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 Chapter 52
#51화
쉬쉬쉭!
검, 도끼, 철퇴.
수십 개의 무기가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그러나 내게는 똑똑히 보인다. 공격 하나하나가 어디로, 어떻게 향하는지.
그 틈을 파고들었다.
서걱-
C급 몬스터, 리자드맨 전사의 목을 쳐 날리는 게 시작이었다. 창날이 반원을 그림과 동시에 사방에서 핏물이 솟구쳤다.
띠링. 띠링. 띠링.
– [Lv.40 리자드맨 전사]를 처치했습니다!
– [Lv.41 늪지대 리자드맨]을 처치했습니다!
– [Lv.40 늪지대 리자드맨]을…….
– 키이이…….
살아남은 놈들이 주춤거리며 물러선다. 동족의 원수를 만나 살기를 뿜어내던 녀석들이, 지금은 두려움에 떨고 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 크워어어!
– 보스 몬스터, [Lv.52 리자드맨 대족장]이 출현했습니다!
– 스킬, [전장의 함성]을 사용합니다!
최소 두 배는 큰 덩치. 거대한 철퇴를 든 리자드맨 족장의 외침에 공기가 터져 나간다. 우두머리의 등장에 뒷걸음질 치던 리자드맨들이 정신을 차리고 대열을 갖췄다.
‘어쩐 일로 쉽게 끝나나 했다.’
등 뒤로 최 팀장의 느긋한 목소리가 들렸다.
“가능하겠어요?”
“그게 며칠 동안 손 하나 까딱 안 한 사람이 할 소립니까?”
“이야기가 다르죠. C급 게이트니까.”
“그럼 도와주시든가.”
곰곰이 생각하던 최 팀장이 대답했다.
“그건 안 되겠네요. 제가 오늘 한정판을 입고 와서. 피라도 튀면 마음 아프잖습니까.”
“……진짜 아프게 해 드려요?”
대화를 이어 갈수록 내상을 입은 것처럼 속이 쓰리고 뒷골이 당긴다. 차라리 몬스터와 싸우는 게 낫지.
성큼 앞으로 한 걸음 내딛는 내게 최 팀장이 한 마디를 툭 던졌다.
“후퇴도 또 하나의 방법입니다.”
한정판 장비에 피 튈까 봐 뒤에서 팔짱만 끼고 있는 인간이 제법 맞는 말을 한다. 처맞는 말.
그리고…….
“더 좋은 방법이 있는데 뭐 하러요?”
저 앞. 리자드맨 대족장을 필두로 몬스터들이 파도처럼 밀려오고 있다. C급과 D급 몬스터가 뒤섞인, 평범한 C급 헌터라면 맞설 엄두도 못 낼 전력이었다.
평범한 C급 헌터라면, 말이다.
‘상태창 오픈.’
띠링.
시스템이 즉각 응답했다.
헌터 일을 다시 시작하고 일주일이 지난 지금, 상태창에는 40레벨이라는 숫자와 맨 밑에 적힌 글씨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 잔여 포인트 : 100
현실로 돌아온 이래 나는 한 번도 잔여 포인트를 쓰지 않았다. 순전히 호기심 때문이었다. 지금의 내가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하는 의문.
하지만 이 이상 아끼는 건 만용이다.
‘근력, 체력에 각각 30. 민첩에 40 부여.’
다음 순간, 잔여 포인트가 바닥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내 몸속 깊숙한 곳에서는 새로운 힘이 솟구쳤다. 불과 몇 초전의 진태경과는 또 다른 내가 지금 이곳에 있었다.
‘그래, 이거지.’
희열감에 몸이 부르르 떨리던 그때.
– 크아아아!
리자드맨 대족장이 포효와 함께 돌진했다. 그림자를 드리운 거대한 철퇴를 향해, 나는 창을 뻗었다.
“일섬(一晱).”
창날의 끝에서, 바람의 길이 열렸다.
* * *
“허.”
최 팀장, 최민우는 헛웃음을 흘렸다.
늪지대를 감싸 안은 농밀한 피 안개, 그리고 그 아래 널브러진 몬스터들의 사체가 그의 눈에 비쳤다.
‘이게 무슨.’
보스 몬스터를 포함한 수십 마리의 몬스터가 한순간에 몰살당했다. 이 모든 게 고작 며칠 전 재각성한 C급 헌터의 창끝으로부터 벌어진 일이었다.
‘이런 게 가능한가?’
진태경을 처음 만난 날부터 품고 있던 의문이었다. 별생각 없이 E급 게이트에 갔던 그날, C급 헌터 두엇은 달라붙어야 하는 레어 몬스터를 압도적으로 밀어붙이던 그 모습.
거기에 더해 지난 며칠 동안 그가 보여 준 힘은…….
‘C급 헌터라니, 웃기지도 않지.’
진태경과 단둘이 레이드를 시작한 이유는 간단했다.
이 흥미로운 인물의 한계를 보기 위해서.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서.
그러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나보다…….’
아니,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애써 이어지는 생각을 털어 내는 최민우의 눈에 진태경이 들어왔다. 그는 상반신이 날아간 보스 몬스터의 사체를 붙잡고 애통한 외침을 토해 내고 있었다.
