몫 벌겠지.”
누군가는 호승심과 입신양명(立身揚名)을 꿈꾸며 무기를 들었다.
그리고 이처럼 특정 문파에 소속되지 않고 제각각의 목적을 가진 이들 중에는 오랫동안 무림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혹은 드러낸 적조차 없던 낯선 얼굴들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어쩐 일로 나와 계십니까, 스승님.”
“날이 좋아 바람을 쐬고 있었다. 한데 네 표정이 과히 좋지 않구나. 무슨 일이더냐?”
“그것이, 실은 스승님께 드릴 설삼(雪蔘)을 찾으러 산을 돌아다니다가 약초꾼을 만났는데, 그자에게 듣기로…….”
하남에서 무림맹이 부활할 것이라는 소문은 이미 숭산결의 이전에도 널리 퍼진 이야기.
그에 관련된 무림의 정세는, 속세를 멀리하고 심산유곡(深山幽谷)에 틀어박힌 은거기인에게 전해지기도 했다.
“으음. 암천, 무림맹이라…….”
“이미 산 아래는 난리라고 합니다. 무림맹이 암천과의 대전을 선포했고, 양민들은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허어, 긴 평화 끝에 환란이 닥쳤구나.”
“스승님.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과거 정마대전 때처럼 숱한 이들이 죽어 나갈 것이다. 더 늦기 전에 즉시 채비하거라. 하남으로 가야겠다.”
이름 모를 깊은 골짜기에서 여생을 보내던 노고수는 제자와 함께 중원으로 향했고.
“노야, 오늘은 많이 잡으셨습니까?”
“에잉. 오늘따라 입질이 더럽게 안 와.”
“하하. 그 말만 벌써 사십 년째 듣습니다. 잉어를 몇 마리 잡았는데 가져가서 드시지요.”
“당연히 그래야지. 십 년 전에 네 녀석 아비 목숨을 구해 준 게 나인데. 크고 실한 놈으로 하나 줘 봐.”
“알겠습니다. 마지막이니 모두 드리지요.”
“응? 마지막이라니.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
“그 소식 못 들으셨습니까? 무림에 큰 환란이 닥쳤다고 합니다.”
“환란이라니? 더 자세히 말해 보아라.”
“하남에서 무림맹이라는 것이 만들어졌고, 바로 그 마교의 후신이라는 암천과 일전을 겨룬다고 합니다. 당장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가족들을 데리고 잠시 자리를 피하려 하…… 노야? 뭐 하십니까?”
“보면 모르겠느냐. 떠날 채비하는 게다.”
“어디로요? 아니, 낚싯대도 놓고 가십니까?”
“앞으로는 필요 없을 것 같구나. 네놈이 쓰거라.”
“노야, 노야!”
“다시 만나는 날이 오겠지. 부디 무탈하거라.”
인적 드문 호숫가에 앉아 시간을 보내던 백발의 노인은 낚싯대 대신 창을 등에 멘 채 홀연히 떠났다.
아주 오래전 한 시대를 풍미했던 노강호. 혹은 무(武), 그 한 글자만을 위해 일평생을 바친 심산유곡의 은거기인 중 일부가 속세로 발을 내디뎠고, 천하로 흘러 들어갔다.
“이곳이 무림맹이 맞는가?”
“그렇습니다. 하지만 혹 입맹을 위해 찾아오신 거라면 당장은 들여보낼 수 없으니 저기 보이는 전각으로 가서 별호와 이름, 그리고 신분을 증명할 만한 것을 제시해야…….”
“맞게 찾아왔군. 가서 홍적(洪迪)이 왔다 전하게.”
“홍적이고 홍건적이고 간에, 우선 검증 절차를 걸쳐야…… 잠깐. 그런데 방금 뭐라 했소?”
“홍적. 광서 사람 홍적이라 했네.”
“궈, 권왕(拳王)……!”
파도처럼 밀려온 세월에 휩쓸려 사라진 이름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인들의 기억들에 또렷이 각인된 별호들이 곳곳에서 등장했다.
해가 지고 어둠이 찾아와도 그들의 존재는 횃불처럼 빛났다.
그리고 새롭게 떠오른 샛별들에 관한 소문 역시 사람들의 입과 입을 타고 계속해서 전해지고 있었다.
“내 장담컨대, 이번 대전에서는 십봉룡(十鳳龍)이 큰 활약을 할 걸세.”
주걱턱을 한 중년 사내의 말에 뱁새눈이 코웃음을 쳤다.
