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 Chapter 5
#4화
장삼은 산적이다.
생전 오대산(五臺山) 인근을 벗어난 적 없는 토박이였고 약관 무렵부터 만만한 산객들을 대상으로 통행료를 뜯어내 왔다.
밤낮을 가리지 않는 성실 영업 덕분인지 언제부턴가 천력부 장삼, 하면 제법 알아주었다.
오늘도 그랬다.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충실한 다섯 부하, 오색귀(五色鬼)를 거느리고 영업을 나왔는데…… 이상하게 발걸음이 멈추지 않는다.
앞마당인 오대산을 한참 벗어나 얼마나 걸었을까, 마침내 발걸음이 멈췄을 때 저 멀리 다가오는 마차가 보였다.
‘어쩌다 여기까지 왔지?’
귀신에 홀렸나? 장삼은 어리둥절했지만 고급스러운 사두마차를 본 순간 자신의 직업 정신이 깨어나는 것을 느꼈다.
‘저건 꼭 뺏어야 해.’
장삼과 오색귀가 길을 막아서자 마부가 고삐를 잡아당겼다.
털에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준마 네 마리가 콧김을 뿜어내며 멈췄다. 척 봐도 마리당 천 냥은 거뜬하게 나올 물건들이다.
오늘은 일진이 좋군. 장삼은 흐뭇하게 웃으며 도끼를 고쳐 잡았다. 자, 이제 단전에 힘을 빡 주고. 하나, 둘.
“돈 내놔!”
* * *
발성 뭐야, 성악가야?
하지만 이 정도로는 눈 하나 깜짝 안 한다. 헌터 외길 인생 7년에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다 겪은 나다.
……근데 좀 무섭다.
“총 여섯 명. 매복은 없어 보입니다.”
마부는 비밀 요원처럼 침착한 목소리로 상황을 전달했다.
이 아저씨는 믿는 구석이라도 있나. 왜 이렇게 여유롭지.
물끄러미 바라보자 머리를 긁적인다.
“간혹 있는 일입니다. 이 근방에서는 처음이지만요.”
“왜요?”
“왜긴요. 어지간한 대형 산채가 아닌 이상 무림세가를 건드리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습니다. 태원진가의 앞마당에서 도적질이라니, 어느 간 큰 놈들인지 궁금하군요.”
‘누구긴. 튜토리얼 NPC지.’
그보다 태원진가의 앞마당 운운하는 걸 보니 제법 가까운 거리인가 보다.
‘시간을 끌어 볼까?’
현재 내 경지는 이류.
스탯 분배 후 느껴지는 체감은 F급 헌터의 그것을 뛰어넘지만, 무림에서 먹힐 만한 수준인지는 모르겠다.
6 대 1. 마부까지 끼워 넣어도 6 대 2.
‘될까?’
중과부적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손발이 묶이는 순간 골로 간다.
“목적지까지 얼마나 남았습니까?”
“거의 다 왔습니다. 앞으로 반 시진이면 충분합니다.
반 시진이면…… 한 시간이나 남았다고?
짐작은 했지만 마부와 나의 ‘가깝다’는 서로 기준이 달랐다.
‘거의 다 오기는 무슨.’
대륙 배경이라 그런가. 스케일이 다르다, 스케일이.
어쨌든 그렇다면 이제 증원군은 없는 셈 쳐야 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혼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시종일관 여유로운 태도를 보이는 마부는 고수의 냄새를 풍겼다. 지금처럼.
“제가 처리할까요?”
그러면서 말채찍을 말아 쥐는데, 채찍질 한 번으로 산적들의 뼈와 살을 분리시킬 기세다.
‘고수다!’
그럼 그렇지. 내가 명색이 명문세가의 후계자요, 홍화루의 특급 고객인데 평범한 마부를 보내 줬을 리가 있나.
‘월화가 신경 써 줬구나. 얼굴만 예쁜 게 아니라 마음도 예쁘네.’
불안감이 사라지고 절로 흐뭇한 웃음이 지어진다. 내 웃음을 승낙의 의미로 받아들인 마부가 돌아섰을 때, 두 번째 고함이 터져 나왔다.