“안 돼! 내 가죽! 이거 비싼 건데!”
……저런 인간이 그럴 리가 없지. 아니, 그러면 안 되지.
최민우는 문득 억울해졌다.
* * *
불타는 금요일. 줄여서 불금.
20대 청춘들은 무리지어 술 마시고, 클럽을 들락거리겠지만 나는 최 팀장과 게이트를 돌았다.
오전에 한 번. 오후에 두 번. 그렇게 C급 게이트 세 번을 돌고 나오자 밖은 이미 어두운 밤이었다.
“고생하셨습니다, 도련님.”
이제는 익숙한 얼굴이다. 선 굵은 외모의 이 40대 아저씨를 최 팀장은 이렇게 불렀다.
“김 집사님도 수고하셨어요.”
김 집사. 비서도 아니고 집사다.
워낙 현실성 없는 단어라 처음에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나는 교회 집사밖에 못 만나 봤는데.’
그는 일주일 용돈으로 천 원을 받던 나의 코흘리개 시절, 십일조로 백 원을 내라고 강요하던 불한당이었다.
물론 나를 도련님이라고 불러 주지도 않았고, 심지어는 내가 십일조를 내기 싫다고 버티자 사탄의 자식이라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일곱 살이었던 나는 궁금한 건 꼭 물어보는 성격이었다.
‘엄마. 엄마가 사탄이야?’
‘응? 사탄?’
‘어. 교회 집사님이 그랬는데, 내가 사탄의 자식이래. 난 엄마 자식이니까 엄마가 사탄이지? 그치?’
그 말이 엄마를 사탄으로 만들었다. 나는 두 번 다시 교회 떡볶이를 못 먹게 됐고 교회 집사는 주님 곁으로 갈 뻔했다.
다시 생각해 보니 인생 진짜 버라이어티 하네.
“하실 말씀이라도……?”
김 집사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잠깐 다른 생각 좀 하느라.”
“이제 퇴근합시다.”
최 팀장은 어느새 사복 차림으로 갈아입었다. 얇은 맞춤 정장을 입은 모습이 꼭 연예인 같다.
‘인생 진짜. 더럽게 불공평하네.’
나는 내심 투덜거리며 장비를 벗기 시작했다. 물론 조심스러운 손길로. 첫날 검색해 봤는데 가격이…… 됐다, 말을 말자.
김 집사가 장비를 건네받아 차에 싣는 사이, 나는 최 팀장에게 물었다.
“내일은 몇 시에 나와야 합니까?”
“내일 말입니까?”
최 팀장이 의아한 듯한 목소리로 되묻는다.
“오늘 금요일입니다.”
“네.”
“내일은 토요일이고요.”
“금요일 다음이 토요일인 건 저도 알죠.”
이게 누굴 병신으로 보나.
“아니, 그러니까.”
최 팀장이 눈썹을 찡그렸다.
“설마, 주말도 일하시게요?”
“……당연한 거 아니에요?”
“…….”
“…….”
최 팀장이 충격받은 얼굴로 물었다.
“아니, 주말에 안 쉬면 언제 쉽니까?”
“음. 일 못 구할 때?”
“그게 얼마나 되는데요.”
“글쎄요. 많이 쉬면 한 달에 한 번?”
“길드 소속이었잖습니까. 주말에도 출근했어요?”
“했죠. 일 있으면.”
“그거 헌터 근로법 위반 아닙니까?”
완벽해 보이던 최 팀장도 모르는 게 딱 하나 있었다.
세상 물정.
나는 피식 웃었다.
“그거 꼬박꼬박 지키는 중소 길드가 어디 있어요. 다들 추가 수당 더 얹어 주고 레이드 시키지. 뭐, 저야 좋지만.”
“예? 좋다고요?”
“주말에는 인력 사무소 가거든요. 그거 갈 바에야 길드에서 추가 수당 받는 게 훨씬 나으니까. 기록 남을까 봐 현찰로 딱딱 주고.”
“…….”
“뭐, 다 그런 거죠.”
최 팀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우리 길드는 근로법 준수합니다. 가계약도 마찬가지예요.”
그거 아쉽네. 이번 주말에는 인력 사무소에 가야 할 모양인가 보다.
입맛을 다시는 나를 최 팀장이 특유의 묘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뭡니까?”
“이유?”
“이제 C급 헌터잖아요. 좀 쉬면서 해도 될 텐데요.”
“그건…….”
시스템이 언제 사라질지 몰라서요.
목구멍에서 불쑥 튀어나오려는 말을 붙잡았다. 그건 누구한테도 말할 수 없는 나만의 비밀이다.
“별 이유 없어요. 물 들어왔을 때 노 저어야죠.”
“그렇게 일하다가는 노 부러집니다. 같이 배 타고 있는 사람도 생각하세요.”
“같이 타고 있는 사람? 최 팀장님이요?”
“뭐, 이를테면…….”
최 팀장이 멈칫하더니 말을 이었다.
“가족이라든가.”
가족.
