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 Chapter 600
#599화
접견을 끝내고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나는 미세하게 달라진 공기의 흐름을 느꼈다.
아마도 철저한 훈련을 통해 익혔을 자연스러운 시선 처리와 행동이었지만, 내 감각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분명 의심하고 있어.’
청와대 경호실 소속의 A급 헌터들.
그들은 자신들의 역할이 나와 가족들의 임시 경호라고 말했지만, 나는 그 말을 철석같이 믿을 만큼 순진한 놈이 아니다.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를 느낀다면 바로 보고가 올라가겠지.’
저들은 평화 길드원도, 일반적인 헌터도 아니다.
오직 한 사람, 대통령을 직속 상관으로 모시는 청와대 경호실 소속의 공무원들이다.
어쩌면 이미 백한성 대통령이 오늘의 접견에 관한 보고를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나와 고세원의 단독 접견. 그리고 1, 2분 남짓한 짧은 시간 동안 들리지 않았던 대화 내용에 관하여.
‘어떻게 해야 하나.’
나는 차량 내부를 볼 수 없게끔 특수처리된 창문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고세원의 입을 통해 들은 또 다른 비밀 구역의 존재. 그리고 이 정보를 어느 시점에 누구에게 밝혀야 할지.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어차피 지금 당장은 움직일 수 없다.’
그날로부터 불과 이틀이 흘렀을 뿐이다. 세상은 여전히 소란스럽고 사람들은 슬픔과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누구보다 먼저 이 정보를 알아야 할 최 팀장마저 마찬가지다.
그러니 적어도…… 곧 치러질 김화종의 장례식이 끝나기 전까지는 입을 다물어야 한다.
비단 최 팀장만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나 역시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후.”
작게 한숨을 내쉬자, 운전석에 앉은 경호원이 백미러로 나를 힐끗 바라보며 물었다.
“혹시 어디 불편하신 부분이라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거짓말과 함께 시트에 깊숙이 몸을 파묻었다.
사실은 불편하다. 내 주위를 둘러싼 이 모든 것들이.
나는 미처 말하지 않은 진심을 내심 중얼거리며, 창밖 세상을 바라보았다.
지금 눈앞에서 스쳐 지나가는 풍경처럼, 시간 역시 빠르게 흘렀다.
* * *
1월 19일.
일명 119사태라 명명된 그 날로부터 일주일이 흐른 현재. 세상은 여전히 떠들썩했다.
그날을 기점으로 일어난 불길은 쉽게 잡히지 않았다. 아니, 누구도 걷잡을 수 없이 계속해서 타올랐다.
대한민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의 언론들은 불길을 향해 장작과 기름을 던져 넣었고, 여론은 더욱 커진 불길을 부채질했다.
[1월 19일. 대한민국에 어둠이 드리운 날.] [인위적으로 발생한 두 번의 몬스터 웨이브. UN 사무총장.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국제적 범죄.] [로마 카톨릭 교황청, “그는 인간이 아닌 사탄. 또 다른 마왕.”] [아레스 길드 공식 입장 표명. “석고준의 만행은 지탄받아야 마땅. 국민 여러분께 머리 숙여 사죄.”] [119사태의 피해자 유가족, 아레스 길드와 국가를 상대로 대규모 소송 준비.] [계속되는 고세원의 폭로. “아레스는 썩어 있다.”]가장 많은 뭇매를 맞아야 했던 것은 역시 석고준과 아레스 길드였다.
고세원은 짧게나마 길드 내에서 2인자의 위치에 있었던 인물이었고,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비리와 범죄 사실을 상세하게 진술했다.
모두가 몰랐던, 혹은 알면서도 쉬쉬했던 비밀들이 밝혀지자 세상은 다시 한번 뒤집혔다.
검찰을 통해 수많은 수색 영장과 체포 영장이 발부되자, 낌새를 알아차린 해외 지사장 몇은 도주를 감행하기까지 했다.
뉴스 봤냐. 중국지사장 도망치다가 현지에서 붙잡혔다더라.
ㅇㅇ봄. 바로 수배령 떨어져서 공안무력부에 걸렸던데.
└ 하필이면 또 짱깨한테 붙잡히네 ㅂㅅ진짜 국가 망신이다.
└ ???공안무력부는 착짱이니까 욕하지 마라. 소격변 때 시벌좌랑 으쌰으쌰 해서 아크 리치 뚝배기 깬 거 모르냐.