“웃기는 소리. 말이 좋아 십봉룡이고 강호 제일의 후기지수들이지, 결국 명문대파의 제자와 자제들 사이에서 뽑은 것 아닌가.”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가?”
“죄다 온실 속 화초들이라 이거지. 좋은 환경에서 먹고 자란 것들이 전장에서 얼마나 큰 활약을 보일 수 있겠나?”
주걱턱이 눈매를 좁혔다.
“이 작자 말하는 것 보게. 혹시 암천인가?”
“뭣이!”
뱁새눈이 발끈하며 버럭 외쳤다.
“입은 삐뚤어져도 말은 바로 하랬다고, 큰일 날 소리하지 말게! 내가 왜 암천이야!”
“그런데 왜 우리 정파의 동량지재들을 깎아내려?”
“깎긴 뭘 깎아. 있는 사실 그대로를 말한 것뿐일세! 그렇다고 자네 턱을 깎을 수는 없잖나!”
“아니, 그 얘기가 여기서 왜 나오나? 외모 비하를 왜 해!”
주걱턱의 눈동자에서 불길이 솟구쳤다.
“한 번만 더 주둥이에서 내 턱에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면 각오하게. 알았나?”
“주걱턱! 주걱턱! 보고 있으면 숨이 턱! 궁기턱, 쿵 터터터턱!”
“야, 이 씨발럼아!”
우당탕탕! 콰직!
상이 엎어지고 안주며 술병이 와르르 쏟아진다.
당장이라도 칼부림이 일어날 것 같은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뱁새눈과 주걱턱의 대립을 지켜보던 염소수염의 사내가 점잖게 입을 열었다.
“둘 다 틀렸네.”
뱁새눈과 주걱턱이 동시에 고개를 돌려 염소수염을 바라보았다.
“뭐라는 거야.”
“수염을 죄 뜯어 뿔라.”
“…….”
염소수염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을 이었다.
“나도 십봉룡이 활약한다는 것에는 별다른 이의가 없지만, 암천이 지금까지의 행보에서 보여 준 힘에 비하면 십봉룡도 결국 후기지수에 불과하지.”
뱁새눈의 얼굴에 화색이 돌아왔다.
“그럼 내 말이 맞다는 소리 아닌가?”
“어느 정도는 그렇다고 생각하네.”
“역시. 자네는 남다른 식견이 있어. 오늘따라 수염도 참 멋지군.”
“…….”
주걱턱이 이를 갈며 뱁새눈을 노려보았다.
“눈깔은 똥구멍보다 작은놈이 귀까지 먹었군. 앞서 둘 다 틀렸다고 한 말은 벌써 잊어버렸나?”
“……그건 그러네. 도대체 이유가 뭔가? 내 말은 딱히 틀린 구석이 없어 보이는데.”
염소수염이 점잖게 수염을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어디에나 진짜배기는 있다는 거지. 자네 말대로 십봉룡은 최상의 환경에서 성장한 이들일세.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강호 제일의 후기지수들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크흠. 그리고?”
“그들 모두가 명문 대파의 제자는 아닐세. 태원진가의 이공자인 진천검 진무경이 대표적이지.”
“아, 진천검을 깜빡했군.”
때를 노리던 주걱턱이 이죽거리며 끼어들었다.
“진천검도 진천검이지만, 모용세가의 핏줄인 모용영휘도 압도적이지. 하긴, 네놈 주제에 뭘 알기나 할까.”
“뭐라는 거야. 이 물에 빠져도 턱만 동동 뜰 새끼가…….”
다시 으르렁거리는 두 사람의 모습에 한숨을 푹 내쉰 염소수염이 입을 열었다.
“싸우지들 말고 마저 듣게. 지금 주목해야 할 만한 후기지수는 십봉룡이 아니야. 그 앞에 이룡(二龍)이 있다는 점이지.”
순간 뱁새눈과 주걱턱이 멈칫했다.
그들이 생각해도 지금 염소수염의 한 말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열화신룡 진태경과 화산신룡 청풍. 이 두 명의 신룡의 이름 앞에서는 십봉룡조차 비견할 수 없었다.
“확실히…….”
“그건 그렇지.”
별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던 그들은 문득 떠오르는 의문을 내뱉었다.
“그 두 사람은 지금 뭘 하고 있을까?”
“그야 모르지.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해.”
염소수염이 근엄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뭔가 대단한 일을 하고 있을 걸세.”
* * *
청풍이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 만두 먹고 싶다!”
“…….”
큰 소리로 말하지 마, 등신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