고작 한 단어일 뿐인데, 몸 구석구석 온기가 스며든다. 통화는 가끔 하지만 벌써 두 달이 넘도록 보지 못했다. 무림에서의 시간까지 포함한다면 석 달이다.
‘벌써 그렇게 됐나.’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내 인생은 줄곧 오르막길을 달리는 차 같았다.
그래서 엑셀만 밟을 수밖에 없었다. 발을 떼면 굴러떨어질 것 같아서. 금방이라도 시동이 꺼질 것 같아서.
“아무튼 주말은 쉽니다. 인력 사무소 갈 생각하지 말고 쉬세요. 그거 계약 위반이니까.”
“아, 네.”
이렇게까지 억지로 쉬라는 거 보면 최 팀장 이 인간, 은근히 인성이 괜찮은…….
아니지, 겨우 이 정도 감성 팔이에 넘어가면 안 되지. 그동안 나 혼자 어떤 개고생을 했는데.
‘최 팀장은 악덕 고용주다. 악덕 고용주.’
주말에 쉬라는 것도 당장 다음 주부터 대차게 부려 먹기 위함인 게 뻔했다. 엄한 데 체력 소모하지 말라는 노예 농장주의 마음가짐인 거지. 지독한 인간.
“준비 끝났습니다, 도련님.”
그때 장비를 실으러 갔던 김 집사가 돌아왔다.
저 양반도 악덕 고용주 밑에서 고생이다. 밤 열 시가 다 돼 가도록 퇴근을 못 하고 있네.
“아, 말씀드린 건요?”
“가져왔습니다.”
“드리세요.”
악덕 고용주의 말에 김 집사가 손에 든 작은 박스를 내밀었다.
“받으시죠, 헌터님.”
나한테.
“예? 저요?”
보기에는 드링크병 박스 같은데. 눈만 끔뻑거리다가 머릿속을 번뜩 스치는 생각이 있어 조심스레 물었다.
“설마 이거 돈이에요?”
“주급으로 계약했잖습니까. 잊으셨어요?”
깜빡했다. 당연히 일요일에 받을 줄 알았거든.
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박스를 받아 들었다. 묵직하다.
“보통 현금 지급인가요?”
“당연히 아니죠.”
“그럼…….”
“진태경 씨가 현금이 좋다면서요. 특히 빳빳한 신권.”
어제였나, 그저께 흘리듯이 얘기한 건데 이런 식으로 돌아올 줄이야. 악덕 고용주에서 평가가 조금 더 올라갔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게 남았지.’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총 4일 치 급여다. C급 헌터로서 받는 첫 주급이고. 금액이 기대될 수밖에 없다.
꿀꺽. 침을 삼키고 입을 열었다.
“그럼 이게 다 얼마…….”
“계약서보다 좀 더 챙겨 넣었습니다. 안에 정산 내역 있으니까 확인해 보시고요. 이만 갑니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헌터님.”
최 팀장과 김 집사가 쌩하니 사라졌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
황당한 얼굴로 멀어지는 자동차 불빛을 바라보던 나는 드링크 박스를 열었다. 흐릿한 달빛 아래 두툼한 지폐 묶음이 눈에 들어온다.
‘하나, 둘, 셋…….’
숫자는 여섯에서 더 이상 올라가지 않았다.
백 장 묶음 여섯 개. 그러니까 6백만 원이다.
“뭐야, 이게.”
사기.
순간 뇌리를 스친 단어에 다리 힘이 풀리려는 찰나.
“어?”
내가 잘못 봤나? 왜 지폐 색깔이 누렇지?
“잠깐, 잠깐만!”
공력을 눈에 집중시키자 눈앞이 밝아진다. 그리고 봤다.
지폐 속, 한복을 입고 인자하게 웃고 있는 아주머니를.
“으아어어어! 신사임당! 현모양처! 아들이 율곡 이이! 남편은 이원수!”
나도 모르게 방언이 터져 나온다. 미쳤다. 이건 미쳤어.
신사임당 백 장이 한 묶음. 그게 여섯 개니까…….
“사, 삼억!”
이번에는 풀리는 다리를 붙잡지 못했다. 쿵, 소리가 날 만큼 세게 무릎을 꿇은 나는 넋 나간 눈빛으로 드링크 박스 안을 바라봤다.
지폐 묶음 밑, 흰 종이가 박스 바닥에 깔려 있었다.
‘맞다. 정산서!’
허겁지겁 종이를 펼쳤다.
그곳에는 지난 4일간의 수익이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었다.
내게 지급되는 최종 금액까지.
‘정산서에는 3천만 원으로 나와 있는데?’
뭐지? 착각했나?
혼란하다, 혼란해. 흔들리던 내 동공이 마지막 줄에 가서 딱 멈췄다.
보너스 : 270,000,000
그리고 최 팀장이 떠나며 남겼던 마지막 말까지.
‘계약서보다 좀 더 챙겨 넣었습니다.’
쿠르릉.
머릿속에서 천둥 번개가 휘몰아친다. 나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일어났다. 저 멀리, 이미 희미해진 차의 불빛이 보인다.
그건 마치 한 줄기 빛 같았다.
“아아. 아아아…….”
최 팀장. 아니, 그는 ‘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