“이놈들! 이 천력부의 말이 들리지 않느냐!”
마차 창문 너머로 넘겨다보니 거대한 양날 도끼를 든 털북숭이가 소리를 치고 있었다. 우람한 상반신에 팔다리가 기둥처럼 두껍다.
하지만 마부는 가소롭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하룻강아지 같은 놈들이 어딜 감히.”
캬, 기세에 취한다.
그리고 마부의 준엄한 질타가 시작됐다.
“양민의 고혈을 빨아먹는 산적 따위가 감히 뉘 앞을 막아서느냐! 네놈을 관아로 압송하여 지엄한 국법으로 다스려 주마!”
판관 포청천 뺨치는 연설이었지만 털북숭이, 천력부와 그 부하들은 그리 감동한 것 같지 않았다.
“그래, 막아섰다. 이제 어쩔래?”
“무수한 악행을 저질러 온 네놈들의 눈알을 파내고 사지를 절구로 빻아 그 가루를 구주에 뿌려 주마! 또한 구족을 멸하여…….”
……형벌 수위가 장난이 아닌데. 거의 역모죄다, 역모죄.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천력부가 입을 열었다.
“거, 안에 황족 나리라도 타셨소? 듣고 있자니 오금이 저려서 못 참겠네. 그 귀하신 얼굴 구경 좀 합시다.”
“이분의 정체를 알면 지금 물러나지 않은 것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알겠어. 알겠으니까 이제 좀 나와 보라고.”
“어리석은 놈들……!”
마부가 혀를 차며 내게 고개를 돌렸다. 이제 드디어 진짜 무림 고수의 활약을 볼 수 있는 건가 싶어 가슴이 두근거린다.
“공자님. 나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응?”
나? 나 왜?
“관을 봐야 눈물을 흘릴 놈들입니다. 감히 공자의 앞을 막아서다니, 고수를 몰라본 죗값을 똑똑히 치르겠군요.”
그러면서 결의에 찬 표정으로 마차 문을 열어 준다.
“진천검(振天劍)의 위명은 익히 들었습니다. 불과 약관의 나이로 절정의 경지에 오른 천재 검수! 공자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늙은 제 가슴이 얼마나 떨렸는지 모릅니다.”
……진천검? 천재 검수?
‘뭐라는 거야.’
머리가 뒤죽박죽이다. 진천검은 누구고, 절정에 오른 천재 검수는 누구며 이 마부는 뭐 하는 새끼인가?
처리하겠다며. 당신 고수 아니었어?
“이놈들! 이분이 누구신지 알아보겠느냐!”
틀렸다. 마부는 핸들이 고장 난 8톤 트럭처럼 폭주 중이다.
안 돼, 그만해. 멈춰!
마부의 손목을 꽉 움켜잡자 그가 나를 돌아본다.
다 안다는 듯한 웃음. 무한한 신뢰의 눈빛.
“자, 잠깐만. 저는 진…….”
내가 뭐라 할 틈도 없이 쩌렁쩌렁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태원진가의 이공자, 산서성을 떨어 울리는 절정 고수! 진천검 진무경 공자이시다!”
“저는 진……태경인데요.”
순간, 싸늘한 찬바람이 불었다.
“예?”
“그러니까 저는 진무경이 아니라 진태경이고 이공자가 아니라 삼공자…….”
“……삼공자? 바로 그 삼공자?”
그래, 이 양반아.
마부의 동공이 흔들린다. 진도 8.0의 강진이다.
“그, 그럼 진무경 공자는요.”
“저야 모르죠.”
이 시간이면 자고 있지 않을까?
마부는 나라 잃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바람 빠진 풍선 인형처럼 쓰러졌다. 졸도다.
‘시바. 고수는 무슨.’
마부의 손목을 놔줬다.
닭 뼈처럼 가느다란 손목이다. 잡는 순간부터 뭔가 쎄하다 싶었다. 그렇게 허세를 부려 놓고 일반인이라니.
“으하, 으하하하!”
산적들이 자지러지게 웃었다. 나? 언제 식은땀이 났는지 벌써 등허리가 축축하다.
‘이거, 진짜 재수 없으면.’
죽음이란 단어는 차마 꺼내지 못하고 꿀꺽 삼켰다.
나는 긴장 어린 눈으로 산적들을 훑었다.
시발. 차라리 고블린 여섯 마리랑 싸우고 말지. 저런 덩치들을 내가 어떻게 이겨…… 어라?
“엥?”
뭐야, 기분 탓인가? 하지만 아무리 봐도 기분 탓이 아니다.
우람한 상반신, 두꺼운 팔다리. 그리고…… 짧다.
옆에 다섯 놈도 별반 다르지 않다. 천력부는 몸이라도 좋지, 이놈들은 아무리 봐도 ‘건장한’이라는 단어와는 오백 광년쯤 차이가 있다.
그러니까 산적들의 체격이 꼭…….
“고블린이네?”
고블린이여?
예상치 못한 상황에 잠시 멍해 있다가 갑자기 날아오는 도끼에 정신을 차렸다. 머릿수도 많은 새끼들이 선제공격까지 하다니.
“야, 야! 잠깐만 타임!”
그 순간 도끼가 그대로 10m 앞 땅에 처박혔다. 아니, 고꾸라졌다. 도끼를 날린 산적이 쑥스러운 듯이 뒤통수를 긁적였다.
“조금 더 위로 던졌어야 했나?”
……이거 어쩌면.
‘살 수 있겠는데?’
7년 동안 가장 많이 상대한 몬스터를 꼽자면 고블린이다.
그러다 보니 놈들에 관한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알게 됐다. 견습 헌터 시절에 주력 무기로 창을 선택한 것도 그 이유였다. 공격 범위에서 엄청난 우위를 점할 수 있으니까.
마침 산적들이 딱 그 정도 체격이다. 내 눈에는 산적이 아니라 고블린 여섯 마리로 보인다. 천력부는 대장 고블린 정도?
‘나머지 다섯은 고블린보다 약할 수도 있고.’
고블린은 독침이라도 잘 쏘지. 방금 도끼 던지는 꼴을 보아하니 촉이 온다. 촉이 와.
나는 바짝 마른 입술을 핥은 다음 두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항복 의사에 몇 놈은 당황하고 천력부는 전역한 아들을 보는 아버지처럼 흐뭇하게 웃었다.
“기특한 놈일세.”
‘그래, 많이 웃어 둬라.’
한 발, 두 발. 천천히 30m에 이르는 거리를 좁혀 나간다.
일정한 보폭과 균형 잡힌 자세로. 한 발에 한 호흡. 입에서 김이 새벽 공기를 뚫고 새어 나왔다.
단순히 발을 내딛는 것만으로도 느껴진다.
‘다르다!’
다시 한번 깨달았다.
이 게임에서의 나는, 현실의 나보다 강하다.
가슴이 뛴다. 동시에 경각심이 고개를 쳐들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집중해야 한다.
“태원진가에 내놓은 자식이 있다는 풍문을 들었지. 무공은 삼류, 계집질은 일류라고. 오늘 보니 눈치도 제법이야.”
천력부가 말했다. 도끼를 쥔 손은 느슨하게 늘어트린 채다.
놈들의 눈에 내가 어떻게 보일지 뻔했다.
무공은 형편없는, 가문만 좋은 한량. 텅 빈 두 손.
천력부는 지금 방심했다.
‘그리고 방심은 죽음이지.’
가족들에게 월급 대부분을 보내고 고시원 단칸방에서 궁상맞게 살지만 나도 헌터다.
F급 헌터도 게이트에서는 목숨을 걸고 싸운다. 아니, 고작 F급이라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한다.
7년을 하루도 빠짐없이 싸워 온 승부사이자, 헌터라는 이름의 무림인이었다.
그래서 안다.
생사는 한 끗 차이라는 것을. 방심은 곧 죽음이라는 사실을.