└ 착짱이 뭔데.
└ 착한 짱깨.
ㄴ 킹안무력부는 인정이지. 이번에 중국지사장 붙잡은 애가 샤오 쉔이라고, 최연소 무력부장 된 앤데 진태경 빠돌이임.
└ ㄹㅇ?
└ 인터뷰 보면 태경 따거. 시벌 따거 막 그러던데. 전에 중국지사장이 현지 문화재도 훼손한 것도 밝혀져서 외교부도 지금 개빡쳤더라.
└ ??중국지사장 이 새끼 전생에 홍위병이었음?
└ 알고 보면 동북공정의 복수 아니냐. 대륙 놈들 아직도 한복을 한푸라고 하더만.
└ 곰돌이 푸는 애저녁에 뒤졌는데 한푸는 아직도 살아 있네…….
그건 아레스 길드의 설립 이래 최초이자 최악의 위기였다.
길드 내 중역 중 절반에 달하는 숫자가 검찰에 소환되었고, 별다른 비리나 범죄를 저지르지 않은 이들도 참고인 조사를 받아야 했다.
그리고 그와는 정반대로, 이번 119사태에서 누구보다 큰 역할을 했던 진태경과 평화 길드에 대한 여론은 극히 호의적이었다.
[시벌좌 업적 요약.jpg] [평창 몬스터 웨이브 당시 현장에 있던 사람입니다. 故김화종 길드장님을 포함한 15인의 평화 길드 헌터분들께 감사하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솔직히 진태경이 무슨 죄냐? (장문 주의)] [청와대 국민 청원 현재 1000만 돌파.]하루에도 엄청난 양의 옹호글이 올라와 인터넷을 잠식했다.
그들은 열렬히 진태경의 무죄를 주장하며 국민 청원을 올렸고, 진실이 밝혀지지 않았던 극초반 당시 섣부르게 진태경을 저격했던 언론사를 욕하며 시위까지 벌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꿋꿋하게 진태경을 비난하는 목소리 역시 있었다.
[애국일보 논설 주간 이강희, “진태경은 단순한 무법자. 석고준에 대한 처분은 법에 맡겼어야…….”]어느 유명 언론인의 발언은 적지 않은 동의를 얻어 냈으나, 아레스 길드가 진태경을 대상으로 발령한 코드 레드의 의미와 119사태 당시 있었던 정확한 피해 상황이 조명되자 의미는 빠르게 퇴색되었다.
[치열한 전투가 낳은 사상자 538명. 그러나 사망자는 불과 20명에 불과해…….] [마침내 밝혀진 사망자들의 정체. 故석고준을 비롯한 그의 경호팀.] [고세원, “석고준의 경호팀은 충성스러운 사냥개이자 광신도. 부산 몬스터 웨이브도 석고준의 지시를 받은 경호팀원이 행한 것.”] [현장에 있던 피해자 증언, “진태경은 자신의 앞길을 막아선 모두를 쓰러트렸지만, 힐러들만은 공격하지 않았다.”] [진태경, 혈전 속에서 빛난 현대의 기사도 정신.] [영국 런던에서 살인 사건 발생. 억류하고 있던 아레스 길드 유럽 지사장 송천우의 가족들을 살해하고 도주한 10명의 경호팀원들. 인터폴 수배 발령…….] [애국일보 논설 주간 이강희. 그가 진태경을 비난하는 이유. 차명으로 된 수백억의 부동산은 어디에서 나왔나. 검찰 조사 착수.]속속 밝혀지는 진실에 진태경을 비난하던 목소리들은 주춤했고, 처음부터 확신에 찬 입장표명을 내놓았던 유명 인사들의 발언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中 국가 주석 샤오 양, “우리는 쓰촨에서의 일을 잊지 않고 있다. 진 선생은 대협이며, 그는 오직 협의로 움직인다.”] [美 대마도사 매직 존슨, “Jin은 히어로고, 한국 언론은 쓰레기. 곧 진실이 밝혀질 테니 병신 같은 활자로 종이를 낭비한 Kanghee Lee는 내 굵고 거대한 요술 지팡이 앞에 엎드려야 할 것.”] [英 펠릭스 왕자, “Jin은 고귀한 핏줄을 타고나지 않았으나, 스스로 고귀함을 입증해 보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를 욕하는 이들은 천한 성품을 가진 듯하다. 내 손등에 입이나 맞춰라.”] [日 총리대신 고이즈미 신지로, “진 상을 욕하는 한국 언론은 반성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반성하고 있는데 반성하고 있다는 자세를 보이지 못하고 있지 못하다는 점에서 반성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美 전 대통령 조셉 바이든, “그는 좋은 청년이다. 얼마 전 직접 만나기도 했는데 침착하고 선량한 사람이었다.” 언제 만났냐고 묻는 기자의 말에 잠시 생각하더니, “사람을 헷갈린 것 같다.”]여전히 혼란스러운 세상 속, 사람들은 하루하루 들려오는 소식을 듣는 것만으로도 바빴다.
백한성 대통령은 대국민 사과를 통해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 것을 약속했다.
그리고 그것과 동시에 사회 정화라는 슬로건을 앞세워 그동안 쉽게 건드릴 수 없을 만큼 팽창된 거대 길드를 저격했다.
전 세계의 유력 인사와 정상들은 끊임없이 평화 길드를 옹호했다.
반면에 감히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석고준과 비리로 얼룩진 아레스 길드는 물론이고, 전임 부길드장인 이정룡마저 지탄의 목소리를 피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 모든 상황 속, 하나둘씩 밝혀지는 진실들 사이로 끝끝내 해결되지 않은 의문이 남아 있었다.
도대체 왜. 어째서.
이런 상황에서도 바로 그. 천태민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가?
그것은 모두가 품은 의문이었고, 동시에 누구도 알아낼 수 없는 진실이기도 했다.
어느 날 홀연히 사라진 불멸의 영웅. 천태민의 거취에 관한 문제는 그야말로 베일에 싸여 있었다.
몇 달 전 중국에서 아크 리치가 발호하여 천문학적인 피해를 입었을 때도, 의형제나 다름없던 이정룡의 국가장이 치러졌을 때도.
심지어는 자신이 길드장으로 있는 아레스 길드의 본사가 진태경에 의해 초토화되었을 때에도…….
하지만 천태민은 끝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이해할 수 없는 그의 은거에 사람들이 품은 의문은 눈덩이처럼 부풀어 올랐다.
그리고 아직 완전히 잠재우지 못한 혼란과 의문 속에서, 119사태의 희생자들을 위한 대규모 국가장이 치러졌다.
* * *
시끄럽던 대한민국은 그날따라 조용했다.
정부는 임시 공휴일을 선포했고, 자동차로 가득 차 있어야 할 도로는 비워졌으며, 뉴스는 엄숙한 목소리로 3천만에 달하는 국민들이 추모를 위해 각 지역에 집결했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 이곳에 와 있다.
명예롭고 헌신한 이들이 묻혀 있는 장소. 바로 국립 현충원에.
저벅.
서서히 봄이 오려는지, 1월 말의 잔디는 푸르고 생기가 넘쳤다.
그와 함께 얼굴을 스치는 바람과 따뜻한 햇볕.
참 좋은 날씨다. 누군가를 떠나보내기에, 그리고 누군가를 다시 기억하기에.
[1월 19일. 그들을 기억하며.]하단에 새겨넣은 짤막한 글귀를 바라본 나는 고개를 들었다.
높게 솟아 있는 위령비(慰靈碑) 위로 눈 부신 햇살이 눈을 찔렀다.
표면에 음각된 희생자 이천여 명의 이름들 중, 낯익은 한 사람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었다.
[故김 화 종]문득 날이 좋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추위에 떨었던 그가, 이토록 따뜻한 날 수많은 이들의 인사를 받으며 영면에 들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제는 따뜻할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김 집사님.’
비록 화장이 끝난 그의 뼛가루는 위령비가 아닌 다른 곳에 묻히겠지만, 이곳에도 그의 넋이 남아 있으리라 믿는다.
그렇게 내가 김화종을 향해 닿지 않을 물음을 건넨 그때였다.
“편히 쉬실 겁니다. 김 집사님께서는.”
귓가를 파고드는 나직한 목소리. 슬픔이 감도는 눈동자로 위령비를 바라본 최 팀장이 덧붙였다.
“하지만 우리는…… 앞으로 더욱 바빠지겠지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감춰 두었던 이야기를 할 때였다.