남은 거리가 절반으로 좁혀졌다. 서서히 발걸음이 빨라진다.
천력부가 나를 향해 손짓한다.
“어허. 천천히 오게, 천천히. 오다가 넘어지기라도 하면 몸값 떨어져.”
20m.
“두목. 쫄래쫄래 걸어오는 꼴이 꼭 강아지 같지 않습니까?”
15m.
“강아지? 으허허! 네 말이 딱 맞다!”
10m.
다음 발을 내딛는 바로 그 순간, 뱃속이 뜨겁게 끓어올랐다.
난생처음 느껴 보는 생소한 감각. 그러나 묘하게 익숙한 이 느낌은 도대체 뭘까?
‘설마. 공력?’
단전에서 흘러나온 열기는 하반신을 향해 질주했다.
그 목적은 오로지 하나다. 좀 더 빠르게, 가볍게, 강하게!
훅. 길게 숨을 들이마신다. 온몸의 근육이 활시위처럼 팽팽하게 당겨졌다. 그리고 마지막, 한 걸음.
쾅!
정면을 향해 쏘아졌다. 지면이 움푹 패고 소리가 그 뒤를 잇는다. 정지된 시간 속, 천력부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말도 안…….”
천력부도, 그 부하들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다.
놈들의 모든 것이 지금의 내게는 보였다. 느껴졌다.
빳빳하고 기름진 머리카락, 가뭄철 논바닥처럼 갈라진 입술과 보기만 해도 악취를 풍기는 이빨…….
그 모든 것들이.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인벤토리 오픈. [예리한 창] 장착.’
허공을 향해 뻗은 손아귀에 서늘한 창자루가 잡혔다.
그대로 힘껏 내지른다. 엉겁결에 들어 올린 도끼가 창날을 막아 냈지만 예리한 창날은 도끼날을 그대로 부숴 버리고 천력부의 가슴을 관통했다.
동시에.
– 치명적인 일격! 상태 이상 [출혈]이 발동됩니다!
“커헉.”
피 분수가 터져 나왔다. 한차례 파르르 떨리던 천력부의 눈동자에서 빛이 사그라졌다.
– [Lv.10 장삼]을 처치했습니다.
– 레벨 업!
– 레벨 업의 보상으로 스탯 포인트 10을 획득했습니다.
– 레벨 업의 보상으로 스킬 포인트 10을 획득했습니다.
– [진가심법]의 잠금이 해제됩니다.
후우.
길게 숨을 내뱉었다. 알림이 울렸지만, 오롯이 심장 뛰는 소리만 내 안을 가득 채웠다.
한 호흡. 이 모든 일이 한 호흡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나는 숨이 끊긴 천력부의 가슴에서 창을 뽑아냈다.
‘이런 게 가능하단 말이지.’
포인트로 능력치를 올리고, 공력으로 강화하며 스킬로 연계한다. 이게 바로 나만이 가지고 있는 시스템의 힘이었다.
F급 헌터 진태경은 꿈꿀 수 없었던 힘.
‘할 수 있다. 반드시.’
돌아갈 길이 점점 밝고 넓게 보이기 시작한다.
나는 창 자루를 움켜쥐고 돌아섰다.
“그래서…….”
내게 못 박혀 있던 다섯 쌍의 시선이 위태롭게 흔들린다.
“더 덤빌 사람?”
아까 도끼 던진 새끼부터 나와.
“…….”
털썩. 털썩. 챙그랑.
눈치를 보던 다섯 놈이 무기를 버리고 넙죽 엎드렸다.
“용서해 주십시오. 대협!”
– 우두머리를 잃은 적들이 전의를 상실하고 항복합니다.
– [산적 퇴치]를 완료했습니다.
– 모든 피로와 부상이 회복됩니다.
– 산적을 토벌했습니다. 명성이 10 상승합니다.
– [튜토리얼 – 3단계]를 완료했습니다. 보상이 지급됩니다.
– 연계 퀘스트, [튜토리얼 – 4단계]가 생성되었습니다.
이제 숨 좀 